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신문사별
조선일보 / 영주일보 / 한국경제 / 국제신문 / 전남매일 / 농민신문 / 한라일보 / 동아일보 / 경제신춘 / 세계일보 / 매일신문 /무등일보 / 한국일보 / 경향신문 / 부산일보 / 불교신문 / 강원일보 / 전북일보 / 경남신문 / 광주일보 / 광남일보
--------------------------------------------------------------------------------------------------------
■ 조선일보
바이킹 / 고명재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우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것을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버리고
네가 다가올 땐 등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뒷목을 핥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교회 십자가가 네 귀에 걸려 찢어지고 있었다
내리막길이 빨갛게 물들어 일렁거렸다
네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더는 바다가 두렵지 않다고
이 배는 오래됐고 안이 다 삭아버려서
더 타다가는 우리 정말 하늘로 간다고
날아가는 기러기의 등을 보면서
실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너를 보면서
눈 밑에서 배가 타는 것을 느꼈다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 영주일보
객공(客工) / 한영미
재봉틀 소리가 창신동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담장이 막다른 대문을 맞춰 다리면
원단 묶음 실은 오토바이가 주름을 잡았다
스팀다리미 수증기 속으로
희망도 샘플이 되던 겨울
어린 객공은 노루발을 구르다 손끝에 한 점
핏방울을 틔우곤 했다 짧은 비명이
짓무른 패턴에 스미면,
엉킨 실은 부풀어 오른 손가락 감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이었다
이제 그 슬픔도 완제품이다
붕대처럼 동여맨 구름
자수(刺繡)의 밤하늘은 그녀의 눈물을 진열한 쇼핑센터가 아닐까
화려하게 화려하게
너무나 눈이 부셔서
쪽가위처럼 날카로운 바람에
이따금 실밥처럼 잘려나가는 유성을 보았다
■ 한국경제
릴케의 전집 / 김건흥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놓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자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
■ 국제신문
십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오후 / 정희안
우선 헐거워진 안구부터 조여야겠어 의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 네모난 메모는 너무 반듯했어 느슨해진 우리 사이에 필요한 건 떨림이잖아 사랑은 사탕 같은 것 길이와 깊이 중 어느 쪽이 좋을까 잠들지 않고 꿈을 꿀 순 없잖아 달리자는 남자와 달라지는 남자 수순은 잘못되었지만 수준은 비슷해 일용직 알바생의 심정을 너는 몰라 너는 내가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해 우리 모두 갑질 아래 새로 태어나곤 하지 사진을 정리하다가 시간을 정리해버렸어 미움은 미움에서 출발해 머리는 항상 미리를 준비했어 망설임은 사치야 네가 생일선물로 준 귀걸이처럼, 취업은 걱정 중 제일 으뜸이지 숲이 술을 대신할 순 없잖아 기능도 못 하면서 가능을 얘기했어 조직은 때로 조작도 해 유인하려면 유연해야 해 정말이지 절망스러웠어 그러니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 밀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빌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진절머리와 전갈머리는 무슨 관계인지 거울 속에 겨울이 있잖아 말 많은 세상 발밑을 조심해 그럼, 이제부터 그림 공부나 해볼까
■ 전남매일
나머지 인간 / 김범남
허름한 옷 입고 재즈만 듣는다. 사랑의 원가에 애착의 비용을 들인다. 가끔 일상은 사람을 멀어지게 만든다. 거리와 집착의 변수에 비례해 만각된다. 비위에 거슬리는 언행으로 허덕거린다.
나머지도 인간이다.
이틀간 잠만 잔다. 수면 부족과 의욕상실증이 만든 침착함이다. 잉여가 없는 느린 속도를 즐긴다. 기억은 꿈을 만들고, 우연은 희망이 된다. 액세서리 지식을 걸치고 동굴로 들어간다. 틈을 타고 빛이 침투한다.
방관자도 나머지 일부다.
역방향과 정방향, 선택을 종용한다. 기울어진 생각으로 방향을 찾는다. 모순이다. 모서리와 모퉁이도 나머지다. 일부가 모여 전부가 된다. 구석을 찾을수록 신경은 예민해진다. 평면의 날카로움이 보인다.
남는 인간이 나머지다.
남은 인간도
나머지다.
■ 농민신문
풀씨창고 쉭쉭 / 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 있다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댈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은 움튼다
■ 한라일보
순환선 / 이도훈
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 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렸고
생전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 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만 책들의 뒷부분은
다 백지상태였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순환선에서 내려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 동아일보
우유를 따르는 사람 / 김동균
창가에 앉아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당신은 조용히 그것을 따르고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 둘러맨 앞치마가 하얗고 당신의 얼굴이 희고
빛이 나는 곳은 밝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우유를 따르고
우연한 기회에 인사를 건네고 거기에서 우유를 따르고
다음 날에도 성실하게 우유를 따르는 그런 사람에게 매일 우유를 따르는 게
지겹진 않나요, 그곳은 고요하고 그곳에서 당신을 계속 지켜보기로 하고
어떤 날엔 tv를 켰는데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출연한다. 책에서도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이 앉아 있는 지면에 부드러운 빛이
쏟아지고 서가가 빛나고 읽던 것을 덮어도 빛나는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던
당신이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차분하게 우유를 따르고 열 번을 쳐다보면 열 잔이 되는 우유가 있다.
실내는 눈부시고 새하얗게 차오르는 잔이 가득해지고
그런데 누가 우유를 즐겨요, 지켜봐도 우유를 즐기는 사람이 없는데
우유를 가져다준 적이 없는데, 당신도 환하고 실내도 환하고 당신이
우유를 계속 따라서 그런 거잖아요, 문밖에서 발목이 젖고 우유가 넘치고
우유가 흐르는 골목이 차갑고 당신은 계속 따를 수 있겠어요.
당신의 손이 새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 경제신춘
양파꽃 지폐 / 이선주
무안군 성동리 170번지 임금례 할머니 집에 불이 났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양파밭일 온품 반품 바꾸어 모은 팔십오만 원 빳빳한 저고리 은빛 테두리 두른 단아한 신사임당 한 장씩 장판 밑에 깔아 놓고 늘어진 난닝구 고부라진 등골 부리고 누워도 손주들 학원비도 대주고 용돈도 쥐어 주며 율곡선생을 빌어주는 순간은 알싸한 파스 몇 장이면 무릎뼈 엉치뼈까지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아 내일 또 어느 밭으로 갈까 노곤달근한 꿈이 깡그리 타버렸다
아침에 나가면서 끓여 먹었던 누룽지 양은냄비 불 끄는 걸 깜빡 잊어버렸던 탓이었다
흙 속에 거꾸로 머릴 박고 살아도 하늘 딛고 땅 속으로 알알차게 살찌우던 양파돈 생각에 연기 자욱한 집으로 뛰어 들어가 장판 먼저 걷어보고 까맣게 타버린 지폐를 발견하고는 기가 막히게 서럽고 허전하던 밤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야 했는데 동네 노인들 하나씩 하나씩 찾아와 성님 잊어부러야제 어쩌겠소 하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양파 냄새나는 사임당 몇 잎씩 꺼내 쥐어 주고는 엉거주춤 펴지지도 않는 다릴 끌고 흰 달빛 속을 걸어 돌아가더라는 밤새 그러고선 다음날 또 새벽같이 날품 가는 경운기에 동글동글 모여 앉았더라는 흙먼지 날리는 길가에 하얀 양파꽃도 무리무리 환하게 피었더라는
■ 세계일보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 찾기 / 김지오
그때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가 내 앞을 지나간다
혹시, 당신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세요? 어머,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도둑 아니고 강도 아니에요 당신의 왼쪽 바지 주머니라 해도 상관은 없어요 당신의 왼쪽 심장이라 해도 상관없지요
혹시, 사탕 있으면 한 개 주실래요? 에이, 거짓말! 나는 당신의 주머니를 잘 알아요 한 번 만져 볼까요? 꽃뱀 아니구요 사기꾼 아니에요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그럼 당신 손으로 당신 주머니에 손 한 번 넣어 보세요 어머, 그것 보세요 사탕이 남아 있다니 당신에게 애인이 없다는 증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는지 당신은 모를 수 있어요 누구에게나 주머니에 사탕 한 개씩은 들어 있어요 사랑 말이에요 세균처럼 바이러스처럼 그 사탕 나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달콤한 것을 좋아해요 유난히,
망설이지 마세요 그 사탕 내게 주면 당신 주머니에는 또 다른 사탕 생길 거예요 사랑처럼 말이에요 경험해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 맞아요
사탕 대신 꽃은 어때요?
어머, 꽃 피우는 당신 마법사였군요
꽃을 나눠 가진 우리
■ 매일신문
남쪽의 집수리 / 최선
전화로 통화하는 내내
꽃 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
그때 산수유나무에는 기간을 나가는 세입자가 있다.
얼어있던 날씨의 아랫목을 찾아다니는 삼월,
나비와 귀뚜라미를 놓고 망설인다.
봄날의 아랫목은 두 폭의 날개가 있고
가을날의 아랫목은 두 개의 안테나와 청기聽器가 있다
뱀을 방안에 까는 것은 어떠냐고
수리업자는 나뭇가지를 들추고 물어왔지만
갈라진 한여름 꿈은 꾸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오고 가는 말들에 시차가 있다.
그 사이 표준 온도차는 5도쯤 북상해 있다
천둥과 번개 사이의 간극,
스며든 빗물과 곰팡이의 벽화가
문짝을 7도쯤 비틀어지게 한다.
북상하는 꽃소식으로 견적서를 쓰고
문 열려있는 기간으로 송금을 하기로 한다.
꽃들의 시차가 매실 속으로 이를 악물고 든다.
중부지방의 방식으로 남쪽의 집수리를 부탁하고 보니.
내가 들어가 살 집이 아니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면서 계약이 성립된다.
산수유 꽃나무가 화르르
허물어지고 있을 것이다.
■ 무등일보
나의 나침판 / 하미정
풀잎하고 부르면 화살표가 나옵니다 당신이라는 낭떠러지는
나를 늘 그런 곳으로 이끌어 세웁니다
잠시 방위를 빌려보기로 하자 방향에 굴하지 않고
유연하게 나아가는 선택의 길에서 나는 늘 진로를 망설였고
우리의 목표는 정말 높고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후 3시가 목표라면 그 안을 보는 일에
그는 늘 바깥 방향을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한번은 밀어내고 한번은 끌어당긴다
자성 강한 잡념들도 나의 몸이 끌어당긴다
누군가를 밀어내면서 누군가의 어둠을 끌어안는다
어둠의 강한 자성에 내 방은 결국 자력을 잃었고
나는 그의 자기장에서 일 년을 붙어살았다
기울어진 힘점이 있다
나는 하루에 한번 넘어지며 균형을 잃는다
힘점에서 나를 빼냈다 공평함이 사라졌다
힘점에서 기울어진다는 건
누군가를 믿지 못한다는 증거
복잡한 머리를 용서하면
나의 좌표는 간결해 질 수 있다
여행은 마음의 풍경을 향해 가는 것
저녁의 산책이 걸음을 이해 할 때
나침판은 내 가슴에 와 박힌다
■ 한국일보
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
저를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 경향신문
세잔과 용석 / 박지일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도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 부산일보
도서관의 도서관 / 임효빈
한 노인의 죽음은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거라 했다
누군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열람실의 빈 책상이었다 책상은 내가 일어나주길 바랐지만
누군가의 뒤를 따라갔으나 나의 슬픔은 부족했고 무수한 입이었지만 말한마디 못했고 소리 내어 나를 읽을 수도 없었다
대여 목록 신청서에는 첨언이 많아 열람의 눈이 쏟아지고 도서관은 이동하기 위해 흔들렸다
당신은 이미 검은 표지를 넘겨 놓았고
반출은 모퉁이와 모퉁이를 닳게 하여 손이 탄 만큼 하나의 평화가 타오른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몇 페이지씩 뜯겨나가도 도서관 첫 목록 첫 페이지엔 당신의 이름이 꽂혀 있어
책의 완결을 위해 읽을 수 없는 곳을 읽었을 때 나는 걸어가 문을 닫는다
도서관의 책상은 오래된 시계를 풀고 있다
■ 불교신문
폐사지에서 / 이봉주
부처가 떠난 자리는 석탑만 물음표처럼 남아 있다
귀부 등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목탁소리 들리는 듯한데
천 년을, 이 땅에 새벽하늘을 연 것은
당간지주 둥근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읊는 독경 소리였을 것이다
천 년을, 이 땅에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풍경처럼 흔들리다가
느티나무 옹이진 무릎 아래 떨어진 나뭇잎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붓다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설법 하였으니
여기 절집 한 칸 없어도 있는 것이겠다
그는 풀방석 위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으니
불좌대 위에 풀방석 하나 얹어 놓으면 그만이겠다
여기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겠다
옛 집이 나를 부르는 듯
문득 옛 절터가 나를 부르면
천 년 전 노승 발자국 아득한데
부처는 귀에 걸었던 염주 알 같은 생각들을
부도 속 깊게 묻어 놓고 적멸에 드셨는가
발자국이 깊다
■ 강원일보
문자와의 사랑 / 박성민
심심하면 자전거를 타고 소양강 돌다리까지 달렸다
강변에서 먼저 와 있던 문자는 조용히 앉아
막 피어난 안개로 손을 씻고 있었다
나는 물풀처럼 흔들리며
흔르는 물살이 입은 햇살이 부러웠다
강 건너 우동동의 저녁을 향해
문자는 어른처럼 익숙한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게 잠긴 목소리로
처음 '그대'라고 불러 보았다
저녁 강이 비치는 하늘은 깊은 분지를 향해 흘러갔다
나는 역 광장에서 서성이며 미군부대 헬기가 뜨기를 기다렸다
담 밖 꽃 진 나무들이 어떻게 바람소리를 내는지 궁금했지만
서울로 가는 길이어서인지, 기적소리 길레 레일을 벗어날 때
검은 안개 본 적 있니? 미군부대 녹슨 철조망에 기대어
헝클어진 머리 문자는 짓궂게 웃기만 했다.
■ 전북일보
골목의 번식 / 김은숙
발밑을 믿지 마세요 골목의 뒤통수는 백 년이 가도 썩지 않아요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태아도 봉지에 버려진 조약돌,
툭툭 발길에 채여요
어둠이 눈감아줬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람 빠진 축구공쯤으로 여겼을 거예요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봉지 속으로 꼬깃꼬깃 숨겨진 첫울음,
도심에는 한 방향만 암기한 검은 사각형들이 살아요
정육면체 어둠이 검은 시냇물이 되어 흘러요
밤이면 먹물 같은 골목, 징검다리는 없어요
그 안에 더 이상 비밀을 숨기지 못할 때
종착지는 캄캄한 땅속이거나 고래 뱃속이었어요
뭔가를 산란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 지난밤 그 골목은 비좁았어요
집안 어디쯤에서 폐품이 되기 좋은 질긴 산책로를 발견했나요? 창문 밖 골목 저 끝말이에요
봐! 저기! 저것 좀 봐! 소리친 게 당신이었나요?
노을을 뚫는 검은 새떼의 비행은 사실상 누군가 목을 비틀어서 유기遺棄한 비닐봉투였죠
은밀함을 목 졸라 죽일 때는 낯선 저녁 역광 뒤쪽이 최고예요
역광을 믿지 않았던 고래는, 죽은 봉투를 해파리로 읽었어요
그것들은 간혹 뱃속에서 심장을 갉아 먹다 고래의 사인死因이 되기도 하죠
검정을 죽이고 돌아와, 비닐봉투가 피살되었다는 뉴스특보를 보더라도 웃음 짓는 것이 중요해요
한잔의 블랙커피를 삽으로 파고서 떨리는 증거들을 감쪽같이 묻어버리세요
지난밤에는 어둠을 자백하라고 길고양이들이 나를 포위했어요 묻어버린 시간과 폐기한 말들을 뱉어
내라고 난리에요 그렇지만 최후의 단서를 들키지는 않았어요
귀소본능이 없는 것은 발명가가 깨트린 새 소리예요
길게 누운 골목, 졸음의 이마 위로 갓 태어난 개똥을 조심하세요
골목 왼쪽, 삐쩍 마른 나뭇가지 꼭대기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입을 헤- 벌린
깃발처럼 펄럭이는 검은 농담들, 맞아요
어느 아르바이트생이 20원짜리 비닐봉투 도둑으로 몰린 사건 아시죠?
두께도 없고 입구도 없는 혐의는 아메바보다 지루해요
괜찮아요 밀봉된 태아의 캄캄한 몸과 비명도 따지고 보면 고무장갑과 같은 족속
붉어서 아무도 구별 못 해요
매일 밤 태어난 어둠은 막다른 모퉁이에 검은 무덤을 만들고, 아침이면
기지개 켜는 코스모스가 그것들을 화려하게 변호하죠
■ 경남신문
고래 해체사 / 박위훈
만년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가
구룡포 부둣가에 누워있다
바위판화 속 바래어가는 이름이나
호기심으로 부두를 들었다 놓던 칼잡이의 춤사위이거나
잊혀지는 일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
허연 배를 드러낸 저 바다 한 채,
숨구멍이 표적이 되었거나
날짜변경선의 시차를 오독했을지도 모를 일
고래좌에 오르지 못한 고래의 눈이
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다
피 맛 대신 녹으로 연명하던 칼이
주검의 피비린내를 잘게 토막 낼 때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
조문은 한 점 고깃덩이나 원할 뿐
고래의 실직이나 사인(死因)은 외면했다
주검을 주검으로만 해석했기에 버텨온 날들이
상처의 내성처럼 가뭇없다
바다가 고래의 난 자리를 소금기로 채울 동안
고래좌는 내내 환상통을 앓는다
테트라포드의 느린 시간을 낚는다
주검의 공범인 폐그물도 인연이라고
수장된 꿈과 비명 몇 숨 그물에서 떼어내자
반짝, 고래좌에 별 하나 돋는다
바다의 정수리
늙은 고래의 흐린 동공에 맺힌 달,
조등이다
■ 광주일보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 선혜경
그런 걸 뭐하러 세어두고 있겠어,
당신은 꿈에서도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을 모르나 봐요, 창틀을 베고 누운 당신도 닫힌 서랍보다 늦게 눅눅해지는데
궁금해
그런 날의 당신은
그림자 대신 검은 석유를 품고 다녔는지
그런 날의 빗방울에게서
풍경의 심장이 뚝뚝 떨어져 나갈 때
벌려둔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는지
새벽의 혀를 길게 베어 문 촛불처럼
가장 빨리 죽는 건 악몽이라 믿으며
밤새 얼얼하게 녹아내리는 것들은 모두
내일의 미아가 되어 버리기를
품,
이라 발음하면
옅어진 등불에 팔다리가 생겼는지
촛농이 굳어버린 하늘을 정면으로 마주치며
빛에 익사하길 바랐다
상처투성이의 손금을 털어내려고
손바닥을 자꾸만 흔들어도
온통 웅덩이였다
모르는 사람의 초상을 여기저기 그리고 다녔다
■ 광남일보
키,키,키 / 한병인
계단을 오르다가 놓고 온 키를 생각 한다
키는 어딘가의 구멍에 꽂힌 채로 계단 하나 정도의 높이에 매달려 있을 것이고
키는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구멍 하나의 길이로 밖을 가늠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오늘이라는 높이에 매달려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상상한다
새의 감정은 한사코 키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구멍을 물고 있는 저 키의 속성이 새의 부리에서 왔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키와 새의 부리가 키,키, 키, 웃음을 만들어낸다 서로 너무 꽉 맞아 떨어지는 속내를 키는 키 만큼의 길이로 유희하고 전유하는 까닭이다 쪼는 저들의 관성에서 부리는 점 점 더 높은 구멍으로 향하고, 그러나 언제고 다시 풀리는 키와 구멍들, 키를 닮은 수많은 부리들이 구멍을 통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환상에 갇힌다 허공 어디쯤에서 키, 키, 키, 잠시 웃음을 만들어 낼 때에도 웃음이 울음에서 왔다는 소리의 의혹을 키, 키, 키, 웃음으로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키들은 단단한 부리를 부비며 한껏 오므려 보이는 것이다 오늘은 너무 뾰족하게 발음되는 키의 모양새를 제외하면 키, 키, 키, 웃음 몇 개는 여전히 내일에 남겨질 것이고, 키, 키, 키, 더 완벽한 웃음을 위하여 계단을 오를 것이고, 이제는 키, 키, 키, 울음에도 섞이고 키, 키, 키, 조금은 숨죽이다가키, 키, 키, 낮게 흥얼거리다가 키, 키, 키, 울먹이다가 키, 키, 키, 소리 지르다가... 드디어는
키,
키,
키,
더 깊은 구멍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다
첫댓글 수준은 높지만 틈새를 비집는 풋풋한 냄새
그래서 더 재미있고 호기심가는 작품들
덕분에 신춘문예 감상 넘 잘하고 있습니다
꼼꼼하게 보려면
며칠 걸릴것 같네요
저는 다독하는 편이 아니라서 ㅎㅎ
조선일보 바이킹부터 넘 재미있어요
예전의 저를 보는 듯해서
고명재님 저는 글로서 첨 뵙는데
바이킹타는 저의 모습은 언제 봤는지
절묘하게 저를 포착했네요
한가지 빠트린게 있다면
하늘 위에 걸렸을때
제 입이 하늘을 집어 삼킬 듯 벌어지더라나요
그 후론 바이킹은 절대 안 탔는데
요즘은 간을 배 밖으로 내 놔라 해싸서
다시 한 번 타 볼까 싶기도 해요 봄 되면요
우리들 얘기를 대변해주는 시들은 모두 좋은 시거나 잘 쓴 시!
정민 시인도 방학동안 우리 얘기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