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라고요? 악보 천 번 보고 외웁니다”
내 50년 음악의 마지막 장면은‘남북 합동연주회’
지휘자 정명훈은 남·북한 합동연주회에 강한 의욕을 내비쳤다. 그는 남과 북의 오케스트라 협연이 ‘작은 평화’를 이뤄내는 일이라고 했다. 남북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이 울려 퍼질 날을 기다리는 그의 심정은 초조하다.
“이 세상에 늙어가는 거 좋아할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걸요. 저는 평생 동안 나이가 들기를 고대해왔습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58·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은 “젊은 나이엔 지휘를 아무리 잘해도 경험 많은 연장자들과 일하는 게 굉장히 불편하다”고 말했다.
“특히 (유럽에서) 동양인은 더 그렇습니다. 이탈리아어인 마에스트로가 ‘선생’이라는 뜻인데 젊은 선생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단원을 이끄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어요. 젊었을 때보다 요즘에 단원들과 호흡이 더 잘 맞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84년 옛 서독 자르브뤼켄방송교향악단에서 처음으로 상임지휘자를 맡았을 때 그는 불과 서른한 살 나이였다. 5년 뒤 서른여섯 살에는 프랑스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았다. 2002년 그를 “영적인 지휘자”라고 평가한 <르몽드> 지는 “그가 1989년 파리 음악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프랑스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감독을 맡아 5년 만에 유럽 유수의 오페라단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1994년 바스티유를 떠날 당시 경영진과의 갈등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1998년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맡았을 때는 단원들과의 갈등으로 몇 달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그가 국내에서 맡은 첫 상임지휘자 자리였다.
정명훈은 “그렇다고 지휘자가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원숙해지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요즘 제 처가 저한테 나이를 먹으면서 공부를 더 많이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고 자꾸 물어요. 이제 좀 덜해도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죠. 실제로 젊었을 땐 아침에 일어나 적당히 준비한 적도 있지만, 요즘은 더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하고 있어요. 과거에 지휘를 했던 곡이어도 또 공부합니다. 그럴 때는 마치 내가 개미가 된 느낌이에요. 그래도 그렇게 공부해야 조금 더 나아집니다. 기왕하는 거 잘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잖아요.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의 목표는 매일 더 좋아지는 것(better everyday)입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사실 처음 배울 때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지휘예요. 농담이 아니라 초보자에게도 1분이면 지휘를 가르칠 수 있거든요. 더욱이 타고난 재능이 있고 퍼스낼리티가 좀 강한 사람이 멋지게 지휘봉을 휘두르면 실력을 제대로 알아보기가 쉽지 않죠. 그런데 그 사람들 가운데 속이 텅 빈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속이 빈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소용없죠.”
10월 28일 오전 지휘자 정명훈과 세종문화회관 예술동에 있는 서울시향 예술감독실에서 마주앉았다. 이 대가는 편안해 보이는 흰색 니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가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 일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음악 담당 기자들 사이에 그는 인터뷰 기피 인사로 악명이 높다. 싫어하는 다른 두 가지는 사진 찍기와 오디션이다. 이날은 둘째로 싫어하는 인터뷰를 하느라 가장 싫어한다는 사진 촬영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오디션을 싫어하는 이유는 노래를 듣고 판단하기가 힘들어서다. 그는 프랑스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상임지휘자 시절에 5년간 약 1000명의 성악가를 대상으로 오디션을 했다고 한다. “그중 1%인 열 명 정도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줬다”고 그가 말했다. 재능 있는 성악가도 1%의 확률로 바스티유의 오페라 무대에 서는 셈이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미라클 오브 뮤직 쪽에서 그의 연주 스케줄을 받아 확인해보니 내년 7월까지 일정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마지막 스케줄인 2012년 7월 13일 연주 프로그램은 그가 2000년부터 상임지휘자로 있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모짜르트의 ‘레퀴엠’이다. 정명훈은 바로 이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을 지휘해 <르몽드>로부터 영적인 지휘자라는 찬사를 끌어냈었다. <월간중앙>과의 인터뷰 날엔 그가 지휘하는 국립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둘째 날 공연이 있었다. 국내에서 그가 발레 공연의 지휘를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국립발레단과 서울시향이 함께 올린 이 공연은 5회 공연의 객석 점유율이 98%에 달해 화제가 됐다.
대가는 1% 재능과 99% 노력의 산물
선천적인 재능과 후천적 노력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까?
“재능이 1%, 노력이 99%라고 봅니다. 선천적인 재능이 어느 정도 있어야겠지만 거기에 99%의 노력을 더해야 비로소 실력 있는 음악인이 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사람 가운데서 고작 1%가 빛을 봅니다. 그러니 만일 99%의 노력을 쏟지 않고 80%에 그쳤다면 1%의 재능을 갖췄더라도 81%의 실력을 쌓는 셈이죠. 단 뛰어난 재능은 없다고 해도 꾸준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잘할 수 있어요. 저도 그런 경우죠. 하지만 모짜르트 같은 천재 음악가는 그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모짜르트보다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어요?”
마에스트로도 천재성이 있지 않나요?
“없어요. 솔직히 제가 판단할 때 그렇습니다. 저희 일곱 남매 가운데서도 제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세상엔 1%에 해당하는 재능을 저보다 잘 타고난 사람이 많다고 봅니다.”
오늘의 마에스트로가 있게 만든 힘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여러 가지이지만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을 꼽고 싶습니다. 음악적인 재능은 아니에요. 음악에 대한 재능은 음악 하신 분은 아니지만 오히려 아버지 쪽에서 받았다고 봐요. 어머니는 늘 남편보다 자식이 우선이었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엄청난 에너지와 고도의 집중력입니다. 설득력도 아주 뛰어난 분이셨죠. 다른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집요하게 설득해 관철시키시곤 했습니다. 프랑스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에서 처음 저를 개관 공연에 초대했을 때 저는 프랑스어도 못했고 프랑스 오페라를 지휘해 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쪽 사람들과 미팅 한번 하고 나서 개관 공연 지휘 부탁뿐 아니라 아예 음악감독으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저는 그때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자질이 발휘됐다고 봅니다.”
연주자 내지는 지휘자를 개미에 비유했는데 작곡과 연주 가운데 작곡의 비중을 너무 크게 보는것 아닌가요?
“연주가 1이라면 작곡이 99죠. 제가 하는 일은 음악을 배달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피자 배달부에 비유할 수 있죠. 피자 배달부는 피자를 직접 만들지 않습니다. 그저 따뜻한 상태로 피자를 배달하고 손님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설명할 뿐이죠. 그런데 그날그날 따뜻한 상태로 배달하려면 작곡가들이 쓴 곡을 새로이 발견한 것처럼 잘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막 내놓은 요리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죠. 이것이 연주자의 책임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인데 이 일도 쉽지는 않아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연습도 많이 해야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모든 레퍼토리가 녹음돼 있습니다. 서울시향이 하는 연주보다 훌륭한 레코드가 많죠. 사실 이런 레코드를 사 들고 집에 가서 편안하게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도 연주회에 가는 것은 그 음악을 살리려는 장면을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연주는 비중이 1%밖에 안 되지만 그 1%가 참 재미있을 수 있거든요. 반면에 잘 녹음된 레코드는 사진 같은 느낌이 들죠.”
정명훈에 대해 서울시향 단원들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탁월하지만 악보를 외우는 암보 능력이 놀라울 만큼 뛰어나다고 말한다. 몇몇 단원은 한 인터뷰에서 그가 ‘거의’가 아니라 ‘완벽하게’ 악보를 외운다고 말했다. 그는 난해한 곡을 포함해 거의 모든 연주를 암보한 채 지휘한다.
어떻게 그 방대한 양의 악보를 다 외우나요?
“세계적 거장인 로린 마젤 같은 사람은 악보를 몇 번만 보고도 사진을 찍듯이 암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천 번을 봐야 합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특별한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죽어라고 하니까 외워지는 거죠. 단, 선택적으로 골라서 배우는 재주는 있다고 봐요. 다 잊어버리지만 좋다고 생각한 한마디는 잊어버리지 않죠. 훌륭한 음악가에 대해 좋다고 생각하는 것 한 가지는 꼭 기억합니다. 그걸 저의 내면에서 요리해 제 것으로 만드는 거죠. 실은 내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지휘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요?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구성원 중 유일하게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반면 연주자는 실수를 하면 그 부분만 망치지만 지휘자의 실수는 전체 연주를 망칠 수도 있어요. 같은 오케스트라도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 연주의 질이 달라집니다.”
서울시향도 전용 콘서트홀 있어야
2006년 정명훈은 서울시향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부임한다. 서울시향의 예술고문 시절 시향을 직접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에게서 2008년까지 서울시향 전용 콘서트홀을 건립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세계적인 수준의 오케스트라로 성장하려면 서울시향만의 연습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전용 콘서트홀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그는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는 서로 안면이 있나요?
“박 시장은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솔직히 정치인들에겐 별 기대를 하지 않아요.(웃음) 정치인들은 새로 일을 맡으면 전임자가 한 일을 모두 부정하고 새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서로 연결이 안 되죠. 그런데 어떤 일은 오랫동안 지속해야만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스포츠를 유난히 좋아한다는 그는 여가 시간이면 텔레비전을 스포츠 채널에 고정시키는 일이 잦다. 미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도 미식축구·수영·농구 등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신문을 볼 때도 스포츠 면부터 펼친다. 그는 요리하는 것도 즐긴다. 요리를 음악에 비유하며 레시피는 악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14년 전 그가 산타체칠리아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를 맡아 이탈리아로 떠난 것도 파스타를 유독 좋아했기 때문이란다.
“우리 집에서는 파스타를 한 접시 먹고 난 뒤 한국 음식을 먹습니다. 요리를 잘하려면 일단 먹는 걸 좋아해야 돼요. 음악 하는 사람이 듣는 걸 좋아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연주나 요리나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에요. 음악도 요리도 다른 사람이 만든 걸 즐기는 것도 좋지만 직접 해보면 참 재미있고 좋아요. 그래서 자주 앞치마를 두릅니다.”
2003년엔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Dinner for 8>이란 요리책도 냈다.여기서 여덟이란 숫자는 그와 아내 구순열씨, 세아들과 이들의 미래 반려자들을 가리킨다.셋 중 둘이 음악을 한다. 둘째가 재즈 기타리스트, 셋째가 아버지의 뒤를이어 지휘봉을 들었다.
요즘 국내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이 붐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신 적 있나요?
“콘테스트 같은 건가요? 나쁘지 않죠. 그런 기회를 잡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나도 한번 나가서 꿈을 펴 보자는 건데 좋은 일이라고 봐요.”
한국인이 객관적으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봅니까?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옛날부터 그렇죠. 그런데 왜 한국 사람들이 국악을 안 하느냐고요? 국악도 좋고 재미있죠. 만일 국악계에서 모짜르트 같은 천재 작곡가가 한 사람이라도 나왔다면 나도 국악을 하겠습니다. 저는 대략 30년 전에 미국에서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어요. 유럽의 작곡가들이 어떤 공기를 마시고 무슨 음식을 먹는지, 무엇을 보며 자랐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것들을 몸으로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한국 사람들은 평생 찌개 같은 맵고 뜨거운 음식을 먹습니다. 그래서 음악도 뜨겁게, 열정적으로 하죠.”
다만 그는 “한국 음악인들은 솔리스트가 되기를 희망하지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긴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그래서 더욱 좋은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은 음악에 특별한 재능 있어
지난 7월 부산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 연주회에서 삼남 정민씨가 지휘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날 마에스트로는 피아노를 연주했었죠. 아들의 지휘를 어떻게 보았나요?
“판단을 잘하고 빨리 가기보다 멀리 갈 수있는 아이입니다.그런데 부모의 입장에선 왜 그리 힘든 지휘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음악가는 먹고 살기 힘든 직업이거든요. 특히 클래식 음악가는. 그러나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또 음악만큼 좋은 것도 없어요. 제가 어제부터 사흘간 국립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지휘하는데 발레야 말로 중노동이에요. 서른다섯, 마흔 살이면 사실상 정년에 해당합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들이죠.”
음악의 가치랄까 위대함이 무엇이라고 보나요?
“음악은 말 없이도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또 회화 같은 예술과도 달라 고정돼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특징이죠. 음악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질 수 있어요. 하나가 되는 데 음악보다 좋은 언어는 없습니다. 만국 공통어죠. 또 음악을 비롯한 예술은 삶의 밸런스를 유지해줍니다.”
정명훈 자신도 일과 가정과의 밸런스가 더할 나위 없이 잘 맞는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점은 아내가 완벽하게 갖췄다고 덧붙였다. 젊어서부터 가정에 충실했던 그는 틈만 나면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그를 보고 아이들이 분가하면 어쩔 거냐고 친구들이 걱정했을 정도다. 그는 “막상 다 커서 나가고 나니 더 좋은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음악인으로서의 남은 꿈은 뭔가요?
“사실 음악인으로서의 꿈은 없어요. 일평생 음악 속에서 사는 사람인데요, 뭘. 하지만 음악을 통해 이루고픈 꿈은 있습니다. 북한 교향악단과 남북 합동연주회를 열고 싶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거의 50년 동안 외국에서 살았는데도 남북 합동연주를 꼭 해보고 싶으니 말입니다. 사실 저 자신도 이런 강한 욕구에 내심 놀랐을 정도예요.”
그는 올 추석 연휴 기간인 9월 12~15일 나흘 일정으로 북한 조선예술교류협회 초청을 받아 북한을 다녀왔다. 이때 북의 평양국립교향악단과 은하수관현악단을 번갈아 연습 지휘했다. 그는 남쪽으로 돌아와 “남북 합동연주회에 대해 북측의 긍정적인 확인을 받는 성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그에 앞서 2006년에도 그는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평화음악축전’에 참가해 북한의 평양 윤이상 관현악단과 베토벤교향곡 제 5번 ‘운명’을 연주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 연주회는 공연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지난 9월 그는 북한 방문 성과를 설명하는 기자간담회에서 “12월에 남북 합동공연을 추진할 계획인데 북측은 한다고 확답했지만 우리 정부는 아직 승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 꿈은 남북한 합동 연주회
올해 안에 남북 합동연주회가 성사될 가능성이 있나요?
“성사 여부는 정치가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사실 가능성이 있어서 제가 북한에 간 건데 그쪽에서는 저를 초대해서 자기네 오케스트라가 얼마나 잘하는지, 자기들이 얼마나 잘사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 혼자 가는 건 별로 의미가 없잖아요.”
북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요?
“잘해요. 기술적으로는 굉장히 발전했습니다. 워낙 노력을 많이 하니까. 무엇보다 실수를 안해요. 실수를 하면 큰일 나나
봐요.”
남북 합동연주회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남북이 한 형제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데 음악 만한 것이 없습니다. 남북의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건 작으나마 평화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평화를 선언하는 것이니까 정치가들이 받아주기가 힘들죠. 음악을 사회 곳곳에 전파하기 위해 제가 시작한 사단법인 이름이 미라클 오브 뮤직(Miracle Of Music)입니다. 음악을 통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어요.”
중국 등에서도 여러 차례 초빙 제의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죠.”
조건이 좋을 텐데 안 가시는 이유는요?
“젊었을 때라면 모르죠. 하지만 지금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하는 일에 비해 많은 돈을 받아요. 그러니 돈 좀 더 준다고 해서 갈 수는 없죠. 중국은 매년 오케스트라와 콘서트홀이 새로 생겨납니다. 돈을 쏟아붓고 있어요. 그런데도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사인 도이치그라모폰(DG)은 서울시향과 음반을 만듭니다. 제가 DG의 경영자라면 (시장이 큰) 중국의 오케스트라와 녹음을 할 텐데 말이죠.(웃음) 일본에는 또 잘하는 오케스트라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DG는 아시아권에서 우리가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우리를 선택한 겁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 정부도 좀 알아야 해요. 중국에 그렇게 많은 오케스트라가 있지만 아시아에서 우리가 가장 잘합니다. 그러니 서울시향 전용 콘서트홀 같은 데 투자도 좀 해야죠. 그럴 사람이 좀 나타나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 관심을 표명하시는 분은 없나요?
“이런 사정을 이해해주시는 분이 몇 명 있었어요. 사실 미국에서는 거의 100% 개인이 투자합니다. 반면 유럽은 아직도 거의 정부가 하죠.”
1889년 창립된 DG는 현존 음반사 중 가장 오래됐다. DG와의 음반 출시는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지름길로 통한다. 서울시향의 앨범은 한국 등 45개국에서 발매된다.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다카쿠 사토루는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뿌리부터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그는 10년 전 자신이 한국에서 서울시향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땐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었다고 회고했다.
서울시향을 업그레이드하다
정명훈은 일찍이 피아노 연주에서 재능을 보였다. 일곱 살 때 서울시향과 협연을 할 정도였다. 스물한 살엔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했다.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한 공로로 귀국할 땐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그는 누나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첼리스트 정명화와 피아노 3중주단인 정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지휘로 전향한 뒤 그는 프랑스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아카데미 오케스트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일본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는 상임지휘를 맡지 않고 특별예술고문으로 있었다.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외조부인 이가순은 일제 강점기 원산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유공자로 지난해 일산 호수공원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6년 그는 오랜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해 일곱 살 때 협연한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당시 그의 나이 쉰둘. 감회가 깊지 않았을까?
“저는 기억력이 짧습니다. 연주를 하고 나면 다음날 다 잊어버리고 그 다음 연주할 것이 머릿속에 자리 잡죠. 평생 해온 연주 중 어느 것이 특별히 좋았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함께한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 140명 중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40여 명밖에 안 된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다. 반면 그의 누나 정경화는 생후 6개월일 때 맡은 냄새까지 기억한다고 한다.
마에스트로는 일찍이 유학을 떠나 오랜 외국 생활을 했는데도 우리 말을 잘 구사합니다(그는 미국 매네스음대와 줄리어드음악원을 나왔다). 그 비결이 뭔가요?
“어린 나이에 미국에 건너가 한 십 년 동안 우리말을 쓰지 않았어요. 그렇다 보니 사실 지금까지도 힘이 듭니다. 과거엔 쉬운 우리말만 할 줄 알았어요. 어려운 단어가 튀어나오면 알아듣질 못해 이게 중국말이야 일본말이야 할 정도였죠. 지금도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기가 힘들어요. 표현이 제대로 안 되면 자꾸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일 하고 싶은 것이 한 1년 동안 한국말을 제대로 공부하는 겁니다.”(웃음)
개인적으로 좌절을 겪은 적도 있나요?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젊었을 땐 매일 좌절했어요. 너무 못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죠. 제 성격 탓도 있어요. 밝은 성격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름 한 점에도 마음이 어두워지는 사람도 있죠.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거기서 벗어났어요. 혼자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가 많이 힘듭니다. 대학 가기도 어렵고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아서죠.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요?
“저마다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울려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돼요. 그리고 그 소리에 따라야죠. 음악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기보다 자기 길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 부산 소년의 집에 손 내민 마에스트로 : 희망과 기적을 만든 앙상블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지난 7월 하순 부산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와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다. 노루그룹의 비영리 장학재단인 양호재단(이사장 한현숙 DIT 사장)과 정명훈이 이사장으로 있는 미라클 오브 뮤직(MOM)이 공동 주최한 ‘희망과 나눔 음악회’ 무대. 정명훈은 피아니스트로 출연했고 그의 아들 정민이 미라클오브뮤직과 부산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의 연합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부산 소년의 집은 알로이시오 슈월츠 신부가 창설한 마리아수녀회가 돌보는 아동 양육시설. 만 3세 이상 18세 미만의 보호자 없는 청소년 490명이 여기서 생활한다. 소년의 집은 아이들을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고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해 주려는 의도로 이곳 아이들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다. 지난해 2월엔 음악인들의 꿈의 무대인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이때도 정민이 지휘를 맡았다. 공연은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큰 성공을 거뒀고 그는 차세대 지휘자로 주목받았다. 2804석을 거의 채운 관중들은 브라보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사단법인 미라클오브뮤직은 2009년 정명훈이 설립한 비영리단체이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사랑을 음악을 통해 돌려주려고 이 단체를 설립했다고 밝혔다. MOM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음악의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한다.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는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분위기가 남달랐다고 그는 회고했다.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기관이라 그런지 영적인 조화랄까, 영적인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과거 서울에서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도한 적이 있는데 두 오케스트라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단원들의 실력은 서울 쪽이 나은데 소년의 집 쪽이 더 안정돼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단원들이 협력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산 소년의 집 아이들은 또 지도하는 사람에게서 지식을 빼앗아 가겠다는 의욕이 강했어요. 저는 학생은 선생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걸 빼앗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이 오케스트라에서 음악의 대가가 나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12월로 설립 11주년을 맞는 양호재단은 노루페인트 한정대 창업주의 이웃 사랑과 도전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장학재단이다. 이 재단은 지난 8년 동안 부산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 축구부를 지원해왔다. 한현숙 이사장은 “소년의 집의 존재를 주변에 알리기 위해 희망과 나눔 음악회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
첫댓글 천번 보고 외운다는 말에 감동...역시나 대단한 분입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죠. 거기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마에스트로를 보면서 경외심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