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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기획특집·2
성년식적 시련의 문학__
──이상李箱의 경우
이보영
오늘날에도 성년식적 주제가 작가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극복하고 싶은 갈망 때문이다. 그런 갈망은 식민지 작가에게 더 간절할 것이다.
본래 성년식은 고대부터 내려온 전통적 의식이었다. 곧 종족種族이나 비밀결사 또는 샤먼들이, 그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 또는 비밀단체의 사명감이 부여된 구성원, 혹은 샤머니즘의 의식을 수행하는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받아야 하는 의식儀式인 것은 주지되어 있다. 그 의식을 위하여 사회집단의 우두머리는 ‘성년이 되려는 젊은이’에게 며칠 동안 굶기거나 생매장하거나 칼싸움도 시킨다. 그런 가혹한 시련을 무사히 통과해야만 그는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거듭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통과의식이 문학작품에서 취급될 때 원형原型대로 취급되지 않고 변형되곤 한다. 근대의 성년식적 소설에서는 성년이 되기 위한 시련이나 그로 인한 정신적인 거듭나기 또는 재생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작가 개인의 정신적 위기의 극복을 위한 것으로 변형되며, 앞에서 언급한 생매장이나 끼니를 굶기는 시련은 가령 감옥에서의 징역살이로 대체되기도 한다. 특히 식민지 원주민의 노예적인 삶은 그 자체가 가혹한 시련이어서 그들에게 삶은 성년식의 과정과 다름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의 감옥을 ‘죽음의 집’에 비유하고, 자기 자신이 겪은 감옥생활을 취급한 장편소설의 제목을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시베리아 감옥’의 체험은 성년식의 체험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밀치아 엘리아데가 「성년식과 근대적 세계」에서 S.T 콜리지의 「늙은 뱃사람의 노래」 T.S 엘리엇의 「황무지」,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등 성년식적인 시와 소설을 예거한 뒤에 “성년식적 시련에 대한 동경은 온전하고 결정적인 거듭나기에 대한 동경을 들어내고 있다.”1)고 말한 것은 현대인의 불안과 그로 인한 내면 분열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말해 주거니와, 이상李箱도 “미래는 전적全的인 인간을 요구한다. 대조에서는 인간은 목적이다.”(「권두언」 ) 말한 적이 있다. ‘전적인 인간’은 소외되거나 내면이 분열되지 않은 온전한 인간으로서 그는 대립적 인간관계에서 편리한 이용가치가 아니라 그의 인격이 존중된 ‘목적’으로 대접 받는다.
이상이 굳이 온전한 인간을 이상적 인간으로 갈망한 것도 식민지 원주민의 식민지적 모순으로 인한 내면 분열이 정신병리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식민지 원주민은 교활한 체제 순응자 외에는, 자기 땅에서 제국주의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식민지적 모순으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걸리기 마련이다.
성년식 과정에서 ‘성년’이 되려는 젊은이는 일단 사회에서 고립되어야 하는데, 성년식적 소설의 경우에는 그 고립이 변형된다. 반체제적 소설의 작가의 경우가 적절한 예이다.
작품을 통한 반체제적 저항은 몹시 위험한 모험이기 때문에 그런 작가는 극소수이다. 가령 일제 강점기에는 염상섭과 이상, 이기영 등이 있다. 그들은 사회적 고립상태에서 창작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고립이 바로 성년식을 위한 고립이기도 하다.(이기영만은 카프문학단체 회원이었기 때문에 염상섭과 이상처럼 고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일제 식민지 한국 작가가 당한 고난은 독립국 작가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독립국 작가들이 누리는 시민적 자유, 또는 정치적 자유가 박탈당한 굴욕적 생활이 일상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년식적 과정은 고대에서는 극단적 고통의 시련과 그것을 이겨낸 피시련자에게는 떳떳한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이 부여되었지만, 근대작가의 경우 혹독한 시련의 밤과 시련 통과 후의 해방감이 상여금으로 주어진다. 이와 같은 과정은 이상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처녀작인 중편소설 「12월 12일」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그 주제가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다.
한국 최초의 분신分身소설 또는 실존주의적 소설, 불교적인 소설로도 분류될 수 있지만, 성년식적 소설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주제의 전개과정에서 주인공이 겪는 극단적인 시련이 그의 정신적 재생을 위한 것이라면, 그런 재생은 실존적 위기를 거친 재생일 수 있다. 따라서 성년식 과정은 실존적인 위기 극복의 과정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12월 12일」에서의 성년식적 주제는 실존주의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까지 발표된 「12월 12일」 연구에는 성년식적 주제에 주목한 적이 없다. 그런 주제는 현대 한국 소설에서 너무나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이는 한국문화사와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에서 ‘성년식’은 유교적 교양체험을 압도하거나 그와 맞먹는 중요성이 부여되지 않았다. 정부에서 시행하는 ‘과거’의 급제가 정신적 성년의식인 나라에서 ‘성년식’은 전혀 품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성년식적 소설의 구조는 교양소설의 구조와 닮은 점이 있다. 교양소설의 경우 주인공은 사회적 소외와 고립상태라는 시련의 과정을 통하여 내면적으로 발전함으로써 성숙한 인간으로서 사회에 복귀한다. J.S 밀이 그의 「자유론」에서 인용한 빌헬름 훔볼트의 말에 의하면, “교양이란 당자의 다양한 잠재력의 점진적인 조화로운 발전”을 의미한다. 그 고전적인 본보기가 괴테의 『빌헬름 마이터의 수업시대』이다. 일반적으로 교양소설이 괴테적인 교양소설을 모델로 삼은 것임은 주지된 사실이요, 그와 같은 소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제국주의자의 식민통치로 인하여 가혹하고 각박한 식민지에서는 그와 같은 교양소설은 바라기 어렵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식민지 원주민에게는 괴테적 교양의 이념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는 일제 강점기에 나온 교양소설이지만 어둡고 각박한 식민지적 역경과는 거의 무관한 작품이었다. 식민지 원주민의 일상생활은 너무나 궁박해서 교양의 여유가 없다. 이상이 「오감도 시 제1호」에서 제시한 “막다른 골목”에서 “13인의 아해”의 “질주”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것은 그 원주민의 결코 여유작작할 수 없는 정신상황을 말해준다. 여기서 “질주”는 단지 아동들의 성마른 달리기만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쫓기면서 살아야 하는 원주민의 초조한 정신상황의 비유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교양소설 주인공의 내면적 발전을 위한 수업修業은 불가능하다. 에세이적 소설 「공포의 기록(서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교양은 그의 겉모양새와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남루. 수염도 텁수룩하다. 거리. 땀.
다음은 「공포의 기록」에 나온다.
성격파산 무엇 때문에?
나의 교양은 나의 생애와 다름없이 되었다.
헌누더기 수염도 길렀다.
거리. 땀.
“성격파산”은 “성격분열”로써 식민지 원주민이 겪어야만 되는 정신적 질병, 곧 인격의 파탄을 의미한다. “나”의 “교양”이 “현재의 겉모양새”나 “생애”와 동일시된 것은 그런 현재의 정신적 상황을 초극하기 위한 교양의 이념과 어긋난다. “거리. 땀”이 바로 “나”의 현재의 생존상황이다. “거리”는 생존을 위한 노역勞役의 현장이요, “땀”은 고된 노역의 상징이다. 인용은 일제의 “공포정치”에 시달리는 원주민의 생존상황이다. 에세이 「오스카 와일드」에서 “일상생활의 중압이 나에게 교양의 도태淘汰를 부득이하게 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런 생존상황의 결과다. “일상생활의 중압” 때문에 “나”의 “교양”은 선과 악, 미와 추 같은 대립관념의 선택(‘도태”)이 불가능해져서 “악”의 길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생활이 각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그와 같은 식민지적 역경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12월 12일」이 성년식적 소설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12월 12일」의 주인공 이름이 “X”인 것도 그와 사회의 심각한 대립을 암시한다. 그는 사회에서 취소(“X”) 또는 부정당한 동시에 이에 대한 반발로써 그 사회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자이다. 생활난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 밥벌이를 하다가 “화태樺太의 탄광노동자로 일하던 도중에 사고를 당하여 한쪽 다리 절단수술을 받기로 한 그는 극도의 염세주의자가 되어 “신神”을 부정할 정도가 된다. 우연히 알게 된 재일교포의 재산을 상속받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 그의 두통거리는 고국의 “T”라는 친동생과의 불화로써 그 연장선 위에 조카 “업”과의 불화가 겹친다. 게다가 “업”은 그가 상속 재산으로 운영하고 있는 병원의 “간호부” 애인이어서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방해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곤경에 처한 그에게 어느 날 닥쳐온 사건은 성년식적 시련을 암시한다.
「선생님! 잠에 취하셨어요? 선생님!」
구루마 바퀴 도는 소리, 매미 잡으러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소리. 이런 것들은 아직도 그대로 붙어 남아 있어서 손으로 몰래 훑으면 우수수 떨어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그의 잠! 졸음!은 졸음 그것만으로 단순한 것이었다.
장주莊周의 꿈 같이─눈을 부벼 보았을 때 머리는 무겁고 무엇인가 어둡기가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짧은 동안에 지나간 그의 반생의 축도를 그는 졸음 속에서도 피곤한 날개로 한 번 휘어져 날아보았는지도 몰랐다. 꿈을 기억할 순 없었으나 꿈을 꾸었는지도 혹은 꾸지 않았는지도 그것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디인가 풍경 없는 세계에 가서 실컷 울다 그 울음이 다하기 전에 깨워진 것만 같은, 모든 그의 사고思考의 상태는 무겁고 어두운 것이었다.
머리가 무겁고 무엇인가 어둡기가 “짝이 없는” 정신 상태는 죽음직전의 상태인데, 그 때 그가 장주의 꿈에 나오는 “나비”처럼 “한 번 휘어져 날”은 것은 “나비”로 비유된 “광선”의 굴절과 그로 인한 과거로의 광속光速에 의한 시간여행을 암시한다. “반생의 축도”는 “그 짧은 동안”에 상기된 그의 과거사의 암시다. 앙리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냇물에 익사하거나 목매어 죽게 된 사람은 죽기 직전 수 초 동안에 그의 과거사가 파노라마처럼 상기된다고 말했거니와, 그와 같은 이변이 “X”에게 일어난 것이다.
“풍경없는 세계”는 “저승”의 세계이며 “나비”가 여행한 것은 “나비”가 환생還生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풍경 없는 세계에 가서 실컷 울었다”는 것은 시간여행이 끝난 뒤의 허무주의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그 시간 여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것은 어쨌든 거리의 수례(“구루마”)나 아이들 소리 같은 평범한 일상사와 극단적으로 다른 무의식 세계의 사건으로서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성년식적인 시련으로 “죽음”을 체험한다. 물론 그것은 성년식적인 거듭나기를 위한 예비단계의 시련이다. 이 “죽음”은 “졸음”이라는 반생반사半生半死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거니와, 그가 가장 든든한 정신적 의지처인 “신神”을 부정하고 친족親族과의 불화가 비극적인 경지에 이르자 감행한 철로 자살은 성년식적 시련의 최종 단계의 사건이다.
이 소설의 성년식적 구조에 맞추어 사후의 재생이 약속 된다. 재생은 생전에 그가 실천한 인류애의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제시된다.
그는 지금 모든 세상에 그치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 받지 못하였던 거룩한 성도聖徒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새로운 우주의 명랑한 가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 환상적인 장면은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의 영향을 받고 있다. 생전의 착한 봉사활동의 보수를 받지 못한 그는 사후에 보상으로 “성도”의 반열에 끼게 되고, 영겁을 상징하는 영험한 “물” 곧 천국의 “생명수”를 마시고 “맑고 따스하고 투명”한 공기를 호흡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재생에 “논공행상”이라는 의미가 수반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인류애가 보수를 받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아쉬웠던 때문이다.
성년식적 사건이 나타난 이상의 초기 시는 「광녀의 고백」이다. “광녀”는 자선적인 마음에 광분狂奔하는 여자라는 뜻인데, 그 자선에 의하여 남자 고객들을 “나한羅漢”으로 상승시킨다. 이는 그녀가 독실한 불교신자임을 입증하는 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불교신자가 되도록 한 사건이 일시적인 죽음을 암시하는 익사라는 점이다.
여자의 입은 작기 때문에 여자는 익사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여자는 물처럼 이따금 거칠어지기도 한다.
“입”이 몹시 작은 것은 그녀의 약소한 육체적 조건을 암시하고 “익사”는 남자 고객에게 당한 폭력적 성교性交의 암시이다. 그 “익사”라는 가혹한 시련을 겪고 거듭났을 때 그녀의 불성佛性이 깨어나서 그녀는 불교신자가 되었고, 그녀의 사회적으로 수치스러운 영업 또는 죄행罪行은 많은 남자들에게는 “나한”이 되기 위한 수업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매음은 돈을 벌기 위한 영업이기는 커녕 불교적 자선행위와 다름없다. 「광녀의 고백」에서 성년식적 과정은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성년식적 시련은 「흥행물천사」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시의 여주인공은 흥행단 소속의 처녀로 그녀가 거쳐야 하는 흥행을 위한 훈련은 “(몸뚱이의) 한공汗孔은 한공만의 형극荊棘”이 되었다고 말할 만큼 극도로 가혹한 것이지만, 그 단계를 거침으로써 그녀는 자기 육체를 너그럽게 남자들에게 분여分與하는 “천사”같은 여성으로 상승한다. 그녀 역시 성년식적 시련을 거침으로써 자기희생적인 “천사”로 거듭난 것이다.
2.
성년식적 시련과 관련하여 이상의 경우 각별히 주목되어야 할 것은 그의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자살충동으로 이는 「12월 12일」에서부터 볼 수 있다. 다음은 이 소설에 삽입된 <작자의 말> 일부이다.
나는 얼마동안 자그마한 광명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전연 얼마 동안에 지나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또 한 번 나에게 자살이 찾아왔을 때에 나는 내가 여전히 죽을 수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참으로 죽을 것을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그에게 “자살”은 일생에 다시없는 행운과 다름없다. 그의 삶은 언재나 위태롭고 불안해서 자기를 “도승사”로 비유한다. 그 삶은 항상 죽음을 각오한 것임을 그는 “도승사”로 암시한 것이다. 따라서 성년식적 시련은 고대의 부족사회나 샤먼 세계에서의 그것처럼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자기 자신에게 강요한 것이다. 그 점에서 「광녀의 고백」이나 「흥행물 천사」의 여주인공 경우와 다르다. 또한 자살이라는 시련의 한 가지 특징은 정신적 재생을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는 절망적인 것이라는 점에 있다고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추정은 “펜은 나의 칼이다”는 <작자의 말>의 결어에 의해 뒤집힌다. “펜”은 「12월 12일」이 그의 유서임을 암시하지만, “최후의 칼”이 상징하는 자살용 칼은 역설적으로 최후의 칼이 아니었다. 만일 이 소설을 문자 그대로 마지막 유서라면 「12월 12일」을 그 펜으로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12월 12일」의 작자는 이 작품을 씀으로써 그의 자살충동을 초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집필함으로써 “자살”을 예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12월 12일」에서 작자의 성년식적 죽음(“자살”)에는 성년식적 재생의 희망이 잠복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일은 이상의 에세이적 소설 「산촌여정」에서도 볼 수 있다. 「산촌예정」은 반체제적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했기 때문에 검열관의 눈을 속이는 암시적 수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이 「산촌여정」의 결말이다.
근심이 나를 제한 세상보다 큽니다. 내가 갑문閘門을 열면 폐허가 된 이 육신肉身으로 조수潮水가 스며들어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메소이스트’ 병甁마개를 아직 뽑지는 않습니다. 근심은 나를 싸고돌며 그러는 동안에 이 육신은 풍마우세風磨雨洗로 저절로 다 말라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밤의 슬픈 공기를 원고지 위에 깔고 창백한 동무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속에는 자신의 부고도 동봉하였습니다.
“갑문”은 자학증 환자 같은 화자의 자살용 독약이 들어있는 약병의 “마개” 은유이다. “조수”는 그의 “육신”을 파괴할 독약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가 독약병 마개를 열지 않은 것은 조국을 위한 반체제운동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근심이 나를 제한 세상보다 큽니다.”라는 도전적인 구절이다. “근심”은 일제의 식민통치로 고난받고 있는 민족을 위한 “근심”이요, 그것이 자기를 소외한 “세상”보다 크다고 한 것은 그 “세상”을 제압하고 싶은 의욕에 연유한다. 따라서 그를 소외한 세상에 대한 복수의 충동이 그 표현 속에 잠복해 있다. “근심”으로 인하여 이미 “폐허”처럼 된 화자의 “육신”이 “풍마우세”로 사라진다는 것은 성년식에 닥쳐올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죽음은 거듭나기를 위한 죽음이며, 재생은 조국의 재생과 궤를 같이 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바, 이를 상징적으로 예시한 구절이 바로 화자 자신의 유서 편지에 동봉한 “부고”이다. “부고”는 반체제 투쟁과정에서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편지인데, 이상의 반체제적 작품에서 그 유서는 특수한 의미가 있다. 단편소설 「슬픈 이야기」에서 비 오는 날 “젊은 사람”이 길가 “우체통”에 넣은 “편지”와 마찬가지로 그 “편지”는 자살용이든 타살용이든 “칼”의 환유이기 때문이다. 문맥상 「산촌여정」에서의 “부고”가 딸린 “편지”는 민족 해방투쟁에서 사용될 무기(“칼”)의 비유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편지”는 반체제 투쟁의 결의만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재생은 실현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화자의 경우 성년식적 시련으로서의 “죽음”은 닥쳐오지만, 그로 인한 거듭나기는 성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산촌여정」의 성년식적 시련은 완료되지 않고 있으므로 이 작품은 성년식적 작품으로는 미흡하다고 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산촌여정」은 식민지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비록 성년식적 시련이 중도발달 상태에 머물러 있을 지라도 성년식적 시련을 통한 거듭나기가 기약된 소설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12월 12일」, 「광녀의 고백」 및 「흥행물 천사」 등에 나타난 성년식적 시련과 「산촌여정」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놓인 「지주회시」, 「실화」, 「종생기」에서의 시련의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월 12일」 등 초기작에서의 시련이 개인적인 차원의 시련인 반면 「산촌여정」을 비롯한 후기작은 개인적 차원의 시련이 민족적 차원의 시련으로 발전한다. 이때 화자의 개인적 자아의식은 동시에 반체제적 민족의식으로 발전한다.
3.
「지주회시」의 주제는 ‘거미와 돼지와의 해후, 또는 대결’을 의미하는 제목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부부의 비유인 “거미”는 사회에 대한 원한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들이 서로를 성적性的으로 착취한다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이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빈궁한 부부이다. 주인공 “그”가 극도로 게으른 잠꾸러기라는 것은 사회와의 소통이 없는 허무주의자임을 암시한다. “나미꼬”라는 일본식 이름의 카페 여급은 남편을 먹여살리기 위해 매음을 한다. 반면 “돼지”에 비유된 A취인점 전무, R회관 주인 및 A추인소 조사부장 “오吳”는 탐욕한 물질주의자로 친일적인 협잡배와 같다. 이 두 유형의 등장인물을 배후에서 지배하고 있는 인물이 일제의 식민지배 장치인 경찰서의 “경부보”이다. 그에 대하여 A전무 등은 비굴하게 아첨하고 “그”는 어릿광대적으로 저항한다. 이런 상반된 반응이 A취인점 전무의 나미꼬에 대한 폭행으로 「지주회시」의 중심적 사건과 관련하여 일어난다. 어느 날 A전무는 나미꼬를 R회관 이층에서 층계 아래로 떠밀어 추락시킨다. 다음이 그들이 경찰에 소환되어 그 사건과 관련하여 심문을 받은 뒤에 일어난 일이다.
유치장에서 연회로(공장에서 가정으로) 이십원 짜리-이백여명-칠면조-소세이지-비겨-양돼지-일년전 이년전 十년전- 수염-냉회와 같은 것-남은 것-뼉다귀-지저분한 자죽-과 무엇이 남았느냐-닫은-일년동안-산채 썩어 들어가는 그 앞에 가로놓인 아가리 딱 벌린 일월이었다.
자유연상에 의하여 제시된 인용문의 의미는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의미심장하다. A전무 등과 화자(그)의 경제적인 생활수준, 일제통치에 대한 대응방법 및 인생관 등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치장”에서 연회(장)으로란 A전무 등이 “경부보에 뇌물을 바침으로써 나미꼬 사건으로 인하여 감금되었던 “유치장”에서 쉽게 풀려나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한 송년 연회장으로 간다. 그러나 공장노동자나 지식노동자들은 그 날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안식처인 “집”으로 가버린다. A전무 등이 주죄한 연회장 참가자의 수효는 200명이요, 각자가 “20원 짜리” 비싼 요리를 먹게 되는데, 거기에는 “칠면조” 요리나 “비겨”나 “소세지” 요리도 포함된다. “양돼지”는 A취인점 전무 등을 경멸하기 위한 별명이다.
인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년 전” 이하인데 그 뜻은 무엇인가? “그”는 “일년 전”이나 “이년 전”의 수염을 그대로 두고 있다. 그것은 “십년 전”의 수염과 같다는 과장이다. 그만큼 그의 생활은 나태하다. 사회적 체면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인용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냉회와 같은 것”이다. “냉회冷灰는 『장자莊子』의 「제물론」에 나오는 “고목사회枯木死灰”에서 ‘사회’의 뜻이다. 장자는 “몸은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불이 꺼져서 죽은 재와 같은 사람”은 세속적 욕심을 떠나 무위자연의 진리를 체득한다고 말한다. 「종생기」에서의 “고고枯槁”도 “고목枯木”과 같은 뜻이다. “뼉다귀”도 “고목”과 그 뜻이 같으며, 이상의 단편 소설 「동해」의 “해骸”와 같은 뜻이다. 화자(그)에게 남은 것은 단지 화려한 크리스마스 연회와 너무나 대조적인 “지저분한 수염”과 “냉회”와 “뼉다귀”뿐이다. 이 것은 “그”의 성년식적 시련 과정의 “죽음”을 암시하며, 이는 “산채 썩어 들어가는 그 앞에 가로 놓인 아가리 딱 벌린 일월”이 입증한다. 과연 “산채 썩어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그가 “산송장”과 다름없다는 것을 암시하며, “아가리”는 그를 삼키려는 “죽음의 심연”과 다름없다. 그러나 “그”는 10년 전의 “수염”을 지금도 그대로 달고 있을 정도로 세속적 생활이나 욕망에 초연하므로 그 “아가리”의 위협도 태연하게 대할 수 있으리라.
인용문이 암시해 준 성년식적 시련이 극점에 이른 사건이 「지주회시」의 결말 부분에서 일어난다. “경부보”의 명령을 따라 A전무가 나미꼬에게 준 위자료를 탕진하기 위하여 R회관 카페로 간 “그”는 “안해야, 또 한 번 전무 귀에다 대고 양돼지, 그래라. 걷어차거든 두 말 말고 층계에서 내리굴러라.”며 상상적인 충고를 한다. 전날 A전무가 나미꼬의 너무 깡마른 몸을 비웃자 그녀가 당신은 왜 양퇘지처럼 살이 쪘느냐고 대꾸하여 층계에서 떠밀려 추락했거니와, 다음번에는 그를 “양돼지”라고 놀려주어서 그가 층계에서 떠밀면 두말없이 층계 끝까지 굴러떨어지라는 것다. 여기서 추락은 바로 성년식적 시련의 극한점이다. 그 극한점을 무사히 통과해야만 정신적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실화」는 「단발」과 「슬픈 이야기」에 이어진 이상의 아나키즘적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진정한 주제의 해명을 위해서는 정치적인 읽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요 인물의 정치 이념 문제가 중요해진다. 다음은 이상과 유정兪政의 대화이다.
“신념을 빼앗긴 것은 건강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쉬운 경우이더군요.”
“이상 형, 형은 오늘에야 그것을 빼앗기셨습니까? 인제- 겨우 오늘이야- 겨우- 인제.”
“신념”은 민족해방 운동을 위한 정치 이념의 뜻으로 그것이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상실된 것을 서로 말한다. 그 상실 때문에 피박탈자는 “건강” 상실자처럼 “죽음”의 유혹을 받는다는 것인데, 그 “죽음”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자살”이요, 다른 하나는 반체제 투쟁과정에서의 죽음이다. 이상이 택한 것은 후자이다. 다음이 그 죽음을 암시한 대목이다.
유정! 유정만 싫지 않으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에게 부상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이십칠 세를 일기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유정과 이상─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情死)─이 너무나 엄청난 거짓을 어떻게 다 주체를 할 작정인지.
인용은 이상의 내적 독백으로, 「실화」에서 가장 뜻 깊은 대목이다. “요물妖物”은 간통을 일삼는 그의 아내를 의미하며, “불우不友”는 때를 잘못 만난 유능한 인재人材의 뜻이지만, 문제는 “천재天才”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도 “불우한 선비”이지만 “천재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실천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불우한 천재”는 나폴레옹 같은 영웅적 인물이다. 이상도 나폴레옹 같은 “천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요, 그 점에서 나폴레옹 같은 초인을 모방하려고 한 라스콜리니코프(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와 비슷하다. 그런데 「실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어 게임적 소설이다. 제국주의 국가의 권력 언어인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와 피압박의 언어로 조선어와 러시아어 또는 인류적 휴머니즘의 언어로서의 에스페란토가 대결하곤 한다. 가령 동경의 “신보정神保町 영란동鈴蘭洞”을 들 수 있다. 영란동은 동경의 창녀촌의 비유로, “동洞”은 조선의 지배언어인 “정町”과 대립된 피지배언어로써의 “동洞”이다. 창녀촌은 일제에게 그 시민권을 빼앗긴 “동洞”의 주민과 같은 피지배 계층의 마을이다.
그러면 왜 “유정과 이상─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가 “엄청난 거짓”인가? “유정……”이 불경죄에 걸릴만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유정과 이상……”은 소위 「대일본 헌법 제1조」인 “천황폐하는 신성불가침이다.”의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유정과 이상……”은 “유정과 이상이 신성불가침적 존재라는 것은 “천황폐하”의 신분을 참칭僭稱한 것으로 “찬란한” 업적이라할 “정사”이다. 그 “정사”는 사전적인 뜻이 아니라, 자살적인 (반체제적) “동반투쟁”의 뜻이요, 일왕 참칭을 말한다.
인용이 입증하는 불경죄는 최고의 불경죄로 범인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이야말로 「실화」에 잠복한 성년식적 시련에 속한다. 그러면 “죽음”을 통한 재생은 어떤 사건이나 표현에 잠복해 있는가? 그것을 암시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 날 저녁에 내 부질없는 향수를 꾸짖는 것처럼 C양은 나에게 백국白菊을 한 송이를 주었느니라. 그러나 오전 한 시 신숙역新宿驛 폼에서 비칠거리는 이상의 옷깃에 백국은 간 데 없다. 어느 장화가 짓밟았을까? (……) 나는 이국종異國種 강아지 올씨다. (……) 사람이-비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참 재산 없는 것보다 더 가난하외다 그려!
나를 좀 보시지요?
인용에 이상의 정신적인 거듭나기가 함축되어 있다. “이국종 강아지”는 정지용의 시 「카페 프랑스」의 결말 부분에 나오는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의 “이국종 강아지”로 노예적 신분의 비유이다. 이상이 그 구절에 의하여 자신을 일제의 “노예”로 자기풍자적으로 비하한 것도 불경죄로 인한 자기살해와 같은 맥락이다. 그 대가는 무엇인가? “나를 좀 보시지요?”가 암시하는 수난자로서의 상승이요, 그것은 정신적 재생과 다름없다. “나를 보시지요?”는 “나를 보라!”의 완곡한 표현으로 신약성경 <복음서>에 그 유래가 있다. 그것은 빌라도가 유대인 군중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할 “예수”를 가리키면서 말한 “이 사람을 보라”에 근원이 있으며, 후세의 예술가나 철학자의 수난자 의식을 격려했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적 자서전 제목도 「이 사람을 보라」인데, “이 사람”은 쉽게 예술가 자신을 지목하는 “나”로 바뀔 수 있었다. 그래서 이상도 “나를 좀 보시지요.”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실화」의 성년식적 시련은 끝난다.
「종생기」의 성년식적 주제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 소설의 이중구조를 주목해야 한다. 곧 표면의 연애소설적 구조와 심층의 성년식적 소설의 구조이다. 전자는 교양인으로 성장한 “정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구조요, 후자는 소녀시절의 창녀 “정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 구조이다. 종생기의 주요한 작중사건은 표층적으로는 이상과 정희의 연애과정을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종생기」는 그녀와의 연애관계를 다룬 “산호편珊瑚篇” 이기도 하다. 종래 김윤식을 비롯한 대부분의 연구자는 이런 견해에 기울어졌었다. 그러나 “종생기”의 진정한 주제는 정희와의 연애가 아니라, 암호적으로 암시되었기 때문에 식별하기가 어려운 주인공 “이상李箱”의 반체제적 저항이다. 그것은 먼저 “사도死都”로 암시된다. “사도”는 소극적으로는 일제의 침략으로 멸망한 “조선”의 환유이지만, 적극적으로는 일제가 세운 식민지 국가의 아나키즘적 부정이요, 더 나아가 “멸망한 국가”가 아닌 새로운 국가 건설의 의지를 암시 한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창녀 “정희”와 관련된 “「지방덩어리」를 생각하자”는 구절이다. 이 매우 암시적인 구절의 해석을 위해서는 모파상의 중편소설 내용을 참고해야 한다. “정희”와 비슷한 창녀인 “지방덩어리”(별명)는 프랑스 프러시아 전쟁 때 루앙에서 피난민 마차에 동승했는데, 마차 안의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간청을 못이기고, 피난 여행의 안전을 위하여 점령군인 독일인 장교에게 수청한다. 그러나 자기희생적인 수청이 끝나자 그들이 그녀를 냉대하는지라, 꼬르뉴데라는 “공화주의자”가 그들을 비난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노래 “마르세즈”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들이 프랑스 혁명정신을 망각한 것에 분노한 때문이다. 이상이 굳이 「지방덩어리」를 상기한 것은 정희가 그 “지방덩어리”같은 창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꼬르뉴데의 피압박계층의 옹호가 「종생기」의 가장 중요한 상호 텍스트인 「춘향전」(완판본)의 이몽룡 암행어사를 상기시킨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암행어사도 남원의 피압박 평민의 구세주와 다름없다.
「종생기」도 「춘향전」 및 「지방덩어리」와 같은 재앙소설이다. 한국인에게 일제의 한국침탈과 식민통치는 재앙이다. 따라서 이상의 이몽룡 암행어사나 꼬르뉴데와 같은 한국의 구세주가 되고 싶은 충동이 두 소설을 「종생기」의 필수적인 상호 텍스트가 되도록 한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둘 때 다음과 같은 대문의 숨은 뜻을 알 수 있다.
물론 나는 내일 새벽 내 길은 로상에서 무려無慮 내게 필적하는 한 숨은 탕아를 해후할는지도 모르나, 나는 신바람이 난 무당처럼 어깨를 치켰다 젖혔다 하면서라도 풍마우세風磨雨洗의 고행을 얼른 그렇게 쉽사리 그만 두지는 않는다.
아- 어쩐지 전신이 몹시 가렵다. 나는 무연無緣한 중생의 뭇 원한 탓으로 악역惡疫의 범犯함을 입나보다.
“내 길들은 노상”은 부활한 두 이스라엘 사람이 예수를 만나는 “엠마오”로 가는 길이요, “숨은 탕아”는 이스라엘의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사야 45:13)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구세주가 “탕아”인 것으로 보아서 그는 풍류도 아는 멋진 “탕아”였던 남원의 구세주 이몽룡 암행어사의 은유이다. 이상이 그를 “해후”한다는 것은 그와 닮고 싶다는 의지를 암시하며, 그것은 “악역”의 침범과 관련된다. 비록 그는 “무연”할지라도 피압박 민중을 위하여 그들이 감염되어야 할 “악역”을 대신 떠맡은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 그게 “풍마우세”의 한 과정이다. 그와 같은 희생양 역할이야말로 성년식적 시련이지만, 그 결과로써의 재생은 어떻게 이 소설에 나타나 있는가?
앞에서 언급한 「종생기」의 이중구조를 상기해 보자.
그 표층적 구조와 관련된 이야기의 여주인공 정희는 “이상李箱”과 만나 수작하는 과정에서 작가인 그에게 앞으로 도스도에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 및 막심 고리키의 『사십년』에 나타난 피압박 민중을 위한 문학의 창작을 권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동지적 관계를 깨어버리는 배신적 행동, 곧 “S”2)같은 남자와의 간통적 관계가 폭로되고, 그것은 이상을 극도로 절망시켜 스스로 “시체”와 같은 인간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는 “악역”으로 인하여 죽는 동시에 정희의 배신으로 인한 “시체”도 된다. 그래서 “이리하여 나의 종생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는 끝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장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네는 노옹일세.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일세.
아니, 아니. 자네는 자네의 먼 조상일세.
이상은 해골처럼 되어 죽음으로서 “종생”했지만, 그의 「종생기」가 그의 “먼 조상”이 된 것은 그 “먼 조상”과 같은 영원한 고전의 가치를 지나게 되리라는 뜻이다. “먼 조상”은 역설적으로 “먼 후손”과 같은 뜻이므로 “종생기”의 문학적 가치는 과거와 미래에 걸쳐서 빛나리라는 뜻이 되는 바, 그런 가치의 획득이 바로 성년식적 시련을 거친 재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육체적으로 죽지만 그의 작품은 영생한다는 것은 성년식적 소설로는 독특한 일이지만, 그 작품이 그의 분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지사이다.
지금까지 이상의 성년식적 소설을 살펴보았거니와 이로써 밝혀진 것은 그의 여러 편의 성년식적인 시와 소설이 식민지적 모순으로 인하여 빠져들기 쉬운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의지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이상의 성년식적 시나 소설에는 전통적인 공동체 같은 배경이나 축제적 분위기가 없다는 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성년식의 배경은 일제의 가혹한 지배를 받는 식민지인지라, 예스럽거나 독립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이상의 소속된 민족은 독립국의 민족이기는 커녕 독립시켜야 할 민족이었다. 그것은 어쨌든 이상은 일제 강점기에 성년식적인 작품을 소설만이 아니라 시의 형식을 통하여 쓴 작가였다는 것은 문학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이보영 / 저서 『토마스 하디연구』, 『난세의 문학-염상섭론』, 『이상의 세계』 외 다수가 있고, 번역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평론』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