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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썰의 전당> 미술품 잔혹사 1부 – 위작 스캔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큰 모자를 쓴 잔에뷔테른(Portrait of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1919년, 캔버스에 유채, 54×37.5cm, 개인 소장
✺ KBS1 <예썰의 전당> [50회] 미술품 잔혹사 1부 – 위작 스캔들. 2023년 4월 29일 방송 다시보기
✵ '예썰의 전당' 쉰 번째 이야기는 미술품 잔혹사 1부, ‘위작 스캔들‘
미술계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위작! 미술 작품은 어떤 작가의 것인지에 따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에, 미술계는 지난 수백 년간 위작 스캔들로 몸살을 앓아왔다. 세상을 속인 은밀한 위작의 과정부터 미술사를 뒤흔든 가짜 작품 이야기까지. 특별 게스트 손이천 경매사와 함께 ’위작 스캔들‘에 얽힌 흥미로운 썰을 풀어본다.
✵ 예썰 하나, 역대 최고가 작품! 위작 논란에 휩싸인 이유는?
2017년 뉴욕의 한 경매장,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사상 초유의 경매가 열렸다. 모두가 주목한 경매 작품은 바로 천재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으로, 예수의 초상을 그린 '살바토르 문디'였다. 경매 결과, 무려 4억 달러(한화 5,240억 원)에 낙찰되어 역대 미술품 최고가를 달성했지만, 일각에서는 해당 작품이 위작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는데. 위작이냐, 진품이냐를 놓고 전문가의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는 가운데, 세계 최고가 작품으로 이목을 끈 ’살바토르 문디‘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걸까. '예썰의 전당'에서 ’살바토르 문디‘에 얽힌 위작 스캔들의 전말을 알아본다.
✵ 예썰 둘, 미켈란젤로는 위조범으로 작가 인생을 시작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가 사실은 위작꾼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석상을 수집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젊은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는 돈을 벌기 위해 로마 시대의 석상을 직접 위작했다는데. 먼저 새로운 석상을 만든 후, 오래된 작품처럼 보이기 위해 석상을 땅에 묻었다가 꺼내 팔았다는 썰이 바로 그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위작 행적은 곧 들통나고 말았지만, 오히려 위작 활동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게 되어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는데. 그가 위조꾼에서 천재 화가로 거듭나게 된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Christ with the Adultress)’, 1942년, 보이만스 판 보이닝헌 미술관, 네덜란드 로테르담
네덜란드의 거장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를 사칭해서 그린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 1889~1947)의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나치돌격대장인 헤르만 괴링에게 작품을 팔았다.
메이헤런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로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를 사칭한 ‘위작의 전설’이다. 메이헤런은 네덜란드 국보로 꼽혔던 페르메이르의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을 독일의 헤르만 괴링에게 700만달러(2008년 가치)판매했다는 이유로 대역죄인이 됐다.
그러나 이 작품은 메이헤런 작가도 깜빡 속은 전설의 위작이었다. 메이헤런은 ‘난 조국을 배반한 게 아니라 괴링을 속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믿지 않자 메이헤런은 직접 붓을 잡고 페르메이르의 기법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그 뿐이 아니다. 네덜란드 최고 감정가들이 국보급 보물로 보존하자던 ‘엠마오의 저녁식사’ 등 페르메이르 작품 8점이 역시 메이헤런의 그림이었다.
감정가 가운데는 페르메이르 연구에 평생을 바친 아브라함 브레디우스가 포함돼 있었다. 브레디우스는 “이 작품(‘엠마오의 저녁식사’)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확실하다”고 큰소리쳤다. 그러자 네덜란드 언론에서는 ‘이런 국보급 그림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아우성 쳤다. 결국 보이만스 판 뵈닝겐 미술관은 이 그림을 52만 길더(400만 달러)에 사들였다. 메이헤런은 총 8점의 페르메이르의 위작을 판매했다.
다른 위작전문가인 기어르트 얀 얀센은 자신이 그린 카렐 아펠(네덜란드·1921~2006)의 위작을 260만 달러를 팔았다. 간이 배밖으로 나온 얀센은 또다른 위작을 그려 경매회사에 보냈다. 그러자 경매회사가 아펠에게 작품 감정을 의뢰했는데 아펠의 대답이 기가 막혔다. ‘내가 그린 그림이 맞다’는 것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지만 이 작품 역시 기록적인 액수로 팔렸다.
그 뿐인가. ‘해바라기’(빈센트 반 고흐)는 7점, ‘절규’(에드바르트 뭉크)는 4점의 버전이 있다. 새 작품이 발견될 때마다 감정가들은 진땀깨나 흘렸다. ‘모나리자’는 어떤가. 2012년 스위스 모나리자 재단은 1913년에 발견된 ‘아일워스 모나리자’ 역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작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다 빈치가 루브르박물관의 ‘모니리자’ 보다 10년 정도 젊은 시절에 그린 진작이라는 것이다. 자외선·발광적외선·감마분광시험 등 첨단 과학 장비를 동원한 결과이니 틀림없다고 했다. 하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과학적 분석은 유사한 연대를 가릴 지는 모르지만 작가의 진작여부를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위작판별은 이렇듯 고금을 통틀어 간단치 않다. (출처: 경향신문 2016년 07월 16일, 이기환 논설위원)
✵ 예썰 셋, 치밀한 위작의 세계 vs 진실을 밝히는 감정의 세계!
고미술품부터 현대 작품까지, 잊을 만하면 터지는 위작 사건들! 모두를 속이려는 위조범과 진실을 밝히려는 미술계의 쫓고 쫓기는 두뇌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위조범의 수법이 치밀해질수록, 작품의 진위를 밝히려는 감정의 방법 또한 다양하게 진화되어 왔다는데.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감정의 방법과 이를 교묘하게 피해 가는 위조범들의 썰!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위조범에게 직접 듣는 그들의 범행 수법까지. 진짜와 가짜를 넘나드는 흥미로운 미술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큰 모자를 쓴 잔에뷔테른‘, 1917년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잃어버렸던 걸작,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 1506~1513년, 유화, 월넛 목판에 유채, 66x45cm, 개인 소장
수백년 만에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이탈리아)의 진품으로 밝혀지게 된다. 조악하게 덧칠된 물감덩어리들과 먼지더미를 한겹씩 걷어낼 때마다 레오나르도 특유의 천재적인 붓터치가 눈앞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 대한 기록이 다시 등장한 것은 1649년 영국의 찰스 1세의 소장품 목록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폐위되면서 잠시 팔렸다가 찰스 2세가 재위하면서 1660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이후 1736년 버킹엄 공작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의 아들이 이 작품을 경매로 넘겨버린 기록을 끝으로 이 작품은 백년이 넘도록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영국의 수집가 프레데릭 쿡이 1912년 이 작품을 사들였는데, 그 당시에는 이 작품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1940년대에 그가 소장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 때에도, 이 작품은 16세기의 ‘밀라노화파’의 한명이자 레오나르도의 수제자인 지오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Giovanni Antonio Boltraffio, 1467-1516)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쿡이 사망한 후, 1958년 경매에서 45파운드에 팔렸던 이 그림은 2011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품으로 판명되며 오늘날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미켈란젤로도 원래 로마 조각 위조범으로 예술적 경력을 시작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Pietà)’, 1498-1499년, 대리석, 174×195cm,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피에타(Pietà)는 르네상스 시대 조각 예술의 대표적인 명작품이다. 그의 많은 피에타 상 중에서 최초의 것으로, 당시 로마에 체류 중이었던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르의 의뢰로 만든 것이었다. 커다란 대리석을 깎아 만든 이 조각상은 장 드 빌레르 추기경의 장례 미사 기념비로 제작되었지만, 18세기에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입구 오른쪽에 있는 경당으로 위치가 옮겨졌다.
미켈란젤로가 이 피에타를 만들게 된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하나 있다. 메디치 가를 나온 후 2년이 지나 미켈란젤로는 오랜만에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아서 저택을 찾았는데 정원에 있는 잠자는 큐피드 상을 보고 지나가던 조각가가 '땅 속에서 찾은 것처럼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한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미켈란젤로는 그 상을 똑같이 만들어 땅 속에 묻었다가 파낸 후 그을리게 만들어 마치 발굴된 고대 로마 조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밀라네제라는 로마의 골동품상에게 팔았는데 밀라네제가 이를 포도밭에서 발굴된 로마 조각상이라며 고위 성직자인 리아리오 추기경에게 팔면서 문제가 된다. 후일, 위작에 사기당한 걸 알게 된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 조각상을 만든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며 전령을 시켜 고작 20세의 어린 미켈란젤로를 찾아오게 된다. 이 잠자는 큐피드 사건은 미켈란젤로를 로마에 입성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리아리오 추기경이 미켈란젤로의 첫 후원인이 되면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만드는 계기로 이어진다. 참고로 이때 밀라네제가 환불해준 큐피드 상은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로 명성을 얻고 난 뒤 더 비싼 값에 팔렸다.
이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의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실제 크기는 2m 이상으로, 굉장히 크다. 이 성모상은 비례학적으로 볼 때 미켈란젤로가 근육에 집착하여 불법 해부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오류가 심한데, 이는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으면서도 조각의 중심이나 표현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미켈란젤로가 일부러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실제의 비례보다 2배 정도 크게 조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2m에 달하는 높이와는 달리 옆면의 두께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옷자락 주름의 입체감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간감이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성모 마리아의 옷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레이스 옷깃을 자세히 보면 라틴어로 "MICHAEL. AN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조각되어 있다.
이 피에타상은 유일하게 미켈란젤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작품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으로 일약 스타로 등극하고 나서도, 사람들이 이 조각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별로 관심을 안 갖자 열받아서는 밤에 몰래 성당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조각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옷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레이스 옷깃을 자세히 보면 라틴어로 "MICHAEL. AN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조각되어 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너무나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고 한다. 조각가가 조각에 자신 스스로의 사인을, 그것도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조각으로 남기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다행히도 이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행으로 그친다.
이 유명한 작품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에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여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묘사한 것이다. 원래 피에타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은 북방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조각상이 제작될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는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유행을 하였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표현은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마리아의 얼굴이 매우 앳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나, 예수의 몸에 비해 마리아의 신체 비율이 매우 거대하게 표현된 점, 그리고 사망한 후 사후 강직이 일어났어야하는 예수의 몸이 부드럽게 늘어져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점 등 매우 독창적으로 제작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이상과 자연주의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예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생전에 만든 거대한 조각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끝마친 작품이기도 하다.
다른 피에타 작품들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눈을 맞추거나, 뺨을 맞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계단의 성모'를 포함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작품에서는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읜 것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즉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 작품에서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도록 해서 아들을 처참하게 잃은 그 슬픔의 표현을 극대화하는 한편, 장래의 부활을 믿기에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분석해본다.
일화에 의하면, 그렇게 피에타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밤중에 길을 나섰는데 밤하늘을 보자 너무 아름다웠다고 느꼈단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생각하기를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든 하느님은 당신의 작품 어디에도 서명을 넣지 않았는데 자신은 고작 조각 하나에 오만하게 서명을 넣은 게 너무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 이후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넣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혹은 자신이 만든 피에타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기대와는 달리 피렌체에 대한 언급 없이 로마 또는 롬바르디아 출신 예술가의 작품일 거라는 평가를 듣자 화가 나서 한밤중에 대성당에 몰래 들어가 출신지와 이름을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2가지 일화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물론 지나치게 젊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나 보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동정녀인 성모 마리아는 속세의 나이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기에, 일부러 젊고 아름답게 조각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예수의 모습은 그저 힘없이 축 늘어진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면 은은한 미소를 풍기고 있다.
5월, 어느 특별한 날
어린이날·어버이날·스승의날·성년의날·
부부의날·부처님오신날….
5월은 기념할 날이 참 많습니다.
평소 전하지 못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기 좋은 달이다.
나뿐 아니라 함께 열심히 살아온 가족과
서로 위안이 되고,
깊이 감사하고 힘을 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선물 같은 5월,
모두 행복이 가득한 달,
사랑이 넘치는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들풀 이영일·고앵자 드림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50회] 미술품 잔혹사 1부 – 위작 스캔들,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무원 김명희 화가
'오월에 라일락'
백오십여년 '고갱'은 오월 이렇게 표현했네요~
홍천도 이렇게 오월을 맞이합니다!
"큰꽃으아리"
주현선 골프가이더님
귀한 소식을 매일 보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날마다 풍성한 문화 정보가 제 영혼을 맑게 해 주심도요.
5 월의 싱그러움과 갖가지 행사와 더불어 부장님 과 고앵자
기자님 께서도 항상
행복 하시기를!!
ㅡ주현선ㅡ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