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구할 인재가 태어났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릴 적 이원익을 두고도 구전(口傳)이 있습니다. 세 살 때 젖을 조르다 어머니의 귀밑머리를 잡아당겼는데 어머니가 아파하자 중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백약(百藥)이 무효하자 지나던 노인이 말했다지요. “탈 없이 장성하면 큰 인물이 돼 사십년 정승을 할 터인데 안타깝구려.” 그러면서 노인은 산삼(山蔘)씨 만이 아이를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때 집에 산삼씨가 있었습니다.
이원익은 17살 때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됐고 1년 뒤 결혼했는데 신부는 고려 때의 명신(名臣)인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7세손인 정추(鄭樞)의 딸이었습니다. 이후 생원 신분인 이원익은 성균관에 입학해 당시 정승이던 이준경과 사제의 관계를 맺는데 이준경의 저서 ‘동고유고’에 제자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정탁-이덕형-이항복-유영경-최흥원-심희수-정언신 등인데 모두 정승의 반열에 오르지요. 그 명단의 첫째가 이원익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준경에 대해 알아보고 가기로 합니다.
이준경의 스승은 명재상 황희였습니다. 그러니 명재상의 도통(道統)이 황희→이준경→이원익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이준경은 이원익을 특히 아꼈는데 공부를 하다 제자 원익이 쓰러지자 선조에게 간청해 궁중에서 쓰려던 산삼을 내리게 했지요. 선조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재길래”하는 궁금증에 이원익을 보곤 실망을 금치 못하고 “산삼만 낭비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원익은 키가 하도 작아 훗날 ‘꼬마 정승’으로 불렸을 정도입니다.
- 오리 이원익은 키가 작아 '꼬마정승'으로 불렸지만 3대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자네들이 모두 이 사람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야. 이 사람은 장차 이 나라가 어지러워질 때 정승이 되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할 것이야!”
강서의 ‘예언’은 적중합니다. 임진왜란을 맞아 그의 중국어 실력이 빛을 발하는 거지요. 그것은 훗날의 일이고, 이준경에 이어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아본 이는 율곡 이이(李珥)였습니다. 이원익이 황해도사, 즉 지금의 황해도 부지사 시절 황해감사가 율곡이었습니다. 그는 이원익에게 웬만한 일을 다 맡겼지요.
이때 이원익이 가장 신경 쓴 일이 군적(軍籍)정리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군적이 개판이었습니다. 군적이 정확해야 병사를 뽑을 텐데 죽은 사람이 올라 있는가 하면 멀쩡한 젊은이는 명단에 없는 등 엉망진창이었지요. 이원익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미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율곡은 이때 이원익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한양으로 돌아와 “이원익이란 젊은이가 참으로 쓸만하다”고 칭찬하고 다녔으며 홍문록(弘文錄)에 그의 이름을 등재합니다. 이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홍문록에 기록돼야 ‘청요직(淸要職)’, 즉 중요한 보직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써도 장수(長壽)였고 지금도 장수한 축에 속하는 이원익의 87세 삶을 일일이 정리하기는 어려워 이제 그가 국난(國難)의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 충현박물관 입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선조를 모시던 신하 중에 진관제가 붕괴했으며 국방개혁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세 명 있었습니다. 바로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과 오리 이원익이었습니다. 앞서 서애 유성룡 편에서 말했듯 원래 조선은 진관제(鎭關制)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진관제는 외침이 있으면 해당 지방의 병력을 모아 싸우며 시간을 끌다가 중앙에서 지원군이 오면 함께 힘을 합쳐 일대 반격을 펼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사이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변해있었지요.
제승방략은 외침이 있을 때 중앙에서 유능한 장수가 여러 고을에서 모은 병력을 이끌고 내려와 결전(決戰)을 벌이는 것으로, 이른바 합체(合體)로보식 전술인데 어중이떠중이 병력이 모일 경우 국가의 근본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약점이 있지요.
주지하다시피 임진왜란 초 조선은 왜군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지요. 다행스럽게 선조는 천운(天運)이라 할 인사(人事)발령을 내는데 이원익을 평안도 도순찰사로 보낸 것입니다. 선조는 이원익이 일찍이 안주(安州)목사를 할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주민의 신망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원익은 선조보다 먼저 한양을 떠나 선조가 평양에 다다를 때쯤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럼에도 선조는 평양 방어를 두고 혼선을 빚었지요.
내심 압록강 건너 명나라 땅으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인선을 못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양에 머물던 관료 중 최고위급은 윤두수였습니다. 좌의정이었는데 그에 버금가는 인사가 전직 좌의정 유성룡, 군사책임자로는 도순찰사 이원익, 도원수 김명원, 순검사 한응인, 경기감사 권징, 평안감사 송언신이 있었는데 누가 최종 명령권자인지가 모호했던 것입니다. 이때 이원익은 스스로 군복차림을 하고 김명원에게 군례(軍禮)를 올립니다.
스스로 하위를 자처함으로써 지휘책임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 이는 앞서 임진강 전투에서 한응인이 김명원의 지휘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혼선을 빚어 패배한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평양을 빼앗기자 민심을 다독이는 자세를 보입니다. 나중에 이원익은 조선 8도 중 평안도를 보전하는데 공을 세웁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유성룡과 이원익은 다른 태도를 보이는데 훗날 사람들이 내린 평가가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고 했다.” 과연 서애와 우리 중 누가 더 현명한 처사를 했는지는 독자 여러분이 판단해 보시지요. 이런 그를 유성룡도 인정했습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신이 들으니 원익은 방패를 베고 누워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우고 병제(兵制)가 오랫동안 폐해진 것을 한탄하여 바로잡아 세울 것을 생각하며 제대로 상벌(賞罰)을 시행하므로 한 달 사이에 성과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