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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史 원문보기 글쓴이: Death-Ripple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의 제휴
-피핀의 쿠데타를 중심으로-
이경구
Ⅰ. 머리말
751년에 피핀(PippinⅢ, 751-768)은 쿠데타를 단행하여 메로빙가 최후의 왕 힐데리히(ChilderichⅢ)를 왕위에서 축출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이로써 메로빙가를 대신하여 피핀의 가문인 카롤링 가문이 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즉 피핀은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 왕조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피핀이 이 새로운 왕조를 창설하는 데에는 교황이 결정적으로 기여를 하였다. 쿠데타를 단행하기에 앞서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 741-752)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교황은 이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로 인하여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이 긴밀하게 제휴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피핀은 왜 교황의 지원을 요청하였을까? 그리고 정의의 사도인 교황이 피핀의 쿠데타를 지원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에 교황과 피핀이 처해 있었던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하여 그 실질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피핀의 쿠데타를 계기로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간에 제휴가 이루어진 이 사건은 유럽의 향후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이 사건과 직접 관련된 사료가 적다는 이유 때문에 종래 사가들로부터 덜 주목을 받아왔다. 대부분의 사가들은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알프스를 넘어 피핀의 궁전에 찾아가 그로부터 로마교회를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내고 피핀을 프랑크 왕으로 도유한 754년의 사건을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간 제휴의 본격적 시작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스테파누스와 피핀의 상봉은 그 이전에 자카리아스와 피핀간 제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비록 이 사건과 직접 관련된 사료는 적지만 8세기 이탈리아 지역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최고의 사료로 인정되고 있는 교황전기(Liber Pontificalis)1)의 전후 내용을 근거로 하여 이 사건의 중요성을 밝혀보려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크 왕의 지위는 어떻게 변하였고, 로마교회의 위상은 어떻게 달라졌으며, 로마교회와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가? 먼저 교황이 피핀의 쿠데타를 지원한 이유를 알아본 다음 이상의 문제와 결부하여 로마교회와 프랑크 왕국간 제휴가 지니는 의미에 관해서도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피핀의 쿠데타 지원 요청
750년에 피핀은 그의 두 사절을 교황에게 보내어 자신의 쿠데타 계획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교황의 견해를 떠보았다.
(피핀은) 주교인 부르하드트(Burchard of Wurzburg)와 사제이면서 그의 궁정목사인 풀라트(Fulrad)를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파견하여, 왕의 칭호를 지니고는 있지만 실질적인 왕의 권위가 없이 프랑크인들을 지배하는 왕에 관하여 교황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교황은 이 사절들에게 실질적으로 권력을 지닌 사람이 왕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좋겠다고 대답하였다2)
피핀의 사절들과 자카리아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머지 내용들을 확인할 길이 없다. 비록 단편적이지만 남아있는 이 기록을 통해서도 우리는 많은 것들을 짐작할 수 있다.
피핀이 가장 신임하는 두 사절을 교황에게 보내서 물어본 것은 한 마디로 유명무실한 메로빙가의 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해도 되겠느냐는 것이다. 즉 자신의 쿠데타 계획을 교황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교황은 이 계획을 찬성한다고 답하였다.
그러면 피핀은 왜 쿠데타 계획에 대해 굳이 교황의 지원을 요청하였을까? 쿠데타를 계획하던 당시 피핀은 궁재로서 프랑크 왕국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 피핀이 쿠데타를 단행하기 이전에 이미 1세기 이상 동안 메로빙가의 왕들은 이름뿐인 왕들에 불과했다. 481년에 메로빙가의 클로비스가 프랑크인들을 통합하여 최초로 왕국을 세웠지만, 그의 사후에 메로빙가의 왕권을 날로 쇠퇴하였다. 왜냐하면 프랑크인들의 전통적인 분할상속제 전통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왕토가 분할되어, 영토문제를 놓고 후계자들간에 골육상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8세기 전반기에 메로빙 왕들은 그야말로 명목상의 왕에 불과하였고 실권은 궁재의 수중에 있었다.
피핀은 당시 궁재로서 왕국내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힘으로 왕을 축출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교황의 지원을 요청하였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2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형인 카를로만(Carloman)과의 마찰 문제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샤를마뉴의 전기작가인 아인하르트(Einhard)의 증언을 통해서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카롤링 왕조의 창설 배경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아인하르트는 칼 마르텔(Karl Martel) 사후에 피핀은 그의 형과 아주 공평하게 궁재직을 나누어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명상의 생활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카를로만은 왕국을 다스리는 세속의 짐을 떨쳐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로마로 떠나가 수사가 되었다고 아인하르트는 보고하고 있다.3) 교황전기의 자카리아스 편에도 카를로만은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교황에게 와서 수사가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4)
747년에 카를로만이 수사가 된 것은 사실이다. 이 해에 그는 프랑크 왕국을 떠나 로마로 가서 몬테 소락테(Monte Soracte) 산언덕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사로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아인하르트나 자카리아스 전기작가의 표현대로 정말 종교적인 생활을 열망하여 수도원에 들어간 것일까? 당시 프랑크 왕국 최고의 직책인 궁재직을 지니고 있던 자가 갑자기 영예를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표현은 어딘지 석연치가 않은 점이 있다.5) 그리고 외아들을 홀로 프랑크 지역에 그대로 둔 채로 떠났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궁재로 있을 때부터 왕의 전용 칭호를 사용할 정도로 야심적이고 권력욕이 매우 강한 피핀과의 관계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였다는 점이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6)
디네슬리(Margaret Deanesly)는 아인하르트의 표현을 수용하여, 747년 8월경에 두 형제는 연합통치를 끝내고 카를로만은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수사가 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교황 자카리아스에게로 가서 머리를 깎고 수사가 되었다고 설명하였다.7) Noble도 카를로만이 수사가 된 동기는 실제로 종교적이었던 것 같다고 보았다.8)
그러나 747년에 카를로만이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아마도 형제간의 권력투쟁에서 패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가정하에 아인하르트의 보고를 대입해보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아인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카를로만은 그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합류하려고 온 많은 형제들과 거기(몬테 소락테)에서 몇 년 동안 갈망해오던 평화를 누렸다."9) 그러나 "프랑크로부터 많은 귀족들이 관례대로 그들의 서약을 이행하기 위하여 자꾸 그곳을 방문하였다. 그 귀족들은 그들의 전 주인을 편안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귀족들은 진정한 존경심 때문이었겠지만 카를로만은 평온함을 누리는데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거처를 바꾸었다. 그는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 있는 성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경건한 생활로 여생을 보냈다."10)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어떨까? 카를로만이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로마로 떠나와 교황의 도움으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를 추종하던 프랑크의 귀족들이 방문하였다. 반대파 세력을 규합하여 도전해 올 것을 염려한 피핀은 그를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겨 다른 세력과의 관계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당시 수도원은 흔히 반란자나 반대파 세력을 감금하는 장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칼 마르텔 사후 프랑크 국내에서 전개된 정치투쟁을 보면 이러한 해석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다. 역사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형제간의 권력 투쟁은 비근한 양상이지만 특히 프랑크 역사에서 더욱 극심하였다. 물론 741년 부친이 사망한 후 두 형제는 궁재로서 아퀴테인, 바바리아, 작센 등 각지에서 그들의 권위에 대항해오는 세력들을 퇴치하는 데 협력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복 동생인 그리포(Grifo)를 타도하는 데에도 협력하였다. 두 형제는 그리포를 체포하여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사촌 형제인 테우도알트(Theudoald)도 희생되었다. 부친으로부터 노이스트리아(Neustria)의 궁재직을 계승하였던 테우도알트는 칼 마르텔에게서 이미 궁재직을 박탈당하였었다. 정통의 궁재 혈통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두 사촌 형제로부터 741년에 마침내 살해당하였다.11)
카를로만이 747년에 수도원에 들어간 이후, 특히 피핀이 쿠데타를 단행하여 왕이 되고 난 후 그의 행동을 보면 카를로만이 권력투쟁의 패배자라는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카를로만이 로마로 떠나간 그 해인 747년에 수도원에 감금되어 있었던 이복 형제인 그리포가 감금된 수도원으로부터 탈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다음 해인 748년에 피핀은 카를로만의 아들 드로고(Drogo)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궁재직을 박탈하였다.12) 이에 불만을 품어오던 드로고는 피핀이 왕으로 즉위하자 곧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753년까지 지속되었으나, 마침내 드로고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머리카락이 잘려 수도원에 보내졌다. 754년에는 카를로만이 몬테 카시노에 있는 수도원을 떠나 프랑크로 와서 피핀에 반대하는 귀족들과 결속하여 피핀에게 대항하였다.13) 그러나 카를로만도 역시 피핀에게 패배하여 프랑크 지역에 있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카를로만을 따라왔던 동료 수사들도 모두 감금되었다.14) 이렇게 볼 때, 카를로만은 피핀과의 형제간 권력투쟁에서 희생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카를로만의 아들을 포함하여 카를로만의 가문은 비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이 피핀이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한 첫째 이유였다. 카를로만과의 관계에서 그는 동생으로서 왕위에 즉위하는데 핸디캡이 있었을 뿐 아니라, 비록 카를로만이 수도원에 억류상태에 있기는 하였지만, 국내에서 그를 지지하던 귀족세력이 피핀에게 부담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물리적인 힘만으로 왕위를 찬탈할 경우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날 소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피핀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그가 왕위를 차지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으며, 동시에 확실한 지지세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피핀은 교황을 적임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카를로만과의 마찰문제와 더불어 피핀이 쿠데타를 단행하는 데 또 다른 하나의 걸림돌은 프랑크 왕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전통이었다. 메로빙가의 왕들은 장발(長髮)을 하고 있었다. 사실 장발은 클로비스를 계승하는 종족의 혈통권을 상징하고 있지만, 그 장발 속에는 초자연적인 신비한 힘이 깃들여 있다는 전통이 전해 내려왔다. 누구든 장발의 왕을 폐한다면 신의 징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힘으로 왕을 폐한다면 심각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핀은 교황에게 관심을 돌렸다. 성스런 사도의 권위만이 메로빙 가문의 혈통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15)
당시 프랑크 사회에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특히 앵글로-색슨 선교사인 보니파키우스(St Bonifacius)의 활약으로 새로운 교회의 설립, 새로운 교구의 창설과 같은 교회의 조직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각지에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고 있었다.16) 이 과정에서 베드로의 계승자에 대한 프랑크인들의 존경심도 커지고 있었다. 피핀은 메로빙의 신비한 전통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교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피핀이 교황의 지원을 요청한 두 번째 이유였다.
카를로만을 지지하는 세력을 무마하고 신비한 전통을 극복해야하는 이중의 부담을 안고 있는 피핀에게 교황은 두 가지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줄 수 있었다. 피핀이 측근의 사절을 교황에게 파견하여 교황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당시 이렇게 피핀이 처한 입장 때문이었다. 피핀은 교황의 원조를 얻음으로써 그가 직면한 난관을 타개하고 왕이 되려는 그의 목적을 순조롭게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Ⅲ. 교황의 쿠데타 지원 이유
피핀이 성직자들을 파견하여 교황의 조언을 구하였을 때, 교황은 긍정적으로 답변하였다.17) 그렇다면 교황이 피핀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교황이 로마에서 처해 있었던 상황과 입장을 살펴보면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있다.
우선 교황은 8세기 중엽 당시에 롬바르드인들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이 위협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롬바르드인들은 호전적인 리우트프란트(Liutprant, 712-744) 왕이 지배하던 8세기 전반기에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였다. 그는 728년에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싸워 라벤나시를 차지하였고, 739년에는 스폴레토 공국을, 740년에는 로마공국 주변의 4개 도시를, 741년에는 베네벤토 공국을 각각 점령하였다. 이로써 리우트프란트가 사망할 당시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로마공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 지역이 이미 롬바르드의 수중에 들어갔다. 749년에 왕이 된 아이스툴프(Aistulf, 749-756)는 그의 전임왕인 라트키스(Ratchis)가 통치할 때 일시적으로 내주었던 라벤나시를 다시 점령하고 그 주변지역을 정복한 후 로마공국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그는 반도 전체를 확실하게 지배하고 싶었던 것이다. 로마시에 거주하면서 로마시를 중심으로 기독교 세계에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던 교황은 직접적인 위기 의식을 느꼈다.
물론 롬바르드인들이 로마시를 정복한다고 할지라도 교황을 폐하고 로마를 파괴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통의 로마 카톨릭을 신봉하는 기독교도들로서 교황을 베드로의 계승자로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Ⅱ, 715-731)가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LeoⅢ, 717-741)와 이탈리아 과세문제를 놓고 충돌하였을 때에도,18) 그리고 성상파괴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을 때에도, 롬바르드인들은 성상파괴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19) 그러므로 그들이 로마를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교황을 폐위하거나 교황의 종교적 기능을 박탈할 까닭은 없었다.
교황이 염려하였던 것은 로마시가 롬바르드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갈 경우에 자신의 신변에 닥칠 사적인 위험 때문이 아니라 좀더 높은 차원의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교황은 기독교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교회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교황은 로마를 중심으로 서방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세속적 지배자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교황은 기독교 세계의 종교적 수뇌로서의 역할은 물론 서방 기독교 세계의 정치적 수뇌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종교적인 최고 지배자가 되려고 했던 계획은 이미 고대 로마시대부터 추진되었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해서 그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초대교회에서 처음에 로마교황은 로마제국내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주교들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는 로마주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일련의 뛰어난 교부들의 이론을 통해서 차츰 로마교회의 우월성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 대표적 이론이 교황의 베드로 계승이론(Petrine Theory)이다.20) 교황의 관할하에 있는 로마교회는 사도중의 사도인 베드로가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것이다. 로마주교는 초대주교인 베드로로부터 그 권위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의 여타 주교들보다 우월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계승이론을 통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로마주교는 다른 지역에 있는 주교보다 종교적인 우월권을 누리게 되었다.21)
그 뿐만 아니라 8세기 중엽에 교황들은 세속적인 측면에서 정치적 지배권에도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의 세속권에 대한 욕구는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게르만족에게 로마시가 함락되고 서로마제국이 몰락하면서 고대 로마의 정치적 조직은 무너지고, 경제는 침체하였으며, 문화가 파괴되었다. 고대의 제도가 와해되는 과정에서 로마인들은 정신적 불안감에 휩싸여있었다. 혼란의 늪에 빠져있는 라틴인들에게 구세주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교황이었다.
교황은 혼란에 처한 인민들에게 정신적 지주로서 뿐만 아니라 로마가 게르만인들에게 약탈당하고 파괴되는 것을 막아내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8세기에 이르러 비잔티움의 세력은 이탈리아에서 라벤나 태수관구 일부에 잔존하였을 뿐이고 비잔티움의 권위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으로 축소되었다. 로마를 다스리는 행정적 역할을 교황이 담당하였다. 교황은 지역의 관리를 임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공업무를 시찰하고 행정과 사법업무를 감독하였으며, 가난한 자와 약자를 돌보기도 하였다. 교회의 재원을 이용하여 로마시의 수도관을 보수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관리와 군인의 봉급을 지불하였다.22) 이미 8세기초부터 로마공국을 지키기 위한 외교적 협상은 물론 군사적 지도자 역할도 교황이 담당하였다. 롬바르드인들이 로마로 침략을 기도할 때, 그들과 맞서 정치적 협상을 담당한 장본인은 바로 교황이었다. 롬바르드인들의 침략에 임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로마공국을 수호하기 위해 로마군대의 군사작전을 지휘하였으며,23) 그레고리우스 3세(GregoriusⅢ, 731-742)도 롬바르드 공들이 공격해 올 때 로마군대의 지휘자로서 행동하였다.24) 자카리아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리우트프란트 왕을 직접 찾아가 교황의 권위로 왕과 20년간의 평화협상을 체결하기도 하였다.25) 리우트프란트를 계승하여 라트키스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자카리아스는 사절을 보내 그 왕에게 20년간의 평화조약을 확인하였다.26)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명목상의 주인은 비잔티움 군주였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교황이었다.
그러나 야심적이고 호전적인 아이스툴프가 롬바르드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돌변하였다. 그는 제국을 대신하여 이탈리아를 지배하려고 계획하였으며, 로마는 위기상황에 처하였다. 만일에 로마시를 롬바르드인들에게 내준다면, 이렇게 로마시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의 실질적인 주인의 역할을 담당해오던 교황의 지위는 약화되고 행동범위가 축소될 것은 당연하였다. 정치적 야심을 지니고 있는 아이스툴프의 지배하에서 교황은 롬바르드 왕의 밑에 있는 그야말로 롬바르드의 주교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교황청에서 조용히 그러나 정교하게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 오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즉 종교적인 최고 지배권과 정치적 지배권을 동시에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황은 롬바르드인들의 로마시 장악을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롬바르드의 위협에 직면하여 교황은 일단 비잔티움 황제에게 군사적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 호소는 실천에 옮겨질 수 없는 비현실적 호소였다. 레오 3세의 치세기간에 해당되는 8세기 전반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역사상 가장 중대한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내부적으로는 세력을 결집하여 황제의 권한에 도전해오는 귀족들에게 대항해야 했으며, 외부적으로는 동쪽에서 수도로 압박해 오는 아랍인들의 위협에 대응해야만 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 때에는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불가리아인들과도 육상과 해상에서 수 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러야 했다.27) 적대적 관계에 있는 아랍인들, 불가리아인들과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비잔티움 황제가 이탈리아로 군사적 원정을 감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황은 급박한 위협에 직면하여 비잔티움 황제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비잔티움의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지만, 막상 황제가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어느 면에서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를 롬바르드 왕보다 더 위험한 상대로 보고 있었다. 만일에 비잔티움 황제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세속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비잔티움 황제는 자신이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할 권리를 주장해 왔으며, 롬바르드 왕과는 달리 황제의 이러한 권리주장은 역사적 정당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제국의 서반부가 게르만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당시대인들은 그것을 제국으로 몰락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신국이 도래할 때까지 지속될 '영원한 제국'은 여전히 비잔티움 황제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고대 로마제국의 유산을 정통으로 계승하는 비잔티움 황제가 고대 로마제국의 중심지인 이탈리아의 로마를 지배할 권한을 지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입장은 레오 3세가 로마교회를 포함하여 전 이탈리아인들에게 과세강령과 성상숭배 금지령을 선언한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28)
그 동안 세속적인 측면에서 황제는 교황을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이탈리아 속주의 총독쯤으로 간주하였다. 교황은 황제 즉위년을 그대로 사용하고 황제의 지시를 받아 이탈리아의 문제를 처리하는 절차를 취함으로써 형식상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론과 달리 현실은 크게 변하였다. 749년에 아이스툴프가 라벤나시를 점령하고 비잔티움의 태수를 축출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에서 비잔티움 세력은 시칠리아 섬과 반도 남부의 칼라브리아(Calabria)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그 동안에는 황제의 대리자인 태수를 통해서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이제 현실적으로 그 근거마저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시대착오적이었다. 교황은 스스로 생존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 교황은 언제라도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동안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법률적 구조 내에 있었다. 교회가 제국의 통합된 일부를 이루고 있는 한 제국 정부에 효율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29) 비잔티움 황제의 지배하에 머물러 있는 한 교황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주인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적 권위마저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없었다. 황제는 자신이 기독교계의 최고 수뇌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황제가 종교적 최고권을 주장하는 것도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세속적 지배권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근거가 있다. 교황제도는 이미 존재하는 로마제국의 조직 속에서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적으로 인정받기 이전에 이교 로마에서 황제는 최고의 제사장이었다. 기독교의 공인과 더불어 로마황제는 세속적인 최고의 지위를 지니면서 동시에 기독교 교회의 최고 수뇌로 부상하였다. 소위 왕-사제(rex et sacerdos)가 되었던 것이다. 황제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사제라는 소위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이래 제국의 법률적 전통이 되어왔다.30)
황제교황주의 이론과 교황의 수위권 이론은 양립할 수 없다. 황제교황주의 하에서 교황의 지위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총대주교와 다름이 없는 로마의 주교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베드로 계승이론을 통하여 교회 내에서 우월권을 수립한 교황의 다음 과제는 황제의 이론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겔라시우스 1세 이래 역대교황들이 발달시켜 온 교황권 이론은 황제교황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황제교황주의에 대한 불만은 726년에 황제 레오 3세가 성상숭배 금지령을 발포하면서 양세력간의 노골적인 충돌로 표출되었다. 레오는 그레고리우스 2세에게 성인, 순교자, 천사를 막론하고 어떠한 화상도 교회에 두지 말도록 명하였다. 만일 그레고리우스가 이 명령에 따른다면 과세강령을 방해한 그의 죄를 용서할 것이고 거절한다면 교황의 직위를 박탈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레고리우스 2세는 황제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황제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이탈리아의 세력을 규합하여 반항하였다.31) 729년에 그가 황제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을 보면 황제를 무시하는 것을 넘어서 모독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짐의 권한과 권위는 사도중의 사도인 베드로에게서 유래한다. 원한다면 짐은 그대를 심판을 할 수도 있다.... 황제여 짐의 말을 들으시오. 사제처럼 행동하는 것을 중지하시오. 성스런 교회의 말을 따르시오. 그것이 당신의 의무이기 때문이오. 교리문제는 황제의 소관이 아니라 주교들의 소관이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오. 황제인 그대의 마음은 너무 야비하고 호전적이오.32)
이 서한 속에는 그 동안 교황들이 주장해 온 교회의 이론이 압축되어 있다. 우선 교황의 권위 문제를 언급하여 그 원천이 베드로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베드로가 그리스도로부터 최고의 권위를 받았듯이, 교황은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그로부터 직접 권위를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계에서 최고 권위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는 교리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간여할 자격이 없고 교황이 그 적임자라는 것이다. 종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교황이 결정권을 지니고 있다는 교황의 이러한 주장은 곧 황제교황주의에 대한 정면 반발이면서 동시에 종교문제에 대한 교황의 우월권의 선언이었다.
교황은 표면적으로 종교문제만을 내세우면서 비잔티움 황제에게 대항하였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적 우월권에 대한 주장 이면에는 동시에 이탈리아에서 교황이 세속적 분야에서도 최고권을 누리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다. 세속권에 대한 교황의 야심은 비잔티움 황제가 이탈리아에 부과하던 과세에 대해 그레고리우스 2세가 반발한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레오 3세의 이탈리아에 대한 과세강령의 시행을 거절하였다.33) 이를 계기로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을 규합하여 교황의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행정문제를 담당하던 사실상의 총독과도 같은 위치에 있는 교황의 이러한 행위는 황제가 보기에 반란이나 다름없었다.
이탈리아인들은 교황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로마라는 이름으로 게르만인들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준 그리스 황제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태수를 파견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는 과정에 이탈리아가 그리스의 한 속주로 전락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하였다. 차츰 그리인들은 그들과는 다른 피, 다른 언어라는 이질감이 커졌다. 그리스 황제가 차지하던 이 빈자리를 교황이 채웠다. 로마주교의 종교적 우월성을 통해 교황은 이탈리아인이 보편적 세계지배권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성상숭배 금지령 이후 교황의 행위는 그리스 황제의 압제에 반항하여 이탈리아인의 자유를 수호하는 그들의 지도자로 인식되었다.34)
이렇게 이탈리아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세속권을 행사하고, 동시에 서부세계에서 종교적인 최고권을 누리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성상숭배금지령을 계기로 그레고리 2세부터 촉발된 황제에 대한 도전은 그레고리우스 3세에게 계승되었다. 그레고리우스 3세는 731년에 로마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이 종교회의의 이름으로 성상숭배 파괴 행위를 엄중히 경고하는 강령을 발하였다.35) 자카리아스 역시 전임의 두 그레고리우스 교황처럼 로마교회의 정통 교리에 대한 의식은 확고하였다. 하지만 전임자들과는 다른 정책을 전개하였다.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지닌 유능한 정치가로서 그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와 소모적인 대립을 피하고 유화정책을 그의 기본 정책노선으로 삼았다. 그가 교황이 되던 같은 해에 비잔티움에서도 성상숭배의 문제에 강경하였던 레오 3세가 사망하고 현실주의자인 콘스탄티누스 5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역시 현실주의적 정치가로서 이탈리아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교황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는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였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탈리아 문제에서 벗어나 아랍인들과 불가리아인들을 상대로 한 국내의 문제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자카리아스 역시 비잔티움과의 전선을 피하고 롬바르드인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36)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카리아스는 황제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으며, 이탈리아 문제는 교황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고 인식하였다. 요컨대 교황은 생존할 수 있는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피핀이 자카리아스에게 조언을 구해왔을 때 교황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피핀이 프랑크 왕국에서 처해 있었던 상황도 무대는 다르지만 당시 이탈리아에서 교황이 처해있던 상황과 양상이 매우 흡사하였다. 프랑크 왕국에서 피핀은 궁재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형식상으로 최고자인 왕이 존재하였으며, 왕의 재가를 받아 국사를 처리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탈리아에서 교황은 종교적인 문제는 물론 세속 행정문제에 있어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식상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자는 비잔티움 황제였고, 교황은 황제의 명을 받아 모든 일을 처리하는 절차를 밟았다.
피핀에게 자카리아스가 "실질적으로 권력을 지닌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답변했을 때, 그 답변은 곧 교황 자신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당시 교황은 롬바르드 위협을 막아내야 하고, 동시에 비잔티움 황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이중의 필요성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교황은 당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를 통해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자카리아스가 피핀의 쿠데타를 지원한 실질적인 이유였다.
Ⅳ. 교황과 피핀의 제휴 의미
8세기 중엽은 향후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간이었다.37) 고대 로마제국의 유적지인 로마시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에서 비잔티움 황제, 로마교황, 롬바르드인이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곳에서 패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서 유럽 역사의 향방이 좌우될 운명이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지중해 세계와 유럽대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외형적인 중요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로마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였다. 로마는 고대 제국의 수도로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이 전통으로 전해내려 왔다. 그러므로 그곳을 차지한다는 것은 보다 넓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이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사실 교황이 로마를 베드로의 유적지로 그렇게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여러 세력들간의 각축장이 된 이탈리아 반도에서 주도권을 교황이 쥐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이 단독으로 주도권을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교황은 자체의 군사력이 없었기 때문에 롬바르드의 무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교황청에서 꾸준히 발달시켜 온 이론만으로는 교황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사실 로마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도 교황보다는 비잔티움 황제가 훨씬 더 역사적인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은 당시의 유럽에서 급격히 부상하는 세력인 프랑크인들을 통해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요컨대 피핀의 쿠데타를 계기로 프랑크 왕국과 제휴함으로써 교황은 향후 중세의 역사를 주도할 수 있는 현실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렇다면 프랑크인들은 단순히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일개의 이민족에 불과했던 프랑크인들 역시 로마교회와의 제휴를 통해서 마침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유럽사의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됨으로써 피핀 이후 프랑크 왕의 권위가 증가하였다. 교황의 긍정적 답변을 들은 후 곧 바로 피핀은 당시 보니파키우스(St. Bonifacius)38)가 주교로 있던 마인쯔의 주교관구를 독일 전역에 권위를 미칠 수 있는 대주교 관구로 승격시켰다.39) 이에 대주교가 된 보니파키우스는 교황을 대신하여 피핀을 성유로 도유(unctio)함으로써 정식 왕으로 세상에 선포하였다. 프랑크 왕실 연대기에서는 당시 피핀의 즉위과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751년에 피핀은 교황의 인가를 받아 프랑크 왕으로 불렸다. 스와송(Soisson)시에서 피핀은 (당시) 대주교이면서 (지금은 고인이 된) 순교자 보니파키우스에게서 성유로 도유를 받고, 프랑크의 관례에 따라서 왕위에 올랐다. 왕의 칭호를 지니고 있었던 힐데리히는 장발이 잘린 채 수도원으로 보내졌다.40)
이렇게 피핀은 교황이 가장 신뢰하고 아끼는 대주교인 보니파키우스로부터 도유를 받아 751년 11월에 왕으로 즉위하였다. 교회와 프랑크 왕국간 우호관계는 계속되었다. 그 대가로 피핀은 보니파키우스에게 풀다(Fulda) 수도원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수도원에 교황을 제외하고는 어떤 교회로부터도 감독을 면제받도록 하는 특혜를 부여하였다. 피핀의 사절로 교황에게 파견되었던 풀라트(Fulrad)에게도 특혜를 부여하였다. 752년 3월 1일자의 피핀의 왕실 특허장에는 풀라트가 수도원장으로 있는 생드네(Saint Denis) 수도원에 피핀이 계속해서 영지를 수여하는 내용이 나온다.41)
메로빙가의 왕을 폐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피핀의 행위는 명백히 쿠데타였지만, 도유를 받아 왕위에 오름으로써 이제 쿠데타는 신의 은총으로 바뀌었다. 도유식은 새로운 왕조에 그 왕조가 결하고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제 카롤링 왕조의 새 왕은 장발의 메로빙 왕들이 소유하였던 것 이상의 신성함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대의 신비한 전통은 신정적 왕권으로 대체되었다. 신의 뜻에 따라 왕이 되었기 때문에 피핀의 권위는 신성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42) 비잔티움에 있는 로마황제 이외에 신의 뜻에 따라서 새로운 신성한 왕이 등장하였다는 바로 이점이 로마교회와 왕국간 제휴의 첫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신성한 기독교 왕의 지배하에 있는 프랑크 왕국 내에서 정치와 종교간의 긴밀한 연계가 이루어졌다. 메로빙시대에 종교회의는 왕의 권위와는 별개로 개최되었다. 종교회의 강령도 왕의 강령과는 별개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카롤링 왕조가 들어선 이후 종교회의는 왕의 통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왕 자신이 백성들의 이익을 위하여 왕의 이름으로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왕이 소집하는 종교회의 참석자들은 성직자는 물론 속인도 포함되었다. 여기에서 수도원 규칙, 성직자의 의상, 성직의 면직, 퇴폐행위 등온갖 종류의 교회문제들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회의는 하나의 통치기구였다. 종교회의 강령과 왕의 강령은 하나로 연결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 종교회의 강령은 곧 왕의 강령들로 선포되었다.43)
신성한 권위로 왕이 된 피핀 이래 프랑크 왕들의 통치하에서 대외적으로도 기독교가 널리 보급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교황의 도움으로 왕이 되어 위신이 증가한 피핀은 이교도들을 상대로 활기차게 정복전쟁을 수행하였다. 752년에는 우선 고올 지역의 나머지 이교지역을 정복하여 기독교화 하였다. 753년에는 북부 이교도들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라인강을 건너 작센인들의 영토에 들어가 베제르(Weser)강에 이르기까지 공격하여 색슨인들을 굴복시키고 기독교 선교사들을 그곳에 파견하였다.44) 피핀이 교황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된 이후의 피핀의 정복전쟁은 곧 이교도에 대한 퇴치요 기독교의 보급을 위한 전쟁이었다. 즉 교황이 원하는 교회의 수호자로서의 실질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왕으로서의 피핀 이후 프랑크 지배자들의 역할을 통하여 이교세력은 퇴치되고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널리 보급 정착될 수 있게 되었다. 프랑크인들은 향후 유럽이 기독교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것이 교회와 프랑크 왕국간에 제휴가 지니는 두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제휴가 지니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중요한 의미는 이를 계기로 서유럽 중세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교황이 주도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수립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교황이 비잔티움 황제의 총독과 같은 지위에서 벗어나 기독교 세계에서 완전한 독립된 군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보호자를 얻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세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세력인 프랑크 왕국과 제휴를 함으로써 교황은 당장 롬바르드인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비잔티움 황제의 황제교황주의 압력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의 입장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확실한 보호자를 세워 그 동안 집요하게 추구해 오던 기독교 세계에서의 최고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Ⅴ. 맺음말
피핀은 교황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단행하였다. 그 결과 카롤링 가문이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샤를마뉴 때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황제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피핀의 쿠데타로부터 약 3년 후에 발생하였던 교황 스테파누스의 피핀 도유 사건은 피핀의 쿠데타를 계기로 이루어진 로마교회와 프랑크 궁정간 제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하였다. 그리고 약 50년 후에 발생하였던 '샤를마뉴의 황제대관식' 사건은 750년에 시작된 로마교회와 프랑크 왕국간 제휴의 마지막 단계였다. 로마교회와 제휴를 통해서 이후의 중세 역사에서 프랑크인들이 세속의 역사과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교회와 프랑크 왕국간의 제휴는 교황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8세기 중엽,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이 롬바르드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로마시가 그들의 수중에 떨어질 위기 상황 속에서 교황은 위험을 기회로 활용하였다. 교황은 피핀의 쿠데타를 지원하고 그 대가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이익을 얻었다.
첫째, 교황은 피핀과의 제휴를 통해서 롬바르드인들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모면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 세계에서 새롭게 부상하던 프랑크족의 힘을 빌어 교황은 로마를 구하고 교회를 구하였다.
둘째, 제휴 결과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프랑크 왕을 교회의 후원자로 끌어들임으로써,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기독교 세계에서 완전한 독립된 군주로서 행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셋째, 독립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교황이 실질적인 독립군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토대가 불가피하였다. 교황은 제휴의 결과 이탈리아에서 교회가 직접 관할할 수 있는 넓은 토지를 교황령으로 확보함으로써 중세에 독립군주가 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넷째, 신앙을 보급하고 교황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교회의 보호자를 확보하였다. 비잔티움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이루고, 교회에서 확보한 토지를 지키고, 또 교황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호자가 꼭 필요하였다. 교황은 프랑크인들을 그 신성한 보호자로 세움으로써 교황이 추구하는 기독교 세계의 최고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서유럽 역사에서 교황은 750년에 프랑크 왕과의 제휴를 통해서 추구하였던 그 목적을 실천하였다. 중세의 교황은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물론 후기에 이르러서는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최고권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교황 계획의 기틀은 750년에 자카리아스와 피핀간에 제휴가 이루어지면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로마교회와 프랑크 왕국간의 제휴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1) Raymond Davis, The Lives of the Eighth-Century Popes(Liber Pontificalis): The Ancient Biographies of Nine Popes from AD 715 to AD 817, translated wit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in Translated Texts for Historians Vol. 13 (Liverpool University Press, 1992).
2) Annales Laurissenses and Einhardi Annales, M. G. H., Scriptores, folio,Ⅰ, pp.136-137; Oliver J. Thatcher and Edger H. McNeal, trans. & eds., A Source Book for Mediaeval History: Selected Documents Illustrating the History of Europe in the Middle Ages (New York: Ams Press, 1971), pp.37-38; Brian Tierney, The Crisis of Church and State 1050-1300: with selected documents (Prentice-Hall, 1964), p.20; Milton Viorst, The Great Documents of Western Civilization (Philadelphia: Chilton Book Co., 1967), p. 25.
3) Einhard and Notker the Stammerer, Two Lives of Charlemagne, trans. Lewis Thorpe (Penguin Books, 1981), p.56.
4) Liber Pontificalis, pp.46-47. Zacharias 전기에서는 Carloman과 관련된 이 문제를 아주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사건이 상세하게 서술된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전기작가는 Karl Martel을 왕으로 잘못 칭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칼 마르텔은 사망할 때까지 프랑크의 궁재직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교황으로부터 수사의 직분을 받은 후 카를로만은 Aquino 지역에 있는 St Benedict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간략히 서술되어 있으나, 이것도 잘못된 내용이다. 수사가 된 후 카를로만은 처음에 Monte Soracte에 있는 St Silvester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얼마간 체류하다가 다시 Monte Cassino에 있는 아퀴노 지역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옮겼다.
5) 피핀의 부친인 Karl Martel은 사망하기 직전인 741년 10월에 강령을 발하여 장남인 카를로만에게는 Austrasia, Alemannia, Thuringia 지방을, 차남인 피핀에게는 Neustria, Burgundy, Provence 지방을 각각 나누어 누었다. 부친의 사후에 두 형제는 각각 Austrasia와 Neustria에서 부친의 궁재직을 승계하였다. 칼 마르텔 사후에 프랑크의 지배하에 있는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하였을 때 두 형제는 서로 협력하여 반란을 퇴치하였다. Margaret Deanesly, A History of Early Medieval Europe 476 to 911 (New York: Barnes & Noble, 1956), p.288.
6) 피핀은 아직 왕이 되기 전인 궁재로 있을 때부터 그 자신의 이름 옆에 "주께서 자신에게 통치업무를 위탁하였다"는 거만한 구절을 사용하였으며, 당시까지 왕에게만 한정하여 사용되어 오던 짐(nos, noster)이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H. M. Gwatkin and J. P. Whitney,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Ⅱ: The Rise of the Saracens and the Foundation of the Western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pp.575-576.
7) Deanesly, A History of Early Medieval Europe 476 to 911. p.290.
8) T. F. X. Noble, The Republic of St Peter, the birth of the papal state 680-825 (Philadelphia, 1984), pp.66-67. recited in Liber Pontificalis p.46 n.79.
9) Einhard, Two Lives of Charlemagne, pp.56.
10) Ibid. pp.56-57.
11) Roger Collins, Early Medieval Europe 300-1000, 2nd ed. (MacMillan Press LTD, 1999), p.271.
12) Ibid., p.272.
13) 스테파누스 전기작가는 754년에 카를로만이 롬바르드 왕 아이스툴프의 사주를 받아 피핀의 친교황정책을 방해하기 위하여, 수도원을 떠나 프랑크로 와서 피핀의 친로마정책에 반대하는 프랑크 귀족들과 결속하여 동생 피핀에게 대항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나(Liber Pontificalis, p.65.), 이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당시 교황과 피핀은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고, 아이스툴프는 이들과는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핀에게 반감을 지니고 있는 카를로만이 아이스툴프와 협력관계를 맺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순히 아이스툴프의 사주를 받아 교황과 피핀의 정책을 방해하기 위하여 수도원을 떠나 프랑크로 와서 반대파 세력과 결속하였다는 설명은 믿기 어렵다. 교황은 피핀의 힘을 빌려 아이스툴프의 압박을 벗어나려고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내용 속에는 반롬바르드적인 로마교회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4) Gwatkin,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p.587.
15) Fritz Kern, Kingship and Law in the Middle Ages. trans. by S. B. Chrimes (Oxford: Basil Blackwell, 1948), p.35.
16) Deanesly, A History of Early Medieval Europe, pp.288-289.
17) 피핀이 파견한 사절들의 질문에 대한 교황의 답변은 과연 즉흥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교황청과 피핀의 궁정간에 사전 외교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물론 그 정확한 답은 알 수 없다. Noble은 사전에 흥정이 없었다고 보았다(Noble, The Republic of St Peter, 70-71. redited in Liber Pontificalis, p.59). 그러나 우리는 Stephanus 전기에 나오는 몇 구절, 즉 "전임 교황들인 그레고리우스, 자카리아스와 '똑 같은 방법'으로 스테파누스 2세도 또한 한 순례자를 통해서 비밀리에 프랑크의 피핀 왕에게 그의 서한을 보냈다"(Ibid., p.59.)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사전에 서신왕래를 통한 외교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진단해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똑 같은 방법'이라면 자카리아스가 피핀에게 서한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내용을 근거로 한다면 자카리아스가 먼저 서한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자, 피핀이 사절을 보내 도와주겠다고 대답을 하면서, 동시에 쿠데타에 대한 교황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교황이 긍정적으로 대답한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외교적인 거래라고 할 수 있다. 즉 피핀의 사절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양측간에 사전조율이나 거래가 있었던 셈이 된다.
18) Liber Pontificalis, pp.10-11.
19) Ibid., pp.11-13, p.16 no.72.
20) 교황의 베드로 계승이론은 2세기 말경에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던 위조문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가짜 문서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가 교황 Clemens 1세에게 '매고 풀 수 있는 권능'을 위임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문서는 중세기 내내 베드로의 계승자로서의 교황 군주정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확실한 역사적 전거인 것처럼 거듭 인용되었다. Walter Ullmann, Medieval Political Thought (Penguin Books, 1975), pp.23-24.
21) See James A. Corbett, The Papacy: A Brief History, pp.9-15.
22) Gwatkin,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p.577.
23) 717년에 롬바르드인들이 로마공국에 속해 있는 Cumae성을 점령함으로써 로마로부터 나폴리로 향하는 육로가 차단되었다. 그레고리우스 2세는 나폴리공과 주민들에게 매일 서한을 보내어 작전을 지시하였다. 그 지시에 따라 나폴리인들은 밤을 기해 기습 공격하여 그 성을 회복하였다.(Liber Pontificalis, p.7). 이것은 교황이 집접 군사행동을 지시한 최초의 사례이다.(Ibid., p.7 no.28). 729년에 Tuscia 지방에서 Tiberius라는 사람이 황제권을 찬탈하려고 주민들을 선동하였을 때에도 교황은 로마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타도하였다.(Ibid., p.15).
24) 742년 스폴레토 공 Transamund가 로마공국에 속해 있는 Gallese 성을 공격해 왔을 때 그레고리우스 3세는 손수 로마군대를 지휘하여 대항하였으며, 마침내 돈을 주고 협상하여 이 성의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였다.(Ibid. p.28).
25) Ibid., pp.38-39.
26) Ibid., p.44.
27) A. A. Vasiliev,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324-1453, Vol.Ⅰ(Wisconsin: The University Press, 1978), pp.237-239.
28)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통치권을 새롭게 확립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자체 방위비용을 분담케 하려는 것이 과세 부과의 목적이었다. Liber Pontificalis, p.10 no.44.
29) Walter Ullmann, The Growth of Papal Government in the Middle Ages (New York: Barnes & Noble, 1953), pp.44-45.
30) James A. Corbett, The Papacy, pp.15-16.
31) Liber Pontificalis, p.11.
32) Jeffrey Richards, The Popes and the Papacy in the Early Middle Ages 476-752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9), p.219; Ullmann, The Growth of Papal Government in the Middle Ages, p.46. Cf. Tierney, The Crisis of Church and State, p.19.
33) Liber Pontificalis, p.10, p.10 no. 40, 44.
34) Gwatkin,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p.579.
35) Liber Pontificalis, p.20.
36) Richards, The Popes and the Papacy, pp.227-228.
37) Ullmann, The Growth of Papal Government in the Middle Ages, p.44.
38) 영국의 선교사였던 St Bonifacius는 일찌기 718년에 로마로 그레고리우스 2세를 찾아가 게르만인들의 복음화 사업에 대한 교황의 승인과 후원을 요청하였다. 그 교황은 기꺼이 위임장을 써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선교사업에 협력하였다. 보니파키우스는 그레고리우스 2세를 계승하는 교황들과도 계속해서 서신왕래를 통해 프랑크 지역의 복음화 계획을 상의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 지역의 복음화를 실천하는 데에는 프랑크 왕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왕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Richards, The Popes and the Papacy, pp.222-223.
39) Gwatkin,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p.581.
40) Annales Laurissenses and Einhardi Annales, M. G. H., Scriptores, folio,Ⅰ, pp.138-139; Thatcher, A Source Book for Mediaeval History, p.38; Tierney, The Crisis of Church and State, p.20.
41) Gwatkin,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p.581.
42) Kern, Kingship and Law, pp.35-36.
43) Ullmann, The Growth of Papal Government in the Middle Ages, p.50.
44) Gwatkin,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p.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