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교회유치원을 다녔어요.
당연히 이 세상을 만든 분이 하나님이라고 배웠고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라고 알았지요.
그러다..
비로자나불이 법신불
우주법계 그 자체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떨림.. /
가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어 "부처가 아니면 중생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부처에게는 부처 언어가 있고, 중생에게는 중생 언어가 있다고 덧붙인다.
저 말의 속 뜻은 세계는 온통 중생 뿐! 이라고 하면서
부처 언어[뜻]는 중생이 이해하기 너무 어렵다는..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불교의 핵심 언어는
내가 보기엔
'마음'과 '법'이다.
석가세존이 말하는 마음과 법은 중생 언어에서 부처 언어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데..
중생 사이의 지식인들이 마음과 법을 다시 중생 언어로 소환해 사견(邪見)을 만들어 전하면서..
이것이 부처님 뜻이라고 사기를 쳤다.. 그는 자신 스스로도 사기인 줄 모르고 정말 그렇게 믿고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사견(邪見)과 정견(正見)이란
사탕처럼 예쁘게 포장되어.. 이것과 저것으로 구분되어 진열된 게 아닌..
하나의 통 속에 잡탕처럼 섞여있다.
우리는 어떤 게 사견이고 어떤 게 정견인지 잘 모르는 아이와 같아..
어떤 사탕이 정견인지 모르면서 하나를 골라 잡는데..
그것이 사견인 사탕이라면..
천공 스님(스승), 건진 법사라 하여 마치 불교인처럼 선전되고 있는데..
이들은 정법에서 벗어난 자기들 언행이 사도(邪道, 사기)라고 스스로 알고 있을까..
동서고금이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마음 mind이다.
마음이란 형이상.. 곧 모양과 무게가 없는 것이기에 보거나 느낄 수 없다.
그와 상대적인 게 존재로.. 존재는 간단히 질량이 있어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러기에 일체라 하면 99%가 질량이 있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석가모니가 가르친 불교의 핵심은 1%도 안되는.. 아니 0.000000..1%도 안 되는 마음에 온통 쏠려 있다.
그런데 그걸 중생에게 전하려다 보면.. 중생이란 존재가 전부인 세계로 아는 자들이 된다.
중생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나쁜 마음이 아닌 오해가 섞여 어떤 것은 결국 사견이요, 사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대승 불교는 상좌부 불교와는 달리 많은 부처님이 등장하고 모셔진다.
그 가운데 법신 비로자나 불, 보신 노사나 불, 화신 석가모니 불을 삼불이라 하며 모신다.
법신이란 모두와 우주의 본래 자리요,
보신은 본래 자리에서 벗어났으나 수행을 통해 그 보답으로 본래 자리에 이른 분이요,
화신이란 상대에 따라 몸을 나투어 중생을 본래 자리로 이끄는 분이라 할 수 있다.
이것만 보면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범아사상과 별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본래 자리는 말이 그럴 뿐 무아요, 공이다.
법신 비로나자 부처님이라 말을 하지만..어떤 말이나 생각을 세울 수 없는 공이란 것.
그에 반해 힌두교의 브라만은 무아나 공이 아닌 존재다.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파도로 일어났던 물이 바다와 다시 하나가 되는 이치다.
ㅎㅎㅎ.. 대승 불교 지도자들이 잘 사용하는 저 바다 비유는 잘 보아야 한다. 힌두교가 아닌지를..
비로자나불을 설명하는 '법신(法身)'이란 말에 '법(法)'이 보인다.
석가세존이 설하시는 '법(法)'이란 무어지?.
'법(法 dhrma)'은 바로 '존재'라는 말에 상대적인 부처의 언어다.
즉 중생은 '존재'라고 알고 있는 것을 부처님은 '법'이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중생들은 부처님이 "법은.. "이라고 말을 하면..
"존재는.. " 이라고 알아듣는다는 것.^^.
"연기.. " 하면 "인연.." 으로 알아 듣듯..
법이랑 존재는 다른가?.
'법(法 dhrma)'은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진리라는 뜻으로
"연기는 법이다"는 말은 연기는 진리라는 것.
또 하나의 뜻은 일체를 가리킨다. 일체 만물 각각이 법이란 뜻이다.
12처는 법으로.. 2법인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과 미), (신과 촉), (의와 법)은 법이라 한다.
여기서 2법의 마지막에 나오는 '의와 법'에서 법의 의미는 의에 대상이 되는 일체를 의미한다.
안이비설신은 법이라 하기 전에 존재하는 감각기관이 아닌가..
그것은 다섯 감각기관으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법이라 하면..
존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뀐 게 된다.
약간 집중력을 높이고..
일체 존재라고 할 때.. 일체란 나에게 접촉이 되는 대상이지만 나와 관계없이 거기에 그렇게 놓여 있는 것이다.
일체 법이라고 할 때.. 법인 일체는 존재하는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알도록 나(마음)에게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저기에 사과가 있네^^ 할 때..
저기에 놓여 있는 사과는 존재이며,
사과가 저기에 있는 것을 내가 알도록 한 것을 법이라 한다.
차이가 보이시는 지?^^.
사과가 저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가..
사과에 대한 이미지[상]가 내 의식에 생겨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법이란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닌..
마음에 생겨..
외부에 있는 존재를 알도록 한다.
나는 이효리는 볼 때 마다 이쁘다고 하지만.. 어느 친구는 이효리를 싫다고 말한다.
한 사람을, 하나의 사건을 본 자들이 전혀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의도가 다르다는 등 다른 이유도 있지만..
각각에게 인식되는 법이 다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나에게 인식되는 효리와 친구에게 인식되는 효리가 다르다는 것.
하여 각각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의 존재에 대해 여러 법이 생긴듯..
법과 존재는 다른 것으로..
존재는 주관과 별개로 있는 것[객체]이고, 법은 존재에 대한 주관의 인식이라 하겠다.
존재는 나와 관계없이 외부에 있는 것이고,
법은 외부에 있는 게 내[의식,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게 된다.
"연기를 보면 법을 알고, 법을 보면 연기를 안다"는 말 뜻은
하나는 연기는 진리인 법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 안에 일어나는 법을 보면서.. 그 법이 어떻게 생기고, 소멸하는 지를 보면 그것이 연기임을 안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저 설법을 하신 것은 두 번째를 설하는 장소에서 하셨다.
그러니 저 말을 이해할 때 법을 진리하고 해석하면 바른 해석이 아니긴 하다.^^.
자, 처음 이 글의 출발점인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에서..
법의 뜻을 이해하고 바라보니
어떤 부처님으로 보이는가?. 어느 절에 가면 돌로 만든 비로자나불이 있는데.. 과연 그럴 수 있나.^^..
외부에 존재하는 우주가 아닌..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실은
(내) 마음에 충만한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부처님이 아니신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야훼는 어떤가..
실제 존재하는 자로 가르친다.
그러면 당장 질문을 하지..
지금 어디에 있는데?. 현대 기술인 우주 비행체로써는 발견할 수 없는 장소에 있나.^^.
솔직히 말해야만 한다.
기독교에서 믿는 야훼 역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법이다.
마음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법이란 존재를 보면서 우리가 연상하는 의식이다.
돌로 만든 상을 보면서.. 석가 부처님을 연상한다.
야훼는 외부에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 의식 안에 법으로 있다.
고로 야훼는 없는 게 아니다.
그걸 억지로 존재로 만들어 우주 어디 쯤에 있는 것으로 사기꾼처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천당이나 지옥은 어디에 있을까..
예수가 유일신인 야훼의 독생자일 장소는..
바로 우리 마음 안에서 일 뿐이다.
그것을 억지로 존재 세계로 끌어 내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긴다.
교부철학의 신학자들은 말한다.
"나는 야훼가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라고..
그에게 불합리인 이유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법 세계를 존재 세계 방식으로 논증하려 하니 불합리한 것이 된 것이다.
법은 법 세계로..
존재는 존재 세계로..
그냥 두면
불합리는 사라진다.
멍청한 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