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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예레미야3장19~4장4절
제목 :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른 많은 자식으로부터 구별하여 그에게 가장 귀중한 상속재산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부와 눈이 맞아 본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여자처럼 자신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신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아는 회계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19~21절)
1) 하나님의 기대(19절)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항상 당신 곁에 머물며 떠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구약의 주요주제입니다(호11:1).
*호1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바는 당신의 백성이 여호와께 순종(順從)하며,
언약 규정의 한도 내에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럴 경우 그들에게 축복의 삶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신28:1-6; 30:9,10).
*신28:1~6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2) 이스라엘의 배반(20절)
“[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자녀 이스라엘이 감사하며 순종하리라는 아버지의 기대는 순진한 착각이었습니다.
음욕에 빠진 여자가 일생의 반려자를 버리고 정부를 찾아가듯, 이스라엘은 자녀의 특권과 가난안을 상속재산으로 주신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 같이”. – 이스라엘은 남편(하나님)을 배반하고 정부(바알)을 쫓아 갔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남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 사상은 19절과 동일합니다.
여호와를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 곁에 머물기를 거절하고 집을 떠나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불렀습니다(2:27).
이 백성은 재앙을 만나면 구원을 호소하지만(4절),
그 순간만 모면하면 부르짖은 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5절).
아버지 하나님의 소박한 꿈이 자녀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으로 산산히 깨졌습니다.
3) 이스라엘의 탄식과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림(21절)
“[21]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감사를 모르는 이스라엘의 배반은 값비싼 대가를 치릅니다.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사람들이 하나님께 애원하며 울부짖습니다.
기대했던 풍요와 번성이 아니라 수치와 치욕이 이스라엘을 덮쳤습니다.
산이 헐벗도록 산당을 오르내린 결과로 ‘조상들의 산업’을 모두 빼앗기고 ‘헐벗은’이스라엘이 됐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풍요의 제의에 빠져 우상을 숭배하고 언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울부짖으면서도 바알 숭배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시야의 개혁으로 한때 그곳에 산재해 있던 바알의 단들이 모두 파괴되었지만 이들은 실재하지 않는 신들을 그리워하며 이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2. 구원의 길(22~25절)
1) 하나님의 초대(22a절)
“[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이스라엘이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애곡과 간구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21a).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배역함”의 고질병을 치료해주시기로 마음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이고 그 분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2) 이스라엘의 응답(22b~25절)
(1) 하나님의 제안에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22b절).
“[22b]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이심이니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을 통해 그분께로 돌아옵니다.
늦었지만, 이스라엘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진심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멸망에 떨어진 이스라엘이 마침내 여호와가 자신들이 섬겨야 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2)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 여호와께 있다고 고백합니다(23절)
“[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참된 돌아감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단절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는 현재 당하고 있는 그들의 곤경이 무엇 때문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소란했던 제사는 ‘헛된 일’이었습니다.
산당에서 떠들썩하게 우상을 섬겼지만 돌아온 것은 재앙뿐입니다.
풍요 제의는 한 마디로 헛것(거짓)이었습니다.
풍요제의를 주관하는 우상들의 실체가 거짓임을 깨닫자 비로소 진리가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버리고 떠났던 출애굽과 광야의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고백하고, 지금의 파국적 현실이 우상숭배로 초래된 것임을 인정합니다.
여호와가 그들의 유일한 참 하나님이란 고백은 그들이 근본적인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으로서(출20:2-6; 신5:6-10; 6:4),
이제 여호와를 그들의 주인으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런 고백은 여호와의 언약 갱신과 다름없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언약 사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3) 바알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24절).
“ [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부끄러운 그것이 –이는 바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죄의 고백과 더불어 여태까지 섬기던 바알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바알은 조상들이 애써 장만해놓은 재산을 빼앗아 갈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어렸을 때로부터. –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되던 출애굽 사건 이후를 가리킵니다.
바알을 '수치'로 여긴 회개자들은 그들 조상들로부터 시작해서 가꾸고 수고하여 온 모든 것을 이 부끄러운 것이 삼켜버렸다고 선언합니다.
즉 바알 숭배로 그들이 멸망하여 양떼와 소떼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다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 이 치옥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불순종한 대가였습니다(25절)
“[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 본절에 서술되는 회개 장면은 순종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의 회개의 내용은 출애굽 이후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때부터 지금까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으로서 예레미야가 거듭 지적하는 주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범죄했다는 자각에서 일어납니다.
이러한 자각은 여호와의 주권과 언약의 요구 사항을 거부했다는 고백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시내광야에서 "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19: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음의 회개가 부족하였습니다.
즉 회개에 대한 외적 고백과 그들의 신체적인 행동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4:1-4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3. 회개의 촉구(1~4절)
1) 참된 회개(4:1~2절)
(1) 가증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1절)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의 처한 상황이 매우 어렵고 절박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안팎의 여러 문제들이 직면하여 이제까지 취해오던 노선을 변경시켜 다른 방도를 따르고자 나름대로 모색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을 의뢰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 나타났던 그런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그들이 가담하고 있는 모든 의존적 외교 조약과 우상을 타파하고 오직 여호와의 주권만을 인정하는 실질적인 회개를 통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가증한 것을 버리고. - '가증한 것'('쉬쿠츠')로서 구약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결한 의복(나3:6), 우상에게 바친 음식(슥9:7), 그리고 이교도의 신들(왕상11:5; 왕하 23:13; 대하15:8)을 가리키며, 때로는 거짓 신들을 섬기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호9:10).
여기서는 가나안의 거짓 신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가증한 것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다른 신들은 양립될 수 없고 화합될 수가 없습니다.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해야 합니다(2절)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 때로는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란 말로도 번역되는 이 구절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맹세할 때에 사용하는 상투어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출20:7; 신5:11).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맹세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구약 예언서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단어들입니다.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 여호와의 주권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 이스라엘이 약속된 축복의 삶을 누리는 것을 보고 다른 민족들도 축복의 참된 근원이 여호와께 있으며 그의 언약에 순종할 때 축복을 받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참된 회개는 이스라엘 자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되는 것입니다(사42:6; 49:6).
*사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49: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2) 묵은 땅을 갈라(3절)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 – 본절의 유다가 1절의 '이스라엘'의 일부를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라집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1절의 '이스라엘'이 현재 포로로 잡혀가 있는 북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봅니다(Streane, Welch).
그러나 문맥상 본절과 4절은 1,2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본절의 '유다'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변방 주(州)로 편입된 이후 남하한 백성까지 포함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 묵은 땅을 갈고. –여기서 '묵은 땅'(니르)은 오랫동안 경작을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작된 바가 없는 '새 토양'을 뜻합니다.
결국 분문은 개혁 기간 동안의 형식적, 피상적 회개가 아닌 근본적 회개를 요청하는 내용으로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란(마9:17; 막2:22) 예수의 비유와 일맥 상통합니다.
(2)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라는 토지가 과거, 특히 므낫세 통치 이후에 악행이라는 가시덤불로 만연되어 있으며,
유다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새 토지를 경작하는 것뿐임을 지적합니다.
즉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야기된 온갖 종류의 폐단들, 곧 가시덤불을 회개와 순종이라고 하는 쟁기로 갈아서 온전히 제거해 버리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C.L. Feinberg).
3) 엄중한 경고(4절)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 할례가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와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창17:1-14 주제 강해, '할례 언약과 세례' 참조).
이 의식은 언약의 표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으며(창17:10-14) 단순히 외적인 표징이 아니라 여호와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내적 실체에 대한
증거였습니다(신10:16; 30:6).
한편 선지자는 여기서 남자 성기 표피 끝을 잘라내는 할례를 말하지 않고,
마음 가죽을 베어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란 지성과 의지, 감정 등을 다 포함하는 내적 삶의 전체를 뜻합니다. 즉, 마음이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 한 물리적인 할례 의식으로는 언약의 취지를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 언약 파괴의 결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종주국과 봉신국 간에 체결된 언약에도 축복과 저주가 뒤따랐습니다. 언약을 배반한 봉신은 대군주의 처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주권 군주이신 여호와는 자기와의 언약을 깬 이스라엘을 징벌하고야 마십니다.
그리고 그 징벌을 예레미야는 '끌 자가 없는 불의 심판'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런 비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7:20; 사1:31; 암5:6등).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응징했던 것과 똑같이 이제 유다도 심판하실 것인 바, 유다는 이미 그의 주인 이스라엘보다 더 범죄 해 있었습니다(3:11).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 되고 싶어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바람을 이루는 일은 바른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됩니다.
회개는 내 안에 있던 그리스도를 살아 통치하시는 왕으로 영접하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회개는 가시덤불 무성하고 생명이 뿌리내릴 수 없는 단단한 묵은 땅을 기경하여 의로움과 새 생명의 씨앗이 꽃피게 하는 일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신실하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복원해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 없이는 참된 회개는 없습니다.
열매는 변화된 마음에서 맺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이스라엘 족속을 아들이라 부르시며, 그들의 “아버지”가 ‘되기를’원하십니다(19절, 시2:7).
또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리라”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방식이자, 이스라엘을 향한 거룩한 요구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신실한 아들이 되어야 하고 받은 사랑을 세상에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주기를’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이스라엘 자손들은 우상을 숭배함으로 자신들의 인생기리을 ‘스스로 굽게’합니다(2:23).
그리고 차츰 그 길의 굴곡이 심해져, 그들은 어느새 그들을 구원하고 인도하신 아버지요 보호자인 여호와까지 “잊어버리는”지경에 이릅니다.
인생길은 물리적 길과 달라, 스스로 굽게 할 수도 있고 바르게 펼 수도 있습니다.
지금껏 내가 추구했던 인생길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이제 내가 나아가길 원하는 그 길은 어떠합니까?
2) “우리”가 참회의 시편을 부릅니다.(22~25절).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구원이 진실로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백성의 진심 어린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회개하기를 바라는 ‘선지자의’ 간곡한 소망입니다.
선지자의 시선은 언제든 타인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흘리는 그리스도인의 눈물만이 단단한 세상의 지각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자기만 아는 시류에 편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3) 어리석은 농부는 양분 없는 토양에 씨앗을 뿌리고 새싹을 기대합니다(4:3).
그들은 가시밭에 묘목을 심고 풍성한 열매를 바랍니다.
그러나 밤낮 수고를 더할지라도 결실을 맺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여러 해 “묵은 땅”과 “가시덤불”은 우상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의 완악한 마음과 헛된 수고를 비유합니다.
회개는 생명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가시덤불을 태우고 묵은 땅을 기경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