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 윤신달(尹莘達) 음택 답사기
2004년 10월 10일 경주지역 답사 코스 중 마지막 간산지역은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552에 있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윤신달(尹莘達)의 음택(陰宅)으로 예정되었다.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에 광활하게 펼쳐지는 터에 조성된 창녕조씨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조계룡의 음택간산을 마친 답사버스는 경주 땅을 벗어나 가을걷이에 바쁜 포항 들판을 바라보며 시원스럽게 달린다.
파평윤씨 시조와 관련한 잉어 설화는 여러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내용은 거의 엇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다.
경기도 파평(파주)의 파평산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 연못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서리면서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몰아 쳤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자, 사흘째 되는 날 부터, 다시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곳에서 빨래를 하던 윤씨란 성을 가진 할머니가 문득 연못 한 가운데를 바라보자 금빛으로 장식된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 금궤를 건져 열어 보니 찬란한 금빛 광채와 함께 아기가 누워 있었다.
금궤 속의 아기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 있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 아기를 거두어 기르면서 그 할머니의 성을 따서 아기의 성을 윤씨로 정하였는데, 그 아기가 파평윤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윤신달의 고손자(高孫子)인 문숙공 윤관(尹瓘)장군의 일대기에도 잉어와 관련한 설화가 나온다.
윤관 장군이 함흥에 있던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자, 수많은 잉어 떼가 몰려 들어 잉어떼를 다리로 삼아 무사히 강을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적병들이 뒤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다리로 삼았던 잉어떼는 어느 틈엔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윤씨들은 선조에게 은혜를 베푼 잉어에게 보은하고자 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한참을 달리던 답사버스는 포항시 기계면소재지의 길을 우회하여 죽장 쪽으로 진입하여, 길가에 세워진 파평윤씨 시조 묘를 알리는 표석(標石)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다리를 건너고,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 둔덕 아랫 길을 들어서니 바로 봉계 2리다. 수로를 옆에 낀 1차선 농로를 따라 진입하는, 버스 차창 좌측으로 장중하게 전개되는 봉좌산(鳳座山: 589m)의 산정이 예사롭지 않은 자태다.
웅장한 산세의 산봉(山峰)에 봉(鳳)머리를 닮은 특이한 암봉(岩峰)때문에 봉좌암(鳳座岩)이란 이름을 얻었다. 봉좌산의 형상은 중앙 부분이 약간 평평한 거문토성으로 펼쳐지다가 좌우 능선이 둥그스름한 녹존성(祿存星)이다.
녹존성은 도지목성인 와탐(臥貪)이나 거문토성(巨門土星)처럼 일자(一字)의 형상이 아니고, 그렇다고 복종형(伏鐘形)의 거문(巨門)처럼 둥그스름한 것도 아니다. 다만 하생다각(下生多脚)이라 하여 다른 구성(九星)보다 곁가지를 많이 생출시키는 것이 특징인데, 지상으로 내려올수록 지각(枝脚)이 많아지고, 지룡(枝龍)은 튼실하다.
산정(山頂)에서 크게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요동(搖動)치듯 내려오는 대룡(大龍) 하나가 옹골차게 생겼다.
얼른 마이크를 잡고 회원들에게 창 밖의 용맥을 주시하도록 주문한다. “저렇게 크게 낙맥(落脈)한 용(龍)이라면 반드시 대혈(大穴) 하나를 품안으로 결지(結地)하고도 남을만한 용세입니다” 라고 설명한다.
농로에서 마을길로 진입하는 모퉁이에 세워진 표석을 잘못 판단하여, 엉뚱한 길로 들어선 답사버스가 경상북도 문화재인 분옥정(噴玉亭)이란 정자 안내판이 있는 공터에서 핸들을 수차례 틀면서 간신히 회차하여 나온다.
농로로 나와 조금 더 진행하다가 좌측 모퉁이의 사과밭을 끼고 들어가 차량에서 내려 몇 발짝을 옮기니 별천지 속에 숨겨진 경상북도 문화재 201호(지정일자: 1987, 12, 29)란 안내판이 이방인을 반갑게 맞는다.
봉강재(鳳岡齋)란 재실(齋室)은 시조(始祖) 윤신달(893~973)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1752년(영조 28)에 28세손인 윤광소(尹光紹)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재임하면서 헌금 50량과 목재 15칸 분을 헌납하여 창건하였으며, 봉황이 사는 암자란 뜻으로 봉서암(鳳棲菴)이라는 현판을 걸고 스님을 상주시켰다. 그 후 10년 뒤, 1762년(영조 38)에는 27세손인 윤동도(尹東度)가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재직하면서 다시 수축(修築)을 하였다고 한다.
봉강재로 들어가기 전 대문 앞 공터를 대나무 숲이 감싼다. 재실로 통하는 마당 안으로 발을 들어놓자 파평윤씨 후손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웃음을 가득 머금고 회원들을 반긴다. 아마 이곳 주변에 사시는 회원이 우리보다 이곳에 먼저 도착하여 우리가 온다는 것을 미리 기별한 연유이다.
건물 정면에는 건립 당시에 명명한 풍루암(風樓庵)이라는 현판을 머리에 인 누각과 함께, 봉강재. 봉서암. 태사공분암(太師公墳庵)이란 현판들이 눈에 뛴다. 그리고, 재사 주변으로 양귀비허리처럼 미끈하게 생긴 소나무들이 병풍을 두르듯 빼곡하게 재실을 에워 싸고 있는데, 그래서 문중에서는 이곳의 형국(形局)을 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고 한다.
이곳에 잠든 태사공 윤신달과 관련한 설(說)이 전하고 있다. 공(公)은 신라의 천년사직이 기우는 후삼국(後三國)의 격동기인 918년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王建)을 도와 궁예(弓裔)를 추방하고, 고려 창건에 공을 세웠으며,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멸(討滅)하여 후삼국을 통합하여 개국(開國) 2등 공신인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서훈(敍勳)과 태사(太師) 삼중대광(三中大匡)의 관직을 하사 받는다. 그러다가 얼마 후 태조 왕건이 죽고, 944년에 혜종(惠宗)이 즉위하였는데, 혜종은 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신라를 다스리는 경주대도독(慶州大都督)으로 내보내고, 공의 아들 윤선지(尹先之)를 인질로 삼아 개경에 봉직(奉職)케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혈육별리(血肉別離)의 고통을 겪는다. 공은 경주에서 30년 재임 중에 한 번의 변란도 없이 선정(善政)을 베풀었는데, 973년(광종 24)에 81세로 경주에서 숨을 거두니 유민(遺民)들이 그의 덕(德)을 흠모(欽慕)하여 이곳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묘소는 후손(後孫)들이 모두 원거리에 살다보니 제대로 돌보지 못했는데, 이 지방에 살던 이하지란 자가 묘비(墓碑)를 동강내어 땅 속에 파묻고 투장(偸葬)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고, 조선조(朝鮮朝) 영조(英祖) 연간에 이르러 이곳에 살던 참봉 윤도(尹燾)가 전래되는 야설(野說)을 전해듣고 요로(要路)에 알리니, 당시 영부사 윤지완(尹趾完)과 판부사 윤지선(尹趾善) 등이 이곳에 내려와 직접 심묘(尋墓)하였으나 확증하지 못하였다가 1737년(영조 13)에 윤양래(尹陽來)가 경상감사로 부임하면서 7일동안 전 묘역을 샅샅이 파헤치자, 동강낸 묘비가 발견되어 확증을 얻어, 비로소 묘를 찾아 봉분을 개축하고 석물(石物)을 세웠다고 전한다.
묘역으로 통하는 재실 마당에서 묘소를 올려다 보니, 봉분을 껴안고 혈장을 아우르는 산자락의 모습이 마치 미지의 세계를 쫒아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를 향해 빨리 올라오라는 손 짓으로 다가선다.
묘소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10명 안팍의 다른 팀이 한참 간산에 열중이다. 모두 지맥을 탐지하는 관룡자를 들고 봉분 주위를 맴돌다가 우리 팀이 묘소에 다다르자 소지품을 하나 하나 챙겨 하산한다. 회원들이 모두 오르고, 오늘 간산에 참여한 회원 중 파평윤씨 후손들이 준비한 제물(祭物)을 상석 위에 진설(陳設)한다. 떡이랑, 고기랑, 과일, 전, 그리고 옥수(玉水) 등, 젯상이 푸짐하다. 후손들은 모두 큰 절로 참배하고, 회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춘다. 그리고, 제가 끝나고 윤씨 선영(先塋)께서 감응(感應)한 음식과 곡주(穀酒) 등으로 음복(飮福)을 한다.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덕담이 한참 동안이나 이어지는데, 몇몇 성급한 회원들이 봉분의 내맥을 밟으며, 위로 오른다.
백호가 일군 본신안(本身案)건너로 훤하게 트인 외명당(外明堂)이 단아하고 수려한 사격(砂格)을 내려보내는데, 시선이 멀게 닿는 것이 시원하고, 상쾌하다. 겹겹이 병풍을 치면서 어우러지는 산봉(山峰)이 귀격(貴格)을 연출하고, 귀인봉(貴人峰)과 선인봉(仙人峰), 문필사(文筆砂), 천마사(天馬砂) 등이 둥그렇게 국세를 형성하며, 구도를 연출하는데, 모든 에너지가 이곳 시조 묘로 집중 되는듯 하다.
그리고, 좌우의 용호(龍虎)가 주룡(主龍)과 서로 키재기를 하며, 마치 비단 병풍을 두르듯 몇 겹을 감싸고, 혈장(穴場)을 옹호한다. 특히 이곳에 들어올 때 동구(洞口)에서 본 웅장한 봉좌산이 이곳 묘역의 외백호(外白虎)로 매김되면서 날개를 펴고 비상하려는 봉황처럼 수려하고 단정한 자태가 일품인데, 봉좌암에서 음룡(陰龍)으로 낙맥되는 지룡(枝龍) 하나가 이곳 혈장을 영접하려고 급하게 나오는 모습인데, 몸통을 크게 굴곡(屈曲)하면서 비틀기도 하고, 내달리면서 뛰기도 하는 모습이 호방하고 옹골지다.
그리고 주룡과 우측 백호자락 사이를 비집고 나온 우선수(右旋水)가 혈장을 과당하여 백호안(白虎案)을 타고 흐르다가 안대를 껴안듯이 밀폐된 청룡자락을 적시고 불능통주(不能通舟)가 되어 명당을 관쇄(關鎖)한다.
이곳 시조 묘를 일으킨 내맥은 낙동정맥이 영천의 운주산(雲柱山)을 일으키고, 이리재 어름에서 한맥을 기계면쪽으로 분지하는데, 봉좌산을 일으키기 직전 무명봉에서 크게 낙맥(落脈)한 용맥이 위이굴곡(逶迤屈曲)으로 내려와 경룡(庚龍) 입수(入首)하여 머리를 파묻고 당판뒤 도두에 생기를 응축한다. 그래서 형기에 합당한 좌향(坐向)을 취한다면 용맥에 등을 댄 경좌(庚坐)를 놓아야 정혈법(定穴法)에 합당한데, 이곳 묘소는 특이하게도 용맥선에서 1~2m 를 좌측으로 비껴 봉분을 짓는 바람에 유좌묘향(酉坐卯向)이 되었다. 또한 문중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묘도(墓圖)를 보면 주봉(主峰)을 봉좌암(봉좌산)으로 표기하여 현장상황과 일치가 되지 않는다.
음양교합(陰陽交合)한 내당수(內堂水)는 우수도좌(右水到左)하여 백호안대(白虎案臺) 끝으로 살짝 꼬리를 감추고는 청룡끝자락의 적송(赤松) 두 그루가 선 갑방(甲方)으로 출수한다. 이곳에 묘를 조성했던 고려초기는 수입풍수(收入風水)와 토종풍수(土種風水)가 공생공존하던 시기로 형기(形氣)풍수가 거의 주를 이루었겠지만, 필자가 고집하는 양균송의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을 응용하면 장생룡(長生龍)에 태향태류(胎向胎流)이다. 이 향법(向法)은 향상(向上)의 갑자(甲字)로 출수하되 묘자(卯字)를 침범하지 말고 꼬리를 감추듯 물이 흘러야 대부대귀(大富大貴)하고, 자손들이 흥왕(興旺)하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오늘 실시한 경주답사는 많은 회원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합류한 회원까지 따진다면 얼추 40명이 훨씬 넘었다. 그동안 대형버스를 고집하다가, 모처럼 외출에 나선 35인승 소형버스로는 회원들을 소화시키기는 커녕 대전에서 이미 만석을 이루었고, 영천 IC에서 모두 4대의 지원차량이 간산에 합류하였다.
이렇게 많은 회원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할 수록 즐겁고 신이 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