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616호]
버리긴 아깝고
박철
일면식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 시집 『작은 산』 (실천문학사, 2013)
*
기록적인 폭염입니다. 이렇게 뜨거운데 누가 시편지를 읽기나 하겠나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도 혹 누군가 있어 읽어주지 않을까 희망하면서
기왕에 써온 거 이제 와서 버리긴 아깝고, 해서 또 시편지를 띄우는 아침입니다.
박철 시인의 시, 「버리긴 아깝고」.
우리집에도 실은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몇 권이 책꽂이에 몇 년째 꽃혀 있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다섯 권의 시집을 냈는데, 처음 몇 번은 저도 그랬습니다.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그런 시집이 몇 권 있거든요.
그 시집 어쩌지 못하고 꽂아둔 그 시집들 저도 박철 시인처럼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가져다 주어야겠습니다.
혹시 모르지요. 아귀찜 꽁으로 한번 얻어먹게 될지 말입니다.
그런 일도 있습니다.
시집 냈다고 사무실 직원들에게 서명을 해서 선물로 주었는데, 한 직원이 라면 받침으로 쓰다가 저랑 눈이 마주쳐서는 머쓱해하던 일, 한 직원이 퇴사를 하면서 자기 짐 다 챙겨갔는데 쓰레기통에 제 시집이 덩그러니 버려져 있던 일....
그런데 말입니다. 삼십 년 시를 쓰다보니 말입니다. 이렇게까지 시를 써야 하나 싶을 때도 없는 건 아니지만, 아귀찜 나눠주는 식당 여주인 같은 독자들이 오히려 더 많더라는 겁니다.
시를 쓰진 않지만 시처럼 살고 있는, 아니 시를 살고 있는 그분들에게서 한 편, 한 편 시를 건져올리는 일이 여간 즐겁지 않더란 말이지요.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폭염에 지치지 말고, 사람에 지치지 말고, 같은 처지 서로 위로해가며 이 풍진 세상 그럭저럭 건너가 보자는 얘기입니다.^^
2018. 8. 6.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
첫댓글 가끔 알라딘중고서점에 가면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시집인데
사인까지 정성껏 되어있는데
떡하니 판매대에 꽂힌 걸 보고 깜놀했었습니다.
버리긴 아깝고 처넌이라도 받자는 심뽀겠지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