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본가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고속도로 상에서 속칭 ‘돌빵’을 당했습니다. 순간 큰 소리에 놀라고, 앞부분, 작은 흔적에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고속도로 상이니 당연히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순간적이었지만, 뭐가 부딪친 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돌빵은 스톤칩이라고도 하는데, stone chip이란 주행 중 도로 위에 있는 돌이나 모래 등이 날아오거나 적재물이 날아와 차량에 상처가 생기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동차 앞유리는 사고에 대비하여 안정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2개의 유리 사이에 필름지를 넣어서 붙인 상태의 이중접합유리이기 때문에 바깥 유리에 금이 가더라도 안쪽의 유리는 멀쩡한 상태가 대부분이라, 돌빵이 크지 않은데 굳이 유리 교체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게 일반적 권유이기에 수리집에 맡기려 하다가 자료를 찾아보니 ‘자동차유리복원키트’란 게 있어서 직접 사서 손쉽게 수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판단이 실수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용설명서를 읽어보고 따라 하는데, 흡탁기 고정 후 주입기 밀착 시 힘을 너무 주어 작은 점이던 돌빵 주변으로 4갈래 긴 균열이 생겨버린 겁니다. 복원크트 사는 데 생돈 들이고, 더운 날 땀 뻘뻘 흘리며 고생하여 흠집만 수리가 불가한 상태로 사태를 키운 겁니다. 고속도로 상의 돌빵 사고는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도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현행법상 스톤칩은 교통사고로 인정되지 않아 보상받을 방법이 마땅치 않지만, 고속도로에서의 돌빵은 진출입기록과 블랙박스에 충격 영상/소리가 있다면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반풍수가 집안 망친다’는 말과 함께요.
문득,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저의 최근 실수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건, 전문분야가 아닌 건 전문가에게 묻고 의견을 따르고, 부족한 지식은 책, 인터넷, 고명한 식견을 가진 이를 통해 쌓아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진실, 근거보다는 확증편향에 기반한 자기논리, 진영 논리로 평행선을 달리는 정치꾼, 모리배가 넘치는 요즘, 2주 중 절반 이상을 특별히 받은 업무 수행을 위해 뉴스 못 보고 세상과 연락 두절된 곳에서 있었던 시간이 도리어 고마웠던 건 참 우스운 현실의 결과가 아닌가 싶어 실소를 지었습니다. 그리도 중간 중간에 만나게 되는, 찾게 되는 자연은 그러한 상처를 치유해 주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따스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이웃도요... 아래 시를 다시 읽으며 또, 다시, 배웁니다.
고색창연한 달성하목정에서 배롱나무 붉은 꽃을 탐미하였습니다. 세상사를 잠시 잊었습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행복감이 밀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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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웠다(모셔온 글)========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임을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을 나는 배웠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또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 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음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해서
내 전부를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많은 이들(오마르 워싱턴, 샤를르 드 푸코 등)이 서로 자신의 시라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