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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돌과 비비추
 
 
 
카페 게시글
동산*문학관* 스크랩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 박남희
동산 추천 0 조회 27 09.07.26 11:3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 박남희                                    

 

 

  나는 어느 날

  당신이 말하는 것이 허공을 말하는 것 같아

  당신이 문득 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꽃은 자신이 허공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자신의 안에 허공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뿌리는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지

  그런데 한차례 꽃이 피어나고 시드는 허공의 이치를

  뿌리는 왜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실뿌리는 점점 땅 속 깊이 뻗어가

  낯선 돌을 만지고 샘을 더듬다가

  어둠의 차디찬 깊이를 만나고 끝내꽃을 떨구게 되지

 

  아름다움은 모두 한차례의 흔들림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허공은 자꾸만 꽃을 흔들고 꽃은 점점 외로워지지

  그렇게 꽃은 떨어져 시들어가지

 

  꽃이 외롭게 흔들리다가 만들어낸 흔적이

  다시허공이된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텅 빈 커다란 꽃이 허공이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도

  허공은 텅 빈 꽃으로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지  

  

 

 

 

 

 

 

 

food for the departed

 

 

 

못을 박으며 / 박남희

 

 


 어쩌면 성수대교와 세계무역쎈타는 스스로 무너지고 싶어서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무너지

것도 행복이다.


 그런데 무너지는 모든 것들은 구멍을 통해서 무너진다 구멍 속으로 드나드는

바람과 흐느낌과 역사와 온갖 소문들까지 무너짐에 봉사한다 언젠가 한번은

무너져 본 것이라야 구멍의 공포와 허전함과 무너짐의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무너지는 것의 역사다 그렇게도 강성했던 바벨론과

로마의 벽에 나 있던 무수한 화살 구멍들, 그렇게 바벨론과 로마는 무너졌다

그 역사는 지금도 구멍을 통해 이야기되고 세상의 무수한 구명 속으로 퍼져

나간다 역사의 총탄은 케네디를 관통하고, 클린턴도 구멍 근처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구멍은 스스로의 몸을 구멍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역사라고, 때로는 천재지변이라고 명명한다 구멍의 이름

수시로 바뀐다

나는 벽에 못을 박으며 못 끝에서 확장되는 구멍을, 구멍의 역사를 생각한다

아니 사랑을, 절망을, 위선을, 아니 아니, 망치가 내려칠 내 손가락을, 그

아픔을……

 

 

 

 

 

 

 

Carvaan

 

 


아름다운 매춘에 대하여 / 박남희

 

 

 

  벌레의 꿈틀거림에 관한 기억을 난 알고 있어 내 몸을 갉아 먹고 내 몸의 뚫린 구멍 속으로 하늘을 보는 벌레, 그래 나는 분명히 벌레먹은 이파리였어 그런데 너는 누구니? 벌레 먹은 나를 쳐다보다가 내 존재의 밑에서 나를 떠받치고 있으면서 나에게 살아있느냐고, 살아있느냐고 수없이 나를 흔들어대는 너는,

  그날 이후 햇빛은 나에게 선물을 주었어 벌레의 이빨에 갉아먹힌 만큼의 상처와 누군가에게 흔들린 만큼의 시련을 얹어 내 살갗 속에, 녹색의 길 속에 다독이며 별빛의 하늘에 이르는 눈빛을 선사해 주었어

  그래 이제 벌레에 대해서 말해주지, 벌레의 끊임없는 꿈틀거림에 관해서, 그 순수한 생의 몸부림에 관해서, 벌레와 함께 해온
 내 아름다운 매춘에 대해서, 이미 벌레에게 바친 이 한 몸 나를 갉아먹어도 나는 그가 좋아 난 지금도 밤마다 내사랑 벌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내 몸의 뚫린 구멍 속으로 바라보이는 하늘에 대해, 한 순간 반짝이다 사라지는 아름다운 소멸에 대해, 벌레먹은 채로도 아름다운 내 몸에 대해,

  그런데 지금도 자꾸만 내 몸을 흔들어대는 너는 누구니?

 

 

 

 

 

 

 

 Family

 

 

 

깡통미학 / 박남희 

 

 

깡통은 비어있으므로 행복해진다
그 안에 소리를 더 많이 가둘 수 있으므로
소리의 아빠와 소리의 엄마가 사랑을 해서
소리를 낳고.....
마음대로 찌그러질 수 있으므로, 찌그러져도
흉보지 않으므로 행복하다
무엇보다도 깡통은
비어있을 때 비로소 깡통이 된다
그 속에서 깡통의 자의식이 무럭무럭 자라고
자라서 모든 쓸데없는 것들의 비어있음을
자유롭게 확인하고 손뼉을 치며
마음껏 소리지르는 깡통 곁에 서 있는 나는
왠지 귀가 멍멍하다 
  

 

 

 

 

 

 

Afghan Nomads cook their food in Afghanistan

 


 

나팔꽃의 경계 / 박남희

 

                                                  

나팔꽃이
오래된 담장을 타고 기어올라간다
흘끗, 태양을 쳐다보다가
말을 아끼고
꽃봉오리 하나를 새로 피웠다

흙과 담장 사이, 담장과 하늘 사이
나팔꽃은 문득
나팔을 불어대고 싶은 마음, 꾹 누르고
꽃을 하나씩 피운다

새가 흔들고 간 쥐똥나무 아래
거미가 새롭게 경계를 세운다

끝없이 흔들리고 싶은
나팔꽃의 경계는 어디인가

바람이 나팔꽃을 흔드는 것은
너무 오랜 습관 같아 불안하고
새가 나팔꽃을 흔드는 것은 돌연,
나팔꽃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 같아
불안하다

새와 바람 사이,
바람과 쥐똥나무 사이에서
나팔꽃은 문득,
말을 아낀다

 

 

 

 

 

 

 

 Fortune teller reads message picked by parrot at roadside in Lahore, Pakistan

 

 

 

랙홀 / 박남희

 

 

나는 어린 시절 
목수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목공 일을 도와드렸다
그 때 아버지는 넓적한 송판을 대패로 밀어
문짝이나 마루를 만들고 집을 만들었다
그 때 송판은 솔향기 짙게 풍기며
간혹 가다 여기 저기 
알 수 없는 구멍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나는 내 유년을 데리고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
세상 밖 풍경을 구경시키다가 흘끗
마당 앞 세발자전거나 냉이꽃 옆에 세워두곤 하였다
나는 그 때 그 구멍이 단지 
다람쥐 구멍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그 구멍은 차츰 내 안으로 들어와
블랙홀이 되었다
나는 그 때 너무 단단한 것은 저렇게
구멍을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빠져나간 옹이는
내 생애가 수 없이 만들어 놓곤 했던
고집같이 단단한 것들이라는 것도 알았다
내 안의 블랙홀은 때때로
제 멋대로 어둠을 잡아당겨 여기저기
수많은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그 때마다 나는 허기져서 
빈 웅덩이를 채우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별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늦게
지쳐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면
내 안의 블랙홀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그 안에 갇혀있던 내 젊은 별이 아팠다
        
 

 

 

 

 

 

enjoying the sunset...

 

 

 

폐차장 근처 / 박남희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는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Guambiano Colombia

 

 

 

로또 계시록 / 박남희  

 

 

  세상이 아주 끝나기 전에 너무 젊은 꽃들은 바다에게로 가라, <로또> 너무

울어서 아픈 꽃들도 바다에게로 가라, <로또>가서 맨 몸으로도 넉넉한 파도

되어라 <로또>

  끝끝내 파도도 되지 못하는 세상의 뼈와 살이여, <로또> 그대들은 세상이

싱거워지기 전에 산으로 가라, <로또> 가서 누군가 단단한 바위무덤 속에

감추어둔 복권의 꿈이나, 말 없는  呪文이라도 되어라 <로또>

 

새가 날아와 오래 앉았다 떠난 가지,
의 알 수 없는 리듬이여<로또> 파도가 흔들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기억,
의 대책 없는 침묵이여<로또> 그래, 이 땅의 아픈 가지도 기억도
기억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도 너무 졸릴 때는 여관으로 가라,<로또>
가서 끝끝내 잠들지 않고 점점 뜨거워지는 싱싱한 물이 되어라<로또>

 

말세가 가까이 왔느니라 <로또>


       

 

 

 

 

Cholistan Express.

 

 

 

고양이는 독서 중 / 박남희

 

 

우리 집에는
수많은 도둑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꽤 지적으로 생겨먹었다

 

가만히 보면
장자를 닮은 고양이
푸코를 닮은 고양이
김수영이나 이상을 닮은 고양이들이
전신주와 나팔꽃 사이의 중간쯤 계단에
웅크리고 있다

 

고양이는 가끔 계단 위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재빠르게 어디론가 몸을 숨기기도 한다

 

하지만 고양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고양이는 내가 밟고 온 계단 밑의
수많은 역사책들과 그 역사책 속에 숨어있는 이름들과
그림자들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내가 밟고 올라가고 싶어하는
계단 위쪽의 정체불명의 빛과 발자국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고양이는 내가 없을 때 수시로 독서를 한다
침침한 계단 위를 오르내리며
그동안 인간이 거느리고 온 세상과
우리가 만나고 싶어하는 것들의 편차를 읽고 있다

 

고양이는 계단 위에서
내가 초등학교 자연시간에도 배울 수 없었던
나팔꽃과 전신주 사이의 간격과,
하늘을 나는 새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쥐들의 표정을 읽고있다

 

고양이는 지금도 독서중이다
사람들이 미처 읽어내지 못한
빛과 어둠이 남겨 놓은 문장들을 읽고 있다

 

두근거리는 심장 근처에
날카로운 긴장의 발톱을 감추고,  

 
 

 

 

 

 

 

Going Home

 

 

 

멍요일 / 박남희 

 

 

오늘은 멍요일이다

 

어젯밤 말 안 듣는 아들을 심하게 때리고
내 가슴에도 멍이 들었다
오늘 아침 아들 종아리에 난 멍자국을 들고
파주 낙원공원묘지 아버지 산소를 찾아간다
그동안 나를 키우시며 멍들었을
아버지의 멍자국을 만져보러 간다

 

무덤 위에는 어느새 풀들이 무성하다
바람은 무덤위의 풀을 흔들고
자꾸 내 마음을 흔들어 댄다

 

바람 속에 까칠한  멍자국이 보인다
세상에서 흔들리는 너무 많은 것들에게
더 이상 흔들리지 말라고 붙잡다가 생긴
멍자국을 가지고, 저 바람은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무덤은
당신의 멍을 하늘로 밀어올리며
푸르게 푸르게 무성하다

 

나는 가지고 간 아들의 멍자국을
아버지 무덤에 가만히 대어본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푸른 멍이
반갑다고 반갑다고 서로 몸을 비비는지
감촉이 까실까실하다


 

 

 

 

 

 

  

 

 

봄, 55일 면허정지 / 박남희 

 

 

신호위반 과태료를 못냈다고
면허정지 고지서가 날아왔다
55일 면허정지,
하루 5시간 교육필시 20일 감면

 

나는 망연히 창 밖의 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겨울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무수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저 햇빛도 때로는 돈이 없어 면허정지를 당할까?
면허정지 세 번이면 면허취소,
꽃들도 이런 규칙 속에서 피었다 질까?

 

지난 겨울, 너무 일찍 찾아온 봄에
옆집 담장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철없이
철없이 봄바람이 불고, 봄은 속도 위반에
신호 위반, 겨울 속의 꽃들은 주정차 위반에 걸려
한순간 단칼에 목을 떨구었다
 

철없는 봄이 잠시 왔다 사라져간 자리에
노란 꽃들이 쪼르르 모여 앉아
교통안전 교육을 받고 있었고, 그 옆의 개미들은
고장난 노란 신호등을 피해 어디론가 기어가고 있었고,
나는 문득, 창 밖에서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굴러가는,
나무들이 떨군 무수한 면허증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Shepherd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 박남희
 

 

어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오래된 먼지도 나오고
시간을 측량할 수 없는 체온의 흔적과
오래 씹다가 다시 싸둔
눅눅한 껌도 나온다

 

어쩌다, 오래 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를 뒤지면
달도 나오고 별도 나온다
옛날이야기가 줄줄이 끌려나온다

 

심심할 때 어머니를 훌러덩 뒤집어보면
온갖 잡동사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뒤집힌 어머니의 안 쪽이 뜯어져
저녁 햇빛에 
너덜너덜 환하게 웃고있다
 

 

 

 

 

 

 

Prayer

 

 

 

해바라기 / 박남희 

 

 

아름다움만으로는 모자라
너는 그토록 많은 씨앗을 품고 있었구나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난해하다
신은 왜
태양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저렇듯 욕심 많은 여자로 만들어 놓았는지
 

해설핏한 가을 날
아름다움으로도
열매로도 온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쓸쓸한 논둑길을 혼자 걷고 있는 아내여


미안하다
약속인 듯 네 몸에 심어두었던
촘촘한 말들이 미안하다
 

 

 

 

 

 

 

 

Pilgrims

 

 


멱살만 남았어요 / 박남희 

 

 

그해 겨울 강물은 구름 밑 산자락에
멱살만 남겨놓고
어디론가 흘러갔어요


쌀 독 깊이 파고들던 쌀벌레들이
몸이 추워, 쌀독 밖으로 기어 나오고
사춘기를 갓 지나던 내 청춘은
찬바람이 정의하던 시대를 거슬러
마당가 붉은 흙을 녹이던
햇살 한줌으로 머물고 싶었어요


무언가 멱살이 필요하던 시대
나무들은 바람에게 멱살을 잡혀
사정없이 흔들리다
우수수 이파리들을 모두 떨구며
제 뿌리를 아파했어요


거리마다 말들은 무성했으나
그것은 단지 행방을 알 수 없는 낙엽이거나
휴지조각이 되어가던 채권일 뿐
좀처럼 멱살의 정체를 알 수 없었어요


겨울바람은 그 때 나에게
구름의 멱살을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어느 순간 하얀 쌀밥이 되었다가 돌연
글썽글썽 눈물이 되어 떨어지던 구름은
한순간, 바람에게 멱살이 잡혀 끌려 다니다가
끝내 멱살만 남곤 했어요
 

그 때부터 일기장을 채워가던 내 안의 말들은
스스로 알 수 없는 행렬을 갖추더니
번지를 알 수 없는 멱살이 되었어요
시가 되었어요
 

내 청춘의 일기장엔 끝내
멱살만 남았어요

 

 

 

 

 

 

 

 different point of interest (infra red picture)

 

 

 

 덤불에 이르는 길 / 박남희 

 

                        

   그녀는 불이다 성격이 불같은 게 아니라 몸이 불이다 그녀의 고향은 덤불이다

덤불은 이스탄불 옆에 있는 지명이 아니다 그녀는 뜨겁고도 차갑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 수시로 꿈틀거리면서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지고, 오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어디론가 막 달려 나가기도 한다 그녀는 속도에 얽매이

지 않는다 그녀가 느리게 걸어갈 때도 그녀의 속도는 우주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덤불을 그리워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덤불

의 형식에 매혹되어 있다 단번에 확 타오를 듯 타오르지 않고,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이 엉겨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길을 가지고 있는 덤불, 그 안에 가시를 숨기고 있지만 순식간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덤불, 그녀는 그런 덤불의 형식을 운명

의 형식이라고 부른다


  덤불은 종종 눈물을, 고통을 몸밖으로 밀어내어 꽃을 피운다 그녀는 자신과

덤불이 한 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제 몸이 덤불에 이

르러 화사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환상은 그녀에게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아침은

그녀의 몸에서 눈물의 형식인 이슬의 옷을 벗겨주며 한밤의 캄캄한 꿈에서

깨어나 덤불에 이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깨닫는다 그녀의 고향은 내 몸이다 나는 불을 가두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형식이고 운명이다 아아, 내 몸의 가시가, 꽃이 느껴

진다 어서 내게로 오라, 내 사랑! 내 몸이 덤불이다 내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meeting place, pushkar

 

 

 

저녁 / 박남희 



하루의 뜨거운 햇살이 날아가 박히는
저녁은 과녁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느덧 서산에는
과녁에서 화살을 거두어들이는 소리가 붉다


화살이 너무 많아 뜨거웠던 여름도
어느새 스스로의 과녁을 찾아 떠나고


뜨거움과 붉음 사이에
성큼 가을이 와 있다
 

가을 속에도
산이 있고, 내(川)가 있고, 꽃이 있다


계절마다 여기저기
메아리의 과녁, 빗방울의 과녁, 꿀벌의 과녁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
제 몸의 무수한 화살 자국을 어루만지고 있다 

 

 

 

 

 

 

 

 one fine windy evening, bhaat

 

 

 

꽃이 방전된다 / 박남희

 

 

세상의 꽃이 너무 아름다울 때 나는 졸립다
눈부터 피곤해져 오고
이내 눈이 스르르 감긴다


아름다운 꽃은 번개처럼 위험하다
수만 볼트의 전압을 가지고 있다
내 안의 꽃은 수만 볼트의 전압에 눌려서
점점 무거워진다


아름다운 꽃 속에 숨어있던 전류는
졸음을 몰고와 나를 혼수상태에 빠뜨린다
이럴 땐 성냥개비를 눈꺼풀에 끼워도 소용이 없다
최상의 방법은 아름다운 꽃이 내 안의 꽃과 만나
즐겁게 방전되는 일이다


나는 나를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순간 깜박 존다
몸 밖의 꽃과 안의 꽃이 만나 방전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신이 점점 맑아져 온다
희미하던 것들이 맑게 보이기 시작한다


몸 밖의 꽃과 안의 꽃의 주소가 같다는 것을
내 안의 졸음은 이미 알고 있다
꽃이 방전되는 것이 하루이고 역사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

 

박남희 시인


경기 고양 출생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9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1997)  
 
시집    < 폐차장 근처 > 
평론    < 탈주와 회귀욕망의 두 거점 -장정일론 >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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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27 06:35

    첫댓글 몸에서 발생하는 분노와 욕심의 에너지를 아무런 잡념 없이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미꽃이 사람의 머리처럼 복잡하다면 결코 꽃을 피울 수 없을 것입니다. 박남희 시인은 사물을 관조하여 삶의 철학을 추출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09.07.27 16:54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우리의 마음도 늘 처음처럼 새로웠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동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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