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읽는
국악이야기
1947031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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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근심에 쪼들리는 백이십만 서울시민에게 하루 동안 명랑한 기쁨을 드리오리니 온갖 볼일 제쳐놓고 봄빛 어리인 창경원 금잔디로나 오시라!
박귀희는 1921년 생으로 당시 스물여섯.
나이로는 파격적이지만, 여러 창극의 주인공을 하면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스타였다.
본명 장영심 (부친 장병관)
호적 오계화
예명 박귀희 (모친 박금영)
실로 우연히 국악 소리에 매료되어 귀동냥 하다가, 또 우연히 재능을 인정받아 국악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취미로 배우다가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기이한 인연으로부터 결정될 때도 있다. 박귀희도 그랬다. 이화중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중략) 첫 공연으로 명창이 났다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대동가극단 일급 단원의 대우를 받으며 순회공연의 길을 오르게 되었다. 1935년, 열다섯 살에 국악 예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년여 악극단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에 머물 때 일생일대의 사건이 하나 더 보태진다. 가야금병창의 명인이었던 강태홍을 만난 것이다.
창극은 판소리에서 파생한 근대적 형태의 한국식 오페라라 할 수 있다.
일목장군
선화공주
여성국악동호회
남자 배역을 여자가 소화한다는 발상
박귀희가 남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디어가 았으면 실행에 옮긴다는 점이다. 때로 무모하게 보이지만 박귀희는 집념을 가지고 그 일을 실행해 나간다. 후술하겠지만, 국악예술고등학교 설립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행해진다.
옥중화
햇님 달님
국악 교육의 대모가 되기까지
한국민속예술학원
국악예술학교
박귀희의 말에는 울림과 진실이 있다.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