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을 내 고향 중산리
글/송악
금년 추석이 이른 탓도 있지만 유례없는 여름더위가 물러가지 않고 맹위를 떨치고 있어 추석이 코앞이건만 여전히 날씨가 덥다.
더위와 가뭄 탓에 차례상 차리기의 비용이 오를 것이라니 이래저래 서민들만 힘든 명절이 될 모양이다.
시대에 따라 명절을 쇠는 풍속도 변해 산업화가 시작 된 이후로는 객지생활을 하는 자식들의 귀성행렬이 줄을 서더니 지금은 또 고향의 부모들이 자식이 사는 도시로 역귀성하는 집안들도 있어 오고가는 길이 모두 혼잡한 모양이다.
어떻던 민족 최대의 명절을 쇠면서 서로가 양보하고 이해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행복한 명절이 되어야겠다.
명절을 쇠고 난 다음에 이혼율이 올라간다는 뉴스는 무얼 의미하는가.
생활의 다양성, 종교 경제 정치 교육의 차이로 인해 대화에도 거리가 생기고 서로의 화합과 친목 보다는 분열과 대립 마찰이 생겨서는 안 될 일이다.
친가에만 가지 말고 처가에도 가고 외가에도 가고, 가사일이나 기타 일들은 역할 분담도 하고 서로가 협동하고 함께 거들고 함께 일하고 함께 놀아야겠다.
추석을 스트레스 받는 의무적 행사일이 아니라 모두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보니 유년을 지낸 우리 마을 중산리는 매우 아름답고 좋은 마을이었다.
덕유산속 깊숙히 들어 앉은 우리 마을은 양지담 음지담 주막걸 질매재 진양지를 다 포함해서 채 200호를 채우지 못한 마을이었지만 집집마다 형제자매 식구가 많아서 골목마다 아이들이 넘쳐나고 밤이면 끼리끼리 모이는 사랑방 문화가 꽃을 피웠다.
주막걸에도 어른들이 가는 집, 청년들이 가는 공간이 따로 있어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술 담배도 예의에 벗어남이 없었고 어른은 공경하고 젊은 사람은 애정으로 대했다.
특히 당시의 우리 동네는 가난한 농촌이었지만 펄펄뛰는 청년 문화가 있었다. 학력이래야 읍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재학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겨우 국졸에 불과한 우리 10여년 위 세대 형님들이었는데 모두가 농사일에 바쁜 중에도 활발한 청년 활동을 했다.
서울YMCA인가 어딘가에 편지를 쓰고 협찬을 받은 책이 몇 권 마을문고로 꾸며져 있었는데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인기가 있었다.
해묵은 잡지 몇 권과 이광수의 ‘무정’ ‘유정’을 비롯해 심훈의 ‘상록수’ 같은 주로 계몽주의식 소설책과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 과 같은 애정소설도 있었는데 지금 같으면 별 이야기 거리도 아니지만 방인근의 농도 짙은 애정소설은 쳐녀들에게 은밀한 인기가 있었다. 초등학생인 나도 몰래 보았던 책이다.
갯들(갯들이란 어원은 큰 도랑과 동네 사이의 들로 낀개자介를 쓴 개들임) 운강재 마당에 당시엔 흔하지 않은 탁구대가 있어 농사일 틈틈이 탁구를 치거나 마루에서 토론도 하다가 아예 신작로 옆에 마을회관을 지어 이용했었는데 그 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없어져버렸다.
청년 문화의 꽃은 역시 추석날 밤에 벌리는 콩쿨대회이다.
콩쿨대회를 중산리만 했던 것은 아니고 어느 마을이고 다 했던 것인데 인근 마을과는 서로 협조하여 같은 날 동시에 열지는 않았으며 서로가 원정을 가서 흥행을 도우기도 하고 가끔은 심사가 불공평했느니 누가 더 노래를 잘 했느니 시비도 있었다.
소재지인 갈계리의 콩쿨대회에 내려가서는 별 기를 못 펴면서도 소정리 쪽의 콩쿨대회에 올라가서는 중산리 청년들이 큰 손님 행세를 했다.
중산리인들 뭐 얼마나 바깥이라고 신기촌 소정본동 개삼불 갈항촌 당산말을 모두 합해 ‘안촌’이라 불렀다.
좁은 협곡 약오리길 들머리 모리를 돌아 들어 들어가는 북덕유산 송계사 절골 아래 막다른 다섯 부락 소정리는 우리 동네 보다는 훨씬 더 넓고 아늑한 들판의 분지이다.
우리 집안은 큰어머니가 소지댁이고 우리 어머니도 신기촌에서 시집오셨고(할머니가 신기촌댁이어서 사용 못함), 숙모님이 또 소정 출신이다. (큰어머니께서 소정댁 택호를 쓰기에 같이 쓸 수가 없어서 밀양박씨에서 따온 밀성댁이 되었다.)
안촌이란 표현이 편안한 곳이란 좋은 뜻도 있지만 더 깊은 산골짝이란 뜻이었는데 우리 어머니들도 그렇게 불렀다.
어느 해 추석에는 우리 마을의 바로 아래 동네인 아랫 탑불 정자나무껄에서도 모처럼 콩쿨대회가 있었는데, 웃탑불 아래탑불 다 합해야 몇 호 안되는 동네이기에 주객이 전도되어서 중산리 출신들이 내내 마이크를 잡고 잔치를 도와 주었다.
중산리 청년들은 콩쿨대회를 열어도 평범한 콩쿨대회를 열지 않았다.
갯들쪽 뒷동산의 비스듬한 잔디밭을 객석으로 삼고 그 앞에 튼튼한 통나무 무대를 꾸몄다.
발동기를 돌린 전력으로 전구를 밝히고 성능 좋은 앰프를 구해서 카랑카랑한 스피커를 울렸다. 그것도 이틀이나 열었는데 노인들 위주로 벌인 추석 당일에는 무대에만 올라와 한 자락 소리를 하신 노인들께 무조건 봉초 한 갑과 막걸리 한잔을 대접했다.
본 게임이 벌어지는 이튿날에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코미디 비슷한 상황극도 연출해 볼거리 풍성한 축제를 벌였다.
중산리의 청년 문화는 그기에 그치지 않는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연극 공연을 했는데 내 기억에 세 작품이 인상에 남아있다.
양지담 영각아지매네 집 대청마루에서 공연했던 사극‘원술랑’과 음지담 말랑뜰 밭에서 공연한 신파극‘이수일과 심순애’ 그리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일면 자명고) 였는데 세 작품 모두 그야말로 큰 히트를 했다.
아마도 세 작품 모두 유치진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각본을 일일이 베껴서 몇 개월간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연습하고, 한지를 오리고 붙이고 그림을 그려서 갑옷을 만들고, 소품을 준비하고 무대를 꾸미고 연출을 하고, 호흡을 맞춰 연기를 했던 그 형님들은 어린 동심의 눈으로 바라본 우상들이었다.
김희갑 양훈 양석천 보다도 더 웃기고, 김승호 이예춘 신영균 최무룡 보다도 연기력이 좋았다. 여주인공으로 분장을 했던 형님은 최은희 김지미 보다도 훨씬 더 예뻤으며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 중산리의 콩쿨대회와 중산리의 청년극장!
중산리의 레전드 형님들이 그립다.
중산리의 청년문화는다시 돌아가고픈 그리운 역사다.
첫댓글 내고향 중산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ㅎㅎㅎ 재근이 아재 또래분들.
언제 숙부님께 그 시절 이야기좀 해 달라고 해보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