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591) ///////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 민소연
드라이아이스 / 민소연
- 결혼기념일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당선소감] “부족함 많은 글 가능성 열어줘 감사합니다”
문득 거울 속에서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다.
글을 쓰겠다는 건 그런 거울을 자꾸만 닦겠다는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 들 때면 그날의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고 나면 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고, 더는 그 기분이 낯설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는 내가 들어 있지 않은 글을 썼다.
나와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인물만이 거기 있었다.
나의 글 속에서 나라고 우기는 인물들이 나 대신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글을 시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내가 시라고 부르는 것들이 나 혼자만의 꿈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에 덜 깬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졸음이 한 번에 달아났는데도 도통 정신이 또렷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꿈에 있을 때보다도 실감이 안 났다.
축하해주시는 기자님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감사 인사를 드렸다.
부족함 많은 글에 가능성을 열어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나의 글이 혼자만 믿는 꿈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기로만 남을 수 있던 글을 믿고 시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준 이희진 선생님과 시를 통해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 장석남 교수님, 권혁웅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나보다도 나의 글을 의심하지 않고 응원해주며 매주 스터디를 함께한 우리 학교 언니들과
친구들에게도 감사와 응원을 전한다.
당선 소식을 알고 “내가 된 것도 아닌데 손이 다 떨린다”면서 기쁨을 함께해준 친구들을 비롯해,
당선의 기쁨만큼이나 축하의 기쁨으로도 가득하게 해준 모든 분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매번 나의 선택을 믿고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심사평] “착상·비유 안정적 구현… 서늘한 감각 탁월”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러 편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공력과 시간을 쌓아온 성과라는 데 공감하였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타자들을 관찰하고 해석한 결실도 많이 보였고,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아 내면의 정직한 기록이 되게끔 한 사례도 많았음을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는데,
김운, 노수옥, 민소연씨가 그분들이다.
오랜 토론 끝에 결국 민소연씨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 심사위원 : 안도현·유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