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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운동본당 남성신자 피정이 지난 20일(토)부터 주일인 21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전남 고흥 소록도에서 있었습니다. 사목회 남성구역분과장 고진석 다미아노 형제님이 기획·주관한 이번 피정에는 총 20명이 참가했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피정이 원만히 진행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얘기냐구요? 아기사슴성당(소록도성당)피정집은 30명 이상 인원에 대해서만 숙박 예약을 받는데, 학운동성당에서 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올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다른 성당의 예약 신청을 물리쳐가며 예약을 받아줬다고 합니다. 피정집 관계자는 "애초에 20명만 온다고 했으면 예약을 안 받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론이 길었지요?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소록도에서 피정을 하다보면 다른 곳에서는 영성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 듯합니다. 한센인들이 겪은 고통과 그 고통을 신앙 안에서 승화시킨 역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한센인박물관과 중앙공원, 감금실, 검시실 등은 일반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지만, ‘치유의길’ 탐방 등은 피정을 오지 않으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소록도에서의 피정은 소록도성당의 한 자매님의 말처럼 ‘작은 상처가 큰 상처를 만나 치유되는’은총을 지향하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진 과거의 한센인들의 아픔을 잠시나마 묵상할 때 우리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질테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4㎞ 남짓한 ‘치유의 길’을 걸으면서 저에게 가장 고통을 준 사람과 사건을 묵상하며 내면에 쌓인 것을 털어버렸던 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소록도에서 알게 된 한가지 희소식은 소록도에서 40여년간 자원봉사 간호사로 헌신했던 마리안느 스퇴거(83)님과 마가렛 피사렉(82)님 두 분의 봉사정신을 계승하는 활동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천사 할매’ 두분과 함께 7년동안 간호조무사로 근무했던 최연정 세실리아 자매님이 2015년 김연준 프란치스코 소록도성당 주임신부님을 찾아와 "마리안느, 마가렛 두분과 같은 삶을 볼리비아에 가서 살고 싶으니 직업학교를 지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답니다. 김 신부님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러겠노라고 답변한 뒤 한센인 환우들의 미사에서 강론을 통해 "우리가 은혜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최 자매를 도와줍시다"고 했습니다. 이에 한 한센인이 익명으로 500만원을 기탁한 것을 포함해 한달반만에 한센인들로부터 1000만 여원이 모금됐다고 합니다. 김 신부님은 이 돈을 종잣돈 삼아 2016년1월 사단법인 ‘마리안마가렛’을 설립합니다. 법인은 그동안 볼리비아에 식량·의료지원금으로 8000만원 가량을 보냈고, 고흥군으로부터 2억원의 제작비를 지원받아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지난 4월20일 개봉했습니다. 올 하반기부터는 볼리비아 현지에 간호전문대학 형태의 직업학교를 세우는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한다고 합니다. 또 고흥군 녹동읍에는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분의 봉사정신을 배울 수 있는 자원봉사자학교와 기념관을 내년에 개관한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진척이 꽤 빠른 편이지요?
김 신부님과 박종원 안토니오 보좌신부(전 학운동 보좌신부)님의 노력으로 ‘마리안마가렛’법인에 매월 1만원씩 후원하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3000명을 넘어섰다고 하더군요. 이번 피정 참가자들도 대부분 후원 약정을 했습니다. 법인 이사장이기도 한 김 신부님은 "두 분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끝낸다면 그분들께 너무 죄송하다. 그 사랑이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각오로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봉사한 두 분의 사랑이 ‘마리안마가렛’ 법인의 활동을 통해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볼리비아에서 헌신의 삶을 3년째 이어가고 있는 최 세실리아 자매님의 영육간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번 피정에 성금품을 찬조해주신 임성호(사목회 남성부회장) 대건안드레아, 고진석 다미아노, 정병래 제노비오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김연준 프란치스코 소록도성당 주임신부님. 사단법인 '마리안마가렛' 이사장을 맡아 전국 곳곳에 강연을 다니며 마리안느와 마가렛님의 봉사정신을 전파하느라 분주하시다.
지난 20일 오후 막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온 소록도성당. 5월의 화사한 장미가 만개해 보기 좋았다.
소록도에는 2개의 성당이 있는데, 이 곳은 병원 직원 등이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으로 '1번지 성당'으로 불린다. 환우들이 다니는 '2번지 성당'은 따로 있다.
아기사슴성당 피정집 입구
피정집 입구에 선 임성호 대건안드레아(왼쪽. 사목회 남성부회장) 형제님과 심학기 사베리오 형제님
소록도성당의 서 스텔라 자매님이 '소록도 이야기'라는 영상을 틀어주기에 앞서 간단한 안내말씀을 하고 있다.
1번지 성당 입구에서 포즈를 취한 형제님들
이곳이 2번지 성당 입구
2번지 성당 마당에 집채만한 후박나무(?)가 넉넉한 품을 펼쳐 보여 눈길을 끌었다.
2번지 성당 옆 역사.문화관 용도로 지어진 건물. 일제시대 지어진 옛 벽돌공장(지금은 없음) 인근에 들어섰다. 건축자재로 쓰인 붉은 벽돌은 한센인들이 큰 고통을 감내하며 만들었던 벽돌을, 나무는 벽돌을 만드는 데 썼던 화목을, 무지개빛 유리창은 시련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게 한 희망과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한다고.
벽돌공장은 환우가 1200명 가량 수용됐던 1933년 4대 원장 스오가 부임하면서 건립이 추진됐다고 한다. 환우들은 자기 손으로 현대식 건물을 짓는다는 기쁨에 초창기에는 기꺼이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병원 운영비의 상당부분이 전쟁물자 구입에 투입되면서 이 벽돌공장에서 강제노동과 무리한 작업이 시작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손이 뭉개지고 화상을 입은 환우들이 늘어났고, 강제노동을 견디다 못한 환우들이 섬을 탈출하는 사례도 많아졌다고 한다. 탈출자 중 상당수는 바다에 빠져 사망했다.
옛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가 천주교 미사를 상징하는 조경으로 꾸며져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성작 모양의 구조가 보이고 십자가, 제대, 예수님 명패 등을 상징하는 나무와 돌이 있다. 십자고상과 루르드 성모상도 있는데, 그렇게 조경된 과정이 기적에 가깝다고 한다. .
김연준 주임신부님의 설명은 이렇다
"벽돌공장이 있던 이곳에 은총의 상징인 십자고상과 병자들의 도움의 상징인 루르드 성모상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조창원 대령이 병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수녀님 3분을 모시고 온 것이 계기가 됐다. 조 원장은 루르드 성모상에 관한 책을 건네 받아 읽고 수녀님들과 상의한 끝에 여기에 세우게 된다. 당시 환우 6000여명 중 5분의4가 개신교 신자였고, 천주교 신자는 900여명에 불과했다. 당시 이곳에서는 "천주교는 구원받지 못하는 종교"라는 교육을 해왔기 때문에 십자고상, 성모상을 세우는 것이 용납이 안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권총을 찬 병원장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옛 벽돌공장 굴뚝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십자고상과 그 옆의 루르드 성모상.
십자고상과 루르드의 성모상이 세워진 영성적인 의미는 자포자기, 자살충동을 느꼈던 당시 한센인들에게 하느님 편에서는 "당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주고, 인간편에서는 "주님을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고,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는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제대의 촛대를 상징하는 나무 두 그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형제님들
소록도 중앙공원에 있는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비.
이 돌은 다른 섬에서 한센인들이 성치 않은 몸으로 운반해온 것이라고 한다. 소록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죽어도 놓고 바위'라 부른다. 운반 과정에서 사람이 깔려 죽는 일이 잦아지면서 바위에 깔려 죽으나 일본인들에게 매를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여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줄을 놓았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진다. 당시 한센인들이 모두 줄을 놓는 항거를 했지만, 이들을 감독하던 일본인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냥 넘어갔다고.
일반 방문객들에게 아름답게만 보이는 이 공원이 꾸며지지까지 숱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고 안내를 맡은 서 스텔라 자매님은 강조했다.
마리안느, 마가렛 두분을 공적을 기리는 비석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감금실에 대해 설명 듣고 있는 형제님들.
한센인들을 가두었던 감금실은 2종류가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규칙을 어긴 사람들(작업에 요령을 피우는 사람 포함)을, 다른 하나는 탈출하다 붙잡힌 사람 등을 가두는 곳이다. 감금생활을 하던 중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탈출죄가 적용된 사람들의 감금실은 마루바닥 밑에 물을 채워 겨울에 냉기가 올라오도록 해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구조였다.
김금실에 갇혔던 한 한센인의 글
이곳이 검시실이다.
한센인들이 사망하면 본인, 가족 의사에 관계 없이 시신을 해부했던 곳이다. 아울러 한센인 여성이 임신하면 강제로 낙태수술이 이뤄졌고, 감금실에서 형을 마치고 살아나온 남자들에게 강제로 단종수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가운데에 놓은 기물을 당시 25살이던 한센인 이동 씨는 '단종대'라고 불렀다.
이동 씨의 글.
피정집 앞마당 잔디밭에서 오랜만에 만나뵌 박종원 안토니오 보좌신부님과 함께 찍었다.
박종원 보좌신부님과 고진석 다미아노 형제님
1번지 성당 뒤뜰에서는 고흥 녹동 앞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저녁 식사후 이어진 박종원 안토니오 보좌신부님의 영상을 활용한 강의. 소록도의 역사와 마리안느. 마가렛 두분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영상 속 가운데에 있는 인물이 조창원 병원장이다.
이튿날 아침 2번지 성당에서 환우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다.
결핵에 걸린 한센인들을 수용했던 결핵병동이다.
소록도 자체가 한센인들이 가족 친지들의 버림을 받아 강제수용된 곳인데, 결핵에 걸리면 2차로 이곳에 격리된다. 추락할 데가 없을만큼 추락한 곳이 결핵병동인 셈이다. 안내를 맡은 자매님은 "아무리 큰 상처를 가진 사람도 이 분들의 상처를 만나면 위로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치유의 길'은 여기서 시작된다.
약 4킬로미터에 달하는 '치유의 길'에 들어섰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극심한 강제노동이 심해지자 탈출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에 스오 병원장이 1938년 1월에 6000여명의 전 원생을 동원해 20일만에 이 길을 닦았다고 한다. 목적은 탈출한 환우들을 쉽게 추적하고 붙잡기 위해서였다는 것. 환우들은 성치 않은 손에 붕대를 감고 작업을 했지만 추운 겨울이라 동상에 걸려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환우들의 피고름과 피눈물로 완성된 이 길이 아이러니하게도 '치유의 길'이 됐다.
'작은 상처가 큰 상처를 만나면 치유된다'는 컨셉트이다.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를 바치며 걸었다.
3분의2쯤 왔을까. '낙화암'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지난해 5월 국립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계기로 건립된 한센인박물관.
첫댓글 한국 ME 40주년 행사에 참석하느라 함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들 즐거운 시간과 하느님의 은총 가득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고 분과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 수고들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