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은 요한복음 전반부(1~12, 표적의 책)가 끝나고 후반부(13~20장, 영광의 책)가 시작되는 부분에 있습니다. 후반부는 다시 13장~17장까지가 예수님의 고별사이고, 18~20장까지가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1~12:50절의 표적들의 책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와서 사람들에게 많은 표적들과 강론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했는가? 그러나 빛보다 암흑을 선호한 대다수 사람과 유대인에 의해서 거절이 되었는가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37절을 보면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였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했으나 그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하는 1:11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입니다. 즉, 요한복음 1:11절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책(13장~20장)은 표적들의 책(1장~12장)이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의 표적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그를 믿게 된 소수의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을 하신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광의 책의 주제는 예수가 세상으로부터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감이 주제입니다.
반면 표적들의 책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과 계시로 하나님을 계시함이 주제였습니다. 영광의 책의 아버지께로 돌아감은 요한복음 12:32절에 예언된 대로 그 사람의 아들이 들림 받으심입니다. 들림 받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게 되는데(요한복음 12:32), 그것은 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지표(地表)에서 들림 받음을 시작으로 해서 부활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높임을 받으심과 성령을 통해서 부활하시고 영광 받으신 주는 그의 백성 가운데 주로 임재하심으로 절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영광의 책(13~20장)은 십자가에 못 박힘을 그의 영광 받으심이라고 지칭합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의 사랑을 계시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인류를 위해서 내어 주심을 나타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심이 드러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힘은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 주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 됨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수난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곧 예수의 진정한 정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광 받음입니다.
요한복음 13~17장까지는 긴 예수의 고별사로 되어 있습니다. 고별사를 시작하기 전에 13:1-30절에 하나의 표적이 소개됩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는 Sign 행위로 시작이 됩니다. 이 표적이 유월절 잔치 때 일어납니다. 상황은 지금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의 장면은 있고, 또 최후의 만찬의 의미가 요한복음 13장, 15장, 특별히 요한복음 6장에 집중적으로 강해 되어 있지만, 최후의 만찬을 성만찬으로 되풀이하라는, 즉 그것을 계속 기념하라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이 이곳저곳에 나타나고, 그 말들의 의미가 요한복음 6, 13, 15장 등에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그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함의 표징으로 식탁을 대하고 둘러앉은 이들의 발들을 씻기는 장면입니다. 당시 유대 종들은 상전의 발을 씻기는 의무를 갖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노예, 그것도 이방인 노예에게만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을 시켰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식사 전이 아니라 식사 도중에 발을 씻겼다는 것입니다(3절). 예수께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바로 유대 상전에 대한 종의 위치보다 더 낮아진 행위입니다. 한 마디로 낮아진 행위입니다.
“카타바시스”(catabasis)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입니다. “카타바시스”(catabasis)는 낮아진 행위, 낮아짐의 극치입니다. 예수께서 위 세상에서 내려오신 분인데 내려오심의 극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연극으로 이루어집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상태, 이제는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께로의 돌아감, 곧 그의 영광 받음, “아나바시스”(anabasis)가 시작되려는 가장 낮아짐의 상태는 십자가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발 씻김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해설입니다. 극이요 드라마입니다. 이 발을 씻긴 극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론적인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에이스 텔로스”로서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시간상으로 텔로스는 “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끝까지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강조의 의미에서 “최종 목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 자신의 구속 사역의 목적을 완성하기까지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 목적(텔로스)을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라고 하십니다. 텔로스의 두 가지 의미 모두 십자가 사건을 그 정점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그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구원 사적인 의미와 윤리적인 범주로서의 의미를 다 가진 것이 세족식입니다.
본문의 구조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크게 4~11절과 12~17절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전자는 세족식의 교리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고, 후자는 세족식의 윤리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윤리적인 모범의 범주에 집착을 해왔습니다. 예수의 겸손, 섬김의 도를 보라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만 해석하였는데, 사실은 이것은 이차적입니다. 일차적인 것은 예수가 백성을 죄로부터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치는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자기는 씻지 않겠다고 할 때 예수께서 씻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상관(헬리어 : 메로스)이 없다는 말은 종말론적으로 받을 몫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씻는다는 말은 제의적 용어입니다. “깨끗한”(카타로스)이라는 말이 요한복음에서 세 번 사용됩니다(10, 11, 15:3). 요한복음 15:3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로 제자들이 깨끗하여졌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의 백성이 예수님으로부터 죄 씻김을 받아서 그들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언제, 어떻게 백성의 죄를 깨끗이 씻깁니까?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서입니다. 그래서 발을 씻김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아주 극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해서 그들을 씻기는 행위이고,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그들의 죄를 깨끗이 씻기는 행위, 죄를 속하는 행위임을 미리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통 사랑의 행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백성을 사랑해서, 그들의 죄를 씻어 가지고 속죄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함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발을 씻기는 행위로 나타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서 발을 씻김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족식에서 본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휘포데이그마”라는 말의 기본 뜻은 “복사”입니다. 휘포데이그마는 마카비 시대, 다른 사람이 본받아야 할 순교적 삶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휘포데이그마”와 같은 어원의 단어인 “파라데이그마”는 구약에서 성전의 모형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출애굽기 25:9, 역대상 28:11). “파라데이그마”는 성전 건축을 위한 일종의 건축 모형인 셈입니다. 성전 건축가들은 이 모형을 보고 성전을 짓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새 성전의 모델이 되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새 성전으로, 성전 된 그의 제자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서로 섬김, 사랑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세족”은 크게 두 가지 경우에 시행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 자기의 손과 발을 깨끗이 씻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회막에 들어가기 전, 물두멍에서 자기의 손과 발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출애굽기 30:17~21, 40:30~32). 일반 유대인들은 제물을 제단에 드릴 때, 자기의 손과 발을 씻어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결 예식은 성전 출입의 필수 요소였습니다. 세족의 또 다른 전통은 가정 방문 정결 예식입니다. 어떤 방문객이 한 집을 방문할 때, 집주인은 발 씻을 물을 제공하며 환대합니다(창세기 18:4, 19:2, 24:32, 누가복음 7:36~50).
이런 측면에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속죄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새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새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새 언약의 공동체 교회에 언약이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으로 성립이 되느냐면 새 계명으로 됩니다.
옛 시내산 언약은 모세율법으로 표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속죄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사랑을 통해서 이제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로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속죄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새 언약의 제사입니다. 새 언약의 공동체에 주어지는 새 언약은 무엇으로 표현이 됩니까? 새 계명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탄생 되는 새 언약의 공동체는 온통 사랑으로 특징 지워지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그들을 위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그들을 위한 사랑이 서로 간에 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발을 씻김의 두 번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을 보이셨는데 사랑은 서로를 섬기는 것이라는 모범의 범주가 이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관계 회복을, 그리고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의 부요함. 즉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됨을 보이십니다. 철저한 낮아짐, 사랑의 극치를 보이심으로, 이 모든 구원의 행위가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새 언약의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인데, 예수님의 자신들을 향한 사랑이 서로 사랑함으로 모범의 범주로서 계속 이루어지는 일이어야 함을 보이십니다. “카타바시스”(catabasis)일 때 비로소 “아나바시스”(anabasis)가 시작이 된다는 귀한 교훈을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발을 씻기는 극, 드라마를 통하여 일깨워주십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이(낮아짐의 극치, 카타바시스) 영광의 사건(높이심, 높아지심, 아나바시스)인가를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위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역설적인 삶을 살아내는 자임을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