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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패트리어트-늪속의 여우 ]
영화 <패트리어트-늪속의 여우>는 <인디펜던스 데이>,<고질라>,<2012>,<투모로우> 등 화제작들을 만들어온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18세기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의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평범한 한 농부가 영국군에게 아들을 잃고 미국 독립전쟁에 뛰어드는 과정을 그린 시대극이죠.
치밀한 조사와 고증을 거친 대작이며, 멜 깁슨이 2500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았고, 총 1억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다시 한번 '문제는 크기(Size Does Matter)'라는 에머리히의 지론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각본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로버트 로닷이,그리고 에머리히 감독의 명콤비 딘 데블린이 이번에도 공동제작을 맡았고 영화음악의 대가 존 윌리암스가 장중한 영화음악을 담당하였습니다.
* 늪속의 부자지간
거액의 출연료를 받은 멜 깁슨이 연기하는 주인공 벤자민 마틴은 실존했던 전쟁 영웅 프란시스 마리온을 모델로 한 인물입니다. 실제 마리온은 사랑하는 조카 가브리엘(영화에서는 아들)을 전쟁 중에 잃은 후 무시무시한 전쟁광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벤자민의 아들로 나오는 가브리엘 역은 떠오르는 청춘스타이면서 미래가 촉망되던 연기파 배우 히스 레저가 맡았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2008년 영화 <다크나이트>를 끝내고 약물복용으로 사망합니다.
영화의 주인공 벤자민에게는 전쟁 영웅 이전의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엿보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겠다는 일념이 결국 그를 전쟁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습니다.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어쩌면 개인을 움직이는 건 그럴 듯한 대의명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두 아들을 죽인 태빙턴을 도끼로 아작내는 벤자민
오히려 가장 사적인 차원에서 한 개인이 꼭 지키고 싶은 것, 이를 테면 가족이 개인을 전쟁 속에 몰아 넣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자신도 상당히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기꺼이 안고 강인하게 앞으로 나가려는 벤자민이라는 인간을 통해 미국 독립 전쟁사의 단면을 엿보게 합니다.
대서양 건너 영국 영화평론가와 역사학자들은 이 영화가 역사를 심히 왜곡했다고 들고 일어났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인들이 모두 다 간악하며, 독립전쟁 자체도 매우 단순하고 편향적으로 묘사됐다며 맹비난을 해댔습니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영국인들은 모두 악마와 같은 존재들인 반면 식민지 개척자들은 매우 순결하고 용감한 사람들로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독립전쟁 자체도 편향적이고 단순히 유혈 스펙터클의 배경으로만 사용되고 있다고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습니다.
실제 영국군 장교였던 태빙턴(실제인은 탤러튼)은 영화처럼 천인공노할만한 사람도 아니고 죽지도 않고 전쟁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하원의원을 지내다 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거꾸로 실제 인물 프랜시스 마리온(주인공 벤자민)은 아주 고약하고 잔인했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독립전쟁의 영웅 벤자민 마틴으로 지나치게 미화하였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멜 깁슨이 제작,감독,주연을 맡았던 영화 <브레이브 하트>도 역사 왜곡이 심하다고 영국 평론가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았는데 이래저래 깁슨은 영국인들(특히 잉글랜드인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영화의 주인공 벤자민 마틴(멜 깁슨)은 7명의 아이를 두었으나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난 홀아비입니다. 그는 강철같은 사내로써 프렌치-인디언 전쟁(영국-프랑스 북아메리카 헤게모니 쟁탈 전쟁)에 참여한 경력이 있으며, 커다란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이 터지자 맏아들 가브리엘(히스 레저)가 부상당한 채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때마침 마틴의 집 근처에 영국군이 지나가고 마틴의 맏아들 가브리엘이 독립군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자 영국군 장교 태빙턴(제이스 아이작스)는 가브리엘을 사로 잡은 후 처형하라고 명령합니다.
* 벤자민과 태빙턴
게다가 태빙턴은 이를 막으려고 한 가브리엘의 동생 토마스를 살해하고 마틴의 농장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러자 분노한 벤자민 마틴은 영국군에게 끌려가고 있던 가브리엘을 구하기 위해 영국군 병사 15명을 도끼와 총으로 잔인하게 도륙한 후 가브리엘을 구출해 냅니다.
이일로 인해 영국군에 대한 극도의 증오를 품게 된 마틴과 가브리엘은 나머지 기족들을 마틴의 처제인 샬롯에게 맡긴 후 독립전쟁에 참가하러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독립군 기지에 참가하러 갔으나 그곳에서 독립군이 영국군에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캄덴전투). 이곳을 급히 떠난 마틴은 현지 민병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영국군에게 게릴라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합니다.
마틴과 가브리엘이 이끄는 민병대는 비록 태빙턴의 군대에게 크게 한번 패했으나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보급물자를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분노한 태빙턴은 샬롯이 데리고 있는 마틴의 나머지 가족들을 살해하려고 하나 실패하고 샬롯과 마틴의 자식들은 흑인 해방노예들이 사는 곳으로 달아납니다.
한편 가브리엘은 어렸을 때 친구였던 앤과 결혼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빙턴 장교에 의해 앤과 마을 사람들이 떼지어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에 분노한 가브리엘은 동료 몇 명만 이끌고 태빙턴의 부대를 기습 공격하지만 아깝게도 그를 죽이는데 실패하고 도리어 태빙턴의 칼에 찔리고 맙니다.
* 악당 태빙턴
뒤늦게 도착한 마틴은 죽어가는 그의 아들을 발견했으나 아타깝게도 가브리엘은 마틴의 품속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그러자 마틴은 커다란 상실감에 빠져 독립운동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으나 죽은 아들 가브리엘이 그토록 원했던 미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다시 한번 독립군에 참여합니다.
* 요크타운 공방전
마틴과 미국 독립군들은 카우스펜 전투에서 영국군 콘월리스 장군과 태빙턴 대령이 이끄는 영국군 정예병들과 큰 전투를 벌입니다. 치열한 싸움 끝에 미국 독립군이 승리하고 마틴은 그의 원수 태빙턴을 죽여버립니다. 카우펜스 전투의 승전 이후 영국군의 패색은 짙어졌고 결국 1781년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항복을 하면서 미국 독립이 이루어집니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자 마틴은 샬롯과 나머지 자식들을 데리고 옛집에 도착하여 독립군 동지들과 함께 불타버린 자신의 집을 재건하며 새로운 미래를 위해 다짐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 미국 독립전쟁(1775년~1783년) ]
* 배경
처음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한 영국인들은 1607년, 제임스 1세에게 허가를 받은 100여 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도착한 지역에 '제임스 타운'을 건설했습니다. 1620년에는 102명의 청교도들이 제임스 1세의 청교도 박해를 피해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의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이후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모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 식민지 13개주
18세기가 되자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뛰어들어 7년 동안 싸웠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나라를 운영할 돈이 부족해진 영국은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들입니다. 설탕 조례와 인지 조례를 만들어 모든 설탕과 각종 문서에까지 세금을 납부하게 했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분노하여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당황한 영국 정부는 두 가지 세금을 철회하는 대신에 종이, 유리, 차 등에 무거운 관세(수출·수입하는 물품에 부과하는 세금)를 물게 했습니다.화가 난 식민지 사람들은 1773년 12월,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배에 실린 홍차 상자 342개를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었습니다.
*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배에 올라 차를 집어 던지는 식민지인들
영국 정부는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킨 식민지 사람들을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식민지 사람들이 차 값을 모두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봉쇄시키는 '보스턴 항구 폐쇄법' 등 여러 가지로 식민지에 불리한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식민지인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13개 주 대표로 구성된 대륙 회의에서 대륙 헌장을 제정하고, 벤저민 프랭클린을 영국에 보내어 식민지인들이 세금을 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결과는 '식민지인들도 영국인이므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식민지 대표가 참여하지 않은 영국 의회의 결정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로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라고 주장하며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차에 대한 관세만 남기고 다른 세금을 모두 없앴습니다. 그러나 때는 늦어버렸습니다. 식민지인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전쟁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의 식민지인들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니다.
*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대륙의회
독립 선언서에는 생명, 자유, 행복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천부 인권 사상과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담겨 있어, 이후 제정되는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독립 선언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775년 4월, 보스턴 서쪽 렉싱턴과 콩코드 지역에서 영국군과 식민지인들 사이에 총격전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 식민지인들은 무기와 병사, 군자금이 부족하여 힘든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이 험난한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었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1781년, 요크타운에서 대승리를 거뒀습니다. 이어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도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원하면서, 미국 독립 전쟁은 식민지인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영국은 마침내 1783년 파리 회의에서 미국 식민지 내 13개 주의 독립을 인정합니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은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출하고,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새로운 국가 '미합중국'을 세우게 됩니다.
아래는 독립전쟁 당시 주요 전투 및 사건, 그리고 조지 워싱턴에 관하여 살펴봅니다.
< 웃기는 최초의 충돌, 렉싱턴, 콩코드 전투 >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아메리카 식민지인들과 영국 본토정부의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본토에서 파병된 정규군 병력이 속속 증강되기 시작했고, 식민지 민병대도 이에 맞서 군수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메리카 총독 토머스 게이지는 불온한 메사추세츠 민병대의 싹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해, 민병대가 콩코드 지역에 비축해놓은 무기들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775년 4월 18일 밤 10시, 스미스 대령이 4백 명의 척탄병과 4백명의 경보병으로 구성된 정예 특공대를 선발하여 건방진 식민지 촌놈들에게 주제를 알게 해주기 위해 콩코드로 출동했습니다.
* "영국군이 온다!!" 말을 달리며 외치는 폴 리비어
그런데 영국군의 계획은 시작부터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 상사 한 명이 출동 전에 생각없이 떠벌리는 바람에 개나 소나 영국군의 계획을 다 알게 된 것입니다. 폴 리비어라는 사람이 밤새 정신없이 말을 달려 콩코드로 가는 길에 있는 렉싱턴에 가서 그 곳에 은신 중이던 식민지인들의 지도자 존 핸콕과 새뮤얼 애덤스를 피신시킨 다음 "레드코트(영국군)가 몰려온다!"라고 법석을 떨고 다니며 렉싱턴의 민병들을 잠에서 깨웠습니다.
존 파커 대위가 지휘하는 130명의 민병들이 서둘러 렉싱턴 그린이라는 곳에 집결했습니다.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막상 모이고 나니 이제 뭘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파커 대위조차도 뭘 해야 할진 모르지만 모여서 결정하려고 민병대를 소집한 것이었습니다. 민병들이 한 시간이 넘게 한밤의 추위에 벌벌 떨던 끝에, 파커 대위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 렉싱턴, 콩코드 지도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이건 너무 춥다. 일단 해산하자."라고...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안전한 이불 속으로 퇴각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몸도 녹일 겸 술집에 한잔하러 몰려갔습니다. 단, 파커 대위는 중요한 명령을 하나 내렸는데, 북소리가 들리는 즉시 달려와 재집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4시 30분에 다급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북소리를 못 들은 사람, 따스한 이불 속에서 곪아 떨어진 사람, 술에 취한 사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미쳤다고 정규군하고 한판 붙겠다니 웃긴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 등등해서 다 빠지고 나니 70명으로 반 토막난 민병대가 허겁지겁 렉싱턴에 재집결했습니다.
잠시 후 붉은 제복을 입은 8백 명의 정예부대가 동트는 햇살에 총검을 번득이며 기세등등하게 나타났습니다. 영국군이 전투 대형으로 변경한 뒤 천천히 코앞까지 다가오자 겁에 질린 한 민병대원이 "대장님 우리 해산해야 말까요?"하고 다급하게 물었지만 파커 대위는 비장하게 선언했습니다.
"누구든 첫 번째로 달아나는 자는, 영국군이 아닌 우리의 총에 죽으리라."
그 직후 두 명의 부관을 대동하고 30미터 앞까지 말을 타고 달려온 영국군 존 핏케언 소령이 "야! 이 반란군놈의 새끼들아,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너희들 대갈통을 다 날려버리겠어!"라고 외치자 파커 대위의 마음이 싹 바뀌어 버렸습니다. 파커가 해산 명령을 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 기다리고 있었던 민병들은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 렉싱턴,콩코드 기념상
그렇게 미국 독립혁명전쟁의 서막이 "될 뻔했던"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끝나려는 순간, 분노조절장애가 의심스러운 핏케언의 부관이 순순히 도망가고 있는 민병들의 등에 대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빌어먹을 새끼들, 다 죽여 버릴 테다!" 그 순간 독립혁명전쟁의 첫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8명의 민병이 죽고 10명이 다쳤으며, 영국군은 단 1명이 다리에 찰과상을 입었습니다. 이런 것도 전투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영국군은 허공에 축포를 쏜 뒤 의기양양하게 콩코드로 행진을 재개했습니다.
렉싱턴의 민병들은 본인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두 가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첫번째는 영국군과 대치하는 동안 많은 시간은 아니지만 콩코드로 허겁자겁 달려가던 나머지 민병대가 집결할 금쪽같은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영국군이 이젠 최소한의 긴장의 끈조차 놓아버리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콩코드에 도착한 영국군들은 수색 작업을 시작했는데, 병사 몇 놈이 대장간과 법원에 불을 질렀습니다. 집결하긴 했지만 기가 죽어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하던 400명의 콩코드 민병대들은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보자 눈이 뒤집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타격을 받아 12명의 사상자가 난 영국군은 화가 나서 퇴각하는 민병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습니다. 울창한 숲 속 산길에는 훨씬 많은 민병대가 매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민병대가 제대로 된 통제없이 각자 마구잡이로 총을 쏴댔기에 영국군은 전멸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무, 바위, 울타리 뒤 등 사방에 숨어서 쏘아대는 민병대의 총격에 영국군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망신스럽게 달아나는 쪽은 민병대가 아니라 영국군이었습니다.
* 당시 민병대
오후 2시 30분, 겨우겨우 빠져나온 영국군 선발대가 퍼시 준장이 이끄는 1천 명의 지원군과 합류했지만 영국군 입장에서 상황은 호전되기는커녕 더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사방에서 꾸역꾸역 몰려온 민병대의 숫자가 이제 4천에 육박했던 것입니다.
찰스타운까지 후퇴하는 고난의 행군 동안 영국군은 끊임없는 추격과 기습을 받아야 했습니다. 곳곳에서 백병전까지 벌어졌고 총검이 없어 급한 대로 집에서 대신 챙겨온 벌목용 손도끼를 휘두르는 민병대의 무지막지한 기세가 영국군의 혼쭐을 빼놓았습니다.
해지기 직전에 지옥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영국군이 찰스타운에 닿으면서 미국 독립전쟁의 첫 전투는 끝났습니다. 영국군 사상자 273명, 민병대 사상자 95명 뿐이었습니다.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모인 70명의 동네 아저씨들이 벌인 렉싱턴의 1분간의 전투가 세계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 독립전쟁의 불쏘시개, 토마스 페인의 책자 ‘상식’ >
식민지인들 간에 자치와 독립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던 여론에 불을 지른 것은 1776년 1월 10일에 필라델피에서 출판된 ‘상식’이라는 조그마한 책자였습니다. 당시에는 익명으로 출간되었지만 그 저자는 놀랍게도 기존의 독립분자들이 아닌 토머스 페인이라는 영국에서 갓 온 이민자였습니다.
1774년 말에 영국에서 필라델피아로 온 전직 세무관리이자 코르셋 제조업자인 페인은 필라델피아로 이민한 직후 필레델피아의 공인(工人)들 사이에 만연한 독립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곧 미국 독립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배운 독립사상을 정리하여 ‘상식’이라는 책자로 정리한 것입니다.
대륙의회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은 학자나 법률가, 기업가 등의 엘리트들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이들은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으로 독립사상을 논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저술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생활하던 토머스 페인은 고전의 문구와 시적인 단어, 그리고 화려한 문장으로 수놓아진 이른바 먹물들의 저술방식을 버리고 약 70장 정도의 짧은 책에 사회와 정부 간의 관계, 왕권의 부당함, 13주의 현재 상황과 현안을 일반 대중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일상용어로 정리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빌어온 비유와 직접적 어법으로 쓰여진 토머스 페인의 ‘상식’은 일반 대중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미국의 독립전쟁을 통틀어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웁니다. 페인은 이를 통하여 왕이라는 존재가 그 통치를 원치 않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역설합니다.
심지어 “왕정이란 우상숭배의 확산을 위하여 악마가 세상에 펼쳐놓은 것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이라는 극언까지 하면서 왕권 통치의 정당성을 총체적으로 부정하였습니다. 페인의 ‘상식’은 왕권에 대한 식민지 대중의 막연한 충성심, 그리고 영국에 대한 무의식적 향수를 그 근본에서부터 철저히 파괴하였습니다.
당시 아메리카 13주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륙의회’밖에 없었습니다. 대륙의회가 독립을 선언하려면 보다 광범위한 여론의 지지가 있어야 했는데 마침 ‘상식’의 출간이 독립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 암울했던 시기, 대륙군의 숨통을 튼 트렌턴 전투의 승리 >
*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대륙군, 맨 앞에 워싱턴이 서 있습니다
트렌턴 전투는 미국 독립 전쟁 중 1776년 12월 26일에 뉴저지 트렌턴에서 벌어진 미국 대륙군과 독일 용병 부대로 구성된 영국군과의 전투를 말합니다. 델라웨어 강 건너편으로 철수했던 조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이 악천후 속에서 위험한 도하를 하여 트렌턴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 용병 부대의 주력을 타격을 했습니다.
전투 자체는 단시간에 끝났으며, 대륙군은 손실을 대부분 입지 않은 반면, 독일 용병 부대의 거의 모든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의 결과, 위축된 대륙군의 사기는 올라갔으며, 다시 병사들의 모집도 수원해졌습니다. 트랜턴 전투의 승리는 독립전쟁의 암울한 시기에 거둔 매우 의미있고 중요한 승리였습니다.
* 전투 상보
독립전쟁이 초기를 지나면서 점차 정규군인 영국군에게 몰리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때 대륙군 사령관인 워싱턴은 뉴저지 주의 주도인 트렌턴에 영국군에 고용된 독일 헤센용병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사실 전쟁으로 먹고 사는 용병들은 역사적으로 그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주면 갑자기 편을 바꾸는 일도 많았고 많은 경우 열심히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아울러 돈이 주어지지 않으면 갑자기 강도떼로 바뀌어 고용주의 땅과 백성을 약탈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헤센 용병들은 특히나 악명이 높았습니다.
워싱턴은 야간에 강을 건너 급습하기 하기로 하고 휘하 부대를 그린과 설리반 부대로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너가려고 하였지만, 문제는 헤센 용병들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약 상륙했는데 혹시라도 정찰병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도강 중 가장 취약한 순간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마침 워싱턴이 얼마 전 트렌턴으로 보낸 첩자인 존 허니맨이 강을 건너와서, 양키들이 작전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더니 용병들의 대장인 요한 롤이 이를 그대로 믿고 집으로 들어가 취침한다는 보고를 합니다. 특히 대륙군에게는 천운으로 날씨가 추워 마을 밖으로 수시로 나오던 순찰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대륙군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델라웨어 강을 건너기는 하였지만 강의 흐름에 밀려 트렌턴에서 상당히 먼 곳에 상륙하였습니다. 결국 트렌턴까지 한 8km 정도 걸어가야 했습니다. 설리번의 부대는 남쪽으로 가고 나머지는 그린 장군 지휘 하에 북쪽으로 갔습니다. 북쪽으로 간 부대는 마침 돌아다니던 일단의 용병들에게 발각되었지만 그 용병들은 수십 명 밖에 없어 싸우지 않고 트렌턴으로 내뺐습니다.
용병들이 그린 부대를 맞아 트렌턴 바로 북쪽에서 싸울 준비를 하는 통에 트렌턴은 비었고 설리번 부대는 남쪽으로 열심히 행군하여 아침 8시쯤에 트렌턴에 빈 집을 털듯이 들어갔습니다.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용병들은 트렌턴 외곽으로 열심히 달아났습니다. 트렌턴에 도착한 대륙군은 집과 거리에 장애물을 열심히 설치했습니다. 재정비를 한 용병들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용병 대장 롤은 부대를 나누어 대륙군을 상대하려 하였습니다. 설리반 군을 맞아 대포를 끌고 나왔으나 용병 포병대는 이미 포대를 배치하고 기다리고 있던 대륙군 포병에 두들겨 맞았습니다. 용병대 보병 역시 시내를 가로질러 대륙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대륙군에 저지 당했습니다. 롤은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대륙군의 후방을 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세 방향에서 쏟아지는 대륙군의 사격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륙군이 이기고 있자 신이 난 일부 시민들도 나와서 싸움에 동참하였습니다. 총체적인 반격에 맞닥뜨린 용병들은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근처의 과수원으로 후퇴하였고 사방에서 포위한 대륙군의 총격을 받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센 용병대의 피해는 사상 약 100여명에 1500명중 1천 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 전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륙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며 워싱턴은 어느 정도 유능한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대륙군은 대규모 소집해제로 인한 해체를 막을 수 있었고 다음 해에는 승리에 고무된 많은 인원들이 추가로 대륙군에 입대하면서 다시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습니다.
< 오합지졸을 강군으로 만든 프로이센 교관 폰 슈토이벤 >
* 폰 슈토이벤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의 물적인 도움도 중요했지만 대륙군을 단순히 민병과 자원병의 모임이 아닌 체계화된 정규군으로 만드는 데는 독일에서 건너온 한 군인의 존재가 결정적이었습니다. 독일 마그데부르크 출신의 폰 슈토이벤은 프로이센군 참모부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실직하게 됩니다.
이후 생활이 곤궁해 빚에 시달리던 그는 프랑스 국방장관 생제르망의 소개로 전문 군인을 찾고 있던 미합중국 사절 벤자민 프랭클린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1777년 9월에 그가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직 미국의 대륙군이 사라토가에서 대승을 거두기 전이었고 전황은 미국에게 상당히 불리했습니다. 뉴저지의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대륙의회는 필라델피아에서 도망해 서쪽인 요크로 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폰 슈토이벤은 대륙의회 의원들에게 당분간 무급으로 대륙군에 봉사하겠다고 했고 1778년 2월 23일에 필라델피아 북쪽의 밸리-포지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던 워싱턴을 찾아가 자신이 배치를 받았음을 신고하고 곧바로 병사들의 훈련에 착수했습니다.
* 밸리 포지의 워싱턴
당시 대륙군에는 진을 치는 법, 심지어 구보하는 법도 모르는 병사들이 태반이었습니다. 폰 슈토이벤은 워싱턴 부대에 들어오자마자 군영의 배치와 위생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해, 계급에 따라 천막을 설치하는 원칙을 정하고 화장실이란 개념을 도입했으며 병사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과 화장실은 군영의 반대편에 각각 설치하게 했습니다.
또한 폰 슈토이벤은 소위 120명의 ‘모범부대’를 만들어 각종 훈련 항목을 가르치고 이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훈련시키게 했습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부사관들을 육성한 것입니다. 유럽의 전문군인으로서 폰 슈토이벤의 가장 중요한 기여라 할 것 같으면, 대륙군에 당시 유럽 정규군의 기본 항목 중 하나인 총검술을 도입한 것입니다.
민병 출신들은 사격은 생활을 통해 익히고 있었지만 총검술과 같은 정규 전술에는 취약한 경우가 많았는데 폰 슈토이벤은 전열(戰列)을 형성해 일제 사격하는 정규사격방식과 함께 총검을 이용한 돌격과 격투술 역시 훈련시켰습니다.
이러한 효과는 바로 나타났습니다. 1778년 6월에 벌어진 몬마우스의 전투에서 영국 정규군과 격돌한 미군은 훈련 받은 대로 대오사격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으며 무엇보다도 상황이 불리하다고 명령도 없이 후퇴하는 현상이 없어졌습니다. 아울러 영국군의 총검돌격을 맞아서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싸웠습니다. 폰 슈토이벤이 오합지졸들을 강군으로 변모시킨 것입니다.
이로써 폰 슈토이벤이 당시 민병대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던 대륙군을 미합중국의 정규군으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를 토대로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혁혁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 독립전쟁의 운명을 바꾼 사라토가 전투 >
미국 독립 전쟁의 운명을 바꾼 것은 1777년 9월과 10월 뉴욕 북쪽의 시골 마을 사라토가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영국 지도부는 전쟁을 빨리 끝내는 최선의 방책은 독립군 지지자가 많은 뉴잉글랜드를 왕당파가 우세한 남부와 갈라놓는 것이라 보고 캐나다에 주둔하고 있던 버고인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을 뉴욕으로 이동시킵니다.
이들은 사라토가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대륙군에 포위당하고 한 달 가까운 전투 끝에 6,200명에 달하는 영국군 전원이 항복하고 맙니다.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독립군이 영국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세계 만방에 과시했고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전쟁에 뛰어드는 계기가 됩니다. 그 후에도 전쟁은 4년 더 계속되지만 독립 전쟁의 승리는 이 때 굳어졌다고 봐도 됩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항상 프랑스가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고 독립군을 진압하는데 전력투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 식민지군은 프랑스로부터 대대적인 군사 장비와 자금을 지원받으며 사기와 전투 능력이 모두 급속히 향상됐습니다.
* 사라토가에서 패전한 존 버고인
여담이지만 당시 프랑스 국왕이던 루이 16세는 참전을 결정함으로써 영국과의 ‘7년 전쟁’ 패배의 치욕을 씻고 미국 독립에 일조했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사형을 언도한 셈이 됐습니다. 미국을 돕느라 쓴 국채를 감당하지 못해 프랑스 재정은 파탄 나고 그것이 결국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것이죠.
남의 혁명 돕느라 자기 집에서 불이 나고 있는 걸 모른 셈입니다.아이러니는 또 있습니다. 미국이 독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라토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베네딕트 아놀드라는 인물입니다.
당시 독립군의 영웅이던 아놀드는 그 후 자신에 대한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영국군과 내통하다 사실이 들통 나자 영국군으로 전향하고 아군이었던 대륙군에 총뿌리를 돌립니다. 그의 이름은 아직까지 미국에서 ‘배신자’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 베네딕트 아놀드
<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남부의 격전, 늪속의 여우 >
북쪽에서 허드슨강을 장악하는 대전략이 사라토가 패전으로 실패로 돌아가면서 영국군은 전장을 미국 남부로 옮겼습니다. 상대적으로 대륙의회와 대륙군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고 왕당파들이 많은 남부 공략에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왕당파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영국군을 지지할 것인가의 여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왕당파들이 본국을 지지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들은 전쟁 초기 독립파들에게 쫓겨 런던으로 피신한 왕당파들로, 이들은 남부로 돌아가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을 생각에서 남부 왕당파의 지지를 과장해 런던 정부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 영화에서...
그러나 이들의 말을 믿은 영국은 군을 미국 남부로 돌려 대대적인 공략에 나섰고 1778년 12월에 조지아주의 사바나를 함락하고, 이어서 조지아주 오거스타를 향해 진격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가 이어졌습니다.
영국군의 오거스타 점령 이후 전황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영국군은 전쟁을 수월하게 수행 할 수 있었습니다. 사령관 클린턴은 그 여세를 몰아 찰스턴까지 함락합니다. 찰스턴은 독립전쟁 중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항복한 병력도 매우 많았으며, 무엇보다 미국 땅에 영국이 마음 놓고 병력을 들여놓을 수 있는 대규모 항구가 영국군에 장악된 것입니다.
* 너대니얼 그린 장군, 남부에서 아메리카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남부에서 영국의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룬 클린턴은 뉴욕으로 떠나고 콘월리스가 미국 남부 주둔 영국군의 사령관이 됩니다. 한편 남부에 있던 대륙군의 잔여병력은 찰스턴 함락 후 전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콘월리스 휘하의 바나스터 태를턴(영화에서 악당으로 나오는 영국군 윌리엄 태빙턴 대령)은 이를 추격해 미군을 크게 무찌릅니다.
이때 태를턴이 미군과 민병 포로들을 학살하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때문에 미군은 그의 이름인 Banastre에 빚대어 그에게 ‘피투성이 반(Bloody Ban)’이란 별명을 붙였다고 합니다.
* 영화에서...
태를턴은 혁명전쟁 중 미군이 가장 증오하는 인물이 되었고 이후 ‘이게 태를턴의 자비(Tarleton's Quarters)다’는 대륙군의 전투 구호가 되었습니다. 이후 몇몇 전투에서 대륙군이 영국군을 꺾었을 때 그들은 적이 항복을 청해도 ‘이게 태를턴의 자비다! 받아라!’라고 외치며 항복하려는 영국군을 무참히 살해했다고 합니다.
영국군에 계속 밀리던 남부의 대륙군은 영국군과 정면대결하기 보다는 영국군을 따라다니면서 기습하거나 영국군을 도발해 유인한 뒤 잠깐 전투를 벌인 다음 빨리 후퇴하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게릴라전이었습니다.
병력의 소모를 막는 동시에 영국군을 지치게 하려는 히트 앤 런 전술이었습니다. 남부 대륙군을 지휘하는 그린은 북쪽에서의 증원군과 주변에서의 지원병들이 몰려들기를 기대하며 1780년 말에서 1781년 초에 이르는 수개월 동안 계속해 영국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린의 군은 약 15차례 영국군과 싸우면서 한 번도 속 시원히 이긴 전투가 없었지만 영국군도 속 시원히 이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 남부 전역
그린의 지연 전술과 더불어 프랜시스 마리온(의 게릴라전은 영국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늪속의 여우’라 불린 마리온(영화에서 주인공 벤자민 마틴)은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이민 온 프랑스인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지형지물에 익숙한 점을 이용해 일부 흑인까지 포함된 수십 명의 민병으로 영국군에 대한 정찰을 하고 소규모 부대와 보급행렬에 기습을 가하는 등 영국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영국군이 그를 잡으려 하면 그는 늪지대 사이에 난 지름길을 통해 영국군을 따돌렸습니다. 그의 별명이 된 ‘늪속의 여우(Swamp Fox)'는 그를 소탕하라는 임무를 맡아 그를 잡으려다가 번번히 놓친 태를턴이 ‘저 놈의 늪 여우는 악마도 못 잡을 거다’라고 푸념한 데서 나왔다고 합니다.
* 영화에서...
그린의 계산은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그린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충원 받으면서 병력이 4천명까지 늘었지만 콘월리스는 이곳저곳을 지키려고 병력을 흐뜨려 논 까닭에 그의 본대는 약 2천으로 줄어있었습니다. 아울러 그의 본대도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고 철저히 지연전술로 일관하는 그린의 부대를 쫓아다니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콘월리스에게 남은 선택은 결국 버지니아로 북상하여 필립스 장군과 미국을 배신한 아놀드의 군과 합류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콘월리스가 북상하면서 대륙군은 다시 남부를 장악하게 되고 영국의 남부군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는 곧 독립전쟁을 사실상 종결짓는 요크타운 전투의 전주곡으로 이어집니다.
< 독립전쟁의 종결, 요크타운 전투 >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경은 남부지역 전투에서 잇따라 패하고 전력을 소모한 뒤 해안으로 나아가 1781년 5월 노스캐롤라이나의 윌밍턴에서 버지니아의 피터즈버그로 이동했습니다. 콘월리스는 프랑스의 후작 라파예트 장군 휘하 대규모 대륙군의 위협에 못 이겨 처음에는 리치먼드로, 다음에는 윌리엄즈버그로 퇴각했다가, 7월말 경에는 요크타운에 이르러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8,000명 병력의 라파예트군은 육로 쪽의 가능한 탈출로를 모두 차단했습니다. 총 7,000명의 콘월리스군은 영국 해군의 증원부대나 구조함대를 고대했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라스 백작이 지휘하는 24척의 프랑스 함대가 서인도제도를 경유해 도착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체서피크 만 해역을 완전 장악했습니다.
* 영-불 함대의 해전
이러한 해군의 엄호 아래 조지 워싱턴 장군은 8월말에서 9월에 걸쳐 7,000명의 프랑스-미국 연합군 추가 병력을 이끌고 요크타운 반도에 있는 콘월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뉴욕에서 버지니아로 진군했습니다.
한편 토머스 그레이브스제독이 이끄는 소규모 영국 함대는 체사피크 만에서 봉쇄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그라스의 프랑스 함대로부터 두들겨 맞고 뉴욕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콘월리스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대는 클린턴 군대의 내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은 우물쭈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0월 19일이 되어서야 간신히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출발했는데 그날은 바로 요크타운의 항복의 날이었습니다.
* 프랑스군 로샹보, 워싱턴과 함께 요크타운 승리의 주역이 된 로샹보 백작
그는 프랑스 육군 원수이면서도 워싱턴에게 지휘권을 양보하여 지휘권의
혼란을 막았던 지혜로운 장군이었습니다
콘월리스는 프랑스 함대와 1만 6,000명에 이르는 연합군 지상군으로부터 포격을 받고 10월 19일 전 병력을 이끌고 항복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독립전쟁에서 미국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1783년 파리회의에서 미국의 독립이 인정되고 전쟁은 완전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 콘월리스
일부 역사가는 마지막에 콘월리스가 탈출을 시도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고 있으나 그는 나름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부대를 가지고 탈출한다는 것은 무익하고 부하들에게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생각했다”
항복한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아메리카군이 존경하는 뜻으로 정숙하게 서 있는 대열 사이로 통과했습니다. 콘월리스는 병상자 취급을 요청하여 이 의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콘월리스의 대리 장군이 대검을 정중하게 워싱턴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의 승리자는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온 그라스 제독이었습니다.
* 영국군의 항복
어쨌든 이 이야기의 속편은 이른바 인생 새옹지마라고 말하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패전 장군인 콘월리스는 고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인도 총독, 아일랜드 총독을 역임하고 여생을 마쳤습니다. 반면에 개선 제독인 그라스 백작은 얼마 있다가 서인도에서 함대를 상실하고 빈궁과 오욕 속에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 대륙군의 사령관이자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조지 워싱턴의 부친은 버지니아의 여러 곳에 넓은 토지를 가진 부농이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11세 때 부친을 잃고 담 재배법과 농원의 관리, 가축 사육법 등을 배우면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이후 토지측량기사 등을 경험하면서 들판에서 야영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프렌치 인디안 전쟁(영-불 아메리카 쟁탈 전쟁)>에 영국군 장교로 참가합니다. 이 후 27세에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마운트 버넌의 넓직한 농원에서 15년간 널널하게 살게 됩니다. 미국 독립전쟁이 없었다면 유복한 버지니아 농장주로 살다가 죽을 팔자였습니다.
그런데 43세 되던 해에 독립전쟁이 터지면서 대륙회의로부터 식민지군을 통솔해달라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경력, 결단성, 위신을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며 완전한 자제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는 화를 내는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영국에 대한 분노만은 참지 못할 만큼 대단하였습니다.
콩코드 전투 이후 처음에는 보스턴을 점령하는 등 식민지군은 기세를 올렸으나 18개월이 경과할 무렵, 식민지측은 전면적인 패배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영국군은 필라델피아를 점령하였고, 대륙의회는 살살 숨어 다니면서 회의를 이어 나갔습니다.
* 마운트 버논의 워싱턴의 저택(현재 기념관)
순수한 혁명가와 기회주의적인 애국자들간의 분열, 헌신적인 식민지 정치가와 은신한 왕당파들이서로 으르렁거렸고, 무기를 팔아 먹는 등 돈벌이에 열중하는 자들 등이 뒤범벅이 되어 식민지군은 혼란의 와중에 있었습니다.
1777년에서 1778년에 걸친 혹한 속에서 워싱턴은 필라델피아 북서쪽 약 20마일에 위치한 밸리 포지에서 오합지졸 병사들을 이끌고 야영하고 있었습니다. 주둔지가 폭설에 쌓인 3월까지 병사들의 1/3이 병마로 쓸어졌습니다. 생존자들도 신발과 내복이 없었고 탈주자도 생기기 시작했던 혹독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은 엄격하고 단호하게 이 위기를 대처해 나갔습니다. 이 후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는 등 4년간의 세월을 지내면서 승리의 그날까지 굿굿이 버텨나갔습니다. 철저한 책임감, 변함없는 예리한 통찰력, 완벽하다고 할 만큼 고결한 정신력 등이 뒷받침 되었습니다.
* 젊은날의 워싱턴
극도로 전황이 불리한 상황에서 몇 년을 견디며 그 어려움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강한 불굴의 정신을 요하는 일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1783년 12월 4일, 독립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워싱턴은 뉴욕에서 사령관직을 사퇴하였습니다. 참모부의 장교들은 워싱턴이 뉴저지로 떠나는 것을 뉴욕 부둣가에서 오랫동안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워싱턴은 회의가 개최되고 있던 아나폴리스에 출두하여 장중하게 총사령관의 직책을 내놓았습니다.
워싱턴이 참석한 모든 의식이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위엄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고향인 마운트 버농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려는 겸허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6년 후 새로이 제정된 헌법에 의하여 워싱턴은 제1회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1789년 4월 마운트 버넌으로부터 말을 타고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할 뉴욕으로 향하였습니다. 대통령 워싱턴은 총사령관 워싱턴과 같이 견실한 성격을 보였습니다.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노력가였으며 매사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였습니다.
* 부인 마사 커티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퇴임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재선은 수락했으나 워싱턴은 3선은 파멸의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전혀 욕심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느 선에서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왕이 되어달라는 국민의 성원이 있었을 때에도 그는 과감하게 욕심을 접었습니다.
임기가 6개월 남은 1796년 9월 17일, 워싱턴은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고별연설’을 발표했습니다. 제목은 ‘고별 연설’이었지만, 연설로 행해진 것은 아니고 일간신문에 발표되었을 뿐입니다.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수 세대에 걸친 선조들과 이 땅에 뜨거운 애정을 느끼면서, 나는 은퇴 후에 누리고자 스스로 다짐했던 생활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해봅니다.”
1797년 3월 4일 워싱턴은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습니다. 초대 대통령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른 평화로운 정권교체였습니다. 그것은 후대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퇴임 후에는 자택이 있는 마운트 버넌으로 돌아갔습니다.
1799년 2월 자필로 긴 유언장을 작성한 워싱턴은 그 해 12월 14일 “죽은 후 사흘이 되기 전에 묻어주오”라고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을 일구어낸 독립운동가이자 첫 단추를 잘 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남긴 업적도 훌륭하지만, 그것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은 아름다운 뒷마무리가 더욱 돋보인 인물이었습니다.
* 마운트 버논의 워싱턴 저택(현재 기념관)
그에게는 젊은이, 카드놀이,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면 사죽을 못쓴다는 인간적인 약점도 있었습니다. 만일에 그런 점조차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그의 위엄성에 눌려서 감히 가까이 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의 사랑을 받았던 한 부인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워싱턴은 가끔 아주 뻔뻔스런 짓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 그렇지, 너와 나는 그것을 참 좋아했지만...”
‘유럽의 국왕을 그의 옆자리에 세워 놓으면 국왕은 그의 시종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얘기도 회자되곤 했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써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격인 관대한 도량, 고결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증오심, 편협한 감정, 허영심 등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역경에 처해서도 비관하지 않고 성공해도 우쭐대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자신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타인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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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멜깁슨의 처절한 복수극
무시무시!!! 영국 대령과
마지막 전투씬
박진감과 쓰릴이 최고로
고조
불사신 깁슨의 연기력에
감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