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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이제서야 이해되는 불교 – 원영
오랫동안 출가해서 수행을 한 스님이 “이제서야 이해되는 불교”라고 하니 그냥 귀동냥으로 불교를 주워듣는 불자 아닌 불자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원영 스님은 운문사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고는, 일본 하나조노(花園)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상임연구원·교육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2023년 현재는 서울 성북구 소재 청룡암 주지로, BBS 불교방송 〈좋은 아침 원영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한다.
스님은 서문에서 “모쪼록 저의 설명이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불법과 해설이 쉽게 다가올 리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스님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성제(四聖諦)보다, 삼법인(三法印)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하고 이 둘은 물론이고 연기(緣起), 육바라밀(六波羅密) 같은 것도 쉬운 주제는 아니다 싶기는 마찬가지다. 그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재미 삼아 본문에 있는 이야기를 옮겨보는 것으로 여기(독후감)에 대신할까 한다.
처음에 삼법인을 설명하였는데, 삼법인은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현실 인식과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엄연한 변화의 이치,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나(我)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고·무상·무아’이 세 가지를 터득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즉 평화로운 상태를 말하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그것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苦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하는 4고와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인 8고를 말하는데, 그것들 모두 자세히 설명했다. 그것들을 여기에 모두 적기는 너무 길어서 생략하고 그냥 읽고만 넘어간다.
무상함을 말하는 데는 꿈 만 한 것이 없다. 꿈에서는 고대광실을 짓고 거기서 행복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깨어 나면 모두 허사가 된다. 문학작품에서 꿈을 소재로 한 것에는 김만중의 「구운몽」과 이광수의 「꿈」이런 것이 있다. 「구운몽」은 ‘성진’스님이 우연히 꿈에서 아름다운 선녀를 만나 갈등하다가 결혼하게 되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다가 인생이 덧없음을 느끼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안도한 뒤, 다시 절로 돌아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내용이고, 「꿈」은 ‘조신’이라는 스님이 절에 기도하러 온 반가의 여인에게 반해 번뇌와 망상 속에 여인과 인연을 맺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하게 되고, 사모하던 여인이 법당에들어와 기도하던 스님에게 “스님을 사모하오니 자신과 함께 도망가자.”고 하여 망설임 없이 여인과 야반도주했고,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살면서 가난하지만, 자식까지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도반스님이 찾아와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고 그만 그를 죽이고 도망자 신세가 된데다 궁핍한 생활로 자식마저 굶어 죽게 된다. 고단하고 힘든 삶을 포기하고 싶어진 부부는 서로를 위해 헤어질 결심을 하기에 이르고, 이런 와중에 조신은 포도청에 잡혀가는 신세가 되어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이에 모든 것이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두 소설 모두 인생이 덧없음을 일깨워 주고, 허망해 꿈 아닌 게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고도 진실한 존재의 생존 양식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상을 배우고, 생주이멸(生住異滅) 즉, 생겨나고, 유지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의 이치를 알게 된다. 세상일이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삶의 비애가 없는 사람도 별로 없다. 무상함을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각성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인지 모른다.
세상이,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은 조금 알겠는데, 또 무아는 무엇인가?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없다니? 불교에서의 ‘무아는 우리가 믿고 싶은 존재로서의 영원불변한 자아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이 몸뚱이는 그저 오온(五蘊)이 조건에 따라서 결합 된 형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쉽다. 인도에 많은 채식주의자들은 고기는 불결하고 야채는 깨끗하다고 하는 생각에 기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명을 아끼기 때문에 채식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깨끗하고, 덜 깨끗하고, 잘나고 못난 차이가 있을 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신이 부여한 영원불변’한 존재성이 있다는 것이 인도의 ‘아트만’사상(혹은 유일신 사상)이지만, 불교는 이것을 완전히 부정한다.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생명체는 다 무상하다. 창조신 아트만이라고 하는 절대 불변의 자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모든 법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 즉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무아설이다.
나는 누구인가? 많이도 물어보는 자아에 관한 질문이다. 만약에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좋아하던 첫사랑 남자가 있었다고 치자, 만약 그 남자와 결혼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까? 당연히 지금의 나와 똑같은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조건이 달라져도 마찬가지다. 내가 태어났더니 아버지는 농부였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셨고, 그런 상황 속에서 성장한다면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는가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도 인생이 달라진다.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가, 더 놀 것인가에 따라서 달라지고, 어떤 사건과 환경을 접하느냐에 따라서도 완전히 달라진다. 조건이 바뀌면 결과도 달라진다. 무아라는 것은 결국 ‘조건이 만들어낸 관계’를 말한다. 지금, 현재 상태로 존재하기까지 수많은 관계들의 변화가 있었다. 그 시간적 변화를 무상이라고 하고 모든 조건의 결합은 따로 하나를 떼어내서 독립된 개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조건에 의해 형성된 어떠한 현상도 홀로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상과 무아다.
이제 오온에 대해 알면 무아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될 것 같다. 《반야심경》첫머리에도 나오는 오온(五蘊)은 단어만으로도 이해가 쉽지 않다. 오음(五陰) 또는 오중(五衆)이라고도 하는 오온은 물질과 정신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즉 색·수·상·행·식으로 구분한 것인데, 부처에 따르면 인간은 이 다섯 가지 존재 요소, 즉 오온으로 인해 현재 상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집합, 모음, 쌓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다시 말해 물질(형상)을 나타내는 色蘊, 감각(느낌) 기능을 나타내는 受蘊, 표상(생각)의 작용인 想蘊, 정신(의지)의 작용인 行蘊, 의식(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識蘊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영원불변한 자아도 무아가 되고, 신이 부여한 神性도 없다. 모든 생명체는 오온의 결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색온은 형상으로 이 몸을, 수온은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기에는 안이비설신의라는 것이 있다. 상온은 생각과 상상을 말하고, 행온은 내가 만난 사람을 그리워한다든가 또 만나고 싶다든가, 아니면 그것을 꼭 갖고 싶다든가 하는 내 마음이 만들어낸 조작된 의도, 그 의도를 담은 행동을 말한다. 여기에서 업(業)이 만들어지고, 식온은 마음을 실행에 옮긴 다음에 만들어지는 의식, 업이 저장된 상태로써 이것들은 모든 대상에 대한 인연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이 과정에 영원불변한 것은 어디에도, 무엇도 없다. 여기에서 자기 욕구에 부합하면 행복하고 좋은 감정이 생기지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싫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보통의 대중은 영원히 중생에 머물고, 중생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부처께 귀의하는 이유기도 하다.
불교에 귀의하는 이유가 열반에 들기 위한 과정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텐데, 열반(涅槃)이란, 산스크리스트어 ‘니르와나’의 음역이다. 이것은 ‘불어서 꺼진 상태’와 ‘갈애(渴愛-오옥에 애착함)가 소멸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번뇌가 소멸된 것으로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을 열반으로 정의하기도 한 것이다. 열반은 유여열반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이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가 6년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육신이 남아 있었으므로, 유여열반 이후 45년간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중생을 제도하다가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을 때를 무여열반에 든 것이라고 한다. 무여열반에 들면 다시 태어나지도, 육도를 윤회하지도 않고 적멸에 든다 한다.
다음은 사성제(四聖諦)에 대해서다. ‘4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하는 이것은 ‘고·집·멸·도’가 그것이다. 이는 삼법인과 함께 불교 교리의 핵심이다. 이외에도 중도, 팔정도, 연기 등 많은 불교의 교리가 있지만, 이 사성제 안에 그것들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사성제를 아는 것은 불교의 거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할 때 이 사성제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을 이끄는 길이다.
나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이것은 유익하며 거룩한 삶의 근본에 적합하여,
경계에서 멀어지도록 이끌며, 욕망의 집착을 놓음으로 이끌며,
바르지 않은 것을 버리도록 이끌며,
평화,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쌍웃따니까야』- 56 *경전 모음집 이름
“인간이 불행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그가 위대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파스칼의 이 말처럼 불행은 괴로움에서 온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희망이란 게 있다. 나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병에 걸려 먼저 죽고 말았다. 그럼 어떨까? 미치도록 괴로울 것이다. 사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행복하던 시절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고통은 몇 배나 가중된다. 행복한 추억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겪어야 할 아픔도 큰 법이다. 이것이 무너지는 괴로움, 괴고(壞苦)다. 인간의 3고 중 하나로 나머지는 인연으로 인해 받는 괴로움인 고고(苦苦)고, 무상한 변화를 통해 느끼는 행고(行苦)가 더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괴로움은 왜 생기는 것일까? 부처님은 탐진치로 인해 생긴다고 했다. 인간은 탐욕(貪)이 많고, 성내기(瞋)도 하고, 어리석음(癡)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이것을 모르고 ‘영원한 것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사성제와 삼법인을 모르는 것도 어리석음에 속한다. 자기 안에 있는 탐욕의 크기도, 분노의 크기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어리석음이다. 이렇게 삼독은 먹고 싶고, 갖고 싶은 욕심과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생기는 분노, 그리고 무상, 무아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이것이 고(苦)라면, 집(集) 멸(滅) 도(道)는 또 무엇인가?
한자 集자를 보면 나무 위에 새가 앉은 모양을 나타낸다. 새가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것이 ‘모일 집’이라면, 괴로움은 원인이 있고 조건이 있다고 하고 그것들이 결합하여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으로 모든 오온들이 모인 결과물로써 괴로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苦의 반대말은 樂이 아니라 ‘고요한 세계, 평안의 세계, 열반의 세계’라고 한다. 괴로움의 반대말은 괴로움이 없는 사유의 세계를 말한다. 아무리 예뻐도 100일 동안 피는 꽃은 없다. 아무리 좋아도 일생동안 내내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불완전한 기쁨, 불완전한 행복일 뿐이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과보를 일으키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는 갈애가 그 원인이다.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가 쾌락과 욕망을 동반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윤회를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에는 반드시 갈애가 자리 잡는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 귀로 듣는 즐거움, 좋은 향기, 맛있는 음식, 피부에 닿는 좋은 감촉, 사랑스럽고 기분, 감정들까지, 이 모든 것에는 갈애가 자리한다. 그리고 갈애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苦와 集이 괴로움과 쌓임이라면 滅은 무엇인가? 아픔의 원인이 다 제거됐을 때 도달하는 고요하고 안온한 상태, 寂靜의 상태, 열반에 든 상태를 멸이라고 한다. 열반에 대해서는 앞서 보았으므로 줄이고, 박노해 시인의 「길] 이라는 시를 보자.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우리 모두는 길 위에 서 있거나 길을 가고 있다. 인생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곧잘 길을 잃기 때문이다. 현실 파악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 사이에 시간은 흘러가고 업보는 쌓인다. 어서 빨리 길을 찾고,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해야 한다. 『중아함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대중 가운데 말룽꺄가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공손하게 여쭈었다. “회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저희들을 잘 보호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런데 세존이이여, 저는 이 세계가 영원한 것인지 유한한 것인지, 생명이 곧 이 육체인지 아닌지 몹시 궁금합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 자체가 진실한 것인지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말룽꺄야, 내가 전에 세계가 영원하다고 해서 그대는 나를 따라 수행해 왔던 것인가? 그 밖의 의문에 대해서도 내가 전에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대는 나를 따라 수행해 온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그대에게 말한 일도 없고, 그대 또한 내게 말한 일이 없는데, 어째서 그리 부질없는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말해 줘도 말룽꺄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말룽꺄 뿐만 아니라 자리에 앉아 있던 많은 비구들이 같은 표정이었다. 부처님은 말룽꺄를 자리에 앉게 하고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에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가족들이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성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고, 또 활은 뽕나무로 만들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는지 알아야 하겠고, 화살의 깃은 매털로 된 것인지, 닭털로 된 것인지도 알아야 되겠다.’고 했다. 이렇게 따지고 들면 그는 독이 온몸에 퍼져서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이와 같다. 나는 그대들에게 세계가 무한하다거나 유한한 것이라고 단정해서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도, 법에도 맞지 않으며, 수행도 아니어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괴로움과 그 괴로움의 원인과 그것의 소멸과 그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에 있다. 그대들도 그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질없는 것에 논리를 갖다 붙여서 논쟁하지 말고, 그냥 가던 길이나 가라는 말 같기도 한데 그것을 이해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시 저자의 말을 빌려 보자. 우리는 감기에 걸렸을 때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다. 그러면 두통이 가라앉고 기침이 멎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화가 잘 안 된다고 느낄 때 소화제를 먹는 것도 같다. 더 큰 병에 걸렸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 병의 상태를 잘 아는 의사의 지시대로 하면 아픈 병이 좋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찾는 것처럼 마음이 아플 때는, 왜 괴로운지 그 원인을 찾고 처방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부처님은 세상 만물의 이치를 자세히 알려줄 테니 잘 들으라고 하면서 무상과 무아를 말씀하셨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쪽은 언제나 중생인 우리다. 중생은 달콤한 꿀물에 현혹되어 쾌락을 외면하지 못한다. 욕심도 성냄도 내려놓고, 어리석지 않다면 번뇌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열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가 있다.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버리고, 벗어나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본 「길」이 한자로는 『道』다. 공자는 인간이 마땅히 쫓아야 할 도리라고 하였고, 노자는 자연 그대로 인 것,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라고 했으나, 부처님은 사성제 중의 하나로 도성제(道聖蹄), 즉 인간이 성스럽게 지켜야 하는 길이 도라고 했다.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으로 가기 위한 ‘길’이 바로 ‘도’인 것이다. 그리고 열반에 도달하는 길은 여덟 개가 있으며, 이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했다. 그래서 팔정도를 알고 지키면 평안의 길,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정도가 무엇이기에 그것을 지키면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인가?
팔정도란 1. 正見(바른 견해). 2. 正思惟(바른 생각). 3. 正語(바른 말). 4.正業(바른 행위). 5. 正命(바른 생활수단). 6. 正精進(바른 정진). 7. 正念(바른 마음챙김). 8. 正定(바른 집중)을 말한다. 이것을 풀이하면 고집멸도를 앎으로써 얻게 되는 지혜인 正見과 삿된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正思惟, 헛소리하거나 한입에 두말하지 않는다는 正語가 있고, 正業은 세 가지 바른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않는 불상생(不殺生), 도둑질하거나 부정한 수입을 갖지 않는다는 불투도(不偸盜), 부정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불사음(不邪婬)을 말한다. 또 正命은 잘못된 방법으로 생계를 잇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계율(戒)과 바른 행동(定)과 슬기로움(慧)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正精進은 바른 정진, 다시 말해 나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正念은 바른 기억과 바른 알아차림을 말한다.
이제 이 책에서 설명하는 불교에 관한 것에는 연기와 육바라밀이란 게 남았다. 緣起란 인연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법칙을 말하는데, 부모와 자식, 부부 관계, 이런 것들이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안다. 여러 조건과 화합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바로 연기의 법칙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
사리뿟따(舍利子)가 친구에게 들려준 ‘짚단의 비유’인, 짚단을 혼자 세워두면 넘어지지만, 둘을 의지시켜 세우두면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사람人자 모양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안 하든 항상 법계에 있었다. 여래는 다만 이것을 스스로 깨달아 정각(正覺)을 이룬 뒤, 여러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고 드러내 보일 뿐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일어나므로 이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無常은 시간이란 것에도 고정된 별개의 개념이 없다. 모든 것이 연기로 이어지고 흘러간다. 죽음조차 그냥 시간이 없는 상태로 되는 것뿐이다. 신성이나 초월자라는 인식이 없으며, 연기법칙으로만 세계를 바라보고자 한 것이 불교다. 어떤 면에서 현대과학과도 매우 비슷하다. 모든 것이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연기법칙이야 말로 세상과 우주를 바라보는 최고의 통찰이고 가치인 것이다.
수행자는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인 팔정도를 지키며, 가장 균형 있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 느긋하지도, 너무 서두르지도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산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둥근 원처럼 연기의 법칙과도 연결되는 중도는 시작과 끝을 들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느 쪽도 맞지 않고, 어느 쪽도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기라는 가르침이 곧 중도로써 모든 진리를 융합한 것이다.
보살행과 바라밀행은 다른가? ‘반야바라밀, 육바라밀’등 불교에 많이 쓰이는 용어가 바라밀이다. 바라밀은 태어나고 죽는 현실적 ‘괴로움에서 벗어나 번뇌와 고통이 없는 세계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 방편이 바라밀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 스스로 고통이 없는 세계로 건너는 행위이자 고통과 불행에 빠진 중생을 도와 함께 건너는 마음 ‘자비심’이 바라밀이다. 자비의 마음으로 행하는 갖가지 행위를 ‘바라밀행’이라고 하고, 보살행이 곧 바라밀행이다.
바라밀(波羅密)은 산스크리스트어 ‘파라미타’를 소리 나는 대로 음역한 것인데, ‘파라(para)’는 ‘저 언덕’, ‘미타(mita)’는 ‘건너가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이생을 건너 완전한 것을 기필코 이루어낸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래서 뜻이 도피안(到彼岸)인 것이다. 도피안은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중생들이 사는 세상, 즉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 자비와 지혜로 가득한 깨달음의 세계, 그곳에 이른다는 말이다. 바라밀은 이상적인 세계로 향해간다는 것으로 어떻게 해야 완벽한 피안의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여섯 가지 바라밀행이 그 방편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보시(報施)·지계(持戒)·생천(生天)을 말했지만,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이들에게 베룬다는 보시바라밀(報施婆羅蜜), 계율을 잘 지키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온갖 고통과 번뇌를 인내하고, 용서한다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끊임없이 노력하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집중하는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지고 지혜를 성취한 깨달음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추가해서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고 한다.
보시는 아무나 어디서나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지계는 스님도 중생도 지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수련과 수양이 필요한 것이다. 지계란 몸으로(身), 입으로(口), 마음으로(意) 지켜야 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婬)은 몸으로, 불망어(不妄語), 불기어(不綺語), 불악구(不惡口), 불양설(不兩舌)은 말로, 불탐욕(不貪欲), 불진에(不嗔恚), 불사견(不邪見)은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이다.
이 10가지 계율(戒律-계와 율을 합친 것으로, 불자가 지켜야 할 규범)은 출가자의 율장이 정비되고 엄격한 계율이 생기면서 이후 계율로 인정받지 못하고, 도덕적 측면의 권유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나, 엄격한 면이 없지 않다. 남을 해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삿된 음행을 해선 안 되고, 거짓말·꾸밈말·험담·이간질하지 말고, 탐욕·성냄·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것은 수행과 깨달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 하지 말고 남에게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육바라밀을 모두 합친 것과 같이 마지막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다. 그것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수행을 통해서 형성된 지혜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중생과 함께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중생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지혜, 중생을 도울 방법을 아는 지혜가 반야바라밀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는 한평생을 두고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길지라도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이는 잠깐이라도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기면
곧 진리를 깨닫는다.
마치 혀가 국 맛을 알듯이
‘해 지는 것을 보고 땅을 치고 울었다.’고 한 어떤 스님의 말이 생각난다. 그만큼 깨달음이란 어렵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반야바라밀로 완성된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스트어 ‘프라즈나’, 빨리어로 ‘빤나’의 음역인데,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고·무상·무아의 삼법인과 고·집·멸·도 사성제를 통찰해서 얻어지는 지혜를 말한다. 연기적 세계관을 통해서 진리를 직관하는 것이므로, 일상의 지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만물의 참모습을 환하게 비추어보는 것으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한 완전한 모습을 반야라고 한다.
반야 지혜를 강조한 경전은 아주 많다. 『금강반야바라밀경』, 『반야심경』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장이 집대성한 600권이나 되는 『대반야바라밀경』도 있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항상 깨달음인 것 같지만, 목표점은 그 너머에 있다. 곧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성취하고자 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반야바라밀의 완성 또한 중생을 위한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우리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부처님 같은 탁월한 스승님을 만났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불교를 공부하며 무언가 특별한 대상을 찾으려고 합니다. 부처님을 찾으려고 하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입으려 하고, 부처님이 되는 특별한 길은 없으려나 기웃거리면서 뭔가 자신에게 없는 그 무언가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찾고 있는 대상이 결국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줄 아는데도 우리는 자꾸만 밖에서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밖이 아니라 내 안을 찾아가는 길을 공부해야 하는데 말이죠.”저자가 책을 마치며 한 말이다. - 불기 2568년 3월 17일 오전 1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