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상하는 소년
2002년 중국 여행 때였다. 명승지 ‘장가계’에 여장을 푼 지 사흘째인 그날은 ‘황룡동굴’ 탐방이었다. 가이드가 행상하는 아이들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곳이니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지갑을 열었다 하면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감당이 안 된다는 부연 설명까지 덧붙이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에서 내리니 초등학교 4, 5학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찰싹 달라붙어 뭔가를 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양은 도시락만 한 플라스틱 그릇에는 제 새끼손가락만 한 고동색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입에 물고 새소리를 내는 걸로 보아 피리 종류가 아닌가 싶었다. 앙증맞은 고것 세 개를 내 턱밑으로 들이밀며 “천언! 천언!” 가파르게 외쳐댔다. 세 개에 한국 돈 천원이니 얼른 사시라는 말일 것이다. 주차장에서 동굴 입구까지는 꽤 먼 거리, 가이드 말이 생각나서 모른 척 앞만 보고 걷는데도 아이는 졸래졸래 계속 따라붙었다.
동굴은 모터보트를 타야 하는 곳이 있을 만큼 크고 웅장했다. 두 시간 가까이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밖으로 나오니 7월의 짱짱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얼른 선글라스를 끼고 올 때와는 달리 느긋한 기분으로 즐비한 노점들을 기웃거렸다. 이만 원짜리 수정 목걸이를 단돈 삼천 원에 사들고는 횡재했다는 생각으로 돌아서는데, 어라! 누가 내 옷을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놀라 돌아보니 피리를 팔겠다고 동굴 앞까지 쫓아왔던 바로 그 아이였다.
억세게도 끈질기다는 생각과 함께 연민의 정이 드는 것은 아까 올 때 너무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나 싶어서일 것이다. 녀석을 향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도 코끝에 주름을 만들며 천진스럽게 마주 웃었다. 꿀밤이라도 한 방 먹이고 어깨를 감싸 안아 주고 싶은 것은, 내게도 저만한 손자들이 있어서만이 아닐 것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는 아이의 얼굴 위로 또 다른 소년의 얼굴이 겹치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인 피난수도 부산. 소년의 얼굴은 영양실조인 듯 파리하고 염색한 군복은 줄여 입었는데도 마냥 헐렁했다. 소년은 양담배와 미제 초콜릿 등 양키 물건 몇 가지를 진열한 나무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번화가인 남포동과 광복동의 다방과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행상이었다. 손님들 앞에 상자를 펼쳐들고 말없이 서서 그들의 눈길이 닿기만을 기다렸다. 더러 팔리기도 했지만, 주인에게 멱살을 잡혀 내쫓김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운이 나빠 한미 합동 군수물자 단속반에라도 걸리는 날이면 물건을 몽땅 빼앗기기도 했다.
세월이 쌓여 반백의 모습인 부산의 그 행상소년과 장가계의 어린 피리 장수는 조손(祖孫)처럼 다정하게 걸어갔다. 국적은 다르지만 어엿한 행상 동창인 셈이었다. 선배가 엄지와 검지를 세워 보이며 부모님이 계시냐고 물었다. 멋쩍은 듯 웃기만 하는 걸로 보아 후배가 아는 우리말은 ‘천언’이 전부인 것 같았다.
선배는 망망한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꼬맹이 후배에게 말을 건넸다.
“가난은 부끄러움도 아니고, 죄도 아니란다. 아름답고 우아한 연꽃도 검은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던가, 어릴 적 고생은 복된 삶의 밑거름이 되고도 남는단다, 네가 훗날 한 가정을 이루고 손자를 보게 되거든 오늘의 행상 일을 부끄럽다고 감추지 말거라. 어쩌면 그것은 아무나 얻을 수 없는 귀하디귀한 훈장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혼잣말하는 모습이 의아했던지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부끄럽다며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어린 시절 얘기를 발설케 해준 후배,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녀석의 피리를 몽땅 팔아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얼마나 좋아할까, 먼저 내 가슴이 펄떡펄떡 춤을 췄다.
웬걸, 이런 낭패가 있을까. 텔레파시로 통했는지 꼬맹이들 예닐곱이 줄레줄레 따라붙는 게 아닌가. 버스가 보이는 다리 위로 올라섰을 때 먼저 가 있던 아내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던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러고는 아이들이 움찔할 만큼 크게 호통을 치고 나서 나를 호위하듯 하여 버스에 오르게 했다. 그 와중에서도 아이에게 천 원짜리 두 장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열 명도 넘는 꼬맹이들이 차창 밖에서 안에 있는 나에게만 집중해 고함을 질러댔다. 세 개가 아닌 다섯이나 여섯의 피리를 쳐들고 팔짝팔짝 뛰면서 “천언! 천언!” 다급하게 외쳐대는 게 아닌가.
돈을 그냥 가지라고 했는데도 번개처럼 재빠르게 피리 한줌을 내 손바닥에 놓고 간 후배 아이, 그는 멀찌감치 다리 위에 서서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2002. 여름)
첫댓글
강철수선생님의 글 잘 봤습니다.
저도 1999년 가을에 上海, 蘇州, 杭州, 南京을 4박 5일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땐 중국이 못살 때입니다.
강철수선생님이 말씀하신 예의 ‘천원 행상’이 달라붙습니다.
천원으로 대나무로 만든 작은 ‘등끌기 효자손’을 5개를 받았습니다.
조금 가자니까 똑같은 행상이 팔아 달라고 강권(强勸)합니다.
그래서 먼저 산 물건을 양쪽 손에 들고 우정 활보한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걸 보고 달라붙지 않던 기억이 납니다.
김윤권 선생님,
공감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