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1.구정 화요일>
<루카12,35-40>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그 종들은 행복하다!39 이것을 명심하여라.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오늘 새해 첫날 눈이 내렸습니다.
어렸을 때는 너무 신이났죠.
청년 때는 “부모님이 넘어지시면 어떻하나?” 라는 생각이 들지요.
철이 드는 때는 20살 정도로 봅니다.
우리의 영과 혼에는 지성 기억 의지라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나의 혼(정신)의 기능이 완성되기 까지는 2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태어나서 18개월 동안은 원초적 본능(Id)의 내가 있게 됩니다.
이 때 부모와 애착관계가 되어야 믿음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을 구걸하려고 불쌍하게 삽니다. 불안해 집니다, 40대 이후에는 관계의 문제가 생겨 우울증 정신 분열증이 올 수 있게 됩니다.
3-4살 때부터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아(ego)가 형성 됩니다.
한마디로 “원초적 본능에 의해서 요구한대로 다 얻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좌절을 겪게 되면서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 때 절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 때 생활지도와 훈육을 해야 합니다.
생활지도란?
좋은 습관과 태도를 가르치는 일이고, 이 때는 정색을 하면서 분노와 화를 빼내고 사무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면 반복해야 합니다.
훈육이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금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로 품성이나 도덕을 가르치게 됩니다.
5-6세 때에는 또래와 어울리며 사회적 자아(Superego)가 형성됩니다.
이 과정이 잘 안 되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못하게 됩니다.
7-14세 (초등학교) 때에는 잘하는 것에 대한 발견과 칭찬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열등감 우월감을 극복하게 됩니다.
15세~20세(사춘기) 때에는그동안 상처로 극복하지 못한 믿음과 절제와 사회성과 열등감 우월감 등에 대해서 홍역을 앓으면서 회복하는 시기입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시기인데, 이 시기를 놓치게되면 계속 캥거루족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렸을 때부터 인격적으로 대우를 하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생명에 대한 존중, 그 아이를 통해서 하느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그 이유를 정중하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20살에 인간의 혼의 세계, 즉 원초적 자아(Id)와 자아(ego) 사회적 자아(Superego) 라는 정체성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성 차원의 “나”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깨어 있어라”는 말씀은 20살에 형성된 “인간성의 나”를 비워내라는 말씀입니다.
48세 정도가 되어야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그러한 영적인 차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48세까지는 보통 이상으로 삽니다.
이상으로 산다면 세상 모든 것이 불만 블평 비난 비판의 대상이 되지요.
그래서 유다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그러한 눈이었던 것이지요.
48세가 넘어가야 호르몬 변화가 생기면서,
“아! 사람이 사는데 이러한 이상만이 아닌 물질적인 것도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게 됩니다.
“내가 이상으로 살지만 이 현실에서도 잘 살아야 되는구나!”
육신과 영의 통합을 이루어야 된다는 인식이 그때 몸의 변화를 거치면서 오게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관상가들은,
“정말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20살에 형성된 인간성의 내가 다 비워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나를 직면하게 됩니다.
즉, 십계명을 지키지만 그 안에는 정화되지 않은 무의식 안에 나를 보면서 역겨워 집니다.
그동안 계명을 지킨다며 큰 소리를 쳤지만,
내 자아(ego)의 교만함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나를 향해왔던 “‘혼soul’의 모습으로서의 나” 인 것이지요.
“‘혼soul’의 세계에서의 ‘나’” 는 내가 하느님이 아닌 나를 향해왔던 결과임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을 향하지 않은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들을 비워내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내가 다 비워지고 무가될 때,
그리스도께서 당신 친히 육화하신 신비를 알려주심으로써,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깨닫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불교는 거기까지이지만
우리는 깨달은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비를 통한 완전한 죽음으로 가야하지요.
그래서 내 머리가 그분의 머리,
내 심장이 그분의 심장,
내 손이 그분의 손,
내 발이 그분의 발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성모성심께 의탁하고 봉헌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리스도를 낳으셨던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낳으시는 것이지요.
혹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1티모2,5)
그러니 성모님이나 성인들에게 왜 기도를 드리느냐구요. 예수님이 중개자이신데 그분께만 드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1티모2,6)
즉, ‘1티모2,5-6’은 초대 공동체에서 쓰이던 신앙 고백문에서 따온 것으로, 사도신경에 이미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는 중개자이신 예수님만을 통해서 기도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자신을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이사53,11-12; 마르10,45)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성모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미리 아시고 예수님께 청하셨기 때문입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2,3). 그리고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성령과 함께 베드로 바오로 마리아 엘리사벳 등의 이름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거듭 낳으셨습니다. 성화될 수 있도록 성모님은 예수님께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2,5)
또한 성모님께서는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1,48)라고 말씀 처럼, 성인중에 성인으로서 모든 세대가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 행복한 분으로 공경하고 따릅니다.
육신적으로 발전되는 단계가 있듯이,
영적으로도 단계가 있습니다.
대 데레사 성녀께서는 기도의 단계가 9단계가 있고, 영적인 상태도 7단계가 있다. 그래서 칠궁방으로 표현하지요.
성모님을 앞세우고 예수님과 내가 손을 잡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아버지 하느님 앞에 영적인 결혼을 하러 가는 그러한 여정, 이것을 대 데레사는 칠궁방으로 표현을 하지요.
일곱 번째 궁궐에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 곳, 그것은 바로 내 영혼의 성이라는 것이지요.
이미 내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계시고, 가장 깊은 곳에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지요.
깨어서 있으라는 것,
이것은 새해 첫 날 부터 이러한 말씀을 듣는 이유는,
우리의 살아있을 때의 삶이 하느님 앞에서 다시 되돌려진다는 것을 잊지 말고,
지금 현재를 종말론적 시각으로 “이 시간은 앞으로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 라는 그러한 마음 가짐으로 소중하게 감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라는 말씀이지요.
영만 있으면 공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20살 때 형성한 ‘나’라는 “인간적인 자아” 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경험하고 겪는 희노애락애오욕의 그러한 과정 안에서 그때 그때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공덕으로 되돌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리 잘못을 했다하더라도,
부족하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성사를 보고 보속을 하며 하느님께 봉헌하게 되면,
치유가 되며,
나중에는 그 모든 것이 행동으로 되지 않고 유혹의 상태에서 봉헌하게 되어,
모든 것이 기쁨이 되고 기도가 되고 감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모든 것이 은총이 되며,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한 것이며,
순간순간의 봉헌으로 공덕이 된다는 것.
그것이 하느님 앞에 큰 수확으로 남을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방법은?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 인해 구원 받는 데에 있습니다.
1.묵상기도
1)기도
홀로 머물며 하느님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매일 미사의 복음 말씀을 2번~10번 읽고 영화처럼 눈을 감고 상상한 후에 예수님을 만나서 질문이나 대화를 합니다.
예수성심께 30초~1분 무념무상으로 의식마저 내려놓은 채, 예수성심 안에 침묵으로 머뭅니다.
2)정화
1)삶 안에서 복음 묵상 중에 만난 예수님을 모시고 삽니다.
순간순간 올라오는 것들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2.자아의 죽음
1)단순 기도
(1)기억
a)정화
“영spirit-혼soul”의 기능인 지성 기억 의지가 있습니다.
내 지성이 십자가 상 아래에 계신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께 대한 믿음을 갖고,
내 기억을 마음(영spirit)으로 내려놓고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과 일치하려는 소망을 갖고,
내 의지로 모든 기억들을 성모성심을 통해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됩니다.
b)기도
내 일생에 대한 기억이 한 번 봉헌될 때마다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에 30초~1분 무념무상으로 머뭅니다.
이러한 과정이 10번 이상 반복되면, 기억이 나도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2)몸
a)정화
내 지성이 십자가 상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통한 예수성심께 대한 믿음으로,
내 몸(에 대한 기억)을 마음(영spirit)으로 내려놓고 십자가 상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통한 예수성심과 일치하려는 소망을 갖고,
내 의지로 내 몸(에 대한 기억)을 십자가상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통해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됩니다.
b)기도
내 몸이 한 번 봉헌될 때마다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에 30초~1분 무념무상으로 머뭅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은 누구신지?”를 세 번 묻습니다.
침묵 중에 올라오는 것들을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무의식이 다 올라오고 봉헌되면,
자신의 신념들이 올라옵니다.
그것마저 다 봉헌되면,
“나”라고 여겨지는 자아(에고)가 올라옵니다.
그 에고를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자아의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Luke12,35-40>
35 "Gird your loins and light your lamps
36 and be like servants who await their master's return from a wedding, ready to open immediately when he comes and knocks.
37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Amen, I say to you, he will gird himself, have them recline at table, and proceed to wait on them.
38 And should he come in the second or third watch and find them prepared in this way, blessed are those servants.
39 Be sure of this: if the master of the house had known the hour when the thief was coming, he would not have let his house be broken into.
40 You also must be prepared, for at an hour you do not expect, the Son of Man will come."
—-//—-
<책 소개>
창의성, 인간 두뇌의 긍정적, 부정적 특권
이제까지 우리가 선택하고 있는 불행과 관련되는 전행동은 고통스럽고 아프고 겁에 질리는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요소는 우리가 관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보다 욕구 충족적인 전행동을 선택하게 되면 제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설명하였다. 심지어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된 ‘셀마 씨의 아들의 뇌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친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 아들이 자신의 욕구를 좀 더 충족시킬 수 있다면 그러한 생각은 감소되거나 혹은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불행할 때 우울하고 아프고 고통을 주고 그리고 미치게 하는 증상들은 우리의 뇌에서 창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 알고 있듯이 우리의 두뇌는 그러한 증상들만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행이 우리 두뇌에 내재하고 있는 창의성을 자극하는 힘이 되고 있다.
불행은 DSM-IV에 기술되고 있는 증상 뿐 아니라 통증, 고통, 피로와 자동면역 질병과 같이 면역체제가 우리 몸의 정상적인 조직을 공략할 때 나타나는 (상당수의 혹은 대부분의) 증상들을 유발하는 힘이 되고 있다.
창의성은 그것이 도움이 되던 혹은 피해를 주던, 좋든 나쁘든, 우리의 전행동의 네 요소 (활동하기, 생각하기, 느끼기, 생리적으로 반응하기)를 통해 표출될 수 있다.
창의적인 활동은 운동이나 춤에서 볼 수 있으며,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먹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거식증이나 거토증에서도 볼 수 있다.
창의적인 생각은 핵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이론에서부터 정신분열증의 망상이나 환상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우리가 밤에 꾸는 꿈도 잠을 통해 최대한의 이득을 얻기 위한 뇌의 창의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창의적인 느낌은 문학, 드라마, 음악 그리고 예술 등의 창의적인 작품을 통해 표출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상의 그림을 통해 모나리자가 어떤 기분일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고 있다.
창의적인 생리적 반응은 마라톤 선수의 인내력이나 혹은 류머티즘 관절염이나 피부결핵(lupus)과 같은 자동면역질병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당신이 행복할 때,
타인에게 모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위트 있게 그것을 받아치기 위해 생각을 짜낸다.
갑자기 너무 좋은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의 기본 욕구에 대한 만족수준을 조정하면서 동시에 욕구만족을 위해 도움을 준다.
우리가 모욕을 당했을 때 우리의 힘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면서 우리의 두뇌는 그 모욕을 치료하기/ 위해 작동한다. 위의 경우는 잠시 늦었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노력에 대해서는 감사히 여긴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시원한 보복이 된다 싶으면 우리는 우리의 두뇌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같은 보복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함께 아주 즐거워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도 당신을 미친 사람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을 때,
창의성이 위의 경우처럼 항상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때때로 창의성이 당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눈에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때가 있다.
창의성은 고통을 주거나 놀라게 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며,
갑자기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환상, 광증 혹은 고통스러운 자율면역증상과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빈번히 술 취한 사람이 운전대를 거꾸로 잡고 운전하려는 것과 같이(창의적이기는 하지만) 자기 패배적인 선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당신의 창의성이 어떤 생각을 만들어 주는 대신 어떤 위협적인 음성이나 혹은 청각 대뇌피질에 바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런 경우 당신은 진짜 어떤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전혀 모른 사람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금방 알 수 있는 목소리일 수도 있다. 당신은 그러한 목소리를 실제적인 진짜 목소리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을 수 없다. 천장에 있는 전구나 이웃집 TV 안테나 같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이 같은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당신을 미친 사람으로 보게 될 것이다. 정신과 의사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당신에게 정신분열증 진단을 내릴 것이며, 강한 두뇌용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의 가족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약을 복용하도록 당신에게 압력이 가해질 것이다./
당신이 창조해 낸 목소리를 당신이 듣고 있다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존 나쉬의 경우와 같이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창의적인 것은 확실히 더 비정상적이다.
당신은 아마도 존 나쉬처럼 그 창의성이 발전하여 환상과 망상을 만들어 내어 1959년에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또 그 후 20여 년을 정신분열증 환자로 살아갔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1993년에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정상적인 사람이었으며, 2002년 현재 그는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관심을 추구하는 창의성(정상적인 경우든 아니면 비정상적인 경우든)을 정신질환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불행한 두뇌가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든 심지어 정신과 의사라도 우리 두뇌의 창의적인 잠재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당신이 들을 수 있으면 당신의 뇌 또한 목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당신이 볼 수 있으면 뇌 또한 시각적인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면 뇌는 질병이나 부상으로 경험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과 더 장시간의 고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당신이 무서움을 느낄 수 있으면 당신의 뇌는 당신을 꼼짝 못하게하는 공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당신이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당신의 뇌는 그 합리성을 초월하여 엄청난 광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누구도 우리의 뇌가 무엇을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해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나 주변 사람이 보이고 있는 어떤 전행동이라 하더라도 그 전행동의 출처가 창의성일 수 있다고 하는 가정이 가능하다.
뇌가 창조해 내는 것들 중 어떤 것은 대단히 불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음악, 예술, 문학, 과학, 운동경기, 유머, 개혁 등이 없는 세계, 즉 창의성이 없는 세계를 생각해 보라. 뇌에 있는 4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가지고 있는 창의적인 잠재력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뇌가 기발한/ 보복적 생각, 환상, 공포, 혹독한 허리통, 심지어는 자동면역 질병까지도 창조해내는 것은 당신의 창의적인 두뇌가 어린이 놀이처럼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창의성이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다.
다음과 같이 가정해보자.
당신이 환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이 불행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단서가 있다.
이 때에,
두뇌용 약을 먹는 대신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당신을 아주 친절하게 대하며 지지를 해준다. 또한 정신과 의사나 다른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당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약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전문성을 활용하여 당신에게 다가서며 다시 현실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들은 겁을 내고 있는 당신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주며 당신이 외롭고 아무도 당신을 존중하거나 이해해 주지 않고 있다고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당신과의 관계에서 아주 정중하고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 친구가 되며 존중해 준다. 동시에 당신의 가족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조언해 준다.
그들은 당신이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을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당신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지 않도록 상담해 준다.
당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종전과는 다르게 당신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외부통제라도 사용하지 않도록 일러준다.
당신이 얼마만큼 재능이 있다할지 혹은 특출하다 하지 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이와 유사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표정, 암시 등)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아주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다.
기본적으로 그가 어떤 (미친)행동을 하던 그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그 행동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로스앤젤레스 서부에 있는 브렌트우드 재향군인병원에서 정신분열증 증상을 보인 사람을 다룰 때 나는 그들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특히 정상적인 행동을 나와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었던 것은 그들에게 바닥청소를 함께 하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병동의 환자에게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다가가곤 했다. 그 시절 그들은 모두 담배를 피웠으며 그래서 바닥에 담배 재나 꽁초로 항상 널려 있었다.
내가 담당의사라고 소개하면서 “바닥을 쓸겠어요? 아니면 내가 쓰는 동안 이 쓰레받기를 들고 있겠어요?” 라고 말하였다. 거의 거절하/는 적이 없었으며 함께 바닥을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쓸었다.
우리가 함께 그 일을 잘 했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감을 위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함께 바닥을 쓸면서 서로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쓸고 난 후에는 함께 게임을 하기도 하고 아니면 함께 TV를 보기도 했다. 예술, 음악, 혹은 다른 심리치료와 같은 다른 병원에서 제공되는 활동에 갈 때 그들과 함께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아주 정상적인 방법으로 환자가 나와의 관계에서 사랑과 소속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내가 그들을 거부하기 전에 나를 거부하지 않았으면 하고 기대했다.
내가 취한 접근방법은,
‘나는 당신을 수용한다.
그리고 당신의 미친 행동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당신 자신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할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이 할 수 있으면서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겠다.’ 이었다.
그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내용은,
‘당신은 현재 안전하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을 진정 보살피고자 한다.’ 라는 점이었다.
약/을 복용하도록 하는 것이나 그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들에게 정신분열증이라는 단어를 결코 언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규칙이었다.
우리는 항상 모든 환자들이 한 때는 매우 정상적이었으며 그러한 정상성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서로 독려하였다.
비정상적인 행동이 새로운 창의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가능한 그러한 행동을 무시함으로써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였다.
환자들의 가족이나 친구들도 환자와 함께 현실적으로 이야기하고 일하면서 그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1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신분열증과 같은 아주 심각한 DSM-IV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 운 좋게 혹은 올바른 판단력이 있어서 전문가나 가족 혹은 친구들로부터 이와 같은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과거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면서 증상이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섬유근육통이라 불리는 새로운 병 진단을 받고 있다.
이들의 신체적 증상으로는 몸이 쑤시고 아프며 잠을 잘 자지 못하고 피로감을 느낌 근육 허약, 복부 팽창, 혹은 비뇨기 관련문제를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진단방법으로는 이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매우 큰 고통을 가지는 것 외에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산다.
편두통, 등 하부의 통증, 관절 통증, 만성위장염 이외에도 병의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러한 만성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문제는 그들 뿐 아니라 담당 의사들도 그러한 창조된 증상이 불행의 결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섬유근육통이나 혹은 다른 만성 통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통증이 불만족스러운 관계에 의해 야기된 불행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신체적인 질병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자존감을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의사들은 통증을 모든 증상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보고,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서 그리고 중독성이 없는 약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행한 인간관계가 통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환자들 못지않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불행한 사람의 두뇌가 무엇을 창조해 내는지에 대해 의학계가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매년 수십억 달러의 돈을 허비하고 있다.
그들은 아마 영원히 관심을 갖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통해 전행동이나 창의성에 관한 나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외부통제를 버리고 그 대신 선택이론으로 대체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잃을 것이 전혀 없다.
의사들도 결과적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예컨대,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약회사의 경우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신체적인 병의 원인이 있어 이를 치료하기 위한 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이들을 위한 약을 생산해내기만 해도 사업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관절염을 앓고 있는 제프의 경우,
전행동의 개념은 현재 의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자율면역 질병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류머티즘 관절염은 면역체계가 자신의 관절에 있는 정상적인 연골을 공략하여 파괴시킴으로써 발병한다.
의사들은 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류머티즘 관절염은 아직 아무 치료방법이 없다. 현재의 모든 치료법이나 약, 혹은 수술은 일시적인 완화 효과만 이 있을 뿐이다.
제프가 만약 자신이 불행할 때 자신의 면역체계가 극도로 창의적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해 보자.
대부분의 다른 증상에서/의 창의성과는 다르게 류머티즘 관절염은 신체적인 피해를 준다.
제프가 자신의 생각하기와 활동하기에 대해 완전한 통제력을 갖게 되면서 주위의 중요한 사람을 통제하려는 것을 중지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행동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고 그들에게도 자신을 통제하지 않도록 요청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향상시키면서 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으며 그 결과 그의 면역체제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노만 큐신의 책 ‘질병의 해부(An Anatomy of an Illness)’ 는 이러한 생각을 지지하고 있는 하나의 선례라 할 수 있다.
나 또한 류머티즘 관절염에 대하여 이 같은 교육적 접근이 효과가 있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관해서는 이미 3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설명한 바 있다.
(경고: 정신과 치료가 당신의 정신건강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생활심리 시리즈 31, William Glasser, M.D. 저, 박재황 역, 도서출판 계림, 2015,p161-170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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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계명
간음하지 마라
402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사랑이란 마음에서 우러난 자유로운 헌신입니다.[2346]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4,7)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아주 마(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16)/
음에 들었을 때 자기의 껍질을 깨고 나와 그것에 마음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음악가는 명곡에 몰두하고, 유치원 교사는 마음을 다해 원생들을 돌봅니다. 모든 우정에는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현세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으로, 이 사랑 안에서 두 사람은 영원히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줍니다. 인간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존재의 본질입니다. 하느님 안에는 끊임없는 교유와 헌신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흐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에 참여하게 됩니다. 인간은 더 많이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더 많이 닮게 됩니다. 사랑은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남자와 여자가 혼인 관계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둘이 한 몸이 될 때”(창세2,24) 사랑은 특히 심오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실현됩니다.->309
우리는 그저 시험삼아 살거나 죽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저 시험 삼아 사랑하거나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남자와 여자가 부부에게만 국한된 정당한 행동을 통하여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성性은, 결코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만은 아니고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와 관련됩니다. 성은 남자와 여자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사랑의 일부일 경우에만 진정으로 인간적입니다. 만일 현세적 차원을 포함해서 전 인간이 걸려 있는 완전한 자기 증여의 징표와 결실이 아니라면, 만일 인간이 완전히 바쳐지지 않는 행동을 통해서 어떤 것을 보류하거나 미래에 달리 결정할 가능성을 유보하는 경우라면, 온몸을 내어준다는 것은 한갓 거짓에 불과합니다.(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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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절 여섯째 계명
간음하지 못한다(출애20,14)(신명5,18 참조)
“간음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마태5,27-28)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31)/
->2346 사랑은 모든 덕의 실체이다. 사랑의 영향 아래, 정결은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을 배우는 학교가 된다. 자제력은 자기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한 것이다. 정결을 지키는 사람은 이웃에게 하느님의 신의와 사랑을 증언하는 증인이 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36)/
섭리 그리고 악의 문제
->309 만일 질서 있고 선한 세계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다면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절박하고도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고도 신비한 이 질문에 그 어떤 성급한 대답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창조의 선성(善性), 죄의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계약, 구원을 위한 당신 아드님의 강생, 성령의 파견, 교회의 형성, 성사의 효력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이 응할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한 삶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 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두려운 신비 때문에 이 초대를 회피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어느 모로든 악에 대한 대답 아닌 것이 없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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