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머리말 "이슬람"하면 함께 연상되는 단어들이 있다. 테러, 광신도, 무슬림형제단... 오늘도 헐리웃의 영화들은 테러와 잔인한 폭력을 일삼는 모슬렘들을 대량생산해내고 매일 접하다 시피하는 서방의 메스컴들은 그들 모슬렘들의 비인간적인 테러장면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비춰준다. 이러한 광신적인 이슬람교도 라는 서구의 이미지에는 종교적,정치적,경제적 오해의 층이 겹겹이 싸여 있다. 여기에 맞서 서구인이 갖는 편협한 이미지와 욕심에 대해 이슬람 교도들은 무차별적인 테러나 석유와 같은 무기로 대항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의 "도전하는 이슬람"은 비단 이슬람 세계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문제만이 아니라 서구를 제외한 발전도상의 제3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보다 큰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문제란 급속히 전세계적인 생활양식이 되어가고 있는 서구적 생활양식과 전통적인 지역 생활양식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슬람과 서구세계의 뿌리깊은 갈등의 역사를 현상황에 비추어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음을 느껴 이 글을 쓴다. 먼저, 이슬람을 이념적,종교적 측면에서 살펴보고 난 후 서구와의 뿌리깊은 갈등의 역사를 재조명해 보겠다. 그리고 최근들어 일고있는 이슬람세계의 "이슬람부흥운동"에 대해 알아본 후 앞으로의 이슬람과 서방세계의 행보에 대해 진단한다.
2.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다. 사람들이 곡해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생활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이슬람은 인간이 완전하게 사는 방법이고 인간 존재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세상만사에 걸친 즉, 개인생활에서부터 사회, 물질, 도덕, 경제, 정치, 법률, 문화, 국가문제에 이르는 안내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종교. 세속 쌍방에 걸쳐 전적으로 합일된 생활방식이며 신앙의 자세임과 동시에 예배의 방법이고 거대하며 완전한 법체계이며 문화, 문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의 역사는 6세기경 아랍에 살고 있었던 모하메드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이슬람교인들은 주장한다. "태초에 하나님이"로 창세기에 시작되어 있으며 코란경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성경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라"라고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알라"는 단일신을 의미하며 유일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코란은 결코 무하마드에 의해서 씌여진 성전이 아니다. 코란이란 말의 뜻은 "읽는다"는 것이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신이 무하마드에게 계시한 말을 그가 읽었던 것이다. 근대 이슬람 학자로서 뛰어난 사상가인 퍼즐러 라프멘은 코란에 대해서 "순수하게 신성한 말씀이며 신이 예언자 무하메드의 마음속 깊이 말하신 말씀이다. 그 성스러운 말씀은 예언자의 마음을 통해서 솟아난 것이지만 예언자 자신은 한낱 인간일 따름이고 신성한 존재는 아니다" 라고 말했다. 코란이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 하지만 그것이 성서일수는 없다. 그 말씀 자체가 신성한 것이고 신격의 일부이다. 무하마드는 소박하기보다는 야성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베드윈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5가지 기본적인 종교상의 의무를 정했다. 이것을 이슬람의 다섯기둥이라고 하는데 이에는 신앙의 고백, 자카드, 1일5회의 예배, 단식의달을 이행할 것, 핫지가 있다. 첫째, 신앙의 고백은 세계의 어떤 종교의 경을 외우는 것보다도 짧고 간소하다. "신은 하나이니라. 무하마드는 신의 사도이니라." 이런 고백의 말은 이슬람교에 귀의하려는 자 모두가 외쳐야 한다. 둘째, 자카드는 단순히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 했던 것만이 아니고 메디나 시대에 있어서 수입원이 부족했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전리품이 모아질 때까지의 아주 중요한 재원이었다. 이슬람법은 자카드를 얼마쯤 징수한다는 세세한 문제까지를 정해놓고 있었는데 우리가 여기서 그세액을 산출하기는 어렵다. 셋째, 1일 5일 예배는 예배자의 마음을 24시간 신에게 향햐게 한다는 의미 이외에 실제생활 면에서도 효과가 있다. 즉, 예배자는 예배전에 정해진 청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얼굴, 손,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메카 쪽을 향해서 하는 것인데 1일 5회를 그런 예배를 하고 보면 몇억명이나 되는 이슬람 교도가 지구상의 동일 지점을 향해서 예배를 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은 단일사회의 단일행동과 똑같은 일이라고 할수 있다. 넷째, 자기억제, 금욕으로서의 단식은 많은 종교에서 정신적인 미덕을 높이는 것으로 되어있다. 라마단중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의 사이에 식사, 수분의 섭취, 성교는 금지되어있고, 최근에는 흡연도 금지된다. 이슬람의 단식은 유복한 자에게 굶주림의 괴로움과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슬람교도의 종교생활상의 토대는 이렇듯 간소하면서도 엄격한 이슬람의 다섯 기둥에 의해서 굳혀져 왔다. 무하마드는 또 메디나의 장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인간의 통치방법을 정했다. 그러나 코란의 전체 6천절중 겨우 5백내지 6백절을 가르치는 메디나의 장만으로 충분하다고는 할수 없다. 다음으로 이슬람의 기본적 개념에 대해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이슬람은 한결 뛰어난 법의 종교라고 하겠는데, 코란과 허디스, 또는 슨나에 곁들여 '이쥬마'와 '캬스'도 이스라엘 사법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캬스는 과거에 있었던 사례중에서 새로운 사상과 똑같은 케이스를 비교하는 연역적 유추법이다. 그리고 이주마는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고 방식이다. 이 말의 뜻은 이슬람공동체=운마 전체의 합의라는 것인데 이 원칙을 통한 이슬람식 통치는 매우 민주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민중의 의식속에 법률을 받아 들이기 쉽게 함과 동시에 국가관리의 기능으로서도 효과가 있다. 이슬람 공동체는 다수의견에 의해서 운영되는 국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 점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역할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고 또 그것은 아주 중요한 점이다. 지하드에 대해 알아보자. 전투적 이슬람의 대표자는 이슬람의 뛰어난 점을 찬양하는 것에 너무도 정력적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슬람은 칼과 지하드에 의해서 세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범죄에 대해 이슬람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야만적인 형벌을 정해놓고 있다. 고리의 금리를 기초로 하는 이슬람 경제는 비현실적이다. 이슬람은 중혼을 인정하고 여성을 차별한다." 이런 모든 일은 사실 코란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정부 방침이기도 하다. 지하드라는 말 그 자체는 "노력"이라는 뜻을 가진 말에 지나지 않다. 초기의 혁신적 일파인 "하리지"파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5가지 기둥에 곁들인 6번째의 기둥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하마드의 우상숭배와의 싸움이 지하드였던 것이고 지금도 그것은 의무라고 생각하는 학파가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유태교, 그리스도교 등 다른 일신교 신자를 "계전의 백성"이하 하여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초기의 세력확장시기에도 이슬람 국가는 세금을 내기만 하면 그들의 사회를 보호했다. 서구에 이슬람이 침입하자 서구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슬람은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심어지게 되었다. 그년에 와서 가장 새로운 지하드로는 1914년에 최후의 칼리프였던 터키의 스루탄이 동맹국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던 싸움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 아주 최근에는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지하드가 고창되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3.이슬람과 서방세계와의 갈등 만일 이슬람의 발상지가 인도네시아이고 그 신앙의 주요지역이 동남아시아였다고 한다면 이슬람의 역사는 불교와 비슷한 조용한 역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발상지가 3대륙의 교차지점이었기 때문에 정력적이고 또한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꾀해왔던 서구세계의 공세로부터 이슬람은 잠시도 쉴 겨를이 없이 자기를 방위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신흥세력인 이슬람은 근접하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아닌 멀리 떨어진 지브랄타 해협으로까지 그들의 방위선을 뻗쳐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교도는 프랑스 진공을 감행하여 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 이래로 그리스도교도는 12세기 간에 걸쳐서 이슬람을 증요하고 비난 공격했다. 왜 이 2대종교는 중립 완충지대라고 볼 수 있는 지중해를 가운데 두고서도 평화공존을 하지 못했는가? 사실은 그러한 평화공존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마저 양 종교는 서로가 살아있는 신앙의 기본적 본질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비난했고 서로의 입장이 진리임을 확인하려고 상대방에게 비난을 퍼부을수밖에 없었다. 이슬람과 그리스도 양 종교의 싸움은 그것이 비슷한 일신교의 경쟁인 만큼 더욱 심했다. 그밖에 암흑속에 꿈틀거리는 이교도들은 나무나 돌을 숭배하고 있는 형태였으므로 보호할 필요도 배척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일신교인 이슬람교도는 같은 일신교이지만 그리스도교가 걷는 길은 잘못된 길임을 알려주어야 했다. 두 종교는 신앙의 시대에 있어서 완전히 상반되어 있었다고 할밖에 없겠다. 둘 사이의 다름이란 한쪽이 내면적인 신앙임에 비해서 한쪽은 보편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와 이슬람교의 항쟁은 서로가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는 종교상 혹은 정신상의 문제에서 발단된 일인데 그것은 서구 그리스도교가 전도를 위해 이슬람세계에 도전을 한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독립하기 전부터 서구의 압력을 받아온 이슬람 세계의 대응은 1947년부터 1962년에 걸쳐서 나타났다. 그 대응의 방법은 서구의 압력을 그대로 밀어제쳐서 되돌려 버리는 반작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해방전의 이슬람세계는 서구세력에 대해서 동등한 보복의 힘이나 압력을 뿌리칠 만한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레벨의 차이는 심한 것이었고 이슬람 세계는 외부세력의 물리적 압력을 일방적으로 뒤집어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순수한 종교적이 면에서 이슬람이 서구의 공세에 대응한 전법은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에 대한 반론이고 또 하나는 서구문명과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대결이다.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에 대한 반론도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물리적으로 선교활동에 대항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교 선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던 예언자 무하마드의 인격이나 이슬람 교의에 대한 비방과 중상에 대한 반론이었다. 물리적인 선교활동에 대한 반응, 즉 미션 스쿨이나 진료원을 통한 선교 활동은 이슬람 국가가 독립을 하자마자 즉시 그 반응은 끝나버렸다. 제국주의 세력이 물러감과 동시에 선교사들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4.이슬람 부흥운동 소련 연방의 붕괴와 탈냉전 시대의 도래는 서방 자본주의 세계 뿐만 아니라 이슬람세계를 크게 고무시켜 이슬람 부흥운동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물론 이슬람권 일부에서는 이러한 국제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편승하여 '이슬람 원리주의'로 지칭되는 과격하고 급진적 형태의 무장투쟁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러한 오도된 성격의 움직임과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고 있다. 즉, 이슬람 부흥운동은 오랜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의 적절한 대응으로 생성, 발전해 왔다. 그것은 제국주의열강의 침탈에 대항한 총제운동으로 반외세, 반세속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 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개혁성향의 교육받은 부흥운동가들은 서구문물의 적대적 배척으로부터 앞선 과학과 제도를 발전적으로 수용하는 이슬람식 사고의 과감한 발상전환을 시도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최고의 지적 엘리트였던 이들 개혁론자들은 이슬람 율법에 대한 맹목적 추종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재해석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유럽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이슬람을 보호하고, 나아가 이슬람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연과학과 군사기술, 그리고 유럽의 정치, 경제 제도 및 복지 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구적 요소를 이슬람 체제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한마디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식 전통과 현대화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합리적이고 조화롭게 극복하려는 지적고뇌의 표현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이슬람 개혁론자들의 노력은 화려한 옛 이슬람 부흥이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각 지역별로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잠재된 욕구로 무슬림들의 가슴속에 내재해 있다. 이러한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근년에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이슬람권 지배력 강화와 세속주의와 서구화에 따른 도덕적 가치관의 혼란, 이슬람권 국가들의 민주주의 부진, 부정부패나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 이스라엘에 대한 서방의 일방적인 두둔자세, 보스니아와 캐시미르 같은 분쟁 지역에서의 무슬림 대량박해에 대한 서방의 방관자적 태도 등에 의해 젊은층과 소외계층의 공감을 얻으면서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국가, 이란, 터키, 파키스탄, 동남아시아 등 이슬람권 전역에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양상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형태로 진행, 발전되고 있다.
우선 이슬람세계는 "Islamic Fundamentalism"의 우리말 번역인 이슬람 원리주의 혹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없다. 원리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 미국에서 과격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세속화반대운동에 처음 붙여졌다. 이런 맥락에서 이슬람원리주의는 1940년대 서구식 정치질서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일체의 이슬람 운동에 서방세계가 갖다부친 용어이다. 그러나 서구세계가 사용하는 이슬람원리주의는 일반적으로 반서구 노선을 표방하거나 세속정부에 저항하는 일련의 모든 이슬람 운동을 악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용어는 최근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이슬람 부흥운동에 적용시되어 '이슬람은 반문명적이고 비인도적이며 위험하다'는 논리의 비약으로 발전되고 있다. 결국 무슬림들의 절대다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자이고 그들의 대부분이 응징되어야 할 위험한 존재임을 부각시켜 이슬람 세계에 대한 부당한 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한 고도의 수법이라고 많은 무슬림들은 믿고 있다. 한편, 이슬람권에서는 단지 서구의 가치체계에 대항해서 이슬람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이슬람부흥운동, 이슬람개혁운동, 이슬람화운동 등의 표현을 쓴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채 정신적 가치의 존중, 코란과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철저히 근거한 이슬람식 삶의 확립이라는 대전제하에서 줄기차게 지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아랍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면서, 종교적 민족주의의 형태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까지 본격적으로 발아되었다. 그것도 중세의 찬연했던 이슬람문화를 회상하며,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앞선 과학과 기술의 습득을 받아들이되. 이슬람 정신의 강화와 이슬람식 사회체제의 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절충적인 개혁운동이었다. 다만 이슬람운동권의 극히 일부가 서구의 끊임없는 경제적 착취와 이슬람 가치체계에 대한 흠집내기에 극단적으로 반응하면서 과격주의와 폭력주의가 생겨났다. 그리고 소수의 폭력적인 성향의 배경에도 다른 저항의 수단을 앗아가 버린 서구자신의 책임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면서 한 공동체의 고유한 사상과 가치틀을 짓밟고 자신의 것만이 지고선이라 생각하는 이슬람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국가에서 보다도 이슬람을 철저히 박해하고 있는 곳에서 급진적이고 과격한 이슬람 운동이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걸프해에서 철저한 미국의 경찰국가로 자처했던 팔레비샤 정권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이란에서 이슬람 정권의 태동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오랜 일당 군부독재와 프랑스의 지원이 알제리에 FIS(국민구국당)의 집권가능성을 만들어 주었다. 튀니지나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는 것도, 무슬림국가중에서 서구화와 세속화가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터키에서 조차 최근 이슬람을 정강으로 표방하는 복지당이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 대도시의 시장선거를 석권하고, 세속공화국 75년만에 처음으로 집권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 부흥운동을 통해 실현해야 하는 이슬람 국가의 개념을 잘 정리한 대표적인 학자는 마울라나 마우두디였다. 이슬람 정치체제에 대한 서구의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마우두디는 아주 명확하게 이슬람 국가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적 의미의 이슬람 국가형태응 이슬람 성법에 기초한 완전한 神政主義국가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원칙과 개념이 확립되어야 한다. 첫째로 이슬람 정치 이론의 기본 원칙은 일원전 유일신관(tawhid)과 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건설되었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알라)만이 절대적 주권의 주인이고 행사자이다. 동시에 신만이 진정한 입법자이며 절대적 사법권을 갖는다. 따라서 국민은 신의 종복에 불과하고, 국가는 그 운용이 신법인 이슬람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때,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둘째, 이슬람 국가의 본질과 성격은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세속적인 서구 민주주의 원칙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구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조는 주권재민에 있다. 이슬람 국가체제는 대주권의 원칙에 절대성을 주지않고, 신의 주권 원칙에 입각한다. 국가를 운용, 통치하는 자는 갈리프(신의 대리인)로 존재한다. 국가 원수는 스스로의 권위로 법을 제장할 수도,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다. 대중은 그들의 주장이 신의 규범틀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내에서만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다. 신법에 대한 해석이 명확하지 않을때는 이슬람 학자들의 전원 '신정민주주의(theo-democracy)'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셋째, 이슬람 국가의 목적인 대중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설정한 이상적인 조건에서 금기된 사항을 멀리하고 권장된 사항을 적극적으로 이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의무는 따라서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표피적인 업무 이외에 대중을 도덕적으로 함양시키는 교육과, 신의 뜻에 걸맞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넷째, 이슬람 국가의 통치목표는 보다 공동체적이다. 모든 행위는 개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지며, 사회 도덕률이라는 전체적인 가치관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의미이다. 다섯째, 이슬람 국가는 통치자나 국민 모두가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두고 이슬람 국가내에서의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의 소유자는 전체 공동체로서 이슬람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 나름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존중되고 보호된다. 이슬람 국가에서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등한 사회적, 법적 지위와 권리를 향유하고, 민족, 종족, 신분, 직업, 출신성분 등의 차이에 의한 어떠한 불이익도 당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일인의 권력 독점에 의한 전제주의나 독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의 근본체제이고,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이슬람 부흥운동은 몇가지 전제에서 오랜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의 적절한 대응으로 생성, 발전해 왔다. 첫째, 종교적으로 이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최종의 종교였기 때문에, 변질된 이슬람으로부터 순수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다. 즉, 코란에 기초를 두면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실현한 초기 이슬람 공동체(Ummah)을 재건하자는 것이다. 둘째.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이 아닌 정교일치의 단일유기체이기 때문에 이슬람 부흥운동이 정치성을 강하게 띠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대항한 문화적 총체운동으로 반외세, 반세속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 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의 전통을 토대로 하면서 앞선 서구의 과학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즉 '전통과 근대화'의 이상적인 조화를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 양상은 국가나 시대, 투쟁의 대상이나 목적, 방법론 등에서 매우 다양하며 이를 획이로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슬람권에서 최초로 개혁을 통한 이슬람 정통주의의 강화를 시도한 움직임은 9세기 중엽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었다. 그는 코란의 창조설과 같은 당시의 비생산적인 교리논쟁을 종식시키고 이슬람의 신학체계를 바로잡았다. 이로 인해 이븐 한발은 후일 완고한 이슬람 율법주의와 청교도적인 이슬람 부흥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4세기에도 이븐 타이미야라는 신학자가 '살라피(salafi)'운동을 주도하여 신비주의, 범신론, 사변적 신학, 미신적인 요소로부터 이슬람의 정화를 주장하였다. 위의 두 학자의 맥을 잇고 등장한 것이 18세기 중엽 '와하비(wahabi)'운동이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 와하비운동을 이슬람부흥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중동연구자들의 일반적이 견해이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성립된 후, 1200년 동안 누적되어 온 신학적 변질과 사회적 악습에 대한 반발로 출발하였다. 특히 당시 이슬람 사회에 만연하던 이슬람 신비주의가 공동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위주의 기복신앙으로 흘러가자 압둘 와합은 이를 배척하고 청교도적인 순수한 이슬람을 회복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슬람 사회가 쇠퇴하게 된 이유는 이슬람 차체의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정신에서 멀어졌기 EOans이며, 따라서 이슬람 본연의 정신과 고유한 전토을 부흥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와하비 운동은 이슬람의 요람지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동하여 사우디 아라비아를 건국하는 사상적 기둥이 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서구열강이 중동.아랍세계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이전 이슬람 사회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와하비 운동은 큰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이 부흥운동은 19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세계의 개혁 움직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리비아에서는 사누시아 운동이 일어나 정권을 잡았고, 인도에서는 무슬림 각성운동이, 수단에서는 무하마드 아흐마드가 마흐디운동이 각각 변질된 이슬람의 타파와 참된 이슬람의 부흥을 주창하였다. 18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유럽열강의 동진은 와하비 운동에 고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의 부흥 움직임을 더욱 촉진하였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유럽의 근대문화가 중동에 소개되는 전환점이었고, 이로 인해 중동의 근대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아랍 지식인들에게 외세의 통치에서 아랍을 해방시키려는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서구의 발전 사이에서 번민하던 사상가는 알 타흐타위였다. 그는 이슬람권 밖에서도 행복과 풍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체제의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해석을 강조했다. 알 타흐타위의 온건한 개혁사상은 후일 세속적 근대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지만 전통적인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견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의 주류는 오히려 이슬람 개혁운동으로 불릴 정도로 진취적이었고 부패하고 무능한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의 가치를 통하여 유럽침탈에 대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종교적 동기에서 출발한 이 운동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성세력과 그 후원 세력인 유럽열강의 탄압을 받아 실패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정치 사회적 동기에서 범세계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시작된 근대적 무흥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이 시기의 운동은 종교적 순수성 강조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변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개혁운동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개혁적 성향을 띤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추구하는 목표와 방법론에서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서구의 도전에 대한 무슬림들의 보다 직감적인 반응으로 당시 서구의 급격한 발전 양상을 애써 외면하면서 영광스러웠던 이슬람의 과거를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집약된다. 두 번째 단계는 서구식 방법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시도였다. 그들은 서구과학의 우수성에 크게 감명받았음에 틀림없지만,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서구식 교육으로 새롭게 습득한 방법론으로 이슬람의 서구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위를 증명해 보였다. 그들은 서구가 이슬람을 공격하는 주된 내용인 여성의 지위, 노예제도,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 계시와 이성간의 상충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명료한 논리로 반박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에게 무슬림으로서의 자긍심과 이슬람문화의 위대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 주었다. 세 번째 단계는 반식민지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사회운동이 행동화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행동철학은 서구의 도전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회피하여 과거 전통이나 영광속으로 숨어드는 것도, 상대의 문물을 받아들여 소화하는 것도 아닌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자기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해 나간 부류는 ;흔히 원리주의자라 불리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정치적 영광과 원래의 순수성을 재건하는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논의를 단순화시켰다. 물론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의 전통과 순수성을 고집한다는 면에서 앞선 율법학자와 비슷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구의 발전 상황과 문물의 우수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낡은 이슬람의 과거에 연연해 하지도 않았다. 나아가 그들은 스스로 서구의 지적,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자부하였다. 자마티 이슬라미의 창시자인 파키스탄의 마울라나 마우두디가 바로 이부류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20세기 이슬람 개혁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후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이는 이란 출신의 자람루딘 아프가니였다. 그는 이슬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유럽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이론적 당위성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의 대동단결을 위해 범이슬람주의를 설파하기도 했다. 탁월한 선동가였던 아프가니는 외교와 설득으로 각 국가 권력층을 계몽하고, 일반 서민과의 대중적 접촉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정점으로 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의 실천적 정치전략은 영국치하의 인도대륙과 프랑스치하의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무슬림들의 부분적 자주투쟁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이론을 계승하여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이가 무하마드 압두였다. 그러나, 압두는 아프가니와는 달리 정치적이고 개별국가 중심의 애국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배척했다. 그는 이슬람을 총체적으로 부흥시켜 유럽의 비평과 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는 이슬람 원리와 가치체계의 적절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더욱이 그는 이슬람의 정통교리가 확립된 후 1000년만에 처음으로 이슬람 신학의 영역에 이성을 끌어 들였다. 이슬람과 과학을 자유롭게 접목한 것이다. 그의 사상적 토대위에 방법론을 달리하는 수많은 이슬람 개혁론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개혁에 앞장섰다.
1차대전 이후 이슬람 부흥운동가들의 노력과 이상과는 반대로 이슬람세계의 세속화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서구의 침탈과 정치, 경제적인 예속상태도 갈수록 심화되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개혁론자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분노한 급진주의가 점차 세력을 얻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집트의 악명높은 '무슬림형제단'이 태동하였다. 1928년 이집트의 청년교사 하사 알 반나는 이슬람식 생활양식에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그 대안으로 그는 도덕과 윤리의 틀로 이집트인을 이슬람 정신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슬림형제단 운동을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 운동으 핵심은 1930에 작성된 하산 알 반나의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서한에는 서구문명의 기만성을 규탄하고 이슬람의 우월성을 온화한 문체로 설득력있게 논술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국가와 서구열강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나 이슬람권내의 소수 기독교도 및 유대교에 대한 처우와 문화적 자주성에 대해 관용을 보이고 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연과학은 이슬람의 존귀함을 증명해 주는 필요한 정치, 사법 및 행정체제의 개혁, 모든 세속정당의 해체, 세속법령의 개정, 관료의 이슬람화, 부패의 청산, 삶의 질 향상, 윤리교육, 기술연마, 군사력의 강화 등과 같은 전략적인 방책도 제시하였다. 예배와 단식과 같은 전통적인 이슬람 관습은 당시 사회적 여건 아래서는 구사력 강화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대체로 이 운동은 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무슬림들의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심을 두면서 계몽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1947년 유엔이 아랍인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활하고 이듬해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형제단은 당시 폭발직전의 아랍대중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극단적인 노선으로 돌아섰다. 반제국주의와 반이스라엘타도를 외치며 그들과 결탁한 기존 정치세력들에 대한 극렬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1948년말 형제단은 이집트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그들의 지도자인 하산 알 반나 마적 암살되었다. 이제 형제단은 지하로 숨어 들면서 극단주의의 상징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들을 급진적원리주의자라고 부른다. 이처럼 근대화를 주창했던 이슬람 부흥론자들이 한결같이 이슬람의 수호를 외쳤지만 방법론은 서로 달랐다. 종래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이 학문적인 접근을 통해 주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서구화데 치중했던 반면, 원리주의자들은 대중을 상대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방법을 택했다.교육기회의 확대, 대중매체의 보급, 새로운 고용창출, 새로운 사회계층의 성장등에 힘입어 20세기 중반까지는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의 역할과 입지가 강화되었다.한편 세속적인 근대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원리주의 개혁사상의 대중성은 2차대전 이후 독립시기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즉,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시도되었던 제3세계의 근대화가 모순 덩어리로 가시화되고 난 후였다. 즉, 이슬람의 정통성이 회복되기는커녕,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이 소위 타락한 서구주의를 지향하면서 승리를 거두는 시기였다.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 이란의 레자 샤 팔레비,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낫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에 의해 추구되었던 세속화와 서구식 근대화 정책은 오히려 원리주의 개혁론자들의 대응과 활동반경을 넓혀주었다.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주의자들은 이제 서구식 조직개념을 도입하고, 출판과 매체의 첨단 매커니즘을 극대화하여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과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고 홍보하였다. 그들의 전략은 서구제도의 모방이 아니라 서구로 부터의 독립과 최소한 대등한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서구의 앞선 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원했고 권력의 쟁취를 위해서는 급진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이슬람의 가치가 상처받고, 무슬림들의 자존심이 유린당하는 시기에 이슬람 개혁론자들은 조직적이고 분명한 태도로 이슬람의 정통성 부흥을 부르짖으며 대중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석유가 자원화된 이후 중동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서구가 엮어내는 배신과 아랍 저항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특히 1948년 아랍의 독립을 보장해 준다던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심장부에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원하자 서구와 아랍의 씻을 수 없는 반목과 불신의 씨앗은 갈수록 나쁜 열매를 맺어갔다. 2천년간 살아온 고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저항운동 조직을 결성하여 고토회북과 독립이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처절한 생존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난 서방세계는 아무도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의 고통에 동정적이지도 않았다. 1967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포기는 이스라엘의 점령지에서의 즉각 철수를 결의했지만, 국제사회의 결의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낳고 있다. 무장되지 못하고 서방의 지지를 받지 못한 아랍인들은 저항하였다.그 납치와 인질 테러의 배후에는 항상 이슬람원리주의라는 이름이 문명세계를 괴롭혔다. 1970년 대 이후 이슬람화운동은 사상적인 투쟁에서 급진적인 이념과 정치투쟁으로 선회하면서, 과격이란 이미지를 강화하였다. 이슬람의 급진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파키스탄의 뛰어난 정치 이론가 마울라니 마우두디였고 이를 더욱 정교하게 체계화한 사람은 무슬림형제단 소속의 사이드 쿠트브여사. 그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무지시대의 상황을 오늘날의 세속화 현상으로 확대해석 하면서 절대신에게 속한 고유한 권한들이 적대적인 비이슬람적 세속정부의 수중으로 넘어 갔음을 개탄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빼앗긴 이슬람의 고유한 가치를 도로 찾는 것은 무슬림들의 신성한 의무로 규정했다. 서구의 비호를 받는 세속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이집트, 이란, 알제리, 튀니지, 터키 등 이슬람세계 도처에서 급진주의는 반정운동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1979년 중동의 가장 서구화된 석유부국 이란에서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을 때, 서구는 경악하였다. 서민과 중산층을 껴안은 아래로부터의 이슬람 혁명은 50년 에 걸친 근대화의 과정에서 빼앗긴 대중의 울분을 한꺼번에 풀어주었다. 그들은 조금 덜 고유한 전통과 문화의 바탕위에 꽃피는 첨단과학의 낙원을 그들은 꿈꾸었다. 이란의 이슬람 정권이 지난 18년간 서구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무역제재에도 그 기반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은 빠른 템포의 서구화보다는 이슬람의 전통과 가치가 변질되지 않는 사회를 선호하는 이러한 민중의 뜻을 업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권의 많은 문제점과 경제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 쿠데타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만약 그런 사태로 발전하더라도 친서방적인 정권의 출현은 더욱 기대할 수 없다는 중동전문가들의 지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슬림 형제단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성향의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약진은 아랍국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의 반정 투쟁이 극렬하게 전개되었으나 아사드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소탕당하였다. 1981년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암살도 형제단의 행위로 알려져 있다. 요르단에서도 1989년 총선세서 원리주의 세력의 의회 의석의 45%를 차지하여 주목을 끌었다. 더욱이 수단에서는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국민이슬람전선이 집권함으로써 이란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등장하였다. 원리주의 성향이 이슬람부흥운동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것은 90년대였다. 동유럽과 소련연방이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함께 서구 강대국들의 중동각국에 대한 침탈이 더욱 가속화 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무너진 사회주의의 축을 이슬람이 대신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노골화된 서구의 침략에 대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이 어느때보다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신원리주의 운동으로도 불리는 이슬람 부흥운동은 양차대전중 이슬람 세계의 지적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분야에서 태동된 근대적인 현상이며 2차대전 후 더욱 중요성을 띠며 발전해 왔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완전한 삶의 방식으로서 만연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비종교적 이념에 대해 생명력 있는 대안을 제공할수 있다는 믿음과 오늘날의 왜곡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수정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슬람이 담당할 수 있다는 믿음과 오늘날의 왜곡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수정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슬람이 담당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 개혁운동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두 개의 상이한 측면, 정치이념적인 그리고 문화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우선 정치이념적인 면에서는 외국의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 나아가 서구의 자유주의와 구소련의 맑시즘의 문화적영향과 이념적 간섭에 대항하는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문화적이 면에서는 독특한 이슬람 문화의 동질성 주창과 본래적인 이슬람의 믿음, 규범, 의례에 기초한 신앙심 회복을 표현하고 있다. 이슬람 부흥론자들은 이슬람의 신학적 질곡에 머무르지 않고, 뚜렷한 정치 이념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정치투쟁에도 참여했다. 그리하여 지난 50년 동안 이슬람 헌법의 제적와 샤리아의 실시, 민주주의와 이슬람 세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정치투쟁을 전개 했다. 중대한 정치쟁점이 있을 때마다 이슬람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정책적인 수정과 반대집단과의 정치적 제휴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개혁론자들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이슬람국가의 수립에 매진해 왔다. 동시에 대중을 선도하고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여 교육의 이슬람적 개혁, 성적으로 천박하고 외설적인 공공매체의 정화, 무신론적인 이념서적의 금지, 남녀공학교육의 폐지등을 주장하였다.
이슬람 부흥운동의 대두는 흔히 탈식민지시대의 무슬림 사회에서 세속적 정치 엘리트에 의해 주도 되었던 이슬람의 근대화 움직임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많은 개혁적 부흥그룹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근대화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근대화를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혁신과 그 과정이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근대적 발전들이 종교의 소외화 세속화 전통적 가족념의 몰락, 성도덕의 문란과 같은 현상을 동반하는 것에 동의하지않고 특히 신의섭리보다 인간의 이성이 우위에 서는 이념적 혼란에 대해서는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흔히 현대화란 이름으로 통용되는 근대화의 사회문화적 요소를 무슬림 사회의 기술적, 경제적 발전은 이룩하는 필수 가결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슬람 복고주의 지도층은 무슬림 사회가 그들 자체의 방식으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모해야 된다는 원론적인 입장외에 근대화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갖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부흥주의 이론가들은 다른 이슬람국가의 엘리트 집단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외적 발전과정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즉, 근대화의 논쟁이 과학, 기술, 발전이라는 외적측면을 벗어나 다원주의, 민족주의,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한 관용,사고와 양심의 자유등의 문제로 확대되면 그들은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그러나 주어진 사회경제적 여건에서 개혁성향 그룹의 절대다수는 종래와 같은 판에 박힌듯한 이념적 해석과 사회적 저항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근대화 과정의 다양한 변화의 요소들을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풍요와 복지를 이룩하려는 목표에 동참하려 했다. 새로운 사회질서의 재편과 급격한 변화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입지를 확보할려는 노력과 요구가 어느떄보다도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이슬람의 화려한 과거를 복구하고 이슬람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강화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사회에서 무슬림으로서의 삶을 확보하려는 다수 대중의 민의의 수렴으로 앞으로도 강도 높게 지속될 것이다. 다만 일부 이슬람 세력들은 급진주의적 양상을 띄면서 서구가 빚어낸 배신과 약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렬한 대응을 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흔힌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지칭되는 이들 부류는 전체 이슬람 세계에서 본다면 극히 일부이고 이런 방식의 투쟁을 바라보는 이슬람 대중의 반응도 냉담한 편이다. 그러나 이런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의 발화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은 서구와 결탁하여 지배층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는 부패한 세속정권과 복리민복이라는 기본적인 정책의 실패,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이슬람 가치관의 타락에 대한 반발이고 힘으로 지배하는 서구강국들의 논리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의식 강한 무슬림들의 응어리의 표출이다.
5.맺음말 이슬람은 그 전도에 보다 크고 보다 좋은 문제를 안고 있다. 토인비는 두 가지 문제를 들어 이들은 이슬람에게 안성마춤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인종적 차별과 알콜중독에 관한 문제의 해결이다. 이슬람은 그 본질에 기본적 재검토를 가하여 사상개혁을 이룩한 뒤 이와 같은 문제에 전념함이 좋을 것이다. 이슬람이 지닌 자신과 긍지는 젊는 활력의 구현으로서 설명함이 적절하다. 따라서 오해를 빚는 근원도 이같은 이슬람의 젊음 그 자체이고 또한 그 젊음에 넘치는 전투성이며 노쇠한 그리스도교와의 세대격차이다. 오늘의 전투적인 이슬람은 그 신앙의 확실성을 확신하고 있다. 또한 진정 진실을 알고 있다. 그 전투적인 프로테스탄트의 선구자처럼 전투적 이슬람은 우매한 경거망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그들의 혁신적,전투적 태도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말해 전투적 이슬람은 그 신앙이 온갖 이슬람국의 운명을 지배할 때까지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투쟁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슬람세계를 이해하고 그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세계는 이미 12억이라는 인구를 가진 문화덩어리이자, 이슬람국가로서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나라만도 55개국에 달한다. 세계화라는 명제를 감소하면서 언제까지 서구언론이 자기들 구미에 맞게 양념된 정보만을 취하면서 우리 바깥의 문제들과 때로는 우리의 문제마저도 그들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수용하는 무지와 위험상태를 계속할 것인가? 이슬람은 위험하고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같은 사람들이란 이미지 조작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적 본질에 접근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슬람세계의 서구세계와의 갈등의 역사와 대응과정을 살펴보면서 다시한번 그들 이슬람세계에 대해 개관적인 판단이 필요함을 느낀다.
첫댓글"만일 이슬람의 발상지가... 동남아시아였다고 한다면 이슬람의 역사는 불교와 비슷한 조용한 역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발상지가 3대륙의 교차지점이었기 때문에 정력적이고 또한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꾀해왔던 서구세계의 공세로부터 이슬람은 잠시도 쉴 겨를이 없이 자기를 방위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여기서부터 그냥 안읽고 스크롤 쭉 내렸음. 태어나자마자 아라비아 반도 정복, 그 이후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정복 -> 페르시아 정복 -> 북아프리카 정복 -> 스페인 정복 -> 중앙아시아 정복 -> 아나톨리아, 발칸반도 정복 -> 북인도 정복 -> 인도네시아 정복 테크를 탄 전투종교가 이슬람인데 뭐라고라?
"신흥세력인 이슬람은 근접하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아닌 멀리 떨어진 지브랄타 해협으로까지 그들의 방위선을 뻗쳐야 했다"
우왕... 이건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생각나는 구절이군요. 그분도 로마의 확장이 국방을 위해서 전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드립을 쳤었죠. 뭐 개신교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정상적인' 한국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너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향이 있는듯요. 한국에서 이슬람을 보는 시선은 60년대 서양인들이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해 가지던 '고귀한 미개인'의 환상 딱 이 수준임. 물론 광신도들이나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애들은 이슬람을 막 싫어해주지만..
제가 말하자는 바는 이슬람을 좋아하면서 기독교를 싫어할만한 근본적인 차이가 두 종교간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쪽이 싫으면 다른쪽이 좋을수가 없고, 한쪽이 좋으면 그 다른쪽도 싫어할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이슬람을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내요. 교회 먹사들이 절에와서 깽판치는것은 나쁜짓인데, 이슬람 세계의 역사적인 공격성은 자기방어일 뿐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이지 않고서야 이렇게는 말 못하죠. 저 '방위선을 뻗치는' 과정에서 짓밟은 '절'이 몇개인데요.
이슬람이 초창기 시절, 비 무슬림 피정복민들에게 강재적 개종을 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관대하거나 포용적이라서가 아니라, 무슬림들에게는 세금을 안 걷고 대신 비 무슬림들에게 걷은 세금으로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꾸려나갔기 때문입니다.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가는 세금을 못 걷으니, 개종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죠. 물론, 옴미아드 왕조를 무너뜨린 아바스 왕조에 가서는 무슬림이든 비 무슬림이든 할 것없이 모두 인두세를 내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를 믿으려면 무슬림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비 무슬림들이 세금을 덜 낼려고 무슬림으로 개종하게 된 것입니다.
퍼와진 이 글의 출저 사이트의 십자군 란에 '십자군에 관한 미신'이라는 글이있는데 그게 딱 타메를랑이 지적하는 데로 지적하더군요. 근데 그게 무려 2005년 때 글이네요 헐.. 그런데 거기 달린 댓글도 하나같이 글은 읽은건지 만건지 하는 수준 참 ㅡㅡ 항상 그렇듯이 비주류놈들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씨부리기로는 1등인듯
첫댓글 "만일 이슬람의 발상지가... 동남아시아였다고 한다면 이슬람의 역사는 불교와 비슷한 조용한 역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발상지가 3대륙의 교차지점이었기 때문에 정력적이고 또한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꾀해왔던 서구세계의 공세로부터 이슬람은 잠시도 쉴 겨를이 없이 자기를 방위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여기서부터 그냥 안읽고 스크롤 쭉 내렸음. 태어나자마자 아라비아 반도 정복, 그 이후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정복 -> 페르시아 정복 -> 북아프리카 정복 -> 스페인 정복 -> 중앙아시아 정복 -> 아나톨리아, 발칸반도 정복 -> 북인도 정복 -> 인도네시아 정복 테크를 탄 전투종교가 이슬람인데 뭐라고라?
"신흥세력인 이슬람은 근접하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아닌 멀리 떨어진 지브랄타 해협으로까지 그들의 방위선을 뻗쳐야 했다"
우왕... 이건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생각나는 구절이군요. 그분도 로마의 확장이 국방을 위해서 전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드립을 쳤었죠. 뭐 개신교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정상적인' 한국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너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향이 있는듯요. 한국에서 이슬람을 보는 시선은 60년대 서양인들이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해 가지던 '고귀한 미개인'의 환상 딱 이 수준임. 물론 광신도들이나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애들은 이슬람을 막 싫어해주지만..
그런 확장은 돈때문 아닌가요? 강제적 개종을 시키지는 않았다고 하던데 종교를 명분으로 한전쟁으로 모든영토를 집어삼킨것은 아니고 간간히 자하드나 성전! 이런건 다른 종교에서도 찾아볼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말하자는 바는 이슬람을 좋아하면서 기독교를 싫어할만한 근본적인 차이가 두 종교간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쪽이 싫으면 다른쪽이 좋을수가 없고, 한쪽이 좋으면 그 다른쪽도 싫어할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이슬람을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내요. 교회 먹사들이 절에와서 깽판치는것은 나쁜짓인데, 이슬람 세계의 역사적인 공격성은 자기방어일 뿐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이지 않고서야 이렇게는 말 못하죠. 저 '방위선을 뻗치는' 과정에서 짓밟은 '절'이 몇개인데요.
물론 이는 뒤집으면 기독교쪽 광신도들한테도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슬람이 초창기 시절, 비 무슬림 피정복민들에게 강재적 개종을 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관대하거나 포용적이라서가 아니라, 무슬림들에게는 세금을 안 걷고 대신 비 무슬림들에게 걷은 세금으로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꾸려나갔기 때문입니다.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가는 세금을 못 걷으니, 개종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죠. 물론, 옴미아드 왕조를 무너뜨린 아바스 왕조에 가서는 무슬림이든 비 무슬림이든 할 것없이 모두 인두세를 내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를 믿으려면 무슬림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비 무슬림들이 세금을 덜 낼려고 무슬림으로 개종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종교적인 전파 과정이나 역사로 보면 이슬람만큼 호전적인 종교도 없어요. 교주인 무하마드부터가 전쟁 지도자였는데 말이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인한 반미감정 확산과 그에 반비례하여 피해자인 이슬람권에 대한 동정심이 싹 터, 생겨난 경향이죠.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도 그런 추세를 따라서 뜬 작품이고요.
그리고 정복 초창기에는 강제 개종이 없었다고 해도, 후반부로 가면 강제 개종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사파비 왕조에서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을 지독하게 탄압하면서 강제로 개종시켰고, 아프간에서도 19세기 누리스탄인들을 상대로 같은 일을 저질렀죠.
강제개종은 후반부로 갈 것도 없이 초중반부에 이미 흔하게 일어났죠. 강제개종 없었던 건 말 그대로 극초기에 불과...
그리고 서구와 이슬람의 역사에서 먼저 침략을 한 건, 엄연히 이슬람 쪽이었지 말입니다...
퍼와진 이 글의 출저 사이트의 십자군 란에 '십자군에 관한 미신'이라는 글이있는데
그게 딱 타메를랑이 지적하는 데로 지적하더군요. 근데 그게 무려 2005년 때 글이네요 헐..
그런데 거기 달린 댓글도 하나같이 글은 읽은건지 만건지 하는 수준 참 ㅡㅡ
항상 그렇듯이 비주류놈들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씨부리기로는 1등인듯
다른건 둘째 치고, 비잔틴 제국이 건제했다고 해도 그 정치체에선 '근대'가 자생적으로 확률이 적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멸망이 아쉽진 않네요.
이슬람이 없었으면 지중해를 둘러산 유럽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은 로마가 만들어놓은대로 여전히 같은 문명권이었겠죠.가끔 아쉬워요^^
하지만 투르크입장에서는.. 이슬람이 없었다면.... 중앙아시아에서 정체성자체가 소멸했을겁니다.
중앙아시아가 터키로 불리게 된것 자체가 침략으로 인한 결과죠. 수천년간 지속되오던 그리스 문명을 순식간에 증발시킴. 뭐 그런데 그런식으로 따지면 나쁜놈 어디 없겠습니까만...
사탕찌개//중앙아시아가 아니고 아나톨리아 아님?
(사탕찌개 님의 의도랑 다를거 같지만)
중앙아시아도 "투르키스탄"(투르크의 땅)이라고 불렸죠.
솔직히 사탕찌개 님 답글 처음보고 '왜 투르키스탄을 터키라고 하셨지? 그리스는 왜 나오고?'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진 2천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 문명의 주요 터전이였던 이오니아 일대가 어떻게 쓸려나갔더라...
우왕... 잘못봤내요... 궁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ㅠㅠ
이슬람은 중동의 정체성이죠...
윗님말대로 이슬람은 그많은 중동민족들을 규합하는 명분이기도 했죠...
십자군전쟁당시에 살라딘은 쿠크르족이었지만 중동의 민족들을 성전이란 명목으로 전쟁을 하니까요..(물론 십자군들의 공격이 약탈전으로 변하니까 어쩔수 없었지만 말이죠..)
다들 나처럼 비슷한 부분에서 스크롤 ㅈ쫙 내렸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