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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잠25:11~13)-2018.5.13
우리가 살다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무척 답답하고 칙칙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운 날에 시원한 청량음료같이 시원함을 줍니다. 이런 사람은 만나면 만날수록 기분 좋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척 부담스럽게 만들고 불편하며 답답합니다. 그래서 만나면 부담스럽고 짜증이 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대부분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을 유쾌하고 상쾌하며 통쾌하게 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안정되고 행복해집니다.
믿음은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과연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답답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답답하게 할 때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정말 이 시간 하나님이 보시는 나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성도인지 혹은 답답하게 해드리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임은 물론이요, 너와 나 모두에게 시원함을 선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곁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오직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나의 인생의 주인되시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성도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정말 답답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가정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제 사회나 국내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가장 시원케 해주어야 할 종교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답답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누군가 답답한 문제를 시원하게 뻥 뚫어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시원케 해 줄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고, 교회를 시원케 하며, 우리의 가정과 이웃을 시원케 해 줄 수만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미안하지만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더 답답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목사와 성도가 세상 사람들을 더 답답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끼리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성도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사람이 자기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사람일까요? 그 답을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1)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11절)
이 말씀은 말로 시원케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동물들이 조련을 받아서 몇 마디 하는 것은 언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언어의 생명은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한다. 말이 안 통한다 라고 말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쌍방간에 대화의 합일점이 없고 서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말이 통한 사람은 시원한 사람입니다. 말이 통하면 우리는 화끈하다고 합니다. 시원시원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라고 해서 모두 말은 아닙니다. 말 같지도 않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두고 사용하는 말이지만, 정말 무섭고 두려운 것이 말입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말 속에 인격이 있고, 품격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에 따라 격조와 수준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속담에 “말속에 말 들었다”고 말합니다. 누가 어느 장소에서 어떤 말을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말로 패가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은 성도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말을 잘하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잘 말하는 것은 청산유수처럼 매끄럽게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적절한 말,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누가 듣더라도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얼마나 귀하든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라고 말씀합니다.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는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 모양도 좋고, 색상도 좋고, 미적 감각도 좋습니다. 정말 멋진 데코레이션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과 커피한잔 하고 싶지 않나요?
프랑스 어떤 휴양도시의 한 카페에 이런 가격표가 붙어있다고 합니다. (*Coffee! 7 Euro *Coffee Please! 4.25 Euro *Hello Coffee Please! 1.4 Euro)라는 가격표가 말입니다. 설명하면 이런 말입니다. 그냥 손님이 반말하는 듯 ‘커피’라고 주문하면 7유로를, ‘커피 한잔주세요’라고 주문하면 4.25유로를, ‘안녕하세요, 커피한잔 주시겠어요’라고 주문하면 1.4유로를 지불한다는 말입니다. 카페주인은 함부로 말하는 손님들에게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었다고 합니다.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훨씬 더 아프고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말이라도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입술의 3초가 가슴에는 30년 남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자기 입술의 문을 지켜달라고 기도합니다(시141:3). 그러므로 성도는 평생토록 간직하고 싶은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사람에 맞아야 하고, 상황에 맞아야 하며, 장소에 맞아야 합니다. 결혼식장에서 쓰는 말이 다르고, 잔치 집에서 사용하는 말이 다르며, 상가 집에서 쓰는 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잘 말하는 사람은 사람과 상황과 분위기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장안에 소문난 식당이 있었습니다. 어떤 스님이 식당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자리를 잡지 못한 스님이 식사를 시켜놓고 기다리던 신부님의 테이블에 합석을 해야 했습니다. 때마침 신부가 식사를 하려다가 인사를 합니다. “스님, 저는 카톨릭 신부입니다”. 인사를 마칠 무렵 스님이 산채비빔밥을 한 그릇 주문합니다. 불고기판에 고기를 굽고 있던 신부가 “스님, 드시는 것도 부실할 텐데, 그냥 공기 밥 하나 추가해서 여기 갈비 같이 드십시다.”그 말을 들은 스님이 “아 예, 다음에 신부님이 장가 드실 때, 저한테 연락을 주시면 그때는 절대로 사양하지 않고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아무리 생각해서 친절하게 하는 말 일지라도 경우에 합당하고 상황에 맞아야하며 이치에 맞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할 말, 못할 말을 가리는 사람이 인격자입니다. 그리고 장소에 맞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사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마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인의 마음이 시원케 됩니다. 본문의 주인의 마음이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일 수 있고, 너와 나 우리 모두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마디의 말을 통해 감격을 하고, 새 힘을 얻고, 답답하고 찝찝하며 막혔던 마음이 뻥 뚫림같이 시원케 될 줄로 믿습니다.
(2) 지혜로운 사람입니다(12절)
이 말씀은 마음으로 시원케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마음이 고와야 합니다.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고운 사람입니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이라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책망이나 충고, 훈계는 머리로 하면 안됩니다. 입으로 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마음으로부터 해야 합니다. 입으로나 머리로 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책망이나 충고, 훈계는 따뜻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때문에 책망이나 충고, 훈계는 지식이나 자기감정으로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지식은 머리에서 나오지만, 지혜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책망이나 훈계는 반드시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사랑을 품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잘 압니다. 그래야 상처를 받지 않고 기쁨으로 수용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책망하거나 충고, 훈계를 하게 되면, 양약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자에게는 금귀고리나 순금장식과 같이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본문 12절의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마치 참 스승이 제자들에게 사랑을 갖고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타이르거나 책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마음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성경은 그런 귀를 청종하는 귀라고 말합니다. 이른바 달콤하게 여기고 듣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귀에 달린 금고리와 정금장식과 같습니다. 이는 보기에만 좋은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그만큼 보배롭고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책망이나 훈계를 하면,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통하면 주인의 마음이 시원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영적으로 통할 때 시원케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소요리 문답 제1문1답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히11:6).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사랑으로 책망이나 충고를 하면 서로에게 마음이 전달됩니다. 진심은 통합니다. 그러면 시원함을 느낍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는 시원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찜찜하고 답답합니다. 심지어 열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평양 같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시는 성도가 되십시다. 너와 나 모두에게 얼음냉수 같이 시원케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충성된 사람입니다(13절)
이 말씀은 행동으로 시원케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인께 충성하는 자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인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도 있지만, 충성치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면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그분의 마음이 시원케 됩니다. 한마디로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를 보십시오. 5달란트, 2달란트 받았던 자들이 비록 작은 일에 충성하였지만, 주인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고 기뻐하십니다.
얼마나 주인의 마음이 기쁘고 시원했으면 그토록 좋아하시겠습니까? 주인은 종의 작은 충성심에 감동하신 것입니다. 충성된 자는 주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분의 뜻을 좇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인의 마음은 무더운 여름철 한줄기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처럼, 뙤약볕에 땀 흘리며 일하던 농부가 얼음냉수 한잔으로 시원함을 느끼던 것처럼 시원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너와 나 관계하는 모든 사람에게 시원함을 선사하는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한 달란트를 가지고 게으름을 피우고 변명을 늘여놓던 어리석은 자를 보십시오. 주인은 몹시 분노하십니다. 정말 기분이 찝찝하시고 불쾌하셨을 것입니다. 불충성한 그에게 주인의 책망을 보십시오. 그에게 있는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책망하십니다. 한마디로 저주입니다. 주인을 이토록 분노하게 만든 원인이 무엇일까요? 충성심입니다. 성경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4:2).
성경에는 답답한 사람, 짜증난 사람도 나오지만,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던 종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고린도전서 16:18절을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좋은 동역자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스데바나와 브드나도, 아가이고는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권면합니다. 이들은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시원케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인가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주는 역할이 우리를 얼마나 시원케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감정만 시원케 한 것이 아닙니다. 영혼까지 시원케 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마음도 시원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까지 시원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하면, 맡은 바 직분에 충성하면, 하나님은 물론이요, 본인과 교회 모든 성도가 다 시원케 됩니다. 나 한사람이 충성하면 하나님과 모든 사람 전체가 시원함을 맛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정에 충실할 때 가장은 물론이요, 온 가족 전체가 시원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자입니다.
물론 우리의 열정이나 수고로 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계시는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다만 내안에 계시는 나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마음을 구하고 찾아서 주님이 나를 통하여 공급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만 가능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시원케 해드리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주님을 최고로 시원케 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성도가 되십시다.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시원함을 제공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평생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거나 힘들게 하지 말고, 모두를 평안케 하고, 모두를 시원케 해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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