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식 朴弘植 (1902 ~ 미상)】 "서울 종로 만세시위 참여"
1902년 5월 17일 경성부 종로4정목(현 서울시 원남동(苑南洞))에서 태어났다. 판결문에는 1919년 당시 본적과 주소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성북리(城北里,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로 기재되어 있다. 직업은 구두 직공(화직공(靴職工))이었다. 1919년 3월 23일 서울 종로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을 때, 적극 참여하였다.
서울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중순 잠시 휴식기를 가졌으나, 일제 군경의 폭압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3월 하순부터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3월 22일 오전에는 서대문 근방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군중 700~800여 명이 노동자대회를 열었고, 이날 밤 11시경에는 종로 영화관 단성사(團成社) 앞에서 200여 명이 만세를 외쳤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튿날인 3월 23일에도 이어졌다.
3월 23일 만세시위는 저녁부터 심야 시간까지 서울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날 만세시위는 운행하고 있는 전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격렬함을 보였다. 저녁 8시경 동대문 부근에서 400여 명, 훈련원 부근에서 400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전차에 돌을 던졌는데, 이들의 행렬은 종로로 이어졌다.
종로 5정목 일대에 만세시위대가 이르렀을 때, 이에 동참하여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체포 작전이 전개되면서 같이 시위에 참여한 41명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그해 7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로 감형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2월 21일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