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이란 팔레비 왕조(1925~1979)레자샤의 장자로 제 2대 황제다. 그의 아버지 레자샤가 1926년 대관식을 올릴 때 그는 7세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어린시절 그는 선왕의 후계자 교육을 위한 각별한 관심과 열의에 힘입어 특수학교를 다녔다. 1994년에 테헤란에서 발간된 [팔레비 왕조의 성립과 몰락]에서 어린시절 그의 친구이며 스위스 유학에 동행했던 후세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팔레비는 1931년 군사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문학·역사 등 암기과목은 점수가 괜찮았지만, 수학은 아주 약했고, 사고하기를 싫어했다. 그는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습성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이는 국정운영 방식에도 연결되었다."그에 대한 또다른 평가에 따르면, 그의 학업성적은 우수했고, 운동경기에 관심이 많았으며 지략에 능하고 무자비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팔레비는 1931년 13세의 나이로 스위스에 갔다. 5년간의 스위스 유학기간동안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정도는 의무적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으며, 이에 레자 샤도 매주 답장을 했다고 한다. 팔레비는 1935년에 테헤란에 돌아온후 곧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초등학교때 레자 샤가 그를 위해 특수학급을 만들어주었듯이, 사관학교 시절에도 장교와 대학생위주로 구성된 특수그룹에서 수학했다. 또한 사관학교 시절 레자샤는 황태자를 전군의 감사관으로 임명한다. 따라서 그는 군부대, 특히 중앙 군부대를 감사해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명하기도 했다. 2년 과정을 마친 팔레비는 임관후 짧은 기간에 대위로 승진했다. 1938년에는 이집트의 왕인 말리크 파루크의 여동생 포지예와의 결혼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결혼은 이란과 이집트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접근시키려는 영국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 포지예와 팔레비의 결혼은 성사되었다. 이집트에서 혼인서약이 치러졌고 테헤란의 골레스탄궁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포지예는 아랍어를 모르는 팔레비와 프랑스어로 얘기했고, 결혼생활 후반기에는 포지예가 페르시아어를 어느정도 익혔다고 한다. 그녀는 사회적 행사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대체로 그녀의 왕궁내 생활은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팔레비 국왕도 전생애를 통해 결혼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레자샤는 이란의 완전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여러분야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1년 추축국에 가담했던 이유로 영국·프랑스의 압력을 받아 물러나고 만다. 41년 9월에는 팔레비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는 레자 샤의 군 통치전략을 고수하면서 궁정수비대의 창설 및 군병력 증강에 재정을 확충했다. 그는 군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그와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석방되면서 투데당이 창당되었고, 병력을 동원하여 투데당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도움으로 아제르바이잔문제를 해결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한층 강화했다. 40년대 말에는 유럽순방길에 올랐고, 순방국가에 대한 내부정세도 훤히 꿰뚫어보았다. 레자 샤 팔레비는 1948년 이래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고,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1957년에는 비밀 정보조직인 사바크를 창설하고, 1963년에는 백색혁명을 단행했다. 또한 1973년에는 제 5차 5개년계획을 실시했으나, 석유·중공업에 편중된 정책으로 인한 경제실책의 여파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보수시아파의 반팔레비 투쟁이 격화되었다. 그결과 1979년 1월 팔레비는 이슬람혁명군에 의해 쫓겨나 이집트로 망명했다. 망명중에도 그는 복권기회를 노리면서 모로코·바하마·멕시코·미국·파나마를 전전했으나, 1980년 아무 성과도 없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췌장암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