본질에 대하여.
가끔 미련한 자신이 미워질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자기 비판과 자기 보호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때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깊게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그런 기분은 더욱더 커져 간다.
글을 적게 될 때 난 수많은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거울에 비친 수십 개의 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 규칙성과 그 속의 진리를 파악하려 애써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글을 적어가면 글의 문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자신의 자기 비판과 그를 향한 다양한 보호 방식이 지딴에는 멋들어진 표현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런 글을 쓰면서 동시에 바라보게 되는 기분은 참 애매하다. 만족감과 동시에 그렇게 가식적이고 쓸데없는 글을 쓰는 자신을 칭찬하며 동시에 바보같이 보게 된다.
누구도 위하지 않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을 글을 쓰는 자신을 상상하게 될 때면 과연 무슨 글이 나에게서 나올지 궁금하게 된다. 밑도 끝도 없는 신앙의 글일까? 정신 없는 자기 비판의 글일까? 과연 그때도 멋들어진 표현을 찾고, 맞춤법을 검사해 가면서 글을 쓸지는 확신에 서지 않는다. 어쩌면 애초에 글을 쓰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도대체 어느 의미에서 나에게 던져진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왜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을 까. 아마 나의 본질을 찾으려 하는 노력일 것이다.
가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또한 굉장히 가식적이고 기계적이게 내가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꿈에 대해 묻거나, 공부의 목적이나 신앙인으로써의 목적에 대해 물어 보는 것이다. 질문에 답할 때는 세상에 보편화 되어 있고 지겹도록 들은 꿈의 목적이나, 어디서 들은 예쁜 말들로 포장한다. 분명 삶의 본질에 대해 묻는 질문들 이지만 난 그 질문들 조차 나의 본질로 답하지 못하고 여러 요소와 매채들에 덕지덕지 수동적으로 칠해진 색으로 답을 해낸다. 질문을 할 때의 입장은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수동적이고 깐깐한 태도로 상대 나름의 대답을, 그 본질을 폄하하고 평가한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 멋들어진 말을 함과 함께 발견할 때면 바닥으로 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기분조차 받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도 수동적으로 쓰여지고 만 가면에 따라 본질을 묻는 질문에 답하고 나도 그 답에 가면에 따라 피드백과 공감을 해댄다. 이런 대화를 할 때면 기분은 끝없이 우울해져 대화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 없게 된다. 누군가에게 대화의 본질에 대해 물어보며 대화를 시작한다면 그 사람을 곧장 어디서 들어본 미련한 것 뒤에 숨으며 그 대화를 파괴하고 말 것이고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반응 밖에 할 것이 없다.
속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지 오래이다. 그러다 보니 속 자체가 사라진 것일지 모른다. 그 속을 파악하는 귀찮고 힘드는 과정을 밟으면서 까지 대화를 하려는 사람은 없다. 그 과정을 밟는다고 하여서 정말 자신의 속을 알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나는 나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나는 나에게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무지는 곧 타인에 대한 무지로 이어지고 나와 타인에 대한 무지는 곧 인간 자체에 대한 무지이다. 인간의 대한 무지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무지이다.
글을 적을 때면 이런 무지에 대한 도전을 해야 하고, 나는 그런 도전이 점점 지겨워진다. 아주 귀찮은 작업을 반복할 때면 결국 어디선가 주입된 무언가로 글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그때의 기분은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타인이 본다는 잡생각과 있어보여한다는 무엇보다 추한 생각에 절여져 내 손 안에서 망가져 가는 글을 볼 때면 당장이라도 전부 지워버리고 싶다. 나에 대한 무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결국 다른 것들, 어느 누군가의 갖추어진 말과 생각에 위탁하여 결론을 내는 것은 정말 쓸데 없는 것이며 오히려 더욱 깊은 무지로 이끄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상한 도주이다. 이상한 길에서의 이상한 도주는 점점 내가 나를 모르게 하고 그 괴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느끼게 한다.
하루를 시작함과 있어 나는 과거를 정리하는 일을 시작하고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나를, 그 본질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꿈이라는 요소를 통해서이다.
모든 괴리와 가식 뒤에 숨었던 과거의 나는 꿈속에서 다 까발려진다. 그 속에는 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욕망과 바람과 분노와 두려움들이 그대로 표현된다.
꿈들을 하나씩 표현하는 것은 불가하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글의 재미와 짜임세를 보며 새로운 가식을 채우는 것은 이 글조차 그저 역겹게 만들 뿐이다.
단지 기억이 나는 것은 즐거운 꿈을 꾼 기억이 없다. 만약 즐거운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그 꿈이 나에게 부족하고, 현실적으로 없는 것들에 대한 허망한 욕망에 실현이라는 것을 깨는 순간 인지할 때면 잠시 좋았던 허구한 망상들이 그대로 사라지고 현실 인지와 함께 거지 같게 구겨진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그럼 곧바로 가면으로 그 모습을 슬쩍 가리고 서는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하루는 쌓이고 쌓여서 어느 날 새로운 절망적인 꿈을 만들어 낸다.
본질을 빗겨 치는 방법이 나에게는 최선의 글일지 모른다. 자기 비판만을 강조하면 나의 본질을 정타를 칠 수 있을까. 자기 보호만을 강조하면 나의 본질을 정타할 수 있을까. 그저 감정대로 본능 대로 글을 적다 보면 나의 본질을 정타할 수 있을까. 뭐든지 도전을 해봐야 하겠지만 그런 귀찮은 일을 하기는 싫다. 그래서 이런 저런 요소들을 결합하여 그나마 쓰기 쉬운 글을 적어 애매하게 빗겨 친다. 어느정도 만족도 되고 마치 이것이 나의 본질과 정답이라는 착각이 들며 그 가식적인 글들에 대해 확신이 들기도 한다. 다만 나의 그 역한 글을 복기 하면 할수록 한 커풀씩 가려진 만족이, 본질이 아닌, 그저 연기할 뿐인 문장들이, 나조차 속이며 전개하는, 마치 내가 나 자신을 세뇌하는 듯한 강압적인 단어들이 벗겨진다. 끝까지 벗겨 본 적은 없다. 다 벗긴 후에 어떤 것이 남을지 감당이 안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자 하나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 모른다.
이런 불안은 결국 핑계일지 모른다. 핑계를 대는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본질적이다. 그런 미련함과 나태함은 무엇보다 나를 잘 설명한다. 핑계는 어떤 문제에 대한 나의 결론이다. 그런 결론은 애매하고 도피적이다, 그 결론이 나온 이유도 자세히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어느 것에 대한 나의 결론이며 그 결론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 그다지 반발심이 들지는 않는다. 물론 이렇게 핑계 대고 마는 자신을 역겨운 표정으로 쳐다 볼 수는 있지만 이는 본질이 아닌 결론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 나와 결론 사이의 괴리감은 아니다. 결론에 대한 설명, 본질적으로 핑계라는 결론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어느정도 가능하다. 내가 미련하기 때문이며, 내가 나태하기 때문이다. 이런 간단한 단어로 모든 것을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나의 본질에 대해 두가지 단어를 더할 뿐이다.
두명의 “내”가 늘었다. 미련한 나이며 나태한 나이다. 왜 미련하게 되었는지, 왜 나태하게 되었는지, 미련이란 무엇인지, 나태란 무엇인지 더욱더 속을 들려다 볼 필요를 느낀다.
글을 쓰면서 가장 곤란 한 것은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로 있지 못하고 가식적인 결론은 정신이 어지럽다. 전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꾸며지고, 만들어진 무언가로 나의 결정체인 글의 마침표를 찍어내는 것은 글 전체가 망가지게 되는 절망의 화룡점정이다.
속에 대한 이야기를 고찰을 하며 다름의 본질을 찾으려 시도를 하는 글은 더러워지고 읽기 힘들며 정신없고, 이상하다. 이것을 다듬고 글적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은 결국 깨끗한 본질적인 더러운 글을 더러운 본질의 깨끗한 글을 만들어 낸다. 이런 글 적인 요소와 본질에 대한 고찰을 정리 시킨 다음 가식적인 내용을 시작한다, 이것을 나는 결론이라 부른다. 결론에 있어서 나는 누구보다 보이지도 않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글을 적어 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본질에 대한 질문은 어느 순간 끝난다. 만약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에서까지 더럽지만 깨끗한 글의 특징을 유지하며 나를 마주하려 노력한다고 해도 키보드에서 손을 때고 침대에 누우며 새로운 결론의 부분에 들어간다. 침대에서의 결론에 다다르면 나는 피곤에 지쳐 글에서 보다 오히려 더욱 바보 같고, 가식적이고, 귀찮은 부분을 다 기피하며 그저 쉬운 쪽으로 마침표를 찍어 낸다. ‘모르겠다.’하고 눈을 붙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