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 소개
- 잭 웨더포드 ( Jeck Weatherford, 1967~ )
미국 미네소타 주의 매칼래스터(Macalester)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이며, The History of Money, Savages and Civilization, Native Roots, Indian Givers 등을 지었다. 부족민 연구 전문가인 저자는 중국,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비단길과 세계 교역의 역사에서부족민이 차지하는 역할을 연구하던 중,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이 동서 문명 교류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8년 동안 몽골 땅을 답사했고, 베이징의 자금성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궁전에 이르는 길을 다니며 고고학적 발굴 현장과 도서관을 찾아보고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1998년, 서구 학자로는 최초로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을 방문하면서, 그의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800년 동안 방문이 금지되었던 구역에 대한 현지답사를 통해, 그동안 풀지 못한 의문들을 풀 수 있었다. 800년 전의 칭기스 칸을 좀더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몽골 학자들과 함께 계절을 바꾸어 그의 고향을 방문했으며, 칭기스 칸이 유목민 생활을 했음을 감안하여 그의 이동 경로를 추측해‘이동의 고고학’탐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워싱턴 포스트」는 필자의 피와 땀이 담긴 이 책이 호머의『일리아드』에 비견된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2. 시대 배경
작품에 등장하는 시대 배경은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중세시대에 해당 한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 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던 시대이다.
이 시기 유럽은 십자군원정이 이루어지던 때이다. 십자군 원정은 1096년부터 1272년까지 일어났으며 십자군의 발원은 유럽이지만 전쟁의 장소가 중동 지역이므로 책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셀주크트루크가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고 기독교전파로 개인 또는 단체가 성지 순례를 하였는데 회교인의 방해가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로인해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8차에 걸쳐 감행한 대 원정이다.
3. 내용 요약
(1) 서문
테무진이 살았던 환경은 폭력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에게 납치당해서 결혼했고 그의 아버지는 독살 당했다. 그의 가족은 일가에게 버림받았고 그의 형은 동생인 즉, 테무진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내는 어머니의 일가에게 납치당했고 그는 어머니의 일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그의 아내를 되찾았다. 아내의 납치로 인해 그의 장남은 아버지를 알 수 없었으며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그의 평생의 라이벌이었다. 그 자신도 긴 노예 생활을 했으며 납치되었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소년은 강렬한 생존과 자기보존 능력을 보여주었다. 굶주림, 갖은 수모, 납치, 노예 생활이라는 괴로운 환경 속에 소년은 좌절하기 보다는 권력을 향한 긴 계단을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어른이 된 그는 해마다 자기보다 권력이 센 사람들을 물리쳐 결국 몽골 초원지대를 통일하였다. 대부분의 정복자가 전장에서 물러나는 쉰이라는 나이에 그는 고비 사막과 황하를 건너 중국 북부를 점령하고,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과 페르시아 인의 땅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의 고산지대를 넘어 인더스 강까지 진출했다.
전성기 몽골 제국은 연속되는 면적으로 2800만 내지 3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차지했는데 이 넓이는 아프리카 대륙과 비슷하다. 현재 지도에서 칭기즈 칸이 정복한 땅은 약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넘는다. 이 넓은 제국을 점령하는 데 필요한 인력은 전체 인구가 100만이 조금 넘고 징발할 수 있는 병력의 수는 약 10만 정도인 몽골의 유목민들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고 유럽과 중국을 연결했다. 정기적으로 통계조사를 실시했고, 처음으로 국제적인 역전(驛傳)제도를 만들었다. 또 국제법을 만들었고 그가 믿었던 ‘영원한 푸른 하늘’의 법을 만민을 다스리는 궁극적인 최고의 법으로 주장했다. 다른 통치자와는 달리 통치자 자신도 미천한 목자와 똑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정복당한 모든 신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고 대신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다. 또 모든 대사와 사절에게 외교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관행을 수립했다.
칭기즈 칸은 제국을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두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제국은 150년간 더 팽창해 나갔다. 제국이 붕괴한 뒤에도 그의 후손들은 수백 년 동안 러시아, 터키, 인도에서 중국과 페르시아에 이르는 작은 나라부터 큰 제국들을 다스렸다. 칭기즈 칸의 후손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통치자였던 사람은 우즈베키스탄의 아미르인 알림 칸이었다. 그는 1920년 소비에트 혁명의 물결에 밀려 퇴위하였다.
(2) 본문
1) 칭기즈 칸의 전략 전술
칭기즈 칸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것들을 통제하길 원했다. 통제하지 못한다면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친척들의 권력을 박탈했고, 귀족 가문과 모든 경쟁하는 칸을 말살했다. 예전의 부족들을 없앴고 사람들을 재배치했고 후에는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샤먼을 죽이는 것을 허락했다.
① 형을 죽이다.
형 벡테르는 테무진(칭기즈 칸의 어린 시절 이름)과는 배다른 형제였다. 몽골 유목민의 가족생활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보통 엄격한 위계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아버지가 없으면 장남이 가장의 위치를 차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남은 자신의 친모를 제외한 다른 아버지의 아내들의 남편이 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장남의 권리는 가족 내에서는 누구도 의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테무진은 형의 지배를 받는 대신에 그와 어머니가 같은 동생인 카사르와 함께 형을 죽인다. 이 일을 통해 테무진은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관습을 어기고, 어머니에게 도전하고, 설사 가족이라도 자신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은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범죄자가 되었고 사로잡혀 노예생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탈출하였다.
② 초원의 오랜 관행을 깨다.
그의 이름이 초원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초원 생활을 지배해 온 규칙을 완전히 바꾸기 시작한다. 그의 개혁은 소수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지만 대다수의 하급가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우선 약탈에 있어서 더 완전한 승리를 거둔 다음 약탈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을 통해 도망가는 적들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었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약탈을 할 수 있었다. 또 모든 물자를 칭기즈 칸의 통제 아래에서 적당한 방식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또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의 물자를 나누어 주었다. 이를 통해 부족 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고 병사들의 충성심도 확보했다.
그는 과거와 달리 자신에게 패배한 부족들을 자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였다. 칭기즈 칸은 전사들을 아르반(십호十戶)이라고 부르는 10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를 편성하고, 형제처럼 함께 살고 싸우도록 하였다. 이로써 병사들 간의 관계를 넘어서서 그들의 가족까지 서로가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출신 부족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10개의 분대는 자군이라 불리우는 중대가 되었고 10개의 자군은 밍간이라고 불리는 연대가 되었다. 10개의 밍간은 1만의 투멘이라는 사단이 되었다. 새로운 단위의 편성은 낡은 체제의 가문, 씨족, 부족의 정체성을 파괴했고 몽골을 하나의 체제로 통일했다.
③ 칭기즈 칸의 대법령
그의 법은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유목민 부족들의 관습과 전통을 강화했다.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사회의 기능에 방해가 되는 낡은 관행들은 없애버렸다. 일상생활을 통제하는 법이 아닌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측면을 규제했다.
우선 여자를 납치하는 것을 금지했다. 자신의 아내 역시 납치를 당했고, 이 일로 그의 장남의 아버지가 자신인지 아내를 납치한 남자인지 불분명한 개인적 경험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또 부인이 낳았건 첩이 낳았건 모든 남자들은 적자라고 선언했다. 그 외에도 여자를 돈으로 사서 결혼하는 것과 간통을 금지했다.
도둑질은 사형에 처한다. 가축을 훔치는 것은 초원의 습격 문화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것은 질긴 적대와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남이 잃어버린 물건이나 가축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로 취급하였다.
종교로 인한 갈등을 막기 위해서 칭기즈 칸은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전면적이 종교적 자유를 선언했다. 칭기즈 칸은 계속 자신의 고향의 영들을 섬겼지만 이것을 국교로 높이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모든 종교인들에게는 납세와 공적인 의무도 면제해 주었다. 이 면제 제도는 후에 필수적인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가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법 집행과 그것을 지키는 책임은 가장 높은 수준, 칸 자신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식으로 칭기즈 칸은 주권자를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④ 몽골식 전쟁 기술
몽골군은 행군하는 보병 없이 무장한 기병대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또 예비의 말을 제외하고는 따로 병참부나 보급 대열이 없었다. 몽골군은 단백질만 먹었기 때문에 탄수화물을 주식으로 하는 타 문명에 비해 더 강했고 병에도 잘 걸리지 않았다. 말들을 먹일 많은 풀이 필요했기에 몽골군은 철저하게 산개해서 이동했고 명령은 곡조가 있는 노래 형태로 각 진지에 전달되었다. 새로운 명령은 늘 연습하던 노래의 새로운 가사 형태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모든 부대에 전달되었다.
몽골군은 선전 전술에 강했다. 그들의 철저한 파괴와 살육은 각지에 전파되었고 몽골의 적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몽골에게 유리한 정보는 부풀려져서 전 대륙에 전파되었다. 몽골은 그들에게 항복한 자들에게는 인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몽골군이 벌인 적에 대한 학살과 파괴에 대한 소문은 더 파괴력 있게 전파되었다.
물론 몽골군은 가장 파괴적이고 잔인한 부대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있어 고기를 주식으로 하지 않는 중국의 농민들은 가축 떼에 불과했다. 몽골군은 항상 다수의 주변 마을을 파괴하여 피난민들을 만들어 냈다. 또 이동을 할 때 피난민들을 앞세우고 다녔다. 방패나 성문을 공격할 때는 피난민들을 살아있는 공성 무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포로들의 몸은 해자를 채우거나 적이 만든 방어용 구덩이나 구조물을 덮어 길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칭기즈 칸은 탕구트(서하) 원정 때부터 중국인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성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투석기는 돌이나 불이 붙은 액체 등을 성 안으로 던졌다. 투사기는 거대한 화살을 쏘는 기계 장치였다. 몽골군은 이런 무기들을 만드는 기술자들을 높이 대접했고 새로운 전투가 벌어질 때 마다 몽골군의 공성무기들은 더욱 강력해 졌다.
2) 칭기즈 칸이 말하는 칭기즈 칸
칭기즈 칸이 남긴 기록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칭기즈 칸이 중국의 한 도교 승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칭기즈 칸이 스스로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 있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적들이 쓰러진 것을 자신의 우월한 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은 자신이 믿는 신인 ‘영원한 푸른 하늘’의 뜻에 따라 주변의 ‘오만과 지나친 사치’ 때문에 그들을 멸했다고 말했다.
칭기즈 칸의 수 많은 정복전쟁으로 몽골족은 엄청난 부를 손에 넣었지만 칭기즈 칸 자신은 이 편지에서 “ 나는 소 치는 목동이나 말을 모는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소. 우리는 똑같이 희생을 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라고 말했다. 그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하는 삶을 유지했다.
그는 스스로가 통치보다 점령에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행정부에서 유능하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기를 원했고 그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그의 큰 꿈은 “전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해가 뜨는 곳부터 해가 지는 곳 까지 모든 사람과 모든 땅의 통치자가 되기를 원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칭기즈 칸을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신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라고 간결하게 평했다.
3) 칭기즈 칸 이후의 몽골 제국
① 유럽 원정
유럽원정은 2년간 준비했고 5년이 걸렸다. 몽골군 5만과 동맹군 10만으로 구성된 몽골군은 1236년 지금의 불가리아를 향해 출발했다. 몽골군은 먼저 항복을 권했다. 항복의 조건은 몽골에 대한 완전한 충성이었다. 몽골은 그에 대해 적에게서부터 보호해 주고 권력과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허락했다. 속국은 전체 재산과 물자의 10분의 1을 몽골에게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몽골군과 싸운 최초의 유럽인은 러시아인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전투에서 발전된 몽골군의 공성 전략 앞에서 러시아인들의 요새는 손쉽게 무너져 내렸다. 몽골군은 일을 시킬 포로들을 잡았고 나머지는 다음 도시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 전략으로 몽골군이 가기도 전에 다음 도시의 주민 수용력은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몽골군은 곧 1240년에 슬라브의 도시 중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슬라브를 점령하였다. 그것으로 동유럽 점령은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게르만 지역으로 쳐들어갔다. 독일의 헨리크 2세는 3만명의 군사를 모았지만 몽골군에 의해 2만 5000명이 죽었다. 그리고 헝가리를 점령했다. 거의 10만명의 기사와 병사들이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몽골의 유럽 원정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자 두 번째 칸인 우구데이가 죽으면서 막을 내렸다. 1242년 몽골군의 사령관인 바투와 몽케는 칸이 되기 위해 몽골로 되돌아갔다.
②제국의 기틀
우구데이가 죽은 후 10년간의 정권 다툼이 일어났고 승자는 칭기즈 칸의 손자였던 뭉케였다. 뭉케의 목표는 송나라와 중동 아랍 국가들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칭기즈 칸의 유언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뭉케는 우선 10년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한 국력의 손실을 정비하기로 했다.
몽골은 각 나라가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명칭과 무게대로 주화를 주조하게 허락하는 한편 수케에 기초한 보편적 가치체계를 확립했다. 과거에는 세금을 물자로 받았지만 이제는 화폐로 받을 수 있었고 이렇게 되자 제국 정부는 예산 수립 과정을 표준화할 수 있었다. 또 정부가 돈을 통제하는 한 상업이 발달해도 정부의 권력은 줄지 않았다. 경제가 안정화 되자 다시 몽골군은 정복전쟁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③ 아랍 침공을 재개하다.
몽케의 동생인 훌레구에 의해 아랍 침공은 재개 되었다. 과거 칭기즈 칸 시절에는 번개 같은 속도로 진군했지만 이제는 큰 규모의 중국 공병대와 교량 등을 만드는 유럽인으로 구성된 공병대는 물론 다양한 보급품을 가진 캐러밴도 뒤따르게 하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훌레구는 우선 아사신이라고 불리는 이슬람계통의 테러집단을 철저하게 붕괴시킨 후 바그다드를 점령하기 위해 진군했다. 바그다드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로서 ‘도시들의 어머니’라고 불렸다. 500년간 무슬림의 중심지였다. 몽골군은 바그다드안의 기독교인과 유대인들과 은밀한 동맹을 맺었고 몽골군이 가진 뛰어난 공성무기로 바그다드를 공격했다. 또 티그리스 강의 물줄기를 바꾸어 바그다드 군의 진영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1258년 2월 5일 바그다드는 몽골군에게 함락되었다. 또 거대한 도시인 다마스쿠스는 먼저 몽골군에게 항복하면서 역시 몽골의 소유가 되었다. 결국 몽굴군은 지중해까지 그들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몽골군의 아랍 정복은 1260년 이집트의 맘루크들이 몽골군에게 승리할 때 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집트를 경계로 몽골군과 이슬람과의 경계가 생겼다.
④ 쿠빌라이 칸의 새로운 몽골
쿠빌라이 칸은 뭉케의 동생이었다. 형이 사망한 후 제국은 분할되었다. 그의 삼촌인 바투는 킵차크 한국을 만들었고 그의 할아버지뻘인 차카타이의 후예들은 무굴 제국을 만들었다. 또 그의 형인 훌레구는 자신이 점령한 아랍 지역을 일 한국으로 분할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대륙과 몽고를 중심으로 한 원 왕조를 만들었다. 나라는 분할되었지만 몽골군에게 대항할 만한 세력은 아직 존재하지 못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식 수도를 건설하고 중국식 나라 이름은 채택하고, 중국식 왕조를 창건하고, 중국식 행정부를 수립했다. 이러한 정책은 원을 구성하는 대다수의 구성원들인 한족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에서 점령자가 아닌 새로운 왕조의 창시자로 보이길 원했다. 이를 통해 한족들이 그를 받아들이게 하기를 원했다.
또 강력한 법전을 중심으로 민간 행정을 짜나갔다. 새로운 법을 만들고 시행하는 것은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과 나라를 통제하는 것 두 가지 이득이 있었다. 그가 만든 법들은 송나라 체계보다 더 온건한 법이었고 많은 한족들은 만족했다.
원의 시대에서 중국의 문화는 큰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을 찾아왔고 상업은 발달했다.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을 실패하기는 했으나 원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패배를 통해 원의 동쪽 한계는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원은 결국 주변의 대만과 필리핀도 점령하지 못했다. 유목민답게 원은 육전에서는 최강이었으나 해전에서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이 후 쿠빌라이 칸에 의해 100년간 칭기즈 칸의 후예들의 국가들은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업, 기술, 지성이 그 전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었다.
4) 팍스 몽골리카 - 몽골이 세계에 미친 영향
① 주식회사 몽골의 국제 무역 활동
몽골의 강력함은 상업에 있었다. 몽골의 부는 상업을 지원하고 거기에 수수료를 받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몽골 인들은 제국의 각 지역의 부에서 자신의 부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에 있었지만 페르시아와 이라크에도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낙타, 말, 양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육지를 벗어나 해로로도 진출했다. 몽골의 해상들은 베트남, 자바, 실론, 인도의 항구에 들렸다. 그들의 진출은 아라비아, 이집트, 소말리아까지 이르렀다. 중국의 상품들이 유럽까지 전달되었고 아라비아의 물품들은 중국까지 전달되었다. 우수한 문명이 전 세계에 전달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정부 관리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계층이었고 이전 중국 대륙에서 가장 높은 계층이었던 유교학자들의 위치는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위치였다.
② 농업과 의학
몽골은 농민들에게 자기 땅의 기후, 토양, 배수 방식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심으라고 장려했다. 이를 통해 각 지역의 특산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또 차나 쌀 같은 중국의 전통적인 작물을 새로운 지역에 전파하는 일도 권장했다. 페르시아 지방을 점령한 몽골은 그 지방의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새로운 작물들이 각 지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 많은 변화들이 뒤 따랐다. 새로운 도구와 기술들이 도입되었다.
의학 역시 몽골 인을 통해 발전했다. 동양의 의학과 무슬림의 의학적 지식이 서로 공유되었다. 몽골은 타브리즈 근처에 치료소를 설립했는데 이곳은 병원, 연구소, 훈련시설을 겸한 곳으로 동서양의 의학지식을 모두 활용했다.
③ 역법, 수학, 역사, 인쇄술의 발달
몽골의 제국은 넓었다. 그 결과 서로의 역법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몽골인은 행성과 별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측정할 관측소들을 각지에 세우게 되었다. 이를 통해 넓은 제국의 역법을 하나로 묶기 시작했다. 발달한 이슬람의 역법이 중국에 전달되었다.
몽골 제국의 정기적인 통계조사를 시행했다. 이번 문명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였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숫자를 다룰 필요를 느꼈고 필요한 계산을 빠르고 능률적으로 하기 위해 몽골 정부 직원들은 주판을 사용하였다. 또 아라비아 숫자를 전 세계에 전파했다.
기록된 역사는 단지 정보를 기록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 왕조를 정당화하고 그들의 위대한 정복과 업적을 선전하는 수단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1260년대에 국사원을 만들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 제국의 역사가 아닌 전 제국 전체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 기획은 무려 80년이 지난 1340년대가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정보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새로운 보급 방법도 필요하게 되었다. 활자를 통해 인쇄를 시작했다. 중국인들과는 달리 몽골인은 알파벳을 사용하게 되었고 과거 중국의 텍스트 전체를 새기는 방법이 아닌 이미 새겨진 활자를 배열함으로서 인쇄를 했다. 인쇄술을 발달은 교육의 발달을 불러왔고 여러 간행물들이 여러 나라의 언어로 발행되게 되었다.
④ 잠든 유럽을 깨우다.
최초의 몽골은 서양인들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몽골 인을 야만족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편견에 가득 찬 혐오감을 나타냈다. 100여년이 지난 후 몽골은 유럽으로 들어오는 호화로운 교역물자와 진귀한 사치품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몽골이 만들어낸 기술 혁명의 결과들이 유럽으로 도입되었다. 용광로가 개선되었고 방앗간에 풍차가 도입되었다. 새로운 농작물들이 유럽인들의 식탁에 올랐고 새로운 연장과 기계, 장치가 전파되었다. 또 종이가 전달되었다. 종이와 인쇄술이 동시에 전파되면서 결국 1455년 구텐베르크에 의한 정보 혁명의 기초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몽골제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가 전 유럽에서 읽혀지면서 유럽인들은 더 크고 발전한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후에 대항해 시대로 연결되게 된다. 중국의 발명품인 종이와 인쇄술, 화약과 화기, 나침반등이 유럽에 전달되었고 이의 영향으로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 문자 그대로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그리스-로마 문명이 아닌 몽골 제국이었다.
자료정리 : 정승원 (영리더스아카데미 3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