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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철수’와 ‘독철수’
임 춘 훈 언론인,
전 <한국방송공사> 미주지사 사장
지난 4일부터 6.4 지방선거에 나서는 시-도 지사와 교육감 후보들의 예비등록이 시작됐습니다. 7일부터는 소치 동계올림픽이 개막됩니다.
소치 올림픽에서는 안현수가, 한국의 지방선거에서는 안철수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름 석 자 중 가운데 한 글자만 틀리는 안씨 가문의 ‘잘 난’ 두 남자가, 공교롭게도 함께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소치 올림픽 한국 팀 최대의 경계대상은 한국의 간판 쇼트트랙 선수였다가 얼마 전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지형을 흔들어 놓을지 모를 6.4 지방선거의 최대 변수로 떠오른 사람이 가칭 새정치신당의 안철수입니다.
안현수 버리고 개고생…한국 빙상
올림픽 3관왕, 세계선수권 5연패의 대기록을 보유한 안현수는 한국 스포츠의 고질적 병폐이며 치부인 한체대(한국체육대학)파와 비(非)한체대파 간의 파벌싸움에 시달리다 몇 년 전 고국을 떠났습니다. 그는 지금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으로 소치 올림픽 러시아 국가대표로 나서고 있습니다.
한국팀은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5개 이상의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지요. 여자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의 이상화, 여자 쇼트트랙의 떠오르는 별 심석희 정도가 비교적 확실한 금메달 감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상화가 다관왕이 될 수 있을지, 남자 쇼트트랙에서 한 두 개의 금이 나올 수 있을지 여부가 목표인 종합10위권 진입의 관건입니다.
한국 팀 최대의 적은 하필이면 안현수입니다. 그는 지난 달 유럽선수권대회에서 4관왕에 오르는 등 요즘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지요. 미국대표 출신 방송해설자인 안톤 오노는“ 기술 경험 능력에서 안현수는 발군의 선수”라며 “이번 소치에서 다관왕에 오를 것”이라고, 한국팀 ‘염장 지르는’ 전망을 내놨습니다. 박세영 이한빈 신다운 등 한국의 젊은 선수들이 과연 ‘안현수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안철수 인기 거품 빠지는 소리
한국의 2014년은 ‘정치의 해’입니다. 2017년의 19대 대선-어쩌면 2022년의 20대 대선까지 이어질지 모를 정치지형과 선거구도가, 올 한해 각종선거에서 판가름 납니다. 6월엔 지방선거, 7월30일엔 상반기 국회의원 재보선, 10월엔 하반기 재보선이 연달아 치러집니다. 한국의 정치가 기대대로 선진 형 새 정치로 환골탈태 할 수 있을 지의 여부는 올해 치러질 각종 선거 결과와 곧 창당될 안철수신당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요즘 안철수의 인기는 여전히 높지만 상승세는 꺾이고 있습니다. 설 연휴기간에 실시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서 안철수신당 지지율은 22.1%를 기록했습니다. 민주당을 여전히 앞서기는 했지만 전 주 대비 무려 5.5%나 지지가 빠졌습니다. 심상찮은 민심 때문인지 요 며칠 새 안철수 진영에서는 그동안 목소리 높여 외쳐 온 민주당과의 ‘야권연대 ’절대불가’ 빗장을 조금씩 푸는 기미가 엿보이고 있습니다. 지지율 하락, 지방선거 여당 승리 때의 책임론, 인물영입난 등이 겹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는 분위기입니다.
당의 지지율이 높으면 사람이 모여야 하는데 안철수신당은 파리를 날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은 거물급 영입인사들의 면면은 참신성은 물론 공유하는 가치나 정체성조차 찾기 어려운 인물이 대부분입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에서 용도 폐기된 올드 네임들이 ‘감히’ 새 정치를 표방하며 안철수 진영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안철수신당은 지향하는 가치가 중도보수인지 중도진보인지 조차 모호한데다, 새정치를 구현할 정강정책이 뭔지, 중장기적 정책 비전이 어떤 것인지, 국민 앞에 내 놓은 콘텐츠가 없습니다.
민주당과의 연대 없이 17개 광역단체장 후보 모두를 내겠다고 큰 소리를 치더니, 당선 가능성이 가물거리자, 슬그머니 정치공학적 연대 카드를 꺼내 들기 시작했습니다. 혁신과 성찰 없는 야권연대로 광역단체장 한 두석이라도 쉽게 건져 보겠다는 ‘안철수답지 않은’ 꼼수가 엿보입니다.
안철수에 다수 국민이 열광한 것은 기성정치인과는 다른 존재방식을 보여줬기 때문인데, 정치입문 2년 만에 그는 ‘간철수’라는 닉네임처럼, 기성 정치인 뺨치는 구시대 정치인의 일탈적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낡은 정치문법을 충실히 따라, 호남에 가서는 호남지역정서를, 영남에 가서는 영남지역정서를 자극하는 데에 사뭇 익숙해졌습니다. 서울시장 박원순에게는 “시장자리를 당신이 양보할 차례”라고 대놓고 욱박질러 ‘독(毒)철수’라는 별명 하나를 더 얻었습니다.
새정치추진위의 윤여준 의장은 “안철수가 상당히 터프해졌다”고 말합니다. “과거엔 잘못하면 깨질 것 같은 연약함과 순수함을 느꼈는데, 한국정치가 사람을 오염시켰는지 굉장히 강인해졌더라. 현실정치를 보는 눈도 많이 달라지고 굉장히 변했다”고 했습니다.
변한 안철수를 바라보는 열성 지지자들은 불편하고 당혹스러워하며, 변화된 그를 무연(憮然)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광역단체장 출마 승부수를
안철수신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호남과 수도권에서 1~2명의 광역단체장을 내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윤장현(광주)과 김효석(전남) 등에 기대를 걸지만, 냉정히 봐서 ‘광역 전패(全敗)’가 정답입 니다. 안철수의 인기는 여전한데 그의 아바타들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당이 살려면 안철수 바람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안철수가 직접 전장(戰場)에 뛰어들어 글자 그대로 일진광풍(一陣狂風)이라도 일으켜야, 꺼져가는 ‘안철수 현상’의 불씨를 다소나마 되살릴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헌데 안철수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서울시장을 양보하라고 박원순을 다그칠 때 “내가 직접 나서겠다”고 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택도 없는’ 이계안 서울시장 카드로 양보를 겁박했으니, 평생 시민운동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박원순이 “딴 데 가서 알아 보슈!”하고 콧방귀를 뀐 겁니다.
서울이 부담스러우면 부산 같은데서 승부를 걸어볼 수도 있습니다. 부산은 무소속 오거돈과 새누리당 후보가 맞붙게 돼 있는데, 안철수가 3파전 승부를 걸고 나서면 승산이 충분합니다. 부산에서 바람을 일으키면 수도권과 호남에서 맞바람이 불 수 있고, 230여개나 되는 전국적 규모의 시장 군수 구청장 등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안풍(安風)이 몰아칠 수 있습니다.
‘간철수’는 이제 ‘독철수’로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울 때가 됐습니다. 안철수의 광역단체장 출사표에 문제와 리스크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대선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에게 광역시의 시장이나 도지사가 썩 어울리는 자리는 아닙니다. 만에 하나 낙선했을 때의 리스크도 물론 고려해야겠지요.
허지만 더 이상 ‘간만 보며’ 야권연대니 후보단일화니 하는 안철수답지 않은 구태의 꼼수정치로 지지자들을 실망시키면, 2017년 대권을 향한 그의 그랜드 플랜 자체가 뒤죽박죽이 될 수 있습니다. 엊그 제 중앙일보에 실린 한 정치부 기자의 칼럼은 끝머리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안철수 신당엔 세 가지가 보이지 않는다. 첫째 사람이 없다. 둘째 감동이 없다. 셋째 그러니 기존과 다름이 없다--. ”
같이 하면 죽고 달리해야 산다. 동즉사(同卽死) 이즉생(異卽生)이라 했습니다.
<2014년 2월 5일>
‘바뀐애’의 슬픔
임 춘 훈 언론인,
전 <한국방송공사> 미주지사 사장
지난 주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경남 거제에서 또 열었습니다. 올해로 두 번째, 지난해 전주미사까지 합치면 세 번째입니다.
시국미사가 열린 거제 고현성당 벽면에는「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 교황 프란치스코」라는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대통령 사퇴요구와 같은 ‘직접적이고 민감한 성격의 정치참여’를 반대하는 신임 염수정 추기경에게, 좌파 신부들이 교황의 이름으로, ‘한 방’ 먹인 꼴입니다.
이날 미사 참석자 중 상당수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와 수녀, 그리고 비신자 시위꾼으로 알려졌습니다. 고현성당 밖에서는 ‘대한민국수호 천주교모임’ 소속 신도들이「종북망언 시국미사 규탄한다」「대한민국과 천주교를 지키자」등의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고, 일부 신도들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 이상원 신부가 강론에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할 때 “사탄은 물러가라”고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대통령 저주 넘치는 인터넷 공간
박근혜 대통령이 7박9일간 인도와 스위스를 국빈방문 하던 지지난 주, 한국의 인터넷과 SNS 공간은 ‘바뀐애-원정녀’ 등 대통령을 조롱하고 저주하는 글들로 넘쳐났습니다. 바뀐애는 진보좌파, 특히 친노무현 성향의 젊은 네티즌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쓰는 박근혜의 별칭입니다. SNS엔 ‘경축! 비행기 추락, 바뀐애 즉사!’ 라는 글이 떴습니다. 귀국 길에 전용기가 추락해 대통령이 죽길 바란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글이었습니다.
원정녀는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을 비하하는 인터넷 속어입니다. 대통령이 스위스에서 세일즈 외교를 펼치고 있을 때 한 좌파 인터넷 사이트에 ‘원정녀 근황’ 이라는 제목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습니다. “세일즈 외교 중이신 댓통령 각하, 나중에 세계 기행문집이나 화보집 하나 내셔도 되겠어요.”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를 성매매 여성의 ‘몸 팔기’에 빗댄 글입니다.【댓통령은 국정원 댓글로 대통령이 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박 대통령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은어】변서은이라는 어린 여자 탤런트는 지난해 철도파업 때 대통령을 ‘언니’라 부르며 “철도를 민간에 팔려면 (차라리) 언니 몸이나 팔라”고 막말 트윗을 날리다 방송에서 퇴출됐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막말조롱의 대상이 된지는 오래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홍어나 펭귄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코알라, 이명박 대통령은 쥐새끼로 희화화 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이 당한 것 같은 혐오스런 막말은 기본이고, 여성성에 대한 성 차별적-폭력적 막말에까지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퇴 안하려면 急死라도?
“경축! 비행기 추락, 바뀐애 즉사!”
임순혜라는 여자가 SNS에 올린 이 ‘악담 트윗’이 화제가 됐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야당추천 자문위원인 임순혜는 이 글 때문에 바뀐애가 탄 공군1호기가 무사히 서울공항에 도착하던 날, 현직에서 잘렸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정부기관의 하나로, 방송프로를 심의하는 자문위원은 명예로운 신분의 공직자입니다. 인터넷에 실린 임순혜의 사진은 손주까지 봤을 나이의 중늙은이였습니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세상 이치를 알고도 남을 지천명(知天命) 나이의 방통위 자문위원이, 현직 대통령의 급사를 바란다는 실명의 트윗을 SNS에 올린 이 ‘담대한’ 지적(知的) 일탈(逸脫)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1년, 국정원 댓글파동의 와중에서도 ‘대통령 사퇴’ 만큼은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일종의 금기어(禁忌語)였습니다. 일부 친노계열 야당의원이 어쩌다 이 말을 입에 담으면 당 대표 등 지도부가 나서 손사래를 치며 “당론 아님”을 애써 변명했고, 발언을 한 의원에겐 ‘주의’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여론의 ‘역풍’을 우려한 야당의 ‘몸 사리기’였지요. 각종 조사에서 대통령의 사퇴에 찬성하는 여론은 10%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금기가 깨진 건 천주교의 좌파신부인 박창신의 강론에서였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은퇴신부인 박은 지난해 11월 전주교구 시국미사에서 “국가기관이 개입된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 대통령은 즉각 물러나라”고 사퇴문제의 공론화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후 정구사의 시국미사는 물론 전국에서 벌어지는 각종 시위에서도 ‘봇물 터지듯’ 대통령 사퇴요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속된 말로 개도 소도 ‘박근혜 아웃’을 외치는 세상이 돼 버린 거지요.
박 대통령이 임기 내에 중도 사퇴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설사 부정당선의 증거가 드러나도 현행 선거법상 현직 대통령을 탄핵 이외의 방법으로 물러나게 강제할 방도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어쩌면 앞으로 남은 임기 4년 내내, 이 문제는 박근혜의 발목을 잡으며 국정을 훼방 놓고,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을 부채질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이를 ‘바뀐애 증후군’ 때문으로 보고 싶습니다.
‘바뀐애 신드롬’의 政治學
“청와대 주인이 문재인이 돼야 하는데 박근혜로 바뀌었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때문이다, 바뀌었으면 원래주인으로 다시 바꿔줘야 한다. 그게 정의다--.” 박근혜의 별명 ‘바뀐애’에는 이런 의미가 포괄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데마고그에 능한 좌파 특유의 절묘한 작명(作名)입니다. 산부인과병원에서 애가 바뀌어 ‘출생의 비밀’이 시작되는 막장 TV 드라마의 설정과 닮았습니다.
국정원 댓글로 당선됐으니 물러나라는 것은 사실은 옹색한 구실이고, 친노 좌파들은 그냥 박근혜가 싫어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옳은지도 모릅니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것도, 극 보수적인 외곬의 통치 스타일도, 항상 50%가 넘는 견고한 지지층을 몰고 다니는 것도, 심지어 여성 대통령이라는 사실도, 그들은 싫습니다. 아무리 물러나라 악을 써도 제 발로 물러날 것 같지 않으니까 전용비행기라도 추락했으면 하는 방통위 ‘할머니 전문위원’의 기원은 그대로 노빠들의 간절한 기도제목이 됐습니다.
지난 주 서울대 사화과학연구원과 한국정당학회가 공동주최한 ‘박근혜정부 1년과 향후 과제’ 세미나에서 강원태 서울대 교수는 주제발표를 통해 “지난 1년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 한 해였다”고 말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정치지도자 아닌 통치자로만 자리매김하는 듯 보였다. 집권당은 소외됐고, 청와대와 내각은 자율성을 찾지 못한 채 지시를 수행하는 도구적 모습이었다”고 그는 지적했습니다.
요즘 박근혜에게 새로 붙여진 별명이 ‘말이 안통하네트’라지요. 백성들과 불통하고 불화하다 쫓겨 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이름을 패러디해 붙인 별명이 ‘말이 안통하네트’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대통령, 제왕적 대통령, 정치를 안 하고 통치만 하는 대통령--. ‘바뀐애 신드롬’의 불편스러운 내면적 본질을 대통령이 심각하게 천착(穿鑿)해 볼 때입니다.
<2014년 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