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배우
| ''나는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목숨 걸고 한 거였어요. 요즘도 그런 생각엔 변함이 없어. 배우는 목숨 걸고 안 하면 안 돼. 훌륭한 남편 두고 천천히 놀면서, 그래 이 역할은 내가 해 주지, 그러면 안 된다고. 배우가 편하면 보는 사람은 기분 나쁜 연기가 된다고, 한 신 한 신 떨림이 없는 연기는 죽어 있는 거라고."
윤여정의 40년 어록 |
79세의 원로배우로 데뷔 60년차다. 2025년 현재까지도 주연/조연, 상업영화/독립영화를 가리지 않고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연기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배우들 중에서도 필모의 다양성이 돋보이는 편으로, 파격적일 만큼 독특한 캐릭터를 여럿 맡아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대체로 까다롭고 엄격하고 보수적인 시어머니 포지션의 배역이나 잔소리 잘하고 무척이나 고집 센 아주머니, 할머니 정도의 이미지가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영화에서는 돈의 맛에서 같은 카리스마 있는 역할부터 가루지기에서 같은 미묘한 색기가 있는 역할까지 다양한 연기를 보여준다. 손자 손녀를 끔찍이 아끼는 다정한 할머니 역할부터 돈을 받고 노인들에게 성을 파는 박카스 할머니까지 대단히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다.
전면에 나서지 않는 배역이어도 극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기술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완급조절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초기부터 자신만의 리얼리즘적인 방향성을 구상하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신인시절 과한 동작과 분장 등으로 극대화되고, 실제와 유리된 연기를 선보이는 기성 배우들의 연기에 강한 반감이 들었다고 한다.
이런 그녀의 연기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아시아 배우 최초로 미국 영화배우조합상 여우조연상과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대한민국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상(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리하여 오늘날에는 연기자로서 독보적인 입지와 넓은 스펙트럼, 독창적인 정체성을 확립하여 세계적인 명배우, 대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뛰어난 영어 실력까지 보유했다. 발음은 영미권 영어의 발음으로는 보기 어려운 한국식이지만,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시상식이나 토크쇼에서도 발음이 상관 없어질 정도로 의미 전달에 문제가 없고, 재치까지 겸비한 회화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1947년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났다. 3살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발발하며 남쪽으로 피란을 왔다고 한다.
윤여정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대본 암기력이 뛰어나며, 집중력이 좋은 것으로 소문난 배우인데, 어렸을 때에도 웅변이나 각종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1959년 성신여대 주최로 개최된 백일장에서 윤여정이 상을 탄 수필이 조선일보에 게시되었다. 제목은 우리집부엌으로, 문명특급에서의 인터뷰에서 언급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명문학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를 들어갔으나 고3 때 위궤양으로 고생하고, 2차로 원하지 않는 한양대학교를 가게 되었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 중에 한양대를 다니는 친구나 선후배를 찾기 힘들어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목표 대학을 가지 못한 죄송함에 등록금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아나운서 김동건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에서 진행을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을 했다. 그때 김동건이 윤여정에게 TBC 탤런트 공채 시험을 보라고 권하였고, 1966년 TBC 탤런트 공채에 응시하여 합격해 TBC 3기 탤런트가 되었다. 그리고 배우 생활을 위해 대학을 중퇴하였다. 배우가 된 것에 대해 윤여정은 "우리 엄마한테는 내가 스타였다. 그래서 남의 눈에 띄는 일을 하면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당시 방송 탤런트는 떠오르는 신종 직업이었는데, 명문 경기고-서울대 출신인 이낙훈, 김동훈과 서울고-서울대 출신인 이순재, 서울고-연세대 출신인 오현경 등이 탤런트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결코 창피한 직업은 아니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고 한다.
윤여정은 신인 때부터 종횡무진의 활약을 펼친 배우였다. TBC시절에는 단역 조연을 했지만, 공채전속이 풀린 직후인 1970년 초[갓 TV를 개국한 MBC로 스카우트 되어, 많은 드라마에서 주연급으로 활약했다.
TV에서 얻은 유명세를 바탕으로, 1971년 영화계에 진출, 거장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최고의 성취를 거두게 된다. 1971년 한국영화 흥행 1위의 영화로 윤여정은 주인집 남자를 유혹하는 가정부로 출연해서 스타덤에 올랐는데, 당시 신문에서도 천재 배우가 나왔다고 대서특필했다.[15] 윤여정은 이 작품을 통해 대종상 신인상과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비평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영화 화녀의 유명세와 인기는 연기 고향인 브라운관에도 미쳐 윤정희와 10년 전 영화에서 장희빈이었던 김지미 등을 제치고 장희빈의 TV판에 장희빈 역에 시청자 엽서투표로 뽑혀 같은 해 7월부터 방영된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 역을 맡으며, 장희빈 역시 크게 히트해 곧바로 방송계에서도 톱 탤런트로 올라선다. 윤여정의 악녀 연기가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기 장희빈 나쁜 X 간다!!"고 욕을 해대는 통에 거리를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을 정도였고, 하고 있던 오란씨 광고모델에서 잘렸다고 한다.
또 1972년 연이어 '충녀'에 출연하면서 젊은 전성기를 화려하게 불태웠고, 역시 절륜한 연기를 선보여 여배우 이화시와 함께 이른바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