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배경에 관한 체계론적 분석
A Systemic Approach to the Background of July 4 South-North Joint
Communique & The Basic Agre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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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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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계내적 요인
1. 주변환경 변화로 인한 체제정비
2. 안보 불안감 감소역할
3. 남북한 체제 내적 스트레스해소
4. 민족적 결속과시
Ⅲ.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계외적 요인
1.주변 강대국의 권유
2. 동북아 체계구조의 변화
Ⅳ. 결론 |
<요약>
남북한은 하나의 체계로서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한반도 주변국가들이 이뤄내는 보다 상위체계인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적응적 변화를 해오고 있다. 분단 이후로 남북한 권위 당국자들간에 실질적으로 최초의 합의문 성격을 갖는 7·4남북공동성명은 체제 생존과 유지에 필요한 남북한 각 정권의 내부변화를 가져왔다. 냉전하에서 한반도 주변의 질서를 끌고 가고 있던 미국과 중국간의 긴장완화 추구는 남북한 정권으로 하여금 체제유지적인 노력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이뤄진 당시에도 남북한은 '동북아 국제체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끌개(attractor) 국가들이 만들어내는 탈냉전인 질서에 적응적 변화를 하였다. 즉, 남북한은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화해와 협력적 관계 변화를 모색하였다. 동시에 남북한은 외부로부터 오는 변화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정권의 유지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주제어: 남북한관계, 7·4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체계, 공진화, 적응적 변화.
Ⅰ. 서론
6.15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전까지의 남북한관계개선의 전기는 크게 보아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는 당시의 남북한관계를 보면, 남북대화채널 자체가 단순하였는데 그것은 적십자회담, 체육회담, 조절위원회 등으로 대표되며, 또한 북한에 비해서 남한이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다. 1970년대 남북한관계개선의 새로운 획을 창조했던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한간의 공식적인 정부간의 접촉에서의 ‘첫 발자국’이었고 이 때문에 이후의 남북한관계 설정에서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매우 의미 있었던 사건이었다. 또한 한반도 주변 4강의 관계변화 즉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에 따른 남북한의 공동노력으로서 ‘7․4 남북공동성명’을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로는 남북대화의 채널이 다양해졌고, 남북한관계개선의 실천성이라는 측면에서 1970년대보다는 충실하였으나,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당시의 남북한관계개선을 위한 채널로는 남북고위급회담, 적십자회담, 체육회담 등으로 대표된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남북접촉이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증가하였고, 그 결과로 남북한관계의 기본 틀인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게 된다.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을 전후한 남북한관계의 시점에서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북한이 과거에 비해서 자신들의 안보문제를 대단히 걱정했다는 점이고 그로 인해 새로운 남북한관계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본 연구에서는 ‘7․4 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될 당시의 상황을 체계론(system theory)의 틀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이렇게 남북한간의 합의가 이뤄진 배경을 남북한 체계의 내부와 외부적 요인으로 나누어 분석해 본다.
Ⅱ.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계내적 요인
먼저 남북한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할 당시 남북한의 각자 사정에 기인하는 체계내적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주변환경 변화로 인한 체제정비
주변환경과의 적응적 변화를 모색해야만 하는 체계적 특성을 가진 남북한은 주변환경이 변화되어 나갈 때, 하나의 생존전략의 일환으로서 남북한관계개선을 시도했다. 냉전기에 남북한은 보다 상위의 체계라고 볼 수 있는 ‘동북아국제체계’가 변화함에 따라, 이런 변화에 대해 나름대로의 적응적 변화를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체계적 특성을 새롭게 변모시킬 필요가 있었다. 남한과 북한이 이런 체계로부터 오는 새로운 변화요인들에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를 새롭게 해야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는 남북한 내부에서 나오는 체계 내적 결정도 어느 정도는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남북한은 ‘동북아국제체계’에 적응적인 변화를 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체제를 인정해 나가면서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1) ‘7ㆍ4남북공동성명’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 통치하의 남한이라는 체계는 보다 상위의 체계들과의 공진화를 하는 데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체계를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였고 다음으로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였다. 보다 상위체계와의 공존을 위해서 남한이라는 체계는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는데, 그것은 ‘7ㆍ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곧바로 출범한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체제였다. 그리고 북한의 경우를 보면, ‘7ㆍ4남북공동성명’의 통일 3대원칙이 김일성이 오랫동안 주장한 것이라는 선전을 대대적으로 함으로써 북한주민들의 사상적 결속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고, 남한에서 유신헌법이 공표된 이후로 북한도 새로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공표하여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려는 체계적 준비를 하였다.
2. 안보 불안감 감소역할
다음으로 남북한 관계개선은 남북한이 상위체계의 변화로 인해 야기되는 안보상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상호 노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과거 1968년에서 1970년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은 남한에 군사적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기간 동안에 권력을 강화하고 입법과정과 경제에 대한 통제를 해서 1971년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나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무장 대원들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남북사건 등은 남한으로 하여금 안전에 대한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 북한에 대한 선제공군공격을 미국에 촉구하였으나 미국이 거절하였다.2) 그 이후로 푸에블로호 승무원의 귀환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의 교섭과정을 지켜보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내의 반전운동 등은 남한정부 당국자로 하여금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갖는 가운데 1971년에는 부분적인 주한미군 감축에 대응하여 베트남으로부터 1만2천명의 병력을 철수시켰다.3) 남북한 내에서 지속적으로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증가하는 가운데 7월 15일 헨리 키신저가 북경을 방문하였으며, 1972년 5월 이전에 닉슨 미국대통령이 중공을 방문할 것이라는 성명이 나왔다. 이런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는 남북한간의 상호 직접적인 대화를 가져왔으며 9월 20일 적십자 대표간의 첫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게 되었고 결국에는 정부 당국자간에 회담결과 ‘7ㆍ4남북공동성명’까지 발표했었다. 또한 1989년 폴란드의 자유노조가 자유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후로 동구공산권이 붕괴되고 1991년에는 냉전체제의 한 축인 소련이 해체되면서 탈냉전의 상태로 나아가자 남북한은 안보상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상호의존을 본격적으로 모색하였다. 1991년 9월 17일에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고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다.
결국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는 주변정세의 변화로 인해서 남북한이 자신들의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4)
3. 남북한 체제 내적 스트레스해소
다음으로 남북한은 각자의 정치체제가 심각한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이런 스트레스의 분출구로서 남북한의 관계개선을 이용해왔다.
남북한관계에서 볼 때, 남북한의 국내정치상황이 대내외적인 스트레스에 직면해서 공히 중압을 받는 정도가 높아질 때 남북한간의 대화는 이루어졌다. 실제로 김일성은 1972년 남북공동성명에 들어가 있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대대적으로 선전함으로써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북한은 ‘7ㆍ4남북공동성명’을 통해서 정권 굳히기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생산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미군의 철수전망’이라는 정보를 얻어내었으며 중국으로부터는 에너지를 유입 받았다.5) 그리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당시에 북한은 북한체제를 ‘우리식 사회주의’로 단합시키는 동시에 남한과의 관계개선의 의지를 표명하여 외부로부터 오는 개방의 압력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남한의 경우에도 박정희 정권은 남북대화를 통해서 나타난 민족통일이라는 정보를 남한사회에 유입하여 과다하게 생산된 정치적 엔트로피를 제거하였고 ‘내셔날리즘’이라는 에너지를 국민들에게 제공하였다. 남북한은 환경적 변화와 남북한 정치체계의 엔트로피 증가에서 나오는 체계내의 무질서를 극복하기 위해서 수많은 정치기구들을 만들었고 이들 기구들을 상호 결합시켰다. 마찬가지로 남북한은 남북한관계에서도 ‘남북대화기구’를 만들어 정권 내부적인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삼았다.6)
4.민족적 결속과시
다음으로 남북한이 변화하는 ‘동북아국제체계’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민족적 결속을 과시하여 자신들의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점도 남북한관계개선의 체계 내적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즉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상에서 표방된 민족적 일체감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남북한은 민족적 일체감에 대해서 상이한 입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내외적으로 민족적 결속을 과시하였다.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 보다 상위체계인 ‘동북아국제체계’로부터 오는 변화에 대해서 남북한 정권이 내셔날리즘을 기반으로 공동 대처한 것으로 해석된다. ‘남북기본합의서’는 국제기구나 국제체계의 주요한 끌개들(attractors)을 통하거나 또 다른 보장수단과 규제장치가 없기 때문에 합의사항을 준수하는 문제가 당사자들의 자유의사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7ㆍ4남북공동성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7) ‘7ㆍ4남북공동성명’에서 등장한 ‘위선적인 민족 일체감’이 또 다시 남북한의 ‘기억’ 속으로 나타나서 재반복된 것은 ‘남북기본합의서’의 한계다. 따라서 앞으로 남북한은 ‘제도적 통합’을 강조하는 내셔날리즘을 마련해 나가는 가운데 다시 하나의 체계로 통합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남북한간의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8)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거기서 내세운 민족결속에 대한 합의는 당시에 급변하는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남북한의 공진화적 의미에서 해석될 수 있다.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표현된 남북한의 내셔날리즘은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적 변화로부터 오는 외압에 대해서 남북한 각각의 정권을 유지하는 기능으로서 작용했다.
이상에서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될 당시에 남한과 북한의 체계 내적 요인들을 살펴보았는데, 결국 남북한은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적 변화로부터 야기되는 안보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소시키고 남북한 체제경쟁의 과정에서 증가되었던 체제 내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목적으로 남북한관계개선을 시도하였다. 또한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서 남북한은 그 동안 체제 경쟁에 따라 증가되었던 체제 내적 엔트로피를 감소시켰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시적인 민족적 결속을 통해 자신들의 정권을 강화하였다. 다음으로는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체계외적 요인을 살펴본다.
Ⅲ.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계외적 요인
1.주변 강대국의 권유
먼저 ‘7ㆍ4남북공동성명’ 당시의 상황을 보면, 당시 남북한이 관계개선을 모색하게 된 동기로는 미국의 주도로 긴장완화를 모색하던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이 상호 적대적 관계에 있던 남북한에 긴장완화를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도 남북대화는 ‘국제체계의 끌개들’인 핵심 주요 강대국들의 데탕트의 과정에서 나온 산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말 미국과 소련간의 평화공존이 ‘동북아국제체계’에 변화를 야기하였고 이어서 미국과 중국간의 상해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며, 1970년대 초에는 중국의 유엔가입 등이 이루어지는 등 미국과 중국간의 대화가 급진전되어 나가자 남북한관계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이후로 미국은 아시아에서 ‘빠져나가려고(disengagement)' 하였고 여기서 생기는 공백을 소련,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서 메우려고 하였다.
남북한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동북아국제체계’의 주된 행위자들(actors)로서 미국과 중국, 소련 등이 변화를 주도해 나가는 가운데 남북한은 자신이 포함된 ‘보다 상위의 시스템’ 안에서의 긴장완화를 모색하였다. 이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평화조약(peace treaty)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갖는 일련의 남북한간의 상호 연관적인 조치를 통해서 촉진될 수 있었다.9) 그 동안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미국의 안보에 이익이 된다는 기조 하에 한반도에서 군사력의 안정적 균형(stable balance)을 도모해 왔는데, 미국의 군사력이 ‘동북아국제체계’에서 ‘빠져나감’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북한의 호전적 태도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남한의 자체적인 노력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에서 재래식 무기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였으나, 북한의 갑작스런 공격으로 부터 남한의 위기관리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협상적 방법(negotiated measures)'을 남한 당국에 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로서 남북대화를 권장했을 수 있다.
다음으로 북한이 ‘7ㆍ4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하는 데에 있어서 남한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권유보다는 약하지만 마찬가지로 중국의 ‘지도’를 받았다. 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북중 관계를 보면, 1969년 봄 북한에서 가까운 우수리강 유역에서 중소가 무력충돌을 벌인 이후로 대소 경계심을 갖는 상황에서 중국의 주은래가 1970년 4월 평양을 방문하여 문화혁명으로 손상되었던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강화해 나가던 때였다. 그런데 1971년 7월에 키신저가 북경을 방문하고 7월 15일 닉슨 미국대통령의 중국 방문결정이 보도되자 남북한 지도자들은 즉각적인 논평을 보류했다. 특히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상대적으로 미국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갖고 있었던 북한도 남한보다는 덜하지만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북한은 주변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남한보다도 여유가 있었으며 미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과 소련간의 긴장완화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남한보다는 덜 충격적이었을는지 모르나 북한으로서는 미국과 중국의 긴장완화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중국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해서 “미 제국주의는 현재 대내외적으로 최대의 곤경에 빠져 있으며, 따라서 미국으로 하여금 아시아 인민의 요구를 수락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인식하면서 북한을 설득하였고 북한은 이런 중국의 입장에 동조하였다.10) 이 당시 중국은 북한에 대해서 “닉슨의 중국행은 승리의 여행이 아니라 백기를 들고 항복하려 가는 여행”이라고 선전하였으며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주은래가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은 미국이 퇴조하고 있고 그 공백을 일본이 아직 군국주의적 방식으로 메우지 못하고 있을 때, 적극적인 정치외교 공세를 펼쳐 국제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고립에서 벗어나고 분단을 영속화하려는 미국의 기도를 분쇄해야 한다”고 부추겼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과 중국의 화해 무드 속에서 북한이 남한에 대해서 군사행동을 취하는 것만은 지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갑작스럽게 성립되었던 미국과 중국간의 긴장완화가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우려했기 때문에, 당시에 남한이 제안했던 적십자회담 및 당국자간의 회담을 북한이 수용한 것이다.11) 이 당시 북한이 남북대화에 동의한 것은 키신저 외교가 중국을 개방함으로써 북한정권에 어떤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으로 북한 지도자들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남북한관계개선의 권유를 받았고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지도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남북한이 통일에의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면 공동성명 이후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남북한의 관계개선을 확대해 나갔어야 했는데,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기 이전까지 남북대화가 결렬되었다는 측면에서 보아 남북한의 통일에의 의지는 허약한 것이었고 남북대화 역시 강대국의 권고와 지도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1990년대 초에 이르러서 남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게 된 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은 ‘7ㆍ4남북공동성명’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북한의 ‘자주적인 의지’에서 보다도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를 주도한 강대국들의 권유와 지도에 의해서 찾을 수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볼 때, 남한과 북한이 구성원으로 있는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를 주도한 강대국들의 행위는 남북한으로 하여금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유도하였다. 우선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기 직전인 10월 4일에서부터 13일 사이에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12) 김일성은 이에 앞서서 1984년 5월말에 23년만에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한 이후로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절정에 달했고 1986년에는 또다시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쵸프와 변함없는 우호관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소련은 제정 러시아 이래로 전통적으로 “한반도 전체에 대한 욕심은 분명 있으나 자국의 힘과 주변상황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조건에서 경쟁 강대국과의 대결은 피했으며 단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보장하는 상태가 유지되는 수준에 만족을 하는 세력균형적 현상유지 정책”13)을 추구하였다. 그에 반해서 중국은 러시아보다도 북한에 전통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남북한관계의 전환점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1991년 8월 소련에 쿠데타가 실패한 이후로 가속화되기 시작하여 그 해 12월에 소련이 해체되는 등 ‘동북아국제체계’에는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소련의 해체는 미국으로 하여금 과거 1970년대 초반처럼 ‘동북아국제체계’에서 미국의 힘을 ‘빠져나가게’(disengagement) 만들었고 ‘동북아국제체계’는 그 동안 과다하게 에너지를 소모하여 엔트로피가 증대되어 버렸기 때문에 결국 새로운 형태의 물질과 에너지를 유입하거나 정보의 흐름을 유입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소련의 해체는 하나의 핵(nucleate)으로서 요동을 치면서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적 변화를 주도해 나갔고 남한과 소련의 수교, 중국의 개방ㆍ개혁정책의 가속화, 남한과 중국관계의 진전과 국교수립 그리고 남북한 유엔가입 등의 구조적 변화를 증폭시켜 나갔으며 나아가서 일시적이지만 남북한관계의 개선을 가져왔다. 남북한은 보다 상위체계인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와의 공진화를 모색하였고 이런 공진화의 과정에서 남북한은 자신들의 체계를 보존하고 새롭게 창조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북한은 상위체계인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변화에 대한 적응을 하기 위하여 주요 끌개들14)의 영향을 받아서 체계의 공진화를 모색하고자 하였으나 북한 체계의 보존과 새로운 체계를 창조해야만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어 더 이상의 남북한관계의 개선은 진행되지 못하였다.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한 이후로도 남한에 대한 비방과 적대감을 표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 내부의 사상교육이나 훈련을 더욱 강화시켰다. 남한과의 비핵화 선언과 불가침 선언에 대한 합의로서 북한은 남한으로부터의 위협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으나, 1992년의 김일성 생일 ‘큰 축제’에서 보여주었듯이 북한 주민들에게 ‘수령’과 북한 ‘인민’의 승리를 과시하면서 체제강화를 모색해 나갔다.15) 상위체계인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적인 변화가 나타나자 북한은 내부적으로 체계를 보존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고 체계를 보존하기 위해서 중국을 모방한 ‘우리식 사회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질서와의 공진화를 모색하기 위한 자체적 개혁프로그램으로서 헌법을 수정하게 된다.16) 새롭게 수정된 헌법의 특징을 보면 제3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임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하여 과거 1972년에 개정된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사회주의헌법’에 나타나 있었던 ‘마르크스 레닌주의’ 부분을 삭제하였다.
이렇게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으로서의 주체사상을 설명한 것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부분을 삭제한 것은 주요한 끌개인 소련과의 관계가 더 이상 북한체계의 생존에 결정적인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은 남한과의 대결에서 내부의 자체 에너지를 소진하여 에너지를 변용 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어가자 외부에서 에너지와 정보를 유입할 필요성을 갖게 되어 대외개방정책 등을 시도하였다.
한편 남한의 경우를 보면, 남한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는 데에 있어서 보다 상위체계인 ‘동북아국제체계’의 체계변화를 주도하는 강대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과거의 남북공동성명의 경우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주적인 결정에 의한 ‘조직내부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9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은 북한뿐만 아니라,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는 북방외교채택을 선언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1990년 6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고 다시 1991년 7월 2일에 국빈자격으로 방미하여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국대통령과 한반도 통일에의 기본 틀을 도출하였다. 한반도 통일문제가 한미 정상회담의 주의제로 상정되어 논의되어 ‘기본 틀’이 최초로 공식화되었다.
이 회담은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기 직전의 상황으로 당시 남한의 최고 통치권자가 미국의 대통령에게 평화적 통일과정에서 “한국이 주도적 입장을 취하고 미국은 이를 ‘지원’하는 입장에서 통일이 달성될 수 있도록 협력을 요청”17)한 사실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7ㆍ4남북공동성명’ 당시에는 미국의 권고가 있었지만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미국의 ‘지도’와 ‘협력’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시 6공화국 정권의 자주 외교적 자신감에서 비롯되어 남한이 과거에 비해서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남북기본합의서’는 ‘동북아국제체계’의 끌개인 미국과 남한의 외교마찰을 가져왔고 북한으로 하여금 외교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나아가 남한국민들에게는 통일에의 꿈을 부풀게 하여 대북 안보의식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한 이후로 남한은 체계를 보존하고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 나가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남북한관계에서 기존의 체계를 보존하는 문제는 남한 체계내부의 문제와 연관되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에서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발생한 민주화의 과정은 남한체계의 ‘자기조직화’의 능력을 향상시켜서 정권이 체계보존문제에 대해서 덜 부담을 갖게 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이런 인식 하에서 ‘동북아 국제체계’에서 주요한 끌개인 미국의 영향력을 과거보다 덜 받는 상태에서의 북방정책을 전개하였지만 결국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런 북방정책 조차도 미국이 주도적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 역점을 둔다면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는 데에 미국이 영향을 미친 점을 간접적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다.
남북한관계는 진정으로 남북한이 통일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실질적인 대화에서 비롯되기보다는 국내외 정세에 편승한 형식적인 접촉으로 점철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한간에는 그 동안 수많은 제안과 회담이 있었으나 남북한관계의 개선은 더디었고 파행적이었으며 남북한간의 대화가 있더라고 그 기간은 길어야 1-2년이었고 화해의 기간보다도 대결의 기간이 더욱 길을 수밖에 없었다.
2. 동북아 체계구조의 변화
다음으로 남북한은 1970년대 초반과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적 변화로 인하여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런 맥락에서 ‘7ㆍ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이 상호 생존해나가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제휴였다. 여기서는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변화가 남북한관계개선을 가져왔다는 인식 하에서 남북한관계개선은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특성에 따라 다른 형태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설명하기로 한다. 즉 ‘동북아국제체계’가 달리 변화하게 된다면, 남북한관계개선의 형태 역시 달라지게 된다는 점을 알아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체계구조의 변화가 남북한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단 이후로 1970년까지의 남북한 대화는 ①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 ②1951년에서 53년 사이의 휴전회담, ③1954년 4월 제네바 정치회담, ④1953년에서 54년 사이의 실향민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접촉, ⑤1962년 1월에서 1963년 7월까지의 동경올림픽 단일 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 등이 있었다. 1970년대 이전에는 이렇다고 할만한 남북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제적인 데탕트에 힘입어 남북한간에는 여러 가지 형태에서 여러 수준에서 남북대화와 협상이 이루어졌다.18) 1970년대에 남북한간의 대화는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서 처음으로 이루어졌고 1980년, 1990년대까지 실무접촉, 예비회담, 비공개 실무회담, 본 회담 등의 여러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1985년 9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단 교환방문“이라는 분단 40년만의 첫 민간차원의 인적 교류도 실지로는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서 이룬 성과였다.
‘7ㆍ4남북공동성명’에는 상위체계의 진화는 보다 하위체계의 진화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공진화적 측면이 담겨져 있다. 공진화는 개체의 돌연변이가 환경에 의해 선택된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벗어나서 실제의 진화는 개체가 전체를 진화시켜 나가고 전체가 개체를 진화시켜나간다는 상호진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하위체계의 구성요소들이 공진화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질서는 상위체계의 자기조직화 과정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상위체계에서 끌개들(attractors)이 요동을 쳐서 체계의 진화를 해나가는 과정이 남북한관계의 진화를 촉진시켰다. 남북한은 각자의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상위체계의 진화에 보조를 맞춰서 상호 이질적인 체계를 접근시키려는 노력을 한 결과 ‘7ㆍ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남북한의 합작인 ‘7ㆍ4남북공동성명’의 내용은 현실과의 괴리를 가져왔다. 이런 괴리는 상위체계의 끌개들의 지속적인 요동의 주기가 하향할 때에 해당되며 남북한은 각자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체계의 정비를 필요로 하였다. 즉 급변하는 상위체계와의 공진화에 남북한이라는 하위체계가 따라갈 수 없었던 상황에서 자체적인 물질과 에너지, 정보의 흐름을 조절하게 되었으며, ‘남북기본합의서’도 남북한과 상위체계와의 공진화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남북한관계의 공진화에는 다음의 두가지가 고려될 수 있는데, 하나는 상위체계의 진화가 하위체계들의 진화를 끌어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위체계들간의 진화도 상호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남북한이 보다 상위의 체계인 ‘동북아국제체계’와의 공진화적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동북아국제체계’와의 통합을 향하기도 하였고 분열을 하기도 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관계에 있어서 제2단계의 진화로 보여지는데, 남북한은 1989년 2월 8일부터 1990년 7월 26일 까지 8차례의 예비회담과 6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 및 13차례의 관련실무대표접촉 등을 통해서 도출해낸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규범이고 장전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88년 12월 28일 강영훈 당시 남한의 총리가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 총리에게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갖자는 서신을 발송하여 그에 대한 답장으로 1989년 1월 16일 연형묵 총리가 ‘남북고위정치군사회담’을 제의하여 이루어진 남북고위급회담의 산물이다.
당시 남북한내외의 상황을 보면,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동구공산권의 민주화와 붕괴, 미국과 소련의 몰타 정상회담에서의 냉전종식의 선언, 그리고 동서독의 통일, 소련연방의 해체 등의 급격한 국제체계의 변화는 남한과 북한이 UN에 동시에 가입하는 등의 남북대화의 실질적인 전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제6공화국의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에 관한 특별선언인 소위 ‘7ㆍ7선언’을 통해서 북한을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선의의 동반자’로 간주하고 남한과 북한이 함께 번영을 이루자는 민족공동체로서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자고 하였다. ‘7ㆍ7선언’은 남북한의 대결구조를 화해의 구조로 전환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조치의 기본방향을 제시한 정책적 선언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북한은 7월 11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을 통해서 비방을 하였으나 7월 16일 당시 최광수 외무부장관이 ‘7ㆍ7선언’과 관련된 외교시책을 발표한 다음에 해외동포의 남북한 방문을 자유화하고 남북한 방문 해외동포의 신변안전보장을 위한 남북한관계당국회담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북한최고인민회의 양형섭 상설회의 의장이 7월 2l일 “불가침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한 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였고 8월 1일에는 당시 남한의 김재순 국회의장이 남북국회회담을 8월중에 성사시키기 위한 준비접촉을 제의하였다.
8월 15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였고 8월 17일에는 양형섭 의장이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일자를 수락하여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이 시작되었으며, 9월 8일에는 김일성이 ‘9ㆍ9절’ 40주년 기념사에서 전제조건하에서의 남북정상회담문제를 언급하였다. 1989년에 1월 1일에는 김일성이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하였고 9월 11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제147회 정기국회 연설에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천명하였다. 1990년 9월 4일에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시작되어 1992년 9월까지 서울과 평양을 왕복하며 8차례나 진행되었으며, 1991년 12월 13일 서울의 제5차 회담 3일차에서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남북한의 수석대표인 총리간에 서명되었는데, 1992년 2월 19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6차 회담에서는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내부절차를 거친 본문이 교환되었다. 아울러서 “한반도 비핵화선언” 및 “3개 분과 위원회 구성에 관한 합의서”를 발효시켰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의 이해에 관련된 최초의 공식합의이며, 전문에서 “7ㆍ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ㆍ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 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여기서 남북한은 서로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의사를 밝히고 있고 합의도 조약이 아닌 민족내부규정으로 설정하여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한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무엇보다도 남한과 북한의 통일기반조성에 대한 합의로서 그 중요성을 갖는다. 남북한은 보다 상위체계의 변화에 대해서 공진화적인 태도를 가졌고 이로 인해서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였으나 남북한은 ‘7ㆍ4남북공동성명’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자주성’을 갖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남한의 경우에는 미국과의 어느 정도의 외교적 마찰을 하면서도 북방외교와 남북한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그리고 북한은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면서도 결국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집했다. 남북한은 과거 남북공동성명 당시와는 엄연히 차이가 있는 ‘자주적 결정’에 의해서 남북한관계 개선을 가져왔던 것이다.
남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할 당시의 전후 상황은 ‘7ㆍ4남북공동성명’이 이루어진 당시의 상황과 달리 상대적으로 ‘점진적 분열’의 성격이 강해진 ‘동북아국제체계’의 질서 하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로 형성된 냉전하의 양극 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점진적 분열’적 성격은 남북한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기존의 양극체제하의 동맹국의 틀에서 벗어나는 ‘자주적 결정’을 내리도록 하였다. 다시 말해서 남북한은 과거에 비해, 보다 상위의 체계에서 ‘외세’의 입김을 덜 받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상대적 자주성’의 태도는 그 이후로 더욱 진화ㆍ발전하였다. 특히 김영삼 정부에 와서 남한이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가져온 하나의 역사적 배경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다. 결국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는 전체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서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가 변화해 나가고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동북아국제체계’를 끌어가는 강대국들이 남북한으로 하여금 관계개선을 하도록 권고와 지도해 나가는 가운데 이루어져 왔다고 보여진다.
Ⅳ. 결론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남북한의 관계개선이 이뤄진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배경을 체계론에 입각하여 체계내적 요인과 체계외적 요인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았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남북한은 동시에 하나의 체계이면서 보다 상위체계인 ‘동북아국제체계’가 변화할 때,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 남북한관계에 있어서도 변화를 해왔다고 본다. 남북한은 원래 하나였으나 지금은 느슨하게 연결된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남북한관계는 하나의 체계내의 관계로서의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에 적응적 변화를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둘째,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는 시점에서 남북한은 그 체제 내부적 요인이 있었다. 남북한은 체제 유지적인 측면에서 이런 내부적 요인들을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적 변화에 공진화하고 적응적 변화를 하기 위한 측면으로 이용하였다. 냉전기에 남북한은 자신들 체제의 문제점 및 스트레스들을 남북한관계 개선으로 해소하려 하였고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동북아국제체계’의 구조의 변화에 대해서 적응해 나가기 위해서 남북한 모두 민족감정을 활용하였다. 또한 남북한이 변화하는 ‘동북아국제체계’의 흐름 속에서 자기 정권의 지속을 위해서는 남북한관계개선 이후에 오는 불확실한 문제를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7ㆍ4남북공동성명’ 이후에 나타날 불확실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남한은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북한은 사회주의헌법을 만들었다. 그 후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는 시점에서도 북한은 헌법을 개정하여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외래사상보다 주체사상을 강조하여 체제강화를 모색하였다. 남한의 경우에는 이미 민주화의 경험을 통하여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변화를 할 수 있는 내구성을 구비해 나가는 상태여서 북한만큼의 불안정한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적극적인 활로를 모색해 나갔다.
셋째, 남북한관계개선은 결과적이지만 남북한의 국내정치상황이 대내외적인 스트레스에 직면해서 공히 중압을 받는 정도가 높아질 때 이루어졌다. 남북한은 보다 상위의 체계인 ‘동북아국제체계’로부터 오는 구조적 변화와 남북한 정치체계의 엔트로피 증가에서 나오는 소산구조를 상호 결합하여 ‘남북대화기구’라는 색다른 소산구조를 만들어서 정권 내부에서 발생되는 스트레스를 해소해 왔다. 그리고 남북한은 상호 소모적인 체제경쟁에서 시간이 갈수록 증가되는 체제내적 엔트로피의 증가를 남북한관계개선으로서 어느 정도 해소하였고 체제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또한 남북한은 형식적으로는 ‘동북아국제체계’의 변화를 끌고 가는 강대국들의 권유와 지도에 대해 동일한 민족이라는 감정으로 맞서서 ‘7ㆍ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였다. ‘7ㆍ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통일이 ‘외세’가 아닌 민족자주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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