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디모데전서 5:16-17
제목: 과부친척과 다스리는 장로 - 돌아보고 존경하라(무시말고 비난말라)
일시: 2021. 5. 16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5월은 관계와 사랑이 풍성한 달이다.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버이날, 5월 11일은 입양의 날, 어제 5월 15일은 스승의 날, 5월 20일은 세계인의 날, 5월 21일은 부부의 날 등이다. 교회 안에서도 풍성한 사랑의 관계가 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성도와 성도 사이의 관계가 그물처럼 엮여져 있으며 그 관계는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 사이를 부지런히 다니면서 일하는 일꾼이 바로 목회자이다. 바울은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그러한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특별히 오늘 두절의 짧은 성경본문은 교회 안에 돌봄이 필요한 사람 즉, “과부친척”과 성도들을 돌보는 사람 즉,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II. “과부 친척”은 무시 말고 내가 직접 도우라.
바울과 디모데가 목회를 하던 초대교회 당시 “과부”는 사회적 약자였다. 과부는 가난하고 약하여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별 큰 영향력도 주지 못하며 짐이 될 뿐이었다. 그들은 돌봐 줄 보호자가 없는 불쌍한 사람의 대명사였다. 그들은 늘 도움이 필요했다. 누가 이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으며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 과부들의 인권과 복지는 누가 책임져 줄 수 있는가? 그런데 오늘 말씀에 과부라는 단어 뒤에 “친척”이라는 단어가 따라 붙는다. “친척”이라고 하는 말은 가까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즉 여기서 언급되는 과부는 과부는 과부인데 잘 모르는 익명의 어떤 과부가 아니고 내가 잘 아는 가까운 과부를 말한다. 이런 과부는 누가 돌아보아야 하는가? 누가 그 필요를 채워주고 도와줄 것인가? 그 과부를 도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를 친척으로 둔 내 자신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자기가 도와주고”라 말하고 있다. 관계된 사람이 먼저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성경과 정반대의 성향이 있다. 부담되는 “과부”가 아니라 내게 도움이 될 만한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고, “친척”을 두는 것보다 골치 아프지 않도록 가능한 관계하지 않고 살려 한다. 괜히 보이게 되고 듣게 되어 알게 되면 원치 않게 마음에 감동이 생기고 그러면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핵심진리는 관계 회복이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멀어졌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깨어졌으며 인간과 자연도 서로 발톱을 세우고 서로를 정복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깨뜨린 관계를 회복시키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우주 코스모스를 인간이 망쳐버린 카오스에서 다시 알레스 인 오두눙으로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물론 알게 되고 관여하게 되면 신경을 쓸 일이 생기고 피곤하게 된다. 알게 되었으니 같이 슬퍼해야 하고, 관여하게 되었으니 내 시간도 쓰고 내 물질도 쓰고 신경도 써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주님은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감수하셨다.
우리에게 과부친척이 있는가? 우리가 사랑의 눈을 뜨게 되면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은 과부친척을 만날 수 있다. 돌아볼 사람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내 눈에 들어오고 내 귀에 들려오고 마음에 감동이 오는가? 내 감각의 레이더에 걸리면 바로 나의 “과부친척”이다. 옆의 누군가가 돕나를 보지 말고 내 자신이 직접 나서라!!! “자기”가 도우라!!!
미얀마 구테타가 일어난지 100일이 훌쩍 넘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방해로 국제사회가 도울 수 없어 상황은 내전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이 멀리 떨어져 있고 숨겨진 나라 미얀마에 대해서 다들 잘 모를 것이다. 아마 유럽의 어떤 교회도 미얀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소식을 나누는 교회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내 귀에 들리고 내 눈에 보이고 내 감각 속에 들어왔는데 어쩌겠는가? 나의 “과부친척”이 된 것이다. 모르던 것을 일부러 빚 내고 발굴할 의도는 없었다. 그 과부친척이 내 손길 닿는 곳에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함께 기도하던 중 권혁선선교사가 임진각에서 광주 518묘역(군부희생자)까지 약 500킬로의 길을 걸어 “필리핀 ABGTS 와 PBTS" 신학교에 재학중인 40여명의 미얀마 학생들을 실제적으로 돕는 워킹슈펜데 이벤트를 계획실행했다. 그와 사모 둘이서 열심히 걷고 저는 뒤에서 할 수 있는 한 도왔다. 성령께서 주신 마음의 감동으로 함께 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 딸들에게 나누었더니 그들이 슈펜데를 했다. 한국에서 라이프찌히주일예배를 늘 참석하시는 부모님이 교회소식을 통해 듣고 감동이 되어 워킹슈펜데 동참했다. 또 어머님이 대전에서 복집식당을 하시는 이모님과 그냥 이야기라고 나누었는데 감동이 있었는지 또 헌금을 했다. 과부친척은 어디 있는가? 내 귀에 들릴 때요 내 귀에 보일 때요 내 마음에 감동이 올 때이다. 어제까지 17일 동안 걸으면서 과부친척을 두신 많은 분들이 동참하여 20,384,520원이 모금되었고 1차 송금을 완료했고 이후에 오게 되는 것은 2차 송금으로 하려고 한다.
이렇게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다들 자기들의 “과부친척”을 돌아보게 될 때, 교회가 짐지지 않게 된다.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그 말은 교회가 싫어서 짐을 피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 합력한다는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과 같이 짐을 분산하니 얼마나 가벼울 것인가? 또한 각 지체들이 자신의 “과부친척”을 돌아보게 될 때는 참 과부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라”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관계 속에서 과부를 돕고자 할 때는 누가 진짜 어려운 과부인지 어떠한 과부가 정말로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지 알기 어렵다. 멀리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잘 아는 가까운 “과부친척”이면 가족 사랑을 가지고 실제로 가려운 데를 긁어줄 수 있는 맞춤형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그 도움을 받는 과부친척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적인 깊은 부분까지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다. 그도 자존심과 존엄이 있지 않는가? 이렇게 과부친척을 돌보는 교회공동체는 건강한 교회를 이룬다.
III.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비난 말고 존경하라.
과부친척과 같이 돌보아 주어야 할 사람은 무시하지 말고 돌보아 주고 도와야 한다. 이제 역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말씀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16절)이라 한다. 미래에서 날라오셔서 우리에게 인생의 정답을 늘 가르쳐 주시는 부모님들과 어르신들,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를 가르쳐 주신 스승들, 앞에서 우리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 그들을 존경하라.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라. 존경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말과 가르침과 이끄는 리더쉽에 권위를 주는 것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권위를 주어야 강한 나라이다. 부모의 권위를 알아 순종하고 공경할 때 그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 된다. 교회에서는 목사와 사역자들, 앞에서 일하는 리더에게 권위를 싫어줄 때 사탄이 넘볼 수 없는 건강한 교회가 된다. 권위가 손상이 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처음 담임목사라는 타이틀로 사역을 한 것은 95년도이다. 그러니 주님이 사역을 마무리 하던 33살의 나이에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미 3년간은 부목사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1년간 인테림 목사 임시목사로 담임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유학을 추진하고 있던 제게 그 교회에서 미국가기 전까지 임시로 담임목사 직분을 맡겨준 것이다. 교회는 내부의 많은 갈등으로 무척 소란스러워 곧 쓰러질 듯 아주 깊은 아픔 속에 있었다. 그런 상황 가운데 담임을 하니 교통정리를 하고 회복해야 할 것이 많았고 임시로 있을지언정 담임목사이기에 영적인 책임을 다 져야 했다. 부사역자일 때는 어떠한 일이라도 그냥 최종 책임자인 담임 목사님에게 토스하면 되었는데 내 자신이 정작 담임목사가 되니 No는 No, Yes 는 Yes를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목회현장의 예민한 테마들을 다른 이에게 넘길 수도 없는 입장에서 싫든 좋든 총대를 메야 했다. 그때 경험했던 것이 리더의 영적 권위가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이었다. 담임목사의 사역차원에서 이런 저런 제안과 결정을 말하자 그런 저를 교만하다고 평하기 시작했다. 권위와 교만이 얼핏 보면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다 한 사건이 있게 되었다. 교회계획에 따라 가을 부흥회를 하게 되었는데 가장 선임 장로님이 강사를 이미 물색하여 초청해 놓은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던 저는 무척 화가 났다. 그것은 담임목사의 권위 강단의 권위에 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그 선임장로님에게 전화하여 “장로님 어찌 그리 하셨습니까? 강단에 설교자를 세우는 것은 목회자가 할 일인데 너무 많이 나가셨고 잘못된 일입니다.” 제 입에서 이 정도 나왔다는 것은 아주 화가 난 것이다. 그때 장로님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바로 사과를 했다. 죄송하다는데 어찌하는가? 저는 제 성품과 스타일과 같이 “일은 되게 해야지요. 이미 초청을 했으니 그 목사님을 모시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그리고 부흥회를 은혜롭게 잘 마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초청되어 오신 목사님이 교회의 상황을 아셨는지 담임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여 교회를 잘 세우라는 테마로 말씀을 몇일 간 전하셨던 것이다. 목회자의 영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할 때가 교회가 깊은 병에 든 때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목회자를 구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 교회에 아주 적격한 목사님을 소개했다. 당시 저도 유학방향을 바꾸어 미국행을 접고 필리핀에서 선교학을 공부하겠노라고 결정을 해 놓은 상태였다. 이 제안을 교회청빙위원회에 했을 때 한 장로님이 이렇게 내게 말한다. “목사님 자기 사람을 심어 놓고 선교후원을 받겠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너무 슬펐고 진심을 알아 주지 못함에 가슴 아팠다. 그리고 무엇보다 임시목사이지만 목사의 말에 아무런 권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저는 그 다음 주 곧바로 사임의사를 전했다. 그 자리에 대한 권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 카톡을 받는 관계다.
우리를 돌보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를 이끌고 리드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들의 영적권위를 세우라. 그들을 인정하고 존경하라. 교회공동체 안에도 리더쉽에 상처를 주고 앞서 이끄는 사람들을 자꾸 끌어내리려하고 흠집을 내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교회는 아픈 교회이다. 오늘 말씀에 앞서 일하는 장로들에 대한 고발이 접수되면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한다.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를 돌보는 자들이 있는가? 그들을 시기하고 흠 잡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돌보는 자들을 인정하고 세우라. 그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IV.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는 과부 친척이 보이면 팔 걷어 부치고 돕고 돌아보는 지체들이 모인 교회이다. 그리고 앞서 다스리는 리더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사람들로 모인 교회이다. 과부친척을 보면 개무시하고 잘 다스리는 자를 어떻게든 흠집내고 비난하여 태클을 거는 사람으로 가득 찬 교회는 슬프고 병든 교회공동체이다. 어려움에 처해 도움이 필요한 과부친척이 보이는가? 그들에게 찾아가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사용하여 도우라. 나를 돌보고 앞서서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존경하라. 그들을 높이고 칭찬하라. 산은 깍고 골짜기는 메우라. 그때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평지가 된다. 내 주변의 과부친척을 돌아보고 앞서 일하는 리더들을 존경함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