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족 상락(知足常樂)
지족 상락(知足常樂) 즉 만족할 줄 알면 언제나 즐겁다 - 안상헌 작가, '미치게 친절한 철학',저자
1. 오래된 삶의 지혜 삶의 지혜가 담긴 오래된 이야기들은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며 깊은 울림을 줍니다.
수많은 지혜의 흔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대가 바뀌어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만족할 줄 알면 행복하다."
이 짧은 말만큼 우리 삶의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문장도 드물 것입니다. 멈출 줄 모르고 앞만 보며 달리는 마음으로는 결코 온전한 평안에 닿을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늘 '조금만 더 가져야 한다' 라는 생각에 쫓기듯 살아갈까요?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는 세상의 소음 때문일 수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 복잡한 이유 속에서도 가장 내면의 만족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물론 더 많이 가지고 더 나은 삶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발전과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높은 자리와 더 나은 조건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갔고, 그 과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살아온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멈추어 쉬고 지금을 온전히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선현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
2. 지족상락
“이제는 무엇을 더 가져야 할까, 아니면 현재를 누려야 할까?"
동양 고전에는 이 질문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깊은 답이 있습니다.
바로 지족상락(知足常樂), 만족할 줄 알면 늘 즐겁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뿌리는 [도덕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족자부(知족者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다. “禍莫大於不知足(화막대어부지족)”,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다. 노자의 이 가르침은 단순히 적게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불행이 '더 가지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족을 아는 순간, 이미 충분하다."
지족상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행복은 밖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가진 것을 충분하게 느끼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공자도 [도덕경]에서 말했습니다. “飯疏食飲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반소식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베고 자도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 널리 알려진 안분지족(安分知足)입니다. 현재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아는 자세지요. 이는 체념이나 한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자리, 지금의 조건,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지족상락이 마음의 상태라면 안 분지족은 그 마음을 삶 속에서 지키는 방식입니다.
3. 내 삶의 속도로 이 두 가지 마음이 삶에 스며들면 자연스레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모습이 묻어납니다. 그저 한가롭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잣대나 남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리듬’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조급함이 옅어지고 비교가 줄어 든 자리에 비로소 '나의 속도'가 찾아와 앉습니다.
이러한 삶 풍경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뉴욕에서 온 한 사업가가 작은 해변 마음을 찾았습니다. 아침 산책을 하던 그는 강가에서 낚시를 멈추고 여유롭게 쉬고 있는 한 노인을 보게 됩니다. 노인은 이미 몇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 놓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업가가 의아해하며 묻습니다.
"왜 낚시를 더 하지 않으시나요?"
노인이 평온하게 대답합니다.
“오늘 먹을 만큼은 이미 충분히 잡았으니까요"
사업가는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말을 건넸습니다.
“조금 더 잡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않습니까?"
노인이 되묻습니다.
"돈을 더 벌면 어떻게 되는데요?"
사업가는 신이 나서 말합니다.
“배를 더 사고 사람을 고용해서 사업을 크게 키울 수 있죠. 그러면 큰 회사를 갖게 되고 아주 많은 돈을 벌게 될 겁니다."
노인이 가만히 다시 묻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사업가는 활짝 웃으며 대답합니다. 그 다음에는 은퇴해서 이렇게 한가롭게 낚시나 하며 여유를 즐기며 사는 거지요.” 그 말을 들은 노인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합니다.
“저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걸요."
이 짧은 대화 속에는 지족상락과 유유자적의 참된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노인은 더 많은 부를 쌓을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충분함을 아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삶 속에서 넉넉한 충만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4. 지금이 곧 미래 우리는 흔히 '자식이 더 잘되면 좋겠다', '경제적으로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만족을 미루고 더 나은 미래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 '나중의 모습'은 결국 지금 우리가 바라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상태를 미래의 조건으로 미뤄두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충분하지 않은 삶이 되고 행복은 늘 '조금 뒤'로 밀려납니다. 뉴욕 사업가와 어부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결국 도달하려는 삶이 지금도 가능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자식이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지금의 자식과 지금의 관계도 충분히 소중합니다. 경제적 여유가 더 많아지면 좋겠지만 지금의 삶 또한 이미 지나온 시간 위에 세워진 좋은 삶입니다. 결국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은 크게 보면 지금 삶을 조금 더 편안하게 바라보는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족장락은 "더 이상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말라"는 매정한 말이 아니라. 이미 당신이 가진 것들을 지금 마음껏 누려도 괜찮다"라는 따뜻한 허락과도 같습니다. 미래에 누리려고 겹겹이 아껴두었던 여유를 오늘이라는 시간으로 조금씩 꺼내어도 좋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한 삶은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움트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즐거운 하루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