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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1;15-25, 고난주간 세 번째 주일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025. 3. 23.
오늘 본문은 특별한 내용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의도적인 질문에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우리말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는 의미와 대상에 따라 사랑을 네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인데 에로스는 남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성 간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가족 간에 주고받는 사랑인데 스토르게입니다. 세 번째는 친구간의 사랑인 우정인데 필리아입니다. 에로스와 스토로게와 필리아의 공통점은 모두 조건적입니다. give and take입니다. 언제든지 조건이 안 맞고 비교의 대상이 되면, 충족이 안 되고 요구한 것이 거부를 당하면 냉정히 등을 돌리는 사랑입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에 따라 울고 웃고 행복하고 슬프다고 합니다.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생명도 마찬 가지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까닭은 에로스 자체가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변함과 동시에 에로스는 흔적이 사라지고 추억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가족 간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조건적입니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부모와 자녀들 간의 갈등이 왜 점점 더 커져갑니까? 없는 것과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대로 다해야 하는 부모님이야 그렇지만 한 부모의 몸속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남보다 더 못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형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간의 사랑인 스토르게 역시 조건적 사랑입니다. 세 번째로 여러분, 같은 학교에 다녔다고 해서 모두 다 친구가 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참된 친구는 손가락으로 꼽힙니다. 이유는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 또한 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적인 사랑과 구별하여 사용되는 헬라어의 네 번째 단어가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조건이 없습니다. give and take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조건이 안 맞고, 비교의 대상이 되고, 충족이 안 되고 요구한 것이 거부를 당하더라도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상태와 수준, 상대의 태도여하에 상관없이 행하는 헌신적인 사랑이 아카페 입니다. 그런데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뜻하는 헬라어 동사는 agapao입니다. 이 agapao의 본뜻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진정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중심으로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면에서 내가 누구를 기뻐하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싫어진다면, 상대의 승승장구에 배가 아프도록 시기심이 난다면, 느닷없이 어떤 형태로든 상대를 한 번 짓누르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나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고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지만 헬라어로서 사랑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 먼저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갈릴리 바다를 다시 찾은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고 얻어진 결과를 가지고 조반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의 제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고 침묵을 했습니다. 이때에 주님께서 새벽녘 갈릴리의 정적과 고요를 깨트리며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물었지만 다른 6명의 제자들에게도 묻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특별히 베드로를 지목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조건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조건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 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어떤 경우에도 네가 가는 이 길을 진심으로 기뻐하느냐? 네가 변함없이 예수님인 진리가 흥왕하기를 진정으로 즐거워하느냐? 네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느냐?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것 없이는 이 세상 속에서 참 된 신앙인으로서 영원한 삶을 바르게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답변은 내가 주님을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가족 간에 주고받는 스토르게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가페의 참뜻을 알지 못했던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친구지간의 사랑인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어느 때는 친구로, 형제로 말씀하신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자신 있게 고백한 필리아의 사랑이 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이 이처럼 조건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로 보였을 때,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사랑으로는 얼마든지 주님을 또다시 배신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필리아의 사랑은 조건입니다. 베드로는 조건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친구로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친구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습니다.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이 친구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두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아카파오 할 수 있느냐? 그러나 베드로는 이번에도 주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의 진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내가 주님을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처음과 똑같은 답변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답변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몰랐던 베드로는 자신 있게 처음의 대답을 되풀이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한계이며 수준입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숙식을 하시면서 가르치셨던 주님으로서는 참으로 한심하실 수밖에 없는, 무어라 질책치 않을 수 없는, 정녕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은혜와 복을 받고, 은총 가운데 기적을 경험 했고 세워 주었는데도 모르는 것과 조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베드로의 마음이고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2.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인데 세 번째 질문에 위대한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계속되는 베드로의 답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필리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질문이 이전과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을 묻지 않았고 아카파오로 묻지 않았습니다. 왜 여태 그런 것도 모르냐고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정말로 네가 친구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으로 베드로의 불완전한 고백을 고스란히 수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베드로가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꾸짖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베드로의 수준으로 낮추고 내려갔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먼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의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한심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베드로를 agapao 하셨습니다. 형편없는 베드로를 진심으로 기뻐하시며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었습니다. 여기서 귀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아가페의 사랑은 상대가 나의 수준에 맞추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수준에 나를 맞추어 가는 스스로 낮추는 자발적인 자기 부인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사람을 agapao한다는 것은 그의 모든 허물과 유치함이 있음에도 지금과 현재 있는 그대로 먼저 수용하고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아가페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아카페의 사랑이 증명되었고, 인카네이션 하시므로 아카파오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으로 낮추어 주셨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의 수준이 최고라고 착각했습니까? 모든 면에서 완성된 존재인양 오해했습니까? 우쭐대고 교만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7절 상반 절에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베드로가 근심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의 수준에 맞추어 주셨을 때 베드로가 근심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 나타나 있는 단어 lupeo는 근심 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고 비탄에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지를 물었을 때 엉뚱하게도 필리아의 사랑을 두 번씩이나 당당하게 고백했던 베드로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수준에 맞추어주셨을 때 오히려 가슴에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말할 수 없는 비탄에 빠졌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수준을 맞추어 주시는,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이 베드로와 자신의 실상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보았고 깨닫고 알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 번째에도 베드로가 아가페의 수준에 이르기를 요구하시는 질문을 하셨다면, 질문과 베드로의 답변은 계속 평행선일 것입니다. 불완전한 필리아의 답을 하고서도 변함없이 당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으로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시고, 그 모습으로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셨을 때, 그 사랑 앞에서와 그 사랑에 의해서 베드로는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형편없음과 한심함을 처절하게 확인했습니다. 불과 열흘 전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을 버리고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지난밤, 몇 시간 전까지도 부활하신 주님을 까맣게 잊은 채 공허한 갈릴리가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인 양 그물만 던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을 향하여 두 번씩이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했으니 얼마나 얼굴이 두껍고 가식적인 존재입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자신에 대한 비탄의 쓴 뿌리를 드러냈습니다. 처절함 속에서 베드로는 17절 하반 절에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 처음과 두 번째의 대답은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당당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 번째 답변에서는 당당함이 전혀 없습니다. 근심을 한 베드로가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아가페의 사랑이 아닌 필리아의 사랑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두 번의 고백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두 번의 답변이 자기 수준을 완전하다는 착각하는 사람의 자기 과시라면, 마지막 답변은 자기 수준의 불완전함을 깨달은 겸손한 자기회개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 냉정히 등을 돌렸던 배신자이었습니다. 아직도 내 것만 찾는 허물투성이이고 여전히 부족합니다. 말씀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보고, 만졌지만 다시 갈릴리로 갔던 그런 존재이지만 할 수 있는 사랑을 다하여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하는 저의 중심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비록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저의 마음과 중심을 받아 주세요. 여러분, 베드로가 주님께 드렸던 많은 고백 중에서 가장 진실 되고 겸손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승낙하며 받아 주셨는데 베드로가 계속 이 고백의 수준과 필리아의 사랑의 수준에 안주하지 않고,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랑의 고백 이후에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시작을 여는 진정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필리아의 수준을 넘어 아가페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시작은 아가페에 의해서 열려집니다. 무엇 때문에요? 베드로의 수준이 장성할 수 있었던 것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형편없는 베드로의 수준에 맞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수준으로 내려와 주신 주님의 사랑에 의하여, 그 사랑을 힘입어, 그 사랑에 이끌려 아가페의 수준이 되었습니다. 결코 빼낼 수 없는 옹이가 된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 너무 깊이 옹이가 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결코 버릴 수 없는 옹이가 된 아카페의 사랑이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했고 진정한 사도가 되게 했습니다. 이는 낮추시고 agapao 해 주시지 않았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오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빼낼 수 없는 옹이가 된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과 너무 깊이 옹이가 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은 상대의 수준에 나를 맞추어 주는 자발적인 자기부인의 능력입니다. 나를 주님의 수준에 다다르게 하는 능동적인 힘입니다. 결코 빼낼 수 없는 옹이가 된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십자가의 사랑과 아카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온전하게 변화되는 베드로입니다. 여러분, 이 일 이후에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반석, 베드로가 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던 이날로부터 30여년이 흐른 뒤에 베드로는 벧전4; 7절∼8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필리아의 사랑으로 우정을 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 agapao하라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설교를 합니까? 아가페의 사랑만이 허물투성이인 상대의 수준까지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수준까지 끌어 올려 줄 수 있기 때문이고,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면 참 사랑을 아는 참 사람다울 수 없음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아가페를 알지 못했을 때는 주님과 사람을 동시에 배신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엡 4;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니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아카파오로 그리스도의 머리까지 자라고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람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다다를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자학하고 안 된다고 합니다. 특정인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 안에서 모든 분이 가능합니다. 왜요? 사랑의 원천 되시는 주님께서 내 수준으로 내려오시고 나를 범사에 걸쳐 주님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사람과 주님을 동시에 사랑하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삶의 환경이 더욱 옭아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결코 빼낼 수 없는 옹이가 된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십자가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낮추고 맞추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은 오늘도 나의 수준으로 낮추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합니까? 주님의 수준을 향하여 또 한 단계 끌어올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결코 빼낼 수 없는 옹이가 된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십자가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을 힘입어 사람을 향해서는 땅 아래에까지 내려가고, 또 주님에게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주님의 아가페 안에서 우리의 수준을 확장시켜 가는 것입니다. 이 확장 없이는 내 몸에서 태어난 자녀와 내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도 바르게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은 언제나 지금 나의 수준을 깨트려 가는 존재의 완성과 참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고 그것은 아가페의 사랑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은 단순히 베드로 개인을 향한 질문이 아니고, 우리 모두를 주님의 아가페로 초청하는 주님의 고백이고 나를 향한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부끄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의 수준으로 친히 내려 오셔서 임마누엘하십니다. 왜냐하면 또 다시 세우고 끌어올리기 위함입니다. 이 예배가 갈릴리 바닷가의 새벽이 되게 하시고, 결코 빼낼 수 없는 옹이가 된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십자가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에 내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고, 이 사랑을 힘입어 좌우 아래로는 사람을 향하고 위로는 주님을 향하여 내수준의 폭이 매일 확장되기 위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랑 속에서 사람과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기쁨을 맛보고, 이 사랑을 힘입어 나의 수준을 끊임없이 끌어 올려 능력이 되는 복을 누리고, 이 사랑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이 되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적용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갑니다. 18절,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런 주님의 말씀을 수용할까요? 주님이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 오셨기 때문이고, 주님의 수준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말씀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주님이 가게 하신 길을 가는 것이지 스스로 원하는 길을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 갈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띠 띄우시는 데로 가야 합니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시간만 지나고 세월만 흐르고 결국에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정입니다. 이야기 하나 합니다. 몇 년 전에 영적으로 항상 충만하다고 하시는 어떤 분이 시적인 영감을 가지고 글을 올렸습니다. 길을 묻고프다, 길이 어딘지! 길은 있는 걸까? 제대로 가는 길인지! 가다가 막다른 길이면 돌아서 가야지! 물이 역류할 수 없듯이 내 삶도 거꾸로 가지 못하듯 그저 물이 가라면 가야지! 길이라 가르치면. 또 그리 가야지! 세월에게 반항하면 그 세월은 세상이 무섭고 사람도 무섭고 나도 나도 무섭다. 마음이 무겁다. 여러분, 끝이 없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과 돌아가는 길입니까? 그렇습니까? 마음에 와 닿습니까? 여러분, 아카파오로 임마누엘 하셨고 그래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확신합니까? 그런데 왜 길을 묻지 않습니까? 어디인지? 길은 있는지? 제대로 가는지? 되돌아가는지? 이 모든 것 앞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세상이 무섭지 않고 사람이 무섭지 않고 내 자신이 무섭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이끌림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예수님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증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설사 죽는 길이라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증인의 모습입니다. 결과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부어진 사랑이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이것저것이 궁금했습니다. 21절 베드로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가리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참으로 엉뚱하고 끝까지 주위에 관심이 많습니다. 은혜를 받고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그 순간에도 주변과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같이 예수님이 따르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실지라도 그것이 베드로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입니다. 내가 복을 받고 주의 길을 가는 것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저 사람은 저 사람도 이런 것에 주목합니다. 여러분! 증인으로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에 관심이 아니고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내가 결코 빼낼 수 없는 옹이가 된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십자가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 다른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마시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내 인생길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나를 세우신 주님의 뜻과 소망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셔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나 같은 것을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사랑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아. 이 사랑이 아카파오입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엔도우 슈사꾸(遠藤周作)의 침묵(沈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크리스토퍼 페레라라는 신부가 등장합니다. 이 신부가 옛날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에 잠입해서 선교를 하다 잡혀서 고문을 받다가 그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항복해서 배교했다는 소식이 포르투갈 교회에 전해집니다. 그 신부는 포르투갈 국민이 모두 존경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항복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모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일본 군국주의가 고문을 심하게 하더라도 이 페레라 신부는 죽으면 죽었지 배교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부의 세 명의 제자가 그 진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잠입합니다. 그중 한명의 이름이 제바스티안 로드리고입니다. 이 사람이 또 체포되어 그 악명 높은 고문대 앞에 끌려 나갔습니다. 그 고문대는 후미에 라는 것인데 나무판 위에 예수님상이 새겨진 동판을 붙여놓고, 그것을 밟고 지나가게 만든 판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아주 교묘하게 신자들의 체면도 살려주고, 배교 하게 하여 항복을 받아 살려주기 위한 방법입니다. 신자들을 검사관 앞으로 나오게 하고 발밑에 예수님의 얼굴이 있는 상을 놓고 밟고 지나가게 합니다. 발로 밟는 것은 검사관만 알고 아무도 모릅니다. 그 예수님의 상을 밟으면 예수님을 배반한 것으로 알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로드리고가 그 앞에 섰습니다. 보니까 바닥의 예수님의 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도 밟혀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서서 이 사람이 고민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배교해야 하나 아니면 이 끔찍한 고문을 받아야 하나? 망설이고 서 있습니다. 그 망설임의 시간이 얼마나 조용하고 엄숙하고 마음이 무겁게 느껴졌겠습니까? 이 사람이 그 앞에 서서 한참동안 조용히 침묵하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침묵입니다. 한참 고민하며 침묵하고 있을 때 그때 어디선가 조용하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망설이지 말고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여 이 세상에 왔느니라. 나를 밟으면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는 음성입니다. 그러자 로드리고는 통분합니다. 주여,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고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있었다.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 책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내가 고통당할 때 침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 제자의 고민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고민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침묵과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하고 고민하지만 필레오로 내려가고 허락하시는 주님이 느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십자가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을 멀리두지 말고 주신 사랑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부끄럽지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몇 번을 물으시더라도 똑같이 대답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장차 주님 보좌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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