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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순례자의 기도
글 : 이 클라우디아(해인) 수녀
저무는 11월에
한 장 낙엽이 바람에 업혀 가듯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게 하소서...
그 이름 사랑이신 주님,
사랑하는 이에게도
더러는 잊혀지는 시간을
서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소서...
길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가 손님일 뿐,
아무도 내 최후의 행방을 묻는 주인 될 수 없음을
알아듣게 하소서...
그 이름 빛이신 주님,
한 점 흰구름 하늘에 실려 가듯
그렇게 조용히 당신을 향해 흘러가게 하소서...
죽은 이를 땅에 묻고 와서도
노래할 수 있는 계절.
차가운 두 손으로 촛불을 켜게 하소서...
해 저문 가을 들녘에 말없이 누워 있는 볏단처럼
죽어서야 다시 사는
영원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소서...
‘사계절의 기도’ 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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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11月을 보내며...
글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11월이 저물어가는 하루
산속 수도원에서 머문다.
때로는 한 시간의 여유를 갖기에도 사치스러운 주중의 시간들로 지내고,
여기저기 필요한 곳에 미사와 강론 등으로 주일을 보내고 나서 오늘은 여기 산속에서 하루를 숨었다.
노령산맥 끝자락 작은 한 줄기에 있는
이 깊은 산속 수도원은 이내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 빛 다가서는 길목에 서 있다.
낙엽수(落葉樹)는 하나둘씩 가을의 찬란한 옷들을 벗어내고,
여름, 가을을 지낸 산속의 단풍나무, 맹감나무, 싸리나무는
벌써 겨울채비를 하였다.
산 쪽 수도원 담장 곁의 은행나무, 감나무도
이제는 마지막 잎새들 몇 개씩 남겨 두었다.
오늘은 온종일 비가 내렸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하늘의 아쉬움도 비가 되어 이 땅위에 내리는가 보다.
아침에는 작은 기도들과 미사를 드리고,
오전에는 꼬박 산속 수도원 동정녀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점심 후에는 낮은 산에서의 등산 후, 오후에는 이 작은 글들을 쓴다.
11월이 지나간다.
11월이 흘러간다.
여느 달처럼 속절없고, 어느 때처럼 미련 없이...
어느 시절에는 애달파하고, 어느 길목에서는 그만큼 아쉬워하기도 했는데...
그러하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는 속절없음과 애달픔이 오가고,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는 빛과 어두움이 교차되곤 한다.
어느 때는 견디기 어려운 힘듦으로, 어느 날은 서있기에도 가슴이 아픔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듯이 서 있기도 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생애와 길인 줄로 여기기도 하지만,
그러하다 해도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는
희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 환희와 아픔이
스치거나 지나가기도 한다.
엊그제 새해를 맞으면서 새로움을 다짐하고,
어제 저녁에 여름을 보내면서 이 가을을 맞았는데,
지금은 벌써 겨울이다.
이제는 또 하나의 겨울이다.
문득문득 삶이 휘청대고, 사랑하고 추구하던 것들이 무너져 내릴 때에는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생은 흘러가고 인간 삶의 꿈과 그리움은 흐른다.
그 누구에게도 세월의 강은 기다리지 않고,
그 어느 것도 멈추어 서있지 않는다.
잘 살고 봉헌해야 하며 제대로 머물고 헌신해야 하는데,
나는 오늘도 여기에 서서 생애의 강이 흐르는 것을 바라다본다.
시절의 냇물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산속 수도원에 이윽고 어둠이 내리고,
나는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이 저녁 길을 나서야 하지만,
나는 길 위에서도 여기 산속 수도원에서처럼 하늘의 님 우러르며,
가슴으로 가슴으로 사랑하며 길들을 달려가야 하리라...
산다는 것은 길 위에서 언제나 빛과 진리를 향하여
살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어니,
중단하거나 머뭇거림도 없이 ...
11월이 떠나는 이 산하에서
당신을 향해 그리움 다하여 오늘도 나는 작은 기도를 드린다.
하늘을 보고 세상을 향하여 늘 못 봉헌 드리는 이 몸 맘 영혼으로,
언제나 미완성인 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한 순례자로 떠나가는
11월의 언덕위에 서 있다.
- 신부님의 ‘순례자의 노래’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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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형제회 초창기 회고사 >
“복음전파를 위해 달릴 길을 다 달렸다” - 제 9 부 -
서울 이문동 일반팀 FㆍB
박 팜필로(원석)
<성서형제회의 집에 관하여... 2>
* 1991년 3월 25일 : 수원 연무동 이 요한(보열) 형제님댁 지층에 B.F집 축복미사(최 바오로마리아(규업) 신부님 집전) - 김 알로시아(연숙) 자매님 상주하면서 봉사하였으나, 아직 체계적인 준비가 돼있지 않는 관계로 저의 기억으로는 가장 힘들게 생활했던 시절로 기억되며, 김 알로시아(연숙) 자매님의 결혼으로 2년 만에 B.F집을 폐쇄하게 됨.
* 1993년 11월 23일 : 사강예수그리스도 수녀회 및 F.B집 축복미사 - 김 안젤로(남수) 수원교구장님 (선종) 집전
* 1995년 3월 19일 : 아나휨 공동체 발족(김 안나, 김 미카엘라(경자) 자매님) - 미래 성서형제회 모델처럼 수원교구 성서형제회 중흥시기
* 1995년 7월 14일 : F.B집 마련을 위한1일 호프집 개최(당산동 나인호프)
* 1995년 10월 15일 : 화서동에 F.B의집 개설 축복미사 – 배 라우렌시오 (영무) 신부님(선종) 집전
* 2000년 3월 11일 : 아나휨공동체 5주년 기념미사 – 최 바오로마리아(규업) 신부님 집전 - 권선동성당2개 팀 발족
* 2003년 9월 30일 : F.B의 집, 수애원 후원 첫 미사(장애인 3명)
<안산 원곡 성당 FB회원들의 추억>
- 베들레헴 말구유를 비추는 별빛같이 빛나는 수원교구 안산 원곡 성당 F.B 회원님들!
2010년경 어느 날, 전국 봉사자들의 월례회를 수원교구청 사회 복음화국에서 할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당시 성서형제회 수원교구 지도신부님이셨던 C 신부님께서 “앞으로 수원교구는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 프로그램을 활성화해 나아가기로 하였으니 가급적 성서형제회를 그만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한 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안산팀 봉사자이신 오 에메렌시아(혜영) 자매님은 아주 침착하고 조리 있게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저희 원곡성당 3팀은 절대로 성서형제회를 그만둘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2003년 8월19일부터 9월 23일까지 일주일에 한번씩 6주 동안 성서형제회가 주관하는 성서생활화 세미나를 통하여 견진성사를 받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본당 신부님께서는 견진성사 교리로 성서형제회가 주관하는 성서생활화 세미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들은 견진교리를 받으면서 일상생활 한가운데서 무덤덤한 신앙생활 해오다가 자연스럽게 성경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고, 미사를 통하여 성체를 받아 모실 때 더욱 더 뜨거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곡성당 3팀의 성서형제회가 모범적인 사도직 수행을 통하여 본당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가는데 헌신하고 있음은 본당신부님도 인정한 모임입니다,“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유관순 누나 같은 오 에메렌시아(혜영) 자매님!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찡하게 울려온답니다.
가정과 하시는 모든 일 위에 예수님의 평화가 머무시길.....
- 2018년 12월호에 제10부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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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일
2018. 11. 4
마르코 12, 28~34
♠ 복음 공부 : 첫째 가는 계명은? 넷째 논쟁
☞ 개요 : 바빌론 유배 이후의 유대교는 계율의 종교로 규제하는 계명이 613개로 그 중 248 조항은 명령, 265항은 금령이었다. 이 중에서 첫째가는 계명을 묻는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등급이 있는 여러 계명을 황금률로 요약하여 (7.12=루카6.31) 하느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핵심으로 모으고, 다른 모든 율법과 전통을 상대화시킨다.
* 28-31절 : 율법학자의 물음과 예수님의 답변 -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율법학자들 사이에서 번번이 논의된 대표 화두다. 예수님께서는 전처럼 질문으로 받아치지 않고, 사랑이며 명령어로 표현하신다. 그분이 꼽는 첫째 계명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성경에서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방향 설정의 근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매일같이 소리내어 읽는 ‘셰마’ (들어라)인데, 신명기의 구절에서 발견하시며(6.4-9), 그분만이 유일한 하느님이심으로 존재 전체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 32-34절 : 율법학자의 응답과 예수님의 인정 - 마르코 복음서에만 발견되며 앞의 가르침을 좀 더 확장한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 목숨, 정신, 힘” 을 다하라 하셨는데 율법학자는 “마음,생각,힘”을 다하라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재물보다 났다” 는 것을 깨닫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기로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신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하늘나라 가까이 있는 바람직한 모습으로 언급한 유일한 율법학자다. 그러나 예수님의 칭찬은 받았지만 지식적 차원에서 슬기롭게 대답하고 잘못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위선을 발견하게 한다.
♠ 복음 요약 : 우리는 삶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바로 내가 만나는 이웃이고 관계 안에서 체험되는 분이시다. 가장 큰 계명을 일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인간 중심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근대 문명과 시류는 우리 각자의 중심을 뒤흔든다. 예수님께서는 존재 전체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현대의 낭만적이나 성적 이끌림으로 이해되는 현대의 피상적 사랑을 깨트리고 끊임없는 사랑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다. “들어라... 너는 사랑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일하느냐’ 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느냐’ 이다.“ (마더 데레사).
♠ 대화 방향 :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1요한 3.14)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1요한 4.20) 이 두 성서 본문을 묵상하고 요즘 생활 가운데 또는 변화하는 시대 상황 이슈들이(예로, 난민수용 등) 나는 정의로울 수 있는(실현 할 줄 아는) 구원받은 인간관계에 동참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요...?
♠ 참고 문헌 : ▪ 예수님을 따라 (성서가족을 위한 마르코 복음서 해설) ▪ 성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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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 평신도 주일
2018. 11. 11
마르코 12, 38~44
♠ 복음 공부 :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성전에서 가르치시다.
☞ 개요 : 하느님나라의 핵심이 생명과 사랑으로 요약된다는 것을 율법학자들에게 보여주시고(12.28-34참조), 이제 마지막으로 군중들에게 성전에서 첫째는 메시아의 출신에 관하여(35-37), 둘째는 백성을 억누르는 지식인들(38-40), 셋째는 참된 종교적 태도(41-44)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성전 자체의 운영에 관하여(13.1-2) 가르치신다.
* 38-40절 : 백성을 착취하는 자신들의 권력을 빙자하여 남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지식인들과 종교인을 경계하라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위선적인 행실을 지적하여 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 명예를 추구하는 “긴 겉옷을 입고 다니며, ⑵ 사람이 많은 곳에 나타나 인사받기를 즐기고, ⑶ 회당이나 잔치상에서 대접받는 것을 즐긴다. ⑷ 도움을 주어야 할 과부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경건한 척 길게 기도하는 등,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는데 치중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야말로 거짓 신앙의 표본이라 하시며 엄중히 단죄하고 심판하신다고 경고하신다.
* 41-44절 : 예수님께서 헌금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대조적인 것을 보고 계셨다. 그 대면하는 눈길은 심판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큰돈을 넣었고, 가난한 한 사람이 와서 콰드라스(로마동전) 한 닢에 해당하는 렙톤(그리스동전) 두 닢을 넣는다. 어쩌면 그 작은 돈을 헌금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아주 적은 돈을 봉헌하는 그 과부를 신앙인의 본보기로 소개한다. 과부의 헌금은 그 여인의 모든 것, 곧 생활비 전부를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보여준 것이다. 과부의 봉헌은 당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 바치는 수난을 예시하는 서곡으로 볼 수 있다.
♠ 복음 요약 : 예수님께서는 심판 예언처럼 복음서에서 가장 심한 말로 지도자들을 꾸짖는다. 그분이 비판하는 것은 종교지식과 경건 속에 깃든 이기주의와 탐욕, 특히 지도자들의 위선이다. 신앙인 가운데서도 약한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행실을 정당화 하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더 길게 한다. 다른 이의 곤경에 무관심한 채 종교의무만 열심히 이행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위선적인 모습의 거짓 신앙과 가난한 과부의 참된 신앙을 비교함으로써, 제자들도 참 신앙인이 되어야함을 촉구하신다.
♠ 대화 방향 : 복음의 이 대목은 나는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하나 큰 위로가 된다. 나에게 과부의 봉헌금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나에게 율법학자의 위선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기를...
♠ 참고 문헌 : ▪ 소공동체 성경공부 ▪ 마르코복음 맛들이기(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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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일 / 세계 가난한 이의 날
2018. 11. 18
마르코 13, 24~32
♠ 복음 공부
☞ 들어가면서 : 우리는 문뜩 밀레의 만종이 떠오릅니다. 들판에 서서 하루일과를 끝나고 기도하는 모습...
그림에 표현되지 않는 저 멀리서 교회의 저녁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 합니다. 사실 그들은 농부이지만 그곳에서 씨를 뿌리고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그런 부류가 아닙니다. 부유한 농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수확물을 모두 가져가지 않고 조금 들판에 남겨놓는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이나 아니면 겨울에 먹을 것이 없는 자연에 사는 들짐승을 위해서 남겨놓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를 ‘이삭줍기’ 라고 합니다. 이런 인연으로 만난 롯과 보아즈는 다윗의 혈통을 잇는 일로 예수님탄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24-27 : 아무리 어두운 삶의 그림자가 우리를 뒤덮어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인 특유의 생리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곧 희망의 원리이며,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당신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희망의 실타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그 말씀을 선포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 28-32 :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라는 평범한 자연 사물을 통해서 위대한 메시아의 징표를 설명하시는 것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안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AD 70년경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염두에 둔 말씀이긴 하지만, 이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평범한 한 순간 순간이 돌이킬 수 없는 단 한 번의 소중한 시간임을 명심케 해주며, 매 순간의 삶을 복음적 징표로 성찰하며 깨어 살도록 강조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 묵상 도움 글 : 수녀원에 계신 한 외국 수녀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에 오신지 3년 정도 된 그 수녀님은 아직 한국말에 서툴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녀원의 다른 식구들과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모두와 화목하게 지낼 뿐 아니라, 다른 수녀님들 모두 그 수녀님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그것은 항상 웃고 계시는 수녀님의 평화로운 표정 때문이라더군요. 외부에서 가끔 오는 손님들에게도 그 수녀님은 눈에 띕니다. 물론 외국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말 눈길을 끄는 것은 수녀님의 밝은 표정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수녀원을 방문하셨던 한 손님이 그 수녀님의 모습이 너무나 좋아 보여 질문을 하셨답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뭐가 그리 즐거우세요?” 그 때 수녀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기쁨의 나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진리이며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닐까요?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항상 이런 마음가짐으로 그 때를 기다려봅니다. †
♠ 대화 방향 : ① 지금 성서형제회는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 어디서나 해가 뜨고 지지만 그 나름대로 우리는 여기에 참여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아침해를 맞으려는 이도 있고, 저녁노을을 보고 감상에 젖는 이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일을 할 때에는 노고를 아끼지 않을까요?
함께하는 이들이 공동체라면 나에게 있어서 성서형제회 코이노니아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② 지금 우리는 늘 바쁜 나날을 보냅니다. 성당 내에서도 신앙적인 업무를... 그리고 사회에서는 세상일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요?
성서형제회 회원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 좌절, 그리고 갈등과 다툼을 거쳐서 오는 주님체험들이 나의 생활과는 무관한 일인가요?
세상으로 나아가서 주님의 일로 다치고 더러워진 모습이 더 좋다고 '복음의 기쁨'을 말하고 있음을 상기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보독솔(가톨릭 청년성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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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 성서 주간
2018. 11. 25
요한 18, 33ㄴ~37
♠ 복음 공부
* 33-35 :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묻는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하신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 하고 되물으셨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의 질문에 회피하며 핑계를 대고 다른 말을 한다.
* 36-37 :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자 빌라도는 또 예수님에게 ‘당신이 임금이냐’ 는 물음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라는 다소 어려운 대답으로 빌라도와의 이야기를 정리하신다.
♠ 복음 요약 : 사회적으로나 주변사람들에게 별 기대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 몇 명을 예로 들면, 먼저 에디슨이다.. ‘그는 우둔해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쫓겨난다. 그뿐 아니라, 병아리를 부화시키겠다고 달걀을 품기도 했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가 없다고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그는 편집국장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줬지만 “이것도 그림이냐?” 타박만 받았다. 그리고 로버트 브라우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편집자에게 원고를 건넸다가 “이거 순 잡동사니 아니야?” 라는 말과 함께 면전에서 원고를 삭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나 주변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지 못했었지만, 자신이 가는 길에 확신이 있었고, 그 길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 결과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왕’이 되었고, 월트 디즈니는 신문사를 나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여, 전 세계 어린이들의 꿈이라는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로버트 브라우닝은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안드레아 보첼리도 마찬가지다. 시각장애인이라는 극복을 넘어서 하느님께서 주신 목소리로 주변의 낮은 기대에도 그는 개의치 않고 우뚝 섰다. 주변 사람들의 낮은 기대감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는 그들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선물이다. 오늘 복음에 보면, 빌라도도 예수님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수님이 왕처럼 품위 있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동족들에게 모함을 받아 잡혀온 것이니 ‘힘도 없으려니...’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라는 질문도 못 믿겠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변의 낮은 기대와 관계없이,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다. 3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예수님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진리를 몸소 증명해 보여주셨고, 사람들이 비난하고 모욕하고 수긍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끝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하느님이 보여주신 나의 길을 성실히 걸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첫 걸음은 기도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바라보는 것이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 안에서 확신을 얻어야, ‘너가 뭘 알어... 너가 뭘 할 수 있겠어...’ 라는 사회의 낮은 기대감을 넘어설 수 있다...
♠ 대화 방향 : 삶의 여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낮은 기대로 인해 상처 받은 적은 없는가? 그 상처를 보듬어주시고, 오히려 더 빛을 내게 해 주신 예수님께 드린 그리고 드릴 감사에 대해 서로 나누어보자.
♠ 참고 문헌 : ▪ [ 주위에 낮은 기대를 넘어서는 사람이 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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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복음묵상 기고 >
에파타, 탈리타 쿰...!
광주 / FB 회원
장 도미니꼬 사비오 (철호)
✠ 마르코 복음 7,31-37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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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성서형제회 형제 자매님들... 예수님께서도 히브리어가 아닌‘아람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발음 그대로’ 기록한 말이 있습니다. ‘에파타’(마르 7,34) ‘탈리타 쿰’(마르5,41)과 같은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곧바로 기적이 일어났기에 놀란 목격자들이 ‘발음 그대로’ 전했던 것입니다.
2일 전 광주평화방송 라디오를 차 안에서 듣던 중 어느 수녀님이 설명을 해 주셨는데 참 쉽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울 때도 “탈리타 쿰” 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 고 청하였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은 이는 어렸을 때부터 선천적으로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라고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주셨습니다. 그 소문은 카파르나움을 거쳐 갈릴래아까지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치유해주십사고 데리고 옵니다.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린 엘리야는 주님께 기도드리고, 자기의 몸을 죽은 아이와 터치하면서 기도합니다.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렸습니다. 엘리아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수넴 여인도 예수님에게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손을 얹어 치유해 주시라고 청을 합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딸은 치유를 받습니다. 엘리야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직접 주님이시기 때문에 손만 대어도 치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치유되는 하혈하는 여인의 치유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은 레위기에서 나오듯이,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되어 종교적인 곳에는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고,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누가 나에게 손을 댔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깃이라도 만지려고 손을 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만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확신을 가진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해도 낳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만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오는 구원의 자비를 바라는 여인의 믿음을 잘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녀의 믿음을 확인해주십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공관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야이로도 마찬가지이지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죽어 가는 딸을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치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하혈하는 여인 때문에 시간이 지연되어 딸이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 하혈하던 여인이 보여 주던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깃에 손만 대어도 하혈하던 여인이 완전히 치유된 믿음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을 선물하시는 분이 시다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유일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윤일마 수녀님께서는 “오늘 우리도 “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죽은 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부모와 세 제자들만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이 세 제자는 유다인들 법이 있는데, ‘어떤 일이 진짜로 일어났다’ 라는 것을 확정 짖기 위해서는 두세 명의 증인이 있어야 하는 유다인들 관습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소녀를 일으킨 것은 손을 잡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라’ 는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는 생명의 힘을 지닌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표현한 마르코복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목격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에야 완전히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모든 희망을 걸고 간절히 간청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을 간직하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옥시토닌이라는 호르몬은 행복감을 느끼는 호르몬입니다. 서로 우정을 나누고 서로 사랑한다는 사랑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저는 아침 저녁으로 아들을 보듬고 터치합니다. 하루에 12번의 터치를 하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행복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손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막고 있는 것들을 열어버리는 ‘예수님의 에파타 말씀’ 과 함께 예수님께서 나를 안수해주시는 것을 마음속으로 체험하면서 기쁘게 살아가시는 삶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줍니다. 한주간도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길 바라며...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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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사자 월례회합 스케치 >
10월 전국 팀봉사자 월례회합
FㆍB 서기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새볔에 집을 나서 필자는 오는 기차 바깥경치는 온통 안개에 덮혀 있었다.
오늘 우리들의 토론을 미리 말해주는 듯하였다.
오래간만에 전국회의를 하였다.
필자와 전국조정 말씀봉사자를 빼놓으면 마치 연이어서 서울지구 봉사자모임이라는 느낌을 든다.
기차의 연착으로 필자가 조금 늦게 도착해보니, 벌써 토론을 하고 있었다. 코이노니아로 시작한다. 주모경으로 전국조정이 창을 연후에 여느 때처럼 각자 돌아가며 한 구절씩 21일 복음을 읽는다.
그리고 참석한 몇 명이 생활나눔을 하고, 마지막으로 필자가 긴급전화를 받는 사이에 수녀님의 총정리를 하셨다. 수녀님은 이어서 그동안 여러 채널을 통한 소통문제를 언급하셨다.
중식 이후, 오후 2부 회합에서 첫 번째 안건으로 단톡방에 대한 의견으로 처리되었다.
결과적으로 단톡방은 ‘봉사자방’과 ‘일반 회원방’ 두 가지를 ‘전국조정 말씀선포자’ 명의로 새로이 개설하기로 하였고, 여기에 올리는 주제는 우선적으로 전국 팀봉사자 월례회합에서 거론된 것에 한해서 올리기로 하고, ‘전국조정 말씀선포자’ 가 규제하기로 하였다
전주팀 2분께서 서울 도착 후 바로 식당으로 들어왔다
오후에 소통문제로 여러 격론이 일어났다. 가장 시급한 문제로 여겨지는 ‘전주팀 내의 소통문제’ 로 다음 달 전국 봉사자월례회합은 12월 15일(토) 11시, 전주 서신동 성당에서 하기로 결정하였고, 내년 2019년 묵상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게 하였다. 지난 수련회 직전 회의에서 천호성지에 이미 예약한 상태이다.
지난 번 9월 이후 서울지구는 지구모임을 11월 11일(일) 오전 11시에 갖기로 했다.
아픔만큼 성숙한다고 한다. 봉사는 준비되어있는 자가 해야 한다는 데는 모두들 동의하였다.
기차로 돌아오는 도중에 편집하시는 이 보나벤뚜라 형제의 마감 재촉을 받고 도착 즉시 후기를 간략하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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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많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8년 9월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