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케티쇼는 시적인 울림 가득한 진짜 쇼
얼마 전 쇼를 하라 쇼라는 광고 카피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는 이 카피를 접할 때마다 도대체 무슨 쇼를 하라는 건지, 어디에서 어떤 쇼가 펼쳐지고 있다는 건지 잠깐씩 고개를 갸우뚱거렸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궁금증을 이내 풀어버리지 못하고 곧 잊어버렸다. 지금도 쇼는 진행되고 있는지, 무슨 쇼인지 알지 못할뿐더러 굳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일상의 관심사가 TV를 비롯한 대중매체와는 워낙 거리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쇼에 대한 내 이런 고정관념을 뒤집는 정말 놀라운 진짜 쇼를 우연히 접하고 말았다. 이건 그저 그런 장난이 아니었다.
<브라케티쇼>는 내 생활 패턴에서 한마디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나는 이 쇼를 보는 동안 이런 쇼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혹시 착시나 착각은 아닐까 반신반의하며 홀딱 빠져 버렸다. 대(大)서사와 대(大)서정이 어우러진 이 쇼는 그동안 내가 틈틈이 시간을 쪼개 보았던 웬만한 영화나 뮤지컬과는 확실히 차원이 달랐다. 흔히 한 줄의 시,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제목이나 배우와 함께 오래 기억에 남는 편이지만 <브라케티쇼>에 농축된 감성의 세계는 장면 장면이 고스란히 시의 한 구절처럼 다가왔다. 그런 점에서 이 쇼는 시의 다양한 요소를 줄줄이 거느린 기막힌 예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일생일대에 이런 쇼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일까?
천재배우의 퀵체인지에 맨 먼저 홀리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 조급한 관객을 위하여 <브라케티쇼>의 세계로 떠나보자. <브라케티쇼>는 이탈리아 출신의 아르트로 브라케티라는 한 천재 배우는 1인극이다. 고작 배우 1명이 등장하여 북 치고 장구 칠 게 뻔한데 무얼 그리 대단한 쇼라고 이제껏 장황하게 떠벌렸냐고 한 소리할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대단히 성급하셔라. 이 쇼는 그저 그런 장난이 아니라는 말을 상기했으면 한다. 브라케티는 성급한 관객의 마음보다 더 빠르고 화려하게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쇼의 아우라 속으로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풀어놓는다. 초고속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층이나 어린 시절 시골장터에서 차력이나 간단한 마술을 보았던 추억을 간직한 세대들도 그가 당기는 마력에 대책 없이 빨려들어 간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모든 일이 벌어진다. 100분 동안 얼굴, 의상, 나이, 성별을 바꾸어 가며 100여 가지의 캐릭터를 선보이는 신기한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지며와~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기술적인 면에서 그의 쇼는 퀵체인지(무대 위에서 재빨리 변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퍼포먼스로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의 영역에 속하는데, 단순히 퀵체인지만 보여준다는 것에 현명한 관객들이 열광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의 놀라운 변신술 속에는 모두가 공감할 만한 정서를 자극하는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다. 공연이 외국어로 진행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예술에는 경계가 없고, 굳이 경계가 있다면 그 경계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 못한 어떤 꽃이 피어 있을 것인데, 내가 본 <브라케티쇼>는 그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행복이나 사랑, 향수, 비애 등등의 감성을 건드리는 농축된 세계는 그 때문에 국경과 언어를 초월하여 만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나 보다.
그렇다면 정작 공연의 주인공인 브라케티는 자신의 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브라케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다. 지난 11월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쇼에 대해 동심을 느껴 보라고 말하고 있다.
퀵체인지 아트를 하는 배우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드라마를 가미하고 다양한 예술 장르를 접목시킨 공연은 브라케티쇼 뿐이다. 마술이나 트릭에 대한 생각은 지워 버리고 어린 시절의 추억에 빠져 보라. 나 자신도 공연할 때에는 어린 아이가 된다. 관객들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린 아이처럼 행동해 보았으면 한다. 처음엔 시각적인 놀라움을, 그 다음엔 아련한 추억을, 마지막엔 아직 가슴에 남아 있는 동심을 만져 볼 수 있을 것이다.
천의 얼굴이 빚어내는 명화와 동심의 세계
브라케티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낯설지만 유럽과 캐나다 등지에서는 이미 대단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1999년 캐나다에서 첫 공연을 올린 뒤 1000회 공연에 10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어린 시절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로부터 "나 같은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절대 어른이 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공연을 "페데리코 펠리니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말하고 있다. 어린 시절 신학교에서 신부로부터 마술을 배웠으며, 퀵체인지의 대가 레오폴드의 프레고리(1867~1936)에 대한 책을 접하고 스스로 기술을 연마, 16세기 이후 사라져갔던 퀵체인지 아트를 부활시켰다고 하니 그의 노력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브라케티 쇼>는 브라케티의 자전적 드라마로써, 벌써 7년째 무대에 올리고 있는 레퍼토리라고 한다. 고향집 다락방을 찾아 온 브라케티가 장난감 상자를 열면, 어릴 적 꿈과 환상 속의 캐릭터들이 되살아나면서 <타이타닉>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운드 오브 뮤직> <프랑켄슈타인> 등 화제가 됐던 영화 20여 편의 주인공으로 변신해 주옥같은 명장면을 재현한다.
브라케티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그의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을 위하여 이쯤에서 접는 게 좋을 듯싶다. 다 떠들어주면 김 빠져서 흥미가 반감되지 않는가.
어쨌든, 브라케티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나는 그의 공연을 더 볼 생각이다. 그의 진짜 쇼에 시적인 울림이, 시의 이미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위대한 아티스트이고, 그가 보여주는 예술세계는 오랜만에 내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박형준
프로필 :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 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춤』, 산문집으로『저녁의 무늬』『아름다움에 허기지다』가 있다. 제15회 동서문학상, 제10회 현대시학작품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