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스포츠 역사와 흐름을 같이 한 동대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스포츠 용품을 사기 위해 하루에도 수없이 다녀가는 곳이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동대문 운동장이 철거에 들어가면서 '스포츠의 메카'란 칭호가 무색하게 됐다. 결국 하나 둘 동대문을 떠나고 있지만 낡은 축구화를 수선하며 그 곳을 32년째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 동대문 운동장 근처 좁은 골목 한켠에 위치한 2평 남짓한 '금성축구화'의 사장 김철(62)씨다.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축구화의 흙을 털며 작업 중이던 김씨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 줬다.
축구화 수선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 김씨. |
◇하루 12시간 이상 축구화와 씨름
김씨가 금성축구화의 간판을 내건 것은 1976년이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이다. 그가 축구화와 첫 연을 맺은 때는 그보다 더 먼 19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씨는 "17살때 집안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공부보다 일하는 걸 택해야 했지. 바로 집 앞에 신발공장이 있었고 난 그 곳에서 기술을 배우며 일했어"라며 기억을 반추했다. 함경북도 부령군이 고향인 김씨는 6.25 전쟁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남쪽으로 내려 왔고 먹고 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단순히 공장이 집 앞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발공장에 나가게 된 김씨는 그 곳에서 처음 축구화를 만지게 됐고 독학으로 축구화를 파고 들었다. 축구화를 뜯어보고 고치면서 축구화에 대한 열정을 키워 나갔다. 그러다 군에 입대했고 제대한 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김씨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지금의 '축구화 병원'이다. 김씨는 "심한 병도 수술로 병원에서 고치잖아. 여기에선 어떤 축구화도 새 것으로 고칠 수 있지"라며 작업실을 축구화 병원이라 불렀다. 그의 손을 거치면 아무리 낡은 축구화도 새 것으로 바뀌니 틀린 말이 아니다.
사실 김씨의 '삶의 터전'인 작업장은 너무 좁아 골방과도 같다. 흙먼지도 많고 본드 냄새도 진동을 한다. 하지만 김씨는 매일 오전 9시 이곳 문을 연다. "오전 9시에 나와 밤 9시 정도에 문을 닫는데 작업이 밀려있을 땐 새벽 1시까지 해". 하루에 짧게는 12시간, 길게는 16시간을 축구화와 함께 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김씨가 축구화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돈도 돈이지만 '보람' 때문이다. 김씨는 "좁은 곳에서 오래 작업을 하다보면 허리와 팔이 쑤셔. 하지만 헌 축구화만 보면 기분이 좋아져. 그것을 새 것으로 고치고 그 축구화를 손님이 마음에 들어 하면 보람을 느끼거든"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중에도 김씨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
◇차범근에서 안정환, 박지성까지
'차범근 허정무 황보관 홍명보 서정원 최문식 김대의 유상철 안정환 이관우 이천수 최태욱 박지성 박주영 고기구….'
역대 축구 국가대표선수 이름이라고? 아니다. 김씨의 손을 거친 축구화를 신은 선수들이다. 한국 축구를 당당히 빛낸 수많은 선수들이 김씨가 만진 축구화를 신고 볼을 찼다. 차범근 수원 감독 얘기를 묻자 김씨는 대뜸 "아 280짜리?"라고 되물었다. 그랬다. 김씨는 수십 년이 지났지만 선수들의 특징은 물론 발 사이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 축구의 역사적인 순간에도 김씨의 족적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도 선수들이 와서 축구화를 많이 손 봐갔지. 유상철도 내가 수선한 축구화를 신고 뛰었어."
한국인 최초 프리미어리거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김씨의 손을 거쳤다. "(박)지성이는 예전에 중학교 때 많이 왔어"라고 밝힌 김씨는 "요즘 잘하는 거 보면 기특해. 박지성 같은 선수들이 해외에서 잘해줘야 한국 축구가 발전하는 거야"라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올해 K리그에선 김병지(서울)와 안정환(부산)이 김씨의 손을 거친 축구화를 신고 뛴다. 김씨는 "김병지가 얼마 전 내가 손봐준 축구화를 신고 뛰었는데 누가 나한테 어떤 모델인지 묻더라고. 당연히 모델명이 없지. 내가 수선한 하나 뿐인 신발인데"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안정환 역시 이번 시즌 신고 뛸 축구화 4족을 김씨에게 가져와 수선해갔다. 올해 친정팀 부산으로 복귀해 재도약을 노리는 안정환이 골을 터뜨린다면 김씨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해야하지 않을까.
거친 손(위)과 닳아 없어진 망치의 표면(아래)이 김씨의 삶을 대변해준다. |
◇'장인'이자 '축구인'
외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축구화와 함께 한 세월이 장장 45년이다. 외골수(단 한 곳만 파고드는 사람)도 그런 외골수가 없다. 강산이 바뀌어도 수차례 바뀌었을 세월을 김씨의 거친 손이 대신 말해준다. 손톱 사이에는 시커멓게 때가 끼고 손가락의 지문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다. 김씨는 "내가 망치질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세어 봤더니 축구화 한 쪽에만 300번 정도 하더라"며 자신과 동고동락해온 망치를 꺼내 보였다. 얼마나 망치질을 했는지 망치의 내리치는 표면이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였다. 그에게 어울리는 말을 생각해보니 선뜻 '장인(匠人)'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축구화 주인보다 더 그들의 발에 대해 잘 알고 축구화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에게 '장인'의 칭호는 전혀 아깝지 않다.
'축구인'이란 수식어도 달고 싶다. 비록 김씨는 선수로, 국가대표로 뛰진 못했지만 축구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김씨는 "수원 고색초등학교에서 축구선수를 했었어. 하지만 집에서 돈 벌라고 축구를 그만두라 했지. 좋아했지만 축구를 할 수 없었던 내가 잡은 게 축구공 대신 축구화였던거야"라고 말한다. 축구도 곧잘 했다는 김씨는 80년대엔 이북5도민 대표로 뽑혀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가며 경기에도 나선 적이 있다. 하지만 10년 전 축구를 하다 무릎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어 지금은 볼을 찰 수 없는 상태다. "많이 다쳤었고 늙어서 이젠 축구공을 찰 수가 없어. 하지만 축구화는 계속 만질 수 있으니 다행이지."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화와 평생을 함께 한 그의 가슴엔 빛나는 대한축구협회 배지는 없지만 어엿한 '축구인' 중 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씨가 아들의 작업을 옆에서 꼼꼼하게 지켜보고 있다. |
◇대물림되는 축구화 사랑
축구에 있어 축구화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흔한 비유로 '전장에 나가는 군인의 총'이라 할 수 있다. 축구화를 최상의 상태로 고쳐주는 김씨야 말로 축구선수, 축구 동호인들에겐 은인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의 나이도 이제 칠순을 향해 가고 있다. "주위 축구화 수선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창갈이를 하는 거고 난 작품을 만드는 거라고 하더라고." 같은 업계의 '선수'들도 인정하는 최고의 기술이 세월의 무상함에 묻힐 수 도 있어 걱정이다. 하지만 다행히 김씨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축구화 수선을 가업으로 이어받고 있다. 김주원(32) 김주현(30). 김씨의 두 아들은 교대로 나와 아버지의 축구화 수선일을 배우며 돕고 있다. 김씨는 "애들이 열심히 안 해서 걱정이야"라며 핀잔을 주면서도 묵묵히 옆에서 축구화를 만지는 아들의 작업을 하나 하나 꼼꼼하게 챙기며 비법을 전수하고 있었다.
건강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 하고 싶고, 아들에게 잘 전수해 한국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싶다는 김씨에게서 수십 년간 숙성된 '열정'의 깊이가 느껴졌다.
이웅희기자 iaspire@sportsseoul.com
출처 : 네이버 뉴스
멋지네요......'축구인' 김철 님..
네이버 댓글보니 가관이던데....에혀..
정말 멋지신 분이네요...^^
첫댓글 저두 금성사서 수선하는데 정말잘해요 여러업체있지만 쩝 수선사들 팬들끼리 서로 헐뜻는거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