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조명희
찹쌀 꽈배기 외
그는 입가에 묻은 설탕을 닦아낸다
그 옷 그만 버리지 그래
내가 입은 스웨터의 소매끝을 잡아 당긴다
꽈배기 무늬가 늘어난다
나는 접시 가를 두드린다
설탕은 한 번씩 털어줘야지
내가 말 받아치기로는 구 단이거든
브래지어엔 호크가 삼 단
한 칸씩 당겨 채우지만
설렘은 이미 느슨하고
늘어진 목 사이 누레진 속옷
보풀처럼 부풀던 때를 꺼내면
서로의 옆구리를 빌려야만 잠이 들던 때
닿는 것만으로 밤은 짧고
겨드랑이 아래를 들추면 뽀얀 속살이
들어가야 할 데 들어가고
나와야 할 때 나와 있는
지금의 헐거움을
버리기로 했으면
당신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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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의 힘
여행 가이드 김 반장이라고 했다 백령도엔 도둑과 신호등과 귀신이 없다고 몇 가지를 이르더니 ‘기사가 오는 대로 출발 시겠습니다’ 우리는 기사를 기다렸다 문이 닫혔는데 어디로 들어온 걸까 어느새 버스는 달렸고 까나리를 닮아 급하기까지 한 김 반장은 두무진의 선대암처럼 늠름했다 웃음과 환호성이 섞여 해안을 돌고 있을 때 ‘잠시 후 여러분은 거수경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철책이 좁혀진 산자락을 용감히 오르던 버스가 잠시 멈추었고 몇 명의 빨간 모자가 올라왔다 거수경례를 마치고 내려갔다 찔레꽃 새순을 조심스레 치우며 비탈을 내려가던 김 반장, 작년 여름이었단다 어느 모임에서 다녀갔는데 누군가 모자를 두고 내렸다고 버리기 뭐해 버스 앞 켠에 뒀는데 무슨 일인지 경비 초소를 지날 때면 저리 깍듯한 인사를 받는다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넉살 좋게 묻는다 한 번의 의문은 영원한 궁금증으로 남는 나는 버스에서 내릴까 다음 버스를 지켜볼까도 했지만 볼 것은 많고 시간은 모자랐다 뭉클함이 단전을 치고 명치에 올라 코끝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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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2012년 《시사사》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껌 좀 씹을까』, 『언니, 우리 통영 가요』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