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 4일 피디수첩에서 꽃동네 문제를 다룬다고 합니다. 꼭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을 분들을 위해서 김형태 변호사의 글을 올립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유럽의 경제학자 슈마허는 이미 오래 전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양의 변화는 질까지 바꾼다는 그의 이론은 여러모로 그럴듯해 보인다. 직접민주주의는 3천, 4천명 규모의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나 가능하지 구성원이 수천만명에 이르면 국민은 그저 투표할 때만 나라의 주인이다. 노동자가 자기가 만든 물건에 지배당하여 소외되고, 나라의 심부름꾼이라는 공무원과 국회의원이 거꾸로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도 다 사회의 규모가 크고 복잡해져서 그렇다.
애초 소규모 원시종교 공동체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 스님과 신도라는 위계질서가 없었는데 커지니까 높은 이와 낮은 이,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나뉘었다. 요즘 시끄러운 꽃동네도 그렇다. 어떤 거지노인이 구걸해 온 밥을 동냥할 힘도 없는 더 어려운 처지의 거지에게 나누어 준 것이 시작이었다. 이제 후원자가 80만명에, 국고보조금이 연 70억원, 후원금도 그 이상 된다니 ‘꽃동네’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신부의 형제들에게 돈이 흘러가고 그들 명의로 400필지나 되는 땅이 취득되었다는데 꽃동네 운영을 위해 그런 것인지 아니면 횡령을 한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만약 횡령으로 밝혀진다면 ‘종교’, ‘선의’, ‘봉사’ 등의 아름다운 말들에 걸고 있던 우리의 기대는 밑바닥부터 허물어질 터다. 꽃동네 운영을 위해 그런 것이었다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복지재단 명의로 농지 취득이 안 되어 형제이름을 빌려 사들였다는 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농토는 농사꾼만 취득하라는 법의 정신을 자선기관이라는 명분으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는 꽃동네의 첫마음은 설립자 신부의 동생에게 수억원의 공사를 맡겼다는 데 이르면 이미 간 곳이 없다.
부랑인, 장애인, 알코올 중독자들을 자선이라는 이름 아래 수백만평 땅 위에 세워진 웅장한 건물 속에 따로 모아놓은 것도 그렇다. 장애인이나 정상인이나, 잘사는 이나 어려운 이나 같은 동네에서 서로 어깨를 부딪쳐가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다. 평균적인 우리와 다르다고 멀찍이 따로 떼어놓고 우리의 봉사를 받으라는 것은 거지, 문둥병자와 함께 저잣거리를 어울려 다닌 예수의 행적과는 거리가 멀다.
이 땅의 종교들은 더 이상 작지 않다. 신자 수가 총인구보다 더 많고, 헌금이며 사찰관람료 수입이 수백억~수천억원에 이르는 교회며 절들이 즐비하다. 이를 운영하는 것은 진리니 자선이니 하는 영역을 벗어나 기업경영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종교단체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외부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성역은 점점 사라져 간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종교며 자선단체들도 차츰 어두운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못난 나를 대신해서 도 잘 닦고 착한 일 열심히 할 것이라 믿었던 종교인들로부터 보통사람들이 받을 배신감이며 상처도 앞으로 많을 것으로 보인다.
평생을 남루한 옷에 맨발로 지내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간디는 ‘마하트마’라 불렸다. 그의 손은 비어 있었고 수백필지의 땅도, 수백억원짜리 절도, 집도 없었지만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 곁에서 그들을 도왔다.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라는 말에 그는 크게 불편해하며 이리 썼다. “그러한 말은 쓴 사람이나 나에게 모두 좋을 것이 없다. 마하트마라는 칭송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한계와 내 존재의 무가치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한 일을 위해 자금을 모으자는 주변의 권유를 철저히 뿌리쳤다.
공중 나는 새며 들꽃들도 하늘의 도움으로 농사며 길쌈도 않고 잘 지내는데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는 좋은 일에 애써 수백만평 땅이며 돈을 모으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