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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분량으로 지루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단 편집은 '글쓰기' 난에서 '등록'을 실행하면 문단 자체가 바뀌어 등록되는 기술적 문제는 제가 좀......
‘살살이’의 처용가
단군님! 용왕님! 부처님! 한울님 그리고 알라시여!
카페지기 소임을 다하려 애쓰지만 빈약한 소재에 허덕이는 글쟁이의 무능을 어여삐 여기소서!
고교 학창시절 그 허약한 친구 살살이를 팔아야 하는 무능을 용서하소서!
자그마치 40 여 년 전 ‘국어2, 古語.’ 시간.
한자가 너무 많이도 나와 두뇌용량이 부족한 우리들에게는 ‘하품 나는’ 시간인데 유독 작은 체구에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살살이’라는 별명의 친구는 하루를 졸다가도 이 시간만 되면 ‘정신집중’ 눈에서 레이저가 나옵니다.
古文중에는 ‘滿殿春’(얼음 위에 댓 닢 자리 보아…….)
‘西京別曲’(서경이 아즐가…….) 등의 ‘남여상열지사’를 다룬 내용이 많이도 나오거든요.
엄격한 선생님이 묵직한 분위기를 잡으며 ‘가락’ 하듯 읽습니다.
처 용 가
작사, 작곡, 노래 : 처용
서벌 밝기 다래 밤 드리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라리 네히어라
둘은 내해 인데 둘은 뉘 해 언고
본디 내해 언다 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 할꼬
엄격하시고 매우 고전적인 老 선생님은 개괄적인 해설과 ‘처용가’가 현대문학에 미친 영향 외로 특히 당신의 담당 학문이 매우 난해하여 학생들이 이해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을 강조하시고는 질문을 받았지요.
질문도 뭘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친구들이 묵묵부답으로 있는 것을 둘러 본 살살이가 손을 천천히 듭디다.
“선생님! 가라리 네히어라 가 무슨 뜻입니까?”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하신 빛이 일순간 얼굴에서 지워지고 뒷줄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흠흠!! 조용!! 그것은 나중에 너희들이 졸업하고 가정을 가진 후에 나에게 와서 물으면 자세히 답변하도록 하겠다. 다음!"
老교사는 곤란한 질문을 절묘하게 우회하신 당신의 기지에 만족하셨지만 살살이는 책을 병풍 삼아 고개 숙이며 내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맹아! 맹색이 선생이 그 설명도 못 한다 카능기 말이 되나? 우리가 얼라가?
알건 다 아는 나이 아이가? 그쟈! 한반도 생긴 이래 간통사건 主題歌 치고는 제일 고색창연한 것 잉기라”
“간통? 간통 주재가?”
“그래! 간통 안 있나! 임마야 모르나? 와 이거 안 있나. 새끼 순진하네!”
살살이는 오른손 엄지를 시지와 중지사이에 끼고는 씨-익 웃었지요.
“처용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밤늦게 집에 와 방문을 열어 봉께 이부자리 밖으로 삐어져 나온 사족(四足)을 보고 자기 부인(內子)과 외간 놈이 간통하고 있다는 거를 알은 거라.
그러나.
‘이거’하는 거 보고도 도끼자루를 찾는다든지 하는 개 같은 경우를 생략하고 유유히 춤추며 걸으며 노래를 부른 기라. 그 노래가 바로 ‘처용가’ 아이가! 맞제! 그라고 요새도 ‘유행가’라 카능기 그 때 처용이 태도를 보고 이웃들이 가락을 ‘유행가’ 라고 부르기 시작항기 유행가의 시초라 카이!
처용이가 유유히(流)걸으며(行) 노래(歌)를 불렀다고 물총(?)사건이 유래가 되어 ‘유행가’라는 말을 낳은 기라! 아나?”
“글쎄라! 맞나?”
“하모! 맞기로! 그라고 처용이도 재밌는 칭구 잉기라…….”
이 때는 살살이 주장을 따라가 보는 것이 순서다.
“내가 어떤 책에 봉께 처용이 생김새나 행동이 당시 보통 신라 사람하고는 쌩판 달랐다 안 카나! 그래서 아마도 북유럽 쪽에서 귀화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고 분석 했더라 카이”
그렇다면,
북유럽 혈통의 이 사나이가 어떤 연유로 신라 서라벌에 귀화하여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분명히 기행(奇行)이라고 까지 해야 할 행동을 한 것이 바로 처용가로 남았다.
자기 마누라와 외간사내가 간통하는 역사적 현장을 두 눈으로 뻔히 목격하고도 읍내 포졸에게 신고한다거나, 부들부들 떨다가 낫을 찾기 위해 광으로 뛴다거나, 현장을 직접 덮쳐 연놈을 끌어내지 않고 덩실덩실 춤추며 소리를 했다고 고증에 기록했으니…….
그 당시 풍속으로는 그런 황당함을 당하고도 ‘가락’을 읊는 쓸개 빠진 신라인은 없었다. 는 것이다.
연구 많이도 했네! 살살이!
이쯤에서는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 조를 인용하는 것이 정석이지.
「통일신라 헌강왕이 동쪽방면을 순행하던 중 안개가 자욱한 개운포(울산)앞 바다에 이르자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들을 데리고 나타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왕이 동해가 바라다 보이는 뒷산에 불사를 크게 이룰 것을 약속하자 용왕은 일곱 아들 가운데 처용을 남겨두고 바다로 돌아갔고 처용은 왕을 따라 동경으로 돌아가 급간 벼슬을 받고 신라여인과 혼인하여 거주하였으나 매일 밤 서라벌 밤거리를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라는 내용으로 귀화인이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갖는다.
다음에는 ‘처용가’의 가락 탄생 설화를 읽자.
「역신(전염병을 관장하는 귀신)이 처용 마누라 아름다움에 반하여 달 밝은 밤에 혼자 있는 처용 부인 방에 침투하여 여색을 범하려 할 제 처용이 출현하여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니 처용의 모습과 대범함 그리고 관용에 놀라서 역신이 간음을 중도에 포기하고 도주했다」
라는 내용으로 그 사건 이후 서라벌 모든 민초들은 역신(疫神)을 쫓기 위해 처용 얼굴 그림을 바람벽이나 기둥에 붙이게 되었고 그 얼굴을 양각하여 기와로 만든 것까지 있을 정도로 신라인들은 처용을 귀신 쫓는데 많이 활용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신은 ‘이거’ 못 한다 아이가. 죽으면서 ‘해탈문’을 통과하몬 육욕이 사그라 지능기 정설인데 역신이 겁탈할라 켔다는 거는 안 맞능기라”
전설이 별거던가?·
전설이 무에 그리 전지전능한 내용의 다큐멘터리던가?
전설 그것 별것 아닙니다.
조화롭게 만들면 전설이지요.
물론 전설의 주인공은 권력자가 대부분이고 역사적 현실이 過去가 되어가는 과정에는 여러 입을 거치면서 민초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미화되어 낭설로 바뀌고 이것이 과대포장 재생산되고 상상을 더하여 발전하면 전설이 되는 게 아니던가.
처용은 매우 異國틱(?)하여 눈은 튀어나올 만치 크고, 코는 꼬부라졌으며 머리터럭은 오글오글했다.
더구나 귀신을 쫓는데 사용할 형상으로 발전(?)시키려면 상상 이상으로 처용의 인상이 점점 험악한 방향으로 바뀌어 갔으리라.
사실은 처용이 역신보다 훨씬 더 못 생겼으리라고 짐작된다.
왜냐하면 처용 얼굴을 본 순간 귀신도 놀라서 도망갔다고 했으니까.
살살이의 속삼임은 이어진다.
“진짜 귀화인이라카모 처용이란 친구도 불쌍한 청춘잉기라”
신라에 귀화하여 서라벌에 기둥박고 잘 살아 보자고 예쁜 마누라까지 얻고 신라 말을 배우려고 애 쓰다가 다른 놈팡이가 부인을 꿰어 차 버렸는데도 신라 말을 잘 못하니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오직 주막에서 배운 노래만 부르며 끓어오르는 내면의 갈등을 춤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었고 밝은 달을 쳐다보고 눈 흘기는 것으로 끝낼 도리 밖에.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지금도 흔하게 보는 사례가 존재한다.
우리 주변에도 흔히 영어나 일본어 등 외국말은 한 마디도 못하면서 외국어 원어 노래를 아무 막힘없이 술술 잘하는 ‘맹꽁이’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지.
그러니 처용이가 춤추고 노랠 부르고 싶어서 부른 게 아니란 말이지.
신라 말 못하는 처용의 ‘벙어리 냉가슴’ 공식에서 나온 것이라 이 말이여.
“이름도 좀 우끼제! 처용이라고 그 당시에 처씨가 있을 리 없다 아이가 아마도 귀화할 때 유럽틱(?)한 이름을 신라 발음으로 고쳐서 처용이라고 했을 끼야 예를 들자면 미국 배우 척 노리스처럼 척 영(Chuck Young)같은 이름이 아니였겠나? 그쟈!”
“니는 영어라꼬는 개뿔도 모르면서 그런거는 언제 연구 했노? 대단하네!!”
기왕지사 귀화할 것이라면 신라귀족 성씨 중 아무것이나 하나 택하여 김 처용 또는 박혁거세의 박 처용이라든지 경주최씨 최 처용이라든지 얼마나 좋은 성이 많은데 그냥 ‘처용’이라했다.
처용의 출현 배경이 ‘동해 용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
이 역사적 기록에도 살살이가 이의(異義)를 답니다.
“맹아! 그 때나 지금이나 용이 어딧노 그쟈?”
옛날부터 거북, 뱀, 버섯, 용 등은 남근토템(男根 totem)의 상징으로 여겼고,
AD 40년경 고대부족들에게 신성관념의 타부(taboo)로 믿도록 세뇌시키기 위해 유행가로 만들어 색도사건을 설화로 구전시킨 것이 아닐까?
그 때나 지금이나 용이란 상상속의 가상 동물이지 실재한 동물은 아니니까.
우리는 고래(古來)로 선비나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바다나 용왕을 두려워했고 존경하였으나 멀리하여 어부를 ‘뱃놈’이라고 비하(卑下)하여 천한 직업으로 멸시하였을 뿐 아니라 바닷가 백리 안에 사는 사람은 ‘갯가 놈들’ 이라 하여 사돈 삼기를 꺼렸을 정도로 천대하는 동안 로마나 유럽, 서구의 바이킹, 이집트 등의 국가에서는 엄청난 해양문화를 연구하여 조선(造船)기술과 천문을 이용한 항해술까지 발달하여 세계 곳곳을 다니며 약탈과 살상, 부녀자 등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아넘기는 만행을 일삼았기 때문이지.
특히 바이킹족이나 로마인이 배를 건조할 때는 선수(船首)에 적의 배와 충돌로 뚫을 수 있는 단단한 원목으로 용머리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조각했다.
거북선 이전, 더욱 더 이전.
그러니까.
약 2000여 년 전에는 우리 한반도에는 ‘함대’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의 큰 배는 없었지 싶다.
그 만치 ‘큰 배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다는 왜구의 노략질 정도의 작은 배 뿐이었으리라.
더구나 우리 조상은 바다를 친수공간으로는 생각지 않았다는 소리지.
그렇다면 백의민족의 ‘바다에 대한 순진한 개념’은 어떠했을까?
용왕님이 계시는 곳으로 신이 진노(震怒)하면 무서운 폭풍노도가 몰아쳐 인간은 감히 범접키 어려운 신성한 곳임과 아울러 고기들이 풍부하게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요한 반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작은 통선(通船)정도를 바다에 띄우며 용왕님의 양해를 구해야하는 경외한 곳으로 알지 않았을까?
바다를 지배한다거나 개척한다거나 이용한다는 생각을 감히 못 했단 거지.
그래서 항상 작은 규모의 배만 보아온 우리의 시각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바다를 지배할 정도의 엄청나게 큰 배가 해안에 출몰했을 것이고,
배 앞머리에 웅장한 용머리 조각을 한 함선(艦船)을 보았음에랴.
항상 용왕이 거주하고 계시리라고 믿어 온 바다에서 용머리를 한 엄청난 함선이 출몰했으니 우매한 백성들이야 당연히 용왕이 용을 부리며 나타난 것으로밖에 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겠소.
자!
결론이 저절로 유추된다.
바다에 안개가 자욱이 끼어서 외국함대가 난파를 당하고 조력이 필요한 외국인 선장과 수부들이 갯가로 나올 때 헌강왕 행차와 만났고 외국인이 언어불통이니 손짓 발짓을 했는데 이것이 용왕이 춤추는 것으로 보였고 그 중에 한 명이(처용?) 지루한 항해에 신물이 나서 잔류(?)를 희망하였고 밀물을 만난 함대는 귀환하고 등등…….
“진짜로 용이 있을 택이 없다 아이가? 그쟈?
우매한 우리 선조들이 당할 만치 당한 기라. 맞제?”
이런 설화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색도(色盜)나 간통의 역사는 청사에 유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논리다.
하기야!
색도의 유래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전쟁의 역사와 함께 병행하여 기록되지 않았을까?
어찌되었든 처용은 우리풍속에는 밝지 못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보통사람보다는 약간 다른 기행(奇行)을 한 것으로 기록됐었다.
“남들 다 자는 번화가에서 달밤에 체조하고 바닷가에서 창가(唱歌)한다꼬 역사에 남았는데 이래도 되나?”
글쎄라!!!
“살살이랑 너그 둘이는 머리 박고 멀 그리 소곤거리노? 이리 나온나”
몽둥이로 교탁을 치시는 선생님의 호령 때문에 우리 둘 만의 공간에서 처용은 일시에 사라졌다.
용왕님! 태상노군님! 아미타불님! 하느님! 당시 매타작을 얼마나 당했던지 원!
여학생에 관심이 많았던 빨간 양말 살살이는 학교 유일의 여선생님인 음악샘 치마 밑에 거울을 얹은 농구화를 디밀었다가 정학을 당한 경력의 보유자로 요즘 노래방을 합디다. 流行歌를 쫓아서…….
“살살아 요새는 처용가 같은 거 연구 안하나?”
“맹아, 그래도 니가 내 고차원 학문을 기억하네. 요새는 아리랑 연구를 하고 안 있나. 한 번 들어 볼래?”
“고마 됐다, 니 그 학문 때문에 마이 맞았다 아이가”
첫댓글 지기님은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분이에요.
근데 무관(武官)의 사주를 타고 나오셨네요.
혹시 환생할 기회가 있다면,다음 생에는
학자 운을 타고 나오세요.
대석학이 되실 겁니다.
한마디 저도 거들면^^
삼국 시대 남녀들은 자유 분방했고,
여성의 정조 관념은 조선시대에
와서야 확립이 되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신라인들은 성을 빼고 이름만 불렀다고
하네요.
진성여왕의 정부였던 각간 위홍도
성이 위씨가 아니라 김씨 였거던요.
귀화인이라 추정되는 처용도
왕이 하사한 성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동방님의 댓글에서 언제나 용기를 얻습니다.
독수리 타법에 '컴'으로 문서작성 능력이 떨어져 좀 '거시기'합니다.
삼국사기 해설문 등을 보면 통일신라 시대의 '성 풍속도' 는 매우 자유 분망하다고 보아집니다.
감사합니다.
이사 문제로
모처럼 출석했습니다
문필가의 위용이
역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