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대 신앙의 기준점
기준점이 없으면 결국에는 흔들려서 혼돈 가운데 빠지고 만다. 집을 짓거나 토목 공사를 할 때에 기준점이 필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인 신앙에도 기준점이 있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 사단이 온갖 미혹과 기만을 일으키는 마지막 시대에는 더욱 더 분명한 기준점이 필요하다. 말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비교해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성서적 기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 신앙의 기준점이 되는 말씀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해 두셨다.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기준점과 비교해 봄으로써 자신이 서있는 영적 좌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마지막 시대의 신앙의 기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시대 신앙의 기준점이 되는 사람들의 정체가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요한계시록 12장과 14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요한계시록 12장은 기독교회의 생성과 그 역사에 관한 에언을 말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세워지며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하늘로 승천한 후에 하나님의 참 교회(여자)가 사단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1260년 (중세기) 동안 광야로 도망하는 예언이 계시록 1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1260년 예언의 끝 무렵에 신대륙 미국이 발견되어 미국이라는 땅을 통하여 여자의 남은 무리(하나님의 참 백성)가 피난처를 얻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12장 17절에서 말세에 사단의 집요한 공격 목표가 되는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성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성은 짐승의 우상을 극복하고 그 표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특성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3장에는 두 짐승이 나오는데 첫 번째 짐승은 중세기 1260년 동안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핍박을 가하는 세력이고 두 번째 짐승은 미국인데 미국은 처음에는 양처럼 올라오다가 나중에는 용처럼 말하는 핍박의 세력으로 돌변한다. 말세에 이 두 짐승이 서로 연합하여 짐승의 우상을 세우고 짐승의 표를 전세계적으로 강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요한계시록 13장의 에언이다.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짐승의 우상과 그의 표를 극복하고 이기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의 정체가 나타나는데 그들이 바로 십사만 사천이다. 계시록 14장 12절은 마지막 시대 신앙의 기준점이 되는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그렇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 이야말로 마지막 시대에 모든 신앙의 기준점이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과 14장 12절의 말씀은 말세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교리와 신앙과 믿음을 분명하게 판단하고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기준점과 같은 말씀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도 이 말씀 위에서 그 옳고 그름이 밝혀질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독자 여러분의 신앙과 믿음 속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에수 믿음 이 포함되어 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답변은 무엇인가?
계명과 믿음 그리고 감정과 느낌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 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2장 마지막 절에서 볼 수 있듯이 말세에는 사단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노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명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구약의 모세 시대에는 계명을 돌비에 기록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다. 새 언약 시대에는 계명이 돌비가 아니라 육비 즉 우리의 마음과 양심에 기록된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양심에 기록된 당신의 계명(법)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계명을 새기시고 양심과 이성에 당신의 뜻을 호소하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과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의지하며 전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해 어떤 방법 을 사용할까? 사단은 말세에 이 적과 기적 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의 표가 내려지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사단이 온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계 13:13,14. 이러한 사단의 기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는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계 16:13,14. 사단은 세상 끝에 있을 최후의 영적 전쟁에서 이적과 기적을 사용할 것이다. 왜 사단은 이적과 기적을 사용하는가?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자극하기 위해서이다. 말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인 계명과 믿음 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의존하는 신앙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과 원칙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사단은 우리가 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기 원하기 때문에 기적과 이적을 사용한다.
감정과 느낌에 의존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어떤 사람들이 사단이 주는 이적과 기적에 미혹되어 빠지게 될까? 감정과 느낌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미혹에 쉽게 빠지게 된다.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기 전에 사단은 먼저 사람들의 신앙을 느낌과 감정에 의지하는 감정적 신앙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처럼 참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지만, 사단은 보고 느끼는 것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믿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간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성경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믿고 따른다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실제로 있었던 한 이야기를 통하여 느낌과 감정을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한번은 나이든 노부부가 기차를 타고 보스톤에 왔다. 그들을 기차역에서 나오는대로 곧장 하버드 대학 총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총장과 시간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총장실의 비서에게 총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비서는 한눈에 그 노부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았다. 얼굴은 검게 타 있었고, 허름하고 구식 양복을 입은 나이든 남자와 전혀 세련되지 않고 시골티가 듬뿍나는 나이든 여인을 보는 순간 총장 비서는 이 사람들은 하버드 대학의 총장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 노부부가 총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였지만, 비서는 총장님은 오늘 하루종일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노부부는 할 수 없이 그러면 저희는 총장님을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비서는 그들이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업무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노부부는 전혀 지치거나 지루해하지 않았고 오랜 시간을 의자에 앉아서 총장을 기다렸다. 참지 못한 것은 노부부가 아니라 비서였다. 비서는 짜증이 났고 결국에는 이 사람들이 총장을 만나게 하여 빨리 돌아가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서는 총장실에 들어가서 총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총장님 잠시 이들을 만나주셔서 노부부가 빨리 돌아가도록 하셔야 할 것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총장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들을 들어오게 하라고 말했다. 총장은 근엄한 얼굴로 노부부에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부인은 대답하였다. 우리 부부에게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작년에 갑작스런 사고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내 남편과 나는 아들을 기릴 수 있는 기념물을 하버드 대학 캠퍼스에 세우기를 원합니다. 총장은 답답한 얼굴로 그리고 조금은 거만한 음성으로 부인, 하버드 대학에 다니다가 죽은 모든 사람들의 동상을 이 대학의 교정에 세우면 이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 공동묘지가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부인은 금새 오, 아닙니다. 우리가 세우려고 하는 것은 아들의 동상이 아니라 건물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총장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 부인이 입고 있는 낡고 촌티나는 옷들을 아래 위로 흘어보면서 부인, 건물을 짓는데 얼마나 돈이 드는지 아십니까? 하버드 대학의 건물들을 짓는데 750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라고 설명하였다. 시골에서 금새 올라온 듯하게 보이는 그 부인은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하였다. 총장은 이제 이 부부가 여기를 나가겠구나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부인은 몸을 돌려 남편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조용히 말했다. 여보, 대학을 세우는데 그 정도의 돈이 든다고 하는데 차라리 우리가 직접 대학을 세우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부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총장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곧이어 리렌드 스탠포드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총장실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는 곧장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에 가서 자신들의 이름을 딴 대학을 세웠는데 그것이 스텐포드 대학의 시작이 되었다. 노부부는 스탠포드 대학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죽은 아들을 추모하였다.
이 이야기는 스탠포드 대학이 세워지게 된 배경의 실화이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는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이 실화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잘못을 지적하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이다. 계명과 원칙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행동하고 결정할 때 이와 같은 일들이 영적으로도 생기게 된다. 사단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느낌과 감정에 따라 신앙을 하도록 유도한다. 교회 내에서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하여 사단은 성령의 은사를 우리의 감정과 느낌과 연결시켜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뜨거운 느낌이 있을 때에만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믿도록 훈련받고 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때는 성령의 임재를 느껴서 믿음이 충만해지고, 감정이 그늘지고 힘겨울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못느끼고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이 일어날 때 깊은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된다.
감정과 느낌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좋은 감정과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과 느낌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을 행사한 이후에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믿음으로 건넌 후에 감격과 감사의 정신을 가지게 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감정과 느낌은 믿음을 행사한 이후에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사단은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믿음을 행사하기 이전에 먼저 행복하고 황홀한 느낌을 갖도록 유도한다. 성결한 믿음의 생애를 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서 박수치고 단순한 노래를 반복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성령을 구하면,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에 뜨겁고 황홀한 감정을 넣어줌으로써 무아지경 속에서 방언을 하거나 이적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감정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대로 사는 거룩한 생애는 전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믿음과 계명이 조화를 이룬 신앙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진짜 그리스도인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지키는 신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신앙을 말하는가? 이것은 계명과 원칙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성령의 지배를 충만하게 받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삶이다.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을 소홀히 하고 계명과 원칙만을 높이면 까다로운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계명과 원칙을 무시하고 사랑과 관용만을 강조하면 경박하거나 부도덕한 사람이 되고 만다.
기독교 신앙은 교리나 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죽은 율법이나 값싼 감정이 아니라 생명이다. 생명이기 때문에 언제나 살아 있어서 명쾌하고 분명하게 움직인다. 그것은 계명으로 육체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며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 계명과 법을 폐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을 통하여 적절하게 육체를 부림으로써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이 참 신앙이다. 참 신앙은 계명과 율법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금욕하고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평안과 만족을 맛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절제하게 되는 것이다. 계명과 믿음이 조화를 이룬 신앙은 어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으며 보기 흉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렇고 내 스스로 느끼기도 그렇다. 참 신앙은 금욕도 아니고 은둔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적 쾌락도 아니고 무원칙도 아니며 나약함이나 무사안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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