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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東煥 傳
선종(宣宗)때 허목(許牧)이라는 이가 있었다. 선대(先代)에 북방오적의 변란을 진압한 공으로 숭무이등공신(崇武二等功臣)에 봉해지고 이후 도 첨절제사를 지냈다. 본래 부인 홍씨(洪氏)와의 사이에 딸 여덟이 있고 대를이을 아들이 없었으나 나이 50을 넘겨 어린 첩실을 보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동환(東煥)이다. 동환이 서자(庶子)라서 가문의 제사는 이을수 있되 과거에 응시할수 없었으나 부친의 배러가 있어 의과(醫科)시험을 볼수 있었다. 보통은 고향 함안땅에 살았는데 이때 지역에 아이들이 밤에 쉬이 울며 잠못드는 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면 보통 집안의 귀천을 막론하고 아이가 밤에 보채면 때리거나 소량의 술이라도 먹여 잠들게 하였는데 동환이 이를 ‘잘못된일’이라 탄식하였다. 고향 인근 감악산에 신비의 약초가 많이 난다는 말을 듣고 이후 잡풀 두어종을 모아 환약을 만든뒤 물에 개어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밤에 쉬이 잠들고 보채지 않아 다들 신기하게 여겼다.
고을 현감 정태원(鄭泰原)의 부인이 이상한 병을 앓아 용한 의원을 모두 불러 진맥케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이때 지역에 백승국(白承國)이란 유명한 의원이 있었는데 현감이 특별히 불러 병을 알아보라 하였으나 ‘송구하옵게도 저 역시 마땅한 대책이 없나이다’ 하며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이때 동환은 승국의 밑에서 허드렛일을 봐주는 심부름꾼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부인의 병환을 살펴보고 ‘송구하오나 신이 한번 부인의 병알 봐드리겠나이다’ 하여 처음엔 다들 놀라고 어이없어 했다.
태원이 어이없어 아전들을 불러 내치라 하였으나 다만 장녀 금옥(今玉)만이 만류하며 ‘어찌 의술(醫術)을 펼침에 그 귀천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이자가 마땅히 이리 자신있어 하니 먼저 어머니의 병환을 살펴보게한후 만약 병을 고치게 하면 상을줌이 마땅하나 재주없음에도 망령되이 나선것이라면 그때 벌을 주어도 늦지 않나이다’ 부친을 설득하여 일단 동환을 병실에 들이게했다.
동환이 부인의 상태를 살펴본뒤 말하기를 ‘이는 여인(女人)이라 앓는병이 아닌 이전에 없던 신병(新病)이니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나이다’ 하고는 침과 뜸을 놓으며 오미자,오디,칡넝쿨등을 갈아만든 환약을 아침저녁 먹였다. 한달쯤 지났는데 부인의 발열과 구토증세가 더 심해지자 현감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 일개 천한것의 망령된 말에 속아 하마터면 부인을 보낼뻔 하였도다. 여봐라, 저자를 당장 옥에 가두어라’ 하였다. 이에 금옥이 말리며 말하기를 ‘어머니의 발열,구토 증세가 심해진 것은 사실이나 낯빛을 살펴보면 이전에 비해 혈색이 좋으지는 흔적이 있고 종기도 사그라드는 조짐이 있나이다. 헌데 아버님께선 어찌하여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살피지 않으시고 단지 일시적은 구토증상만을 보며 의심하시나이까’ 하니 현감이 오히려 더욱 노하여 ‘네가 의원(醫員)의길 하더냐, 의녀(醫女)이길 하더냐 ? 의술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 없는 일개 계집으로 어찌 한낱 천한것만 이리도 싸고돌수 있단말이냐 ?’ 하고 딸마저 내보내려 하였다. 금옥이 은밀히 옥에 먹을 것을 싸들고 들어와 동환의 손을 부여잡고 말하기를 ‘공께서는 잠시만 고통을 인내하소서. 아버님의 진노가 풀리실날이 있을것이외다’ 하며 위로하였다.
현감이 본래 동환의 목을 벨 생각이었으나 의원과의 친분을 고려하여 고을에서 추방하는 정도로 일을 마무리 지을 참이었다. 일시적으로 풀어주고 한달이내에 고을을 떠날 것을 명하였으나 동환이 갈곳을 정하지 못해 일단 사가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현청에서 급히 사람이 달려와 ‘현령께서 부르시니 공꼐선 어서 납시오소서’ 하였다. 놀라 가보니 부인이 완쾌되여 혈색도 나아지고 종기도 더 이상 없었다. 발열과 구토증상도 더 이상 없으니 현감이 감격하며 동환의 손을 잡고 사죄하였디. ‘이 죄를 어찌 다 갚을수 있단 말인가. 내 일시적인 분노의 허물을 용서하시게’ 하고 동환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고을 인근에 엄여와 승찬이란 이가 살았는데 차마 표현할수 없는 부위가 아파 고통을 호소하니 동환이 듣고 가보았다. 증상일 보니 동환이 매우 놀라고 기겁한 가운데서도 탄식하였다. ‘일단 병증부터 고치세’ 제안하여 우선 담뱃재,송진,나무껍질등을 섞어만든 고약(膏藥)을 한달동안 정기적으로 붙이게 했다. 동환이 특히 말하기를 ‘하의(下衣)를 벗은채 당분간 실내에서만 지내는 일이 있더라도 당분간 바깥출입을 삼가고 옷을 입지 말게. 고약이 흩어지면 약효가 줄어들 우려가 있네’ 하였다. 엄여와 승찬이 쉬이 납득하지 못하여 ‘밥을 먹을때도 그리하여야 합니까 ?’ 하니 동환이 혀를 끌끌차며 답하기를 ‘우선 병증치료가 급선무 아니곘나 ? 우선 시키는대로 하게’ 하여 엄여와 승찬이 모두 시키는대로 하였다.
한달후 병층이 많이 치유가 되니 동환이 이제 정상적으로 옷을 입고 생활해도 무방하다 하면서 또 한편으로 묻기를 ‘내 아무래도 의심이 있어 아니물을수 없는데 혹시 근자에 해서는 안될 관계를 가진적이 있는가 ?’ 하니 엄여와 승찬이 처음엔 부끄러워 차마 말못하다 동환이 거듭 진지하게 물으니 모든 것을 실토하였다. 동환이 놀란 가운데서도 엄히 꾸짖으며 ‘앞으로 그와같은 경거망동을 삼가게. 이후 다시 질환이 재발했을때는 고치기 힘들것일세’ 하니 엄여는 수긍하여 다시는 그와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승찬은 승복하지 않았다. 약 반년후 병이 나은 엄여는 정상적인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수긍하지 않은 승찬은 마침내 병이 재발해 죽고 말았다.
허목이 아들의 미래를 근심하여 하루는 지역의 유명한 관상가인 만일준(萬一俊)에게 동환을 데려가 아들의 상(相)을 살피도록 했다. 일준이 말하기를 ‘벼슬길에 오를만한 팔자는 아니나 천성이 유순하니 대세에만 순응하면 고을에서 아전일이라도 보며 식솔을 챙길만한 능력인 될것이오’ 하였다. 동환이 이 말에 별다른 반응없이 오히려 만의 알굴만을 똑바로 쳐다보니 부친이 되려 의아해 물었다. 동환은 부친의 얼굴조차 보지않은채 만일준만 더욱 또렷이 바라보며 ‘공의 혈색이 심상치 않은데 아무래도 술과 짠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생긴 병 같소이다. 앞으로 육류와 염식(鹽食)을 삼가고 채식을 하지 않으면 공의 병이 악화될것이오. 하였다. 만일준으 격노하여 북채도 받지 않은채 동환 부자를 쫒아내었다.
한달후 만일준이 동환을 급히 찾으니 병세가 이미 악화되어 쉬워보이지 않았다. 동환이 가르친대로 식이요법을 하고 침과 뜸을 맞으니 비로소 살아날 수 있었다. 만일준이 의아하여 ’그대는 의술을 배운이도 아니면서 어찌 내 병증을 알수 있었는가 ?‘ 하니 동환이 대답하기를 ’조선백성들의 혈색은 예부터 옅은 황갈색인데 종종 술과 고기를 너무 먹어 검붉은 빛으로 변하는이가 있나이다. 공의 중상이 곧 그와 같았으니 어찌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리이까‘ 하였다. 만일준이 동환의 손을 잡으며 ’내 밑에서 관상과 풍수를 배워보지 않겠나 ? 일만 잘 되면 나중에 상감이나 태후마마의 상(相)을 살피며 때론 묘자리를 살펴 국상(國喪)에 참여하는 일도 있을것일세‘ 하였다. 동환이 손을 내저으며 답하기를 ’뜻은 고마우나 부친께선 제게 의과시험을 보시길 원하니 일단 부친의 뜻을 따르리다‘ 하였다.
동환이 처음 지역의원 백승국의 밑에서 일을 하였는데 처음엔 아무런 보직(補職)없이 허드렛일만 하는 급낮은 심부름꾼이었다. 처음엔 약초꾼들조차 시기하여 일에 동참시키지 않고 사소한 심부름만 시켰는데 동환은 약초꾼을 따라다니며 스스로 약재와 그 효능을 하나하나 익혀갔다. 병부잡이 조일서(趙壹瑞)는 백승국의 30년 지기로 오직 그만이 동환의 재주를 알아보가 간간이 의술을 가르쳤는데 하루는 사사로이 술을 권하며 말하기를 ’그대 집안의 내력을 내가 대충 들어 알고있으나 의원어른께선 그대에게 큰 일을 맡길 생각은 없는듯하네. 차라리 내 밑에서 일을 하여 나중에 병부잡이라도 되어보는게 어떻겠는가 ? 하찮은 고을 아전보다도 벌이가 괜찮을걸세‘ 하여 본격적으로 조일서에게 일을 배웠다.
백승국이 동환을 의과시험에 보내지 않고 계속 밑에 두려 하였으니 허목이 찾아와 하루는 이 일을 근심하여 상의하였다. 승국이 다시 동환을 불러 말하기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슬하에 자식이 없고 다만 당숙어른댁에서 흉년에 양녀로 거둔 예진(禮眞)이란 아이를 어른이 돌아가신뒤 막내누이처럼 거두어 의녀(醫女)일을 맡기고 있네. 하지만 여인이라 내가 죽은뒤 의원(醫院)일을 맡아볼수는 없으니 내가 죽은뒤 자네가 예진과 혼사를 치루어 이 의원을 맡아보는게 어떻겠나 ?‘ 하였다. 동환이 거듭 거부하며 조정의 의과시험에 나갈뜻을 밝혔다.
경진년(庚辰年)에 왕의 총비(寵妃)인 현빈(賢嬪)이 아들을 낳으니 왕이 기뻐하여 별시(別試)를 열어 이때 동환이 의과에 응시하였다. 차석(次席)으로 합격하여 관례대로라면 내의원(內醫院)에 배치되어야 하나 동인(東人) 일부가 그 아비 허목의 전력(前歷)을 시기하고 있어 활인서의 일반의원으로 배치되었다.
이때 도성에 큰 홍수가 났는데 민가에까지 물이 차올라와 사람들 발목까지 잠길 지경이었는데 나라에서 병사들까지 동원해 물을 퍼내는데도 쉽지 않았다. 하는수없이 적잖은 백성들이 한동안 방치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강물에 마을 곳곳 오물까지 뒤섞이어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한달여후 물은 모두 빠졌으나 이후 백성들 다리와 발목에 이상한 염증과 종기가 나 여러 가지로 병을 치료해보려해도 쉽지 않았다. 이때 동환이 나서서 말하기를 ’해남.진도 지역에 나는 신비의 약초면 이 염증을 치료할수 있을것이니 소신을 보내주소서,‘ 하였다. 다들 어이없어서 ’그대가 함안출신으로 해남,진도까진 거리가 멀어 그대가 갈일이 없읉터인데 어찌 그와같은 일을 알수있단 말인가. 지역출신들도 모르는 약초를 그대가 안다니 가당찮도다‘ 하며 보내주지 않았다. 동환이 두 번세번 간하자 결국 동환이 진도까지 내려와 신비의 약초로 약을 지어왔다. 백성들의 염증이 난곳에 약을 바르니 모두 깨끗이 나아 다들 신기해하였다.
도제조가 의아해서 묻기를 ’그대가 어찌 멀리떨어진곳의 약초와 이런일의 효능을 안단말인가 ?‘ 하여 동환이 대답하기를 ’아버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길 조선땅 곳곳에 지역마다 신비의 약초가 다 있거늘 옛 선현의 문헌에 다 나오는 일인데 사람들이 알 수 없어 실로 답답하도다‘ 하시며 틈틈이 옛 선현의 문헌을 참고하거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그와같은 약초와 효능을 알아내곤 하셨나이다. 또 어릴때부터 집에서 직접 재배하여 그와같은 효능을 실험해보기도 했사온바 해남,진도의 약초 효능을 알수있던 연유도 여기 있사옵니다’ 하니 다들 기이하게 여겼다.
도성 인근 한 야산에 정덕사(定德寺)라는 제법 큰 사찰이 하나 있는데 주지승 본초(本超)와 공양간 수석보살 덕원(德原)이 하루는 활인서를 찾아와 심병(心病)을 호소하였다. 증상인즉 배와 가슴이 몹시도 아파 식사도 쉽지 않고 하루 일과를 정상적으로 보내기도 쉽지 않으며 때론 두통이 나기도 한다 하였다. 이에 동환이 진맥을 해보고는 ‘화병(火病)’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활인서의 의원들도 의아해하며 ‘처방이 있는가 ?’물으니 동환조차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 시대에 화병을 치료할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봐야할것입니다’ 하면서 일단 마음을 다스릴수 있는 책 한두권을 본초와 덕원 두 스님과 보살에게 내주어 돌려보냈다.
공이 차츰 실력을 인정받아 얼마후 혜민서로 임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완(李完)이라는 하급관리가 있었는데 가슴이 몹시 답답하고 음식을 잘 넘기지 못하는 통증을 느껴 의원을 부르니 동환이 찾아갔다. 말하기를 ‘감초,황기등을 달인물로 탕약을 지어 드시면 효과가 있을것입니다’ 하였다. ‘어느정도 지나면 차도가 있겠는가 ?’ 이완이 물으니 처음 동환이 ‘한달정도’라 답했다. 허나 한달이 지나도 차도가 없자 ‘용한 의원이라더니 이제 보니 돌팔이 아닌가 ?’ 이완이 의심하였다. 다시 다른 약재를 좀 더 섞어 탕약을 지어 먹이니 그제서야 차도를 보였다.
전석홍(全錫洪)이란 원로대신이 있었는데 젊은시절부터 머리숱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은밀히 의원을 불러 말하기를 ‘내 젊은 나이때부터 머리숱이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자꾸 빠져서 나이 서른을 넘겼을 때 이미 대머리나 다름없었다. 수치스러워 한때 가발을 쓰고다닐 정도였는데 이제 내 나이 어느덧 칠순에 이르렀으니 살면 얼마나 살겠냐만 죽기전에 다른이들처럼 풍성한 숱이 있는 머리를 한번만 보고 가면 원이 없겠도다’ 하였다. 동환이 말하기를 ‘제가 한번 해볼터이니 기다려보시오서서’. 하였다. 먼저 측백나무 잎과 당귀등을 가루로 만든 약을 술에 담가 꺼낸뒤 머리에 발라보았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후 철쭉뿌리 달인물로 머리를 감겨보았으나 한달이 지나도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다시 이번엔 우엉뿌리 기름을 발라보았으나 역시 효과가 없자 동환이 머리를 조아리며 ‘제가 할수있는 것은 다 해보았으나 아무래도 대감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쉽지 않을 것 같나이다’ 하며 죄를 청했다. 석홍이 탄식하며 ‘이 또한 자연의 이치요 내 팔자라면 팔자일텐데 그대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 하며 돌려보내려 하였다. 헌데 동환이 문을 나서는 순간 하인이 급히 불러 다시 들어가보니 석홍에게 그제서야 머리숱이 나는 모습이 보였다. 석홍이 동환의 손을 붙잡으며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내 평생 한을 씻어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하여 동환도 함께 감탄,감격하여 울었다.
홍윤성(洪允成)이란 무관(武官)이 있었다. 훈련대장을 역임하고 공신의 반열에까지 오른 이지만 성품이 포악하고 괴팍하여 다들 꺼려하였다. 나이들어 현직에서 물러난뒤 전에없던 병증이 생겨 의원을 청했는데 다들 두렵고 불편해하여 가지 않으려했다. 이때 동환이 나서며 ‘의원이 병자(病者)를 치료하는데 어찌 성정(性情)을 가리겠나이까 ?’ 하였다. 스스로 가기를 청하니 고집은 꺾을수 없었으되 도제조 이하 모두들 근심하며 ‘동환이 아직 어리고 철이없어 세상물정을 모른다’ 하였다.
이윽고 대감댁에 이르니 들어서자마자 홍공(洪公)이 칼을 겨누며 ‘이 칼은 내가 20년을 아껴온 천하명검(天下名劍)인데 그 옛날 관운장의 청룡도인들 비길바가 아니다. 한여름밤 내 침수를 귀찮게 하는 모기 열 마리를 이 칼로 단칼에 베었느니라’ 하며 ‘내 병증을 치료하지 못할시 네놈도 한여름밤의 모기처럼 될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많이 놀랐으나 태연함과 침착함을 되찾으며 ‘의원이 병자를 치료하는 것이 본분일뿐 어찌 다른뜻이 있으리이까.’ 하였다.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공의 병세가 이미 나이들고 깊어 쉬이말하기 어렵소이다’ 탄식한뒤 묻기를 ‘혹시 근래에 젊은 여인을 가까이 하신일이 있나이까 ?’ 하니 일단 홍공이 수긍하였고, 또다시 ‘평소 술을 자주 하시나이까 ?’ 물으니 역시 홍공이 시인하였다. 동환이 대답하기를 ‘이는 평상시 성품이 거칠고 술과 고기 여인을 너무 가까이하여 생긴 병으로 젊은시절 혈기로는 능히 버틸수 있으나 나이들면 버틸수 없나이다.’ 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지금부터 술과 고기 그리고 기름진 음식과 여인을 삼갈것이며 소인이 지어주는 탕약과 침과 뜸으로 병을 치료할것이며 또한 식사는 보리밥 외에 콩나물,시금치,맨김,두부,더덕만을 드시고 그 외 일절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시오소서. 소인의 뜻대로 백일만 하시면 이후 능히 20년은 더 사실것이나 뜻을 어길시엔 1년을 버티기 힘들것이오이다’ 하였다. 홍공이 역정을 내어 밥상을 걷어차며 말했다. ‘그걸 누가 모르느냐 ? 술,여자,고기를 가까이해서 멀쩡한 이가 예부터 세상에 누가 있다더냐 ? 한낱 일자무식의 무인도 할 수 있는 말을 지껄이자고 그래도 이름났다는 명의가 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그 수준이라니. 여봐라 !!! 당장 이자를 끌고가 목을 베어라 !!!’ 하였다.
동환이 겁이 났으나 거듭 침착해하며 ‘일단 소인의 명대로 병증을 치료해보소서. 죄는 그 뒤에 내리셔도 늦지 않을것입니다’ 하니 윤성이 거듭 역정을 내며 ‘술,여자,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대체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사느냐 ? 날더러 머리깎고 중이되어 입산수도라도 하란 말이냐 ? 죽으면 죽었지 그리는 못하겠다’ 거듭 칼을 휘두르며 애꿋은 하인,하녀까지 두들겨패니 모두 겁이나 저만치 달아나고 다만 동환만이 거듭 엎드려 병증의 치유만을 권하였다. 다시 홍공이 말하기를 ‘나는 예부터 침맞는게 싫었으니 침은 받지 않겠다. 침말고 다른 치유법을 연구해오라’ 하였다. 동환이 진심으로 딱하여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세상에 침을 맞지 않고 치유할수 있는 병증은 없는줄로 아옵니다’ 하였다. 홍공이 거듭 역정을 내며 동환에게 오줌까지 갈겨버렸다.
홍의 옛 스승이자 선배인 한공이 찾아와서 달래니 그제서야 겨우 윤성이 병증치유의 뜻을 밝혔다. 마침내 침과 뜸을 받아들이고 의원이 권한대로 섭생(攝生)을 시작하니 처음 동환의 권유대로 보리밥과 나물찬만이 나오자 오히려 그것을 한데 비벼서 강제로 동환에게 떠먹이며 말했다. ‘네가 장수식단이라 하였으니 너부터 먹어보아라. 네가 이것을 처먹고 장수하면 내가 그뒤에 먹어보겠다’ 하였다. 동환이 숨찬몸을 겨우 달랜뒤 ‘공께서 원하시면 제가 이 찬을 다 들것이오나 그대신 공은 이후부터 단식(斷食)을 하셔야 하오이다. 원하신다면 바라는대로 술과 기름진 음식을 내올것이나 그 뒤의 일은 소인이 책임질수 없나이다’ 하니 윤성이 그제서야 두려워하며 동환이 차려주는 상을 받았다.
한달,두달 지나도 차도가 없자 윤성이 거듭 동환을 죽일 듯 위협하였고 그때마다 동환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기뜻을 따를 것을 권했다. 석달이 지나자 차도가 보이니 윤성은 시큰둥하게 ‘그만 되었으니 가보라’고만 말했다. 다만 그래도 양심은 있어 고마움을 알아 다만 자존심 때문에 은밀히 하인을 시켜 밤중에 동환의 집으로 보내 천금을 하사하였다.
공(公)이 점차 실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내의원 의관이 되고 종6품 주부(主簿)가 되었다. 이때 왕의 총비 현빈은 나이가 26세요 밑으로는 남동생이 넷 있는데 막내 승환은 이때 나이 겨우 7세였다. 이때 갑자기 배와 장이 아프며 좀처럼 음식을 먹지 못하니 이름난 의원을 불러도 좀처럼 효험이 없자 결국 궁으로 블러 동환에게 직접 치유케했다. 동환이 상태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장의 기운에 문제가 생겨 난 병이니 이부터 고쳐야합니다’ 하고는 우선 뽕나무껍질과 옥수수등을 달인물로 탕약을 지어 먹이게 했다. 현빈이 보고 해괴하여 말하기를 ‘병을 고치랬더니 이상한것만 먹이니 대체 무슨 까닭이냐 ? 아우의 병세만 점차 악화되고 있도다’ 하니 동환이 현빈을 진정시키며 말하기를 ‘원래 병이란 처음엔 순한약과 부드러운 음식으로 환자를 안정시키고 나중에 독한약과 강한 음식으로 병의 뿌리를 뽑는 법이니 원컨대 마마께서 조금만 기다려주소서’ 하였다. 현빈이 불같이 화를내며 ‘네 궤변을 도무지 참을수가 없도다. 내 막내아우의 병이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는데 그 무슨 헛소리란 말이냐 ?’ 하며 ‘저 요사스런 자의 혓바닥부터 뽑으라’며 실제 그럴 기세로 나오니 내관과 궁녀들이 다들 당황해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왕이 들어와 겨우 상황을 중재시키며 ‘혀의원의 의술이 남다르다 하니 알단 효험을 지켜봅시다’ 하며 총비를 달랬다.
한달이 지나도 좀처럼 차도가 없고 발열과 구토만 심해지니 현빈이 더욱 노했다. 마침내 승환이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레 바닥을 구를 지경이 되니 현빈이 더옥 노해 동환을 파직시키고 다른 의원을 들일 것을 청했다. 왕이 근심하는데 동환이 간곡히 간하기를 ‘지금 공자(公子)께선 병증이 낫는 과정에 있나이다. 몸속의 나쁜기운이 빠져나갈 때 있는 일시적인 증상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소서’ 울며 간하니 일단 임금이 공의 파직은 보류하였다. 두달,세달을 더 지켜보며 환자를 치료케하니 백일만에 마침내 승환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현빈이 감격하며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하며 무릎꿇고 큰절을 올렸다. 공이 오히려 당황하여 현빈앞에 맞절하고 말하기를 ‘지체높으신 마마께서 이 무슨 당치않으신 일이십니까 ? 모든 것은 그저 하늘의 보살핌일뿐입니다’ 하였다. 현빈이 거듭 감동하며 동환에게 큰 상을 내렸다.
원래 선대 의종(義宗)이 2남4녀중 둘째였는데 손위와 아래로 누이가 한명씩 있었다. 손윗누이가 출가가 늦어 두 딸을 낳았는데 오히려 선종보다 어렸다. 왕족이었으나 시집간 집안의 가세가 몰락하여 딸 하나를 멀리 입양보냈는데 그 뒤로도 연락은 주고받으니 성명을 바꾼뒤로도 대충 내막을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선종이 왕이된후 그 누이를 자주 궁으로 불러 친 동기간으로 지냈다. 다만 입양보낸 딸이라 ‘공주’호칭은 부를수가 없어 편의상 ‘귀선부인(歸宣婦人)’이란 칭호를 붙여 부르게 했다.
부인이 자주 궁에 들르던중 하루는 사가에서 갑자기 얼굴과 몸이 비틀려지는 병을 앓았다. 왕이 보고를 받고 깜짝놀라 부인을 궁으로 부르니 이미 얼굴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동환을 불러 상태를 살피게 하니 동환은 곧 삼남지방의 신비의 약초를 가져오게 하고 귀선을 따뜻한 방에 누인뒤 약초로 고약을 만들어 여인의 얼굴에 바르게했다. 다만 남녀가 유별하야 바르는 행위는 의녀(醫女)가 담당했다. 부인이 처음엔 동환의 지침대로 따랐으나 다만 섭생을 해야했기에 동환은 부인이 즐기던 면류(麵類)를 들지 못하게 했다. 부인이 처음엔 수긍했으나 병증이 쉬이 차도를 보이지 않으니 차츰 짜증을 냈다. 비밀리에라도 면류를 들게 했으나 나중에 동환에게 발각되어 공이 화를내어 말하기를 ‘부인께서 비록 귀하신 몸이고 소인이 천한 의원이라 하나 지금은 병을 치료받는 환자의 몸일뿐인데 어찌 의원의 권고를 이리도 무시하시나이까 ? 지금 면류를 멈추시고 탕약을 드시면 석달안에 병이 나을것이나 면류를 계속 즐길 경우 천년이 지나도 병이 완치되지 못할것이외다’ 하였다. 부인이 거듭 짜증을 내니 왕이 들어와 겨우 중재를 하여 부인이 그제서야 수긍을 하였다. 다만 부인의 차도가 쉬이 보이지 않아 6개월만에 비로소 사가로 돌아갈수 있었다. 사가로 돌아가며 부인 역시 동환에게 크게 사례를 하였다.
선종이 본래 정비로 황후 엄씨(嚴氏)가 있었고 후궁으로 총비인 현빈(賢嬪) 주씨(周氏), 신빈(新嬪) 이씨(李氏), 인빈(仁嬪) 지씨가 있었다. 이때 황후가 선종과의 사이에 소생이 없고 현빈이 아들 둘을 낳았으며 신빈은 2남2녀, 인빈은 딸 둘을 낳았다. 이에 황후가 자신만 소생이 없음을 근심하다 은밀히 동환을 불러 고민을 토로하였다. ‘내 음양지행(陰陽之行)의 도(道)에 따라 이 나라의 국모가 된지 어느덧 10년 세월이나 아직 후사가 없고 다만 금상께선 후궁과의 사이에 여러 아들이 있을뿐이다. 옛 구려이래로 화려(華麗)를 거쳐 금선(金鮮)에 이르기까지 적장손 승계원칙이 지켜졌으나 다만 적손이 없거나 왕재로 적절치 않을시엔 다른 왕자를 택하는 일이 천년세월을 이어져왔도다. 이미 금상께서 후궁에게 소생을 보셨으니 이로서 후계를 정한다면야 내가 달리 근심할일이 무에 있겠냐마는 다만 황실의 후사를 보아야하는 막중한 황후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대로 세상을 떠난다면 종묘사직은 물론 선대(先代)의 어른들께도 뵐 면목이 없겠도다. 다른 방도가 없겠는가 ?’ 대책을 의논하니 동환이 사뭇 답답한 듯 말하기를 ‘후사를 보는일은 존귀한 황실에서부터 양반과 일반 백성,천인에 이르기까지 오직 음양지도(陰陽之道)로만 이룰수 있는것인데 아무리 용한 의원이나 도력높은 무인(巫人),승려라 할지라도 어찌 다른 방도가 있을수 있으리이까 ?’ 하였다. 황후가 거듭 안타까와 묻기를 ‘듣기로 옛 비방서(祕方書)에는 자손은 물론 아들을 볼 수 있는 묘책까지 전해진다 들었는데 그대가 용한 의원으로 그런 이치를 모른단 말인가 ?’ 하니 동환이 거듭 손사래를 치며 답하기를 ‘황실어른들의 안위를 살피는 막중한 의무(醫務)가 있는 내의원 의관으로 어찌 그와같은 허황되고 잡스런 요설(妖說)을 국모(國母)께 전하리이까. 신의 팔다리를 잘라내는 형벌을 내리신다 한들 그와같은 요설을 국모께 권할 수는 없나이다’ 하였다. 엄씨가 거듭 탄식하여 묻기를 ‘정녕 다른 방도가 없단말인가 ?’ 하였다.
동환이 다시 말하기를 ‘황후께서 거듭 간곡히 권하시니 그 심중을 헤아리어 몇가지 방편을 써보긴 하겠으나 장담은 못하옵니다’ 하였다. 이후 솜씨좋은 의녀와 궁녀를 몇몇 차출하여 황후의 목욕재계를 매일 시키며 아침,저녁으로 매실과 오미자 달인물을 마시게 했다. 이후 묘시(卯時)와 유시(酉時)에 달을 바라보며 기체조를 시키니 황후의 건강은 이전과 달리 좋아졌으나 자손을 보는일은 생기지 않았다. 동환이 다시 머리를 좋아리며 ‘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여기까지옵니다. 더 이상은 해괴한 요설일 따름이라 황후께 권할수 없나이다’ 하였다. 황후가 거듭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또한 자연이치라면 내가 어찌 손쓸수 있겠는가 ? 천지신명의 복덕이 나를 가엽게 여기지 않으시나보다’ 하고 다만 동환의 그간 노고를 치하하는 소량의 선물을 전해준뒤 돌려보냈다.
금선이 예부터 천혜의 낙원이라 산천경개 좋은곳에 신비의 약초와 약재가 많이 났다. 옛 중원땅에도 좋은 약초는 많았으나 열국(列國)이 망한 이후로 그곳의 약재는 거의 쓰여지지 않았다. 북방은 땅이 척박해 오랑캐땅에 좋은 약초가 있을리 없어 늘상 반도로부터 수입하며 살았다. 동완이 어느덧 정3품 첨정(僉正)이 되어 사신단을 꾸려 거란,여진으로 떠났다. 준비한 약재만 천여종 수천관에 이르렀다. 거란왕을 알현하니 왕이 말하기를 ‘금선은 예부터 약초가 많이 나나 쓸만한 광물이 없고 우리는 예부터 광산에서 많은 광물을 채취하며 살아왔으나 약은 없도다. 이 천지이치를 어찌 생각하는가’ 하니 동환이 다만 미소지으며 ‘일개 미천한 의원신분으로서 어찌 천지이치를 다 깨달을수 있으리이까. 다만 북방의 백성들도 좋은 약으로 더 이상 질환이 없이 평온케 살기 원하나이다’ 하였다. 왕이 껄껄 웃으며 교역품을 받았다.
거란명장 엄대수(嚴大守)가 사람을 시켜 은밀히 동환에게 방문을 청해 동환이 가보니 엄대수가 말하는바가 이와같았다. ‘오래전부터 배와 가슴 신장에 큰 병이 생겨 다시는 싸움터에 나갈수 없을 것 같도다. 그대가 반도의 용한 명의라하니 한번 진상을 알고자 청하였도다’ 하였다. 동환이 상태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식습관이 잘못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종종 간이나 신장이 아픈일이 있나이다. 혹시 그와같이 하셨나이까 ?’ 하니 ‘거란이 아무리 좋은약이 없기로 어찌 명의도 없으리. 그만한 처방정도는 나도 알고 있도다. 예부터 용한 명의들이 식습관이 중하다 충고하여 나도 그와같이 따라왔는데 이제와 이와같은 병을 알으니 실로 이치를 알수 없도다’ 하였다. 동환이 ‘신이 처방을 해보곘나이다’ 하고 진맥을 해보고 탕약을 끓여주었다.
달개비와 오동나무열매등을 섞은 탕약을 장군을 먹이며 침을 놓으니 한달여만에 대수가 완쾌되어 동환에게 사례하였다. 또 한편으로 궁금하여 ‘그대가 보기에 내가 언제까지 살수 있을 것 같은가 ?’ 하니 ‘사람들이 예부터 의원과 점쟁이의 역할을 많이 혼동하는가 싶더니 북방의 이치도 크게 다르지 않나보옵니다. 소생은 어디까지나 병을 치료하는 의자(醫者)일뿐 어찌 사람의 수명을 점칠수 있겠나이까 ?’ 하였다. 대수가 거듭 안타까와 말하기를 ‘그저 내가 오래살수 있는지나 말해주시게’ 하니 동환이 답하기로 ‘듣기로 장군께서도 이미 수(壽)가 60에 이르셨다고 들었는데 무엇을 그리 더 아쉬워 하시나이까. 다만 식이요법을 잘 지키고 건강생활을 하면 그런대로 천수를 누릴수 있을것이라 사료되업니다’ 하였다. 대수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세를 풍미한 장수도 다 소용없구나. 늙고 병듬은 그 어떤 천하용장과 귀재도 당해낼수 없으니 유유창천의 도리릴 어쩌면 좋단말인가’ 동환이 안타까이 절하고 돌아갔다.
거란왕이 오래전부터 두통에 시달리고 근래에는 알 수 없는 작은 혹까지 나 동환을 오게하여 물었다. 동환이 답하기를 ‘두통은 탕약정도로 능히 고칠수 있사오나 혹의 일은 감당할수 있을지 모르곘나이다. 옛 의원의 문헌에 혹을 스스로 잘라내어 치료했다는 사례가 있사온데 제가 본뜰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답하기를 ‘생명에 큰 위해가 없다면 모든 것을 사해줄터이니 걱정마시고 할 수 있는 방도를 다해보시게’ 하여 탕약을 짓고 본격적인 시술에 들어갔다. 두통은 나았고 혹이 난 부분도 어느정도 치료가 되었으나 다만 자욱은 영원히 없애지 못하였다. 거란왕이 탄식하여 ‘이런 몰골로 중신들앞에 나서느니 차라리 태자에게 양위하는게 나을 것 같도다. 다만 내 애첩 보희(普姬)를 다시 보기 민망해질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하였다. 동환히 씁쓸히 궁을 나오며 말하기를 ‘세상사는 이치와 법도는 조선의 일과 북방 오랑캐의 일이 크게 다르지 않도다’ 하였다.
여진의 공주가 몹시 아프다 하여 동환이 찾아가보았다. 왕이 나이 50을 넘겨본 늦둥이 딸이라 그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한결 더했다. 동환이 진맥을 해보고 상태를 살펴본뒤 이해할수 없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공주께서 이제 열 살 남짓 어린나인데 증상은 부인병(婦人病)과 거의 비슷하니 연유를 알수 없나이다’ 하였다. 왕이 놀라서 묻기를 ‘공주의 나이 이제 겨우 열한살이고 아이를 낳기는커녕 혼사조차 치러본일이 없는데 그 무슨 해괴한 답인가’ 하니 동환이 당황한 가운데서도 거듭 침착해하며 답하기를 ‘일단 부인병과 비슷한 증상으로 처방을 해보곘나이다. 큰 기대는 마소서’ 하니 여진왕이 ‘시집도 안간 열 살 어린아이에게 부인병이라니 당치도 않도다. 혹여 그대가 명성과는 달리 돌팔이가 아닌가 ?’ 거듭 노하자 동환이 머리를 조아리며 ‘신은 의원으로서 할 도리를 다하고 제가 아는 의술의 범위안에서만 답할뿐 다른뜻이 없나이다’ 하였다. 여진왕이 목을베려 했으나 그 뒤에 다른 방도가 없을것임을 생각해서 목숨을 살려주고 치료를 맡겨보도록 했다. 한달이상이 지나도 더는 차도도 없고 효험이 없자 동환의 목을 베는 대신 금선이 보낸 교역품들을 사례없이 받는 것으로 대신하여 사신단을 돌려보냈다.
공(公)이 늘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조선반도가 원래 천혜의 낙원이라 예부터 신비로운 약초가 많이 났으나 다만 그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지 않아 대개 사람들은 물론 용한 의원들조차도 ’어디에 어느 병증에 좋은 어떤 약초가 난다더라‘는 식으로만 막연히 알뿐 그 구체적 진상을 알지 못하도다. 또한 구려(句麗)때부터 지금까지 의서가 발간된 사례가 없지 않았으나 어디엔 조선반도의 약초가 천여종 정도가 된다하고 어디엔 2천종 어디엔 4천종도 넘는다 쓰여있어 그 종류조차 일관되어있지 않으며 효능에서도 오류가 많고 심지어 상반(相反)되는 경우조차 있다. 예부터 의술을 펼치는 과정에 사고가 종종 있었는데 이 또한 근본을 따지면 이와 무관치 않도다. 내 이제 기회만 준다면 손수 전국 12도(道)를 돌아다니며 각지에서 나는 약초,약재와 그 효능을 정확히 알아내어 일목요연하게 기록하리라’ 하였다. 다만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하루는 임금께 직접 소(疏)를 올리니 임금이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다. 공이 3년간의 휴직계를 내고 마침내 긴 여행을 떠났다. 또 한편으로 말하기를 ‘지금까진 약초꾼들이 산을 돌아다니며 손수 자연산을 캤으나 이제 재배법도 가르쳐 민가에서 손수 약초를 기를수 있도록 하는것도 좋겠다’ 하였다.
이덕순(李德淳) 장군이 이때 전라 좌수사로 있었다. 항상 왜적(倭敵)의 침탈을 우려하여 비밀함선을 제작하여 이에 대비토록 하고자했다. 민간인의 출입을 금한 지역에서 그와같은 작업을 시작했는데 공이 산속을 헤매며 돌아다니다 뜻하지않게 전라 먼 바닷가까지 가게되ᄋᅠᆻ다. 뜻하지 않게 장군이 설정한 금지구역내로 깊숙이 들어가니 파수를 보는 병사에게 곧 붙잡히고 말았다. 신분을 물으니 공이 정확히 밝히기가 곤란하여 ‘인근 지역 의원의 명을 받아 약초를 캐는 약초꾼’이라 둘러댔다. 의원의 이름을 들어보니 못들어본 이름이라 곧 거짓이 탄로나 장군에게 넘겨졌고 장군은 왜적의 첩자 가능성을 의심하여 참수하려 하였다. 이에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아뢰었다. ‘신은 실은 내의원의 의관으로 조선12도 약초,약재의 효능을 보다 정확히 알아내어 더 많은 병자를 살리고자 긴 여행을 떠난 것으로 그 과정에서 뜻밖에 장군의 금지구역에 든것일뿐 다른뜻이 없었나이다. 내의원의 의관을 어찌 왜인첩자라 하시나이까. 실로 가당치 않은 일이오이다’ 하였다. 장군이 처음에 믿지 않아 말하기를 ‘내 비록 외직(外職)에 오래 있었다하나 조정안의 상황을 아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의원의 의관들은 본래 백성들의 안위보단 자신들의 출세영달에 뜻을 둔자가 더 많다고 들었다. 헌데 그런자가 오히려 자신의 직위까지 내던지고 그런 기약없는 여행을 떠난단 말이냐 ? 더더욱 믿을수 없다’ 하였다.
그리고 ‘네 정녕 의관이 맞다면 직접 시험해보리라’ 하며 지역의 잘 알려져 있거나 알려져있지 않은 약재 열가지를 내놓으니 공이 반은 맞추고 반은 틀렸다. 장군이 불같이 화를내며 ‘내의원에서 그런 높은 직위에까지 있었다는자가 이만한 기본적인 약재조차 모른단말이냐 ? 감히 천한 왜적의 첩자가 조선의 대장군을 능멸하려 들다니. 도저히 용서할수 없도다’ 다시 끌어내 참수하려 하였다. 공이 다시 무릎끓고 울며 애원하기를 ‘신이 약재의 효능을 정확히 알고자 긴 여행을 떠난 까닭이 실은 여기 있나이다. 말씀드렸다시피 조선땅에 원래 약재는 많으나 그 정확한 효능이 제대로 알려져있지 않고 지역에 따라서도 편차가 많기 때문이다. 신이 고향이 영남(嶺南)출신이라 영남의 약재는 잘 알고 있고 호남의 약재도 선친때부터 공부한바가 없지는 않아 전혀 모르지는 않사오나 그런 소인의 지식수준도 방금 보신바와 같나이다. 바로 이런일이 없이하기 위해 보다 정확한 약재의 효능을 알아내기 위하 떠난몸을 여전히 왜적이라 의심하시다니 실로 억울하기 그지없나이다’ 하였다.
장군이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하여 두 번째 시험을 보려 하였다. 세명의 사람을 들게 하였는데 일단 느낌이 병자는 아니었다. 장군이 문제를 내기를 ‘하나는 조선인이요 하나는 왜인(倭人) 또 하나는 중원인(中原人)이니 맞춰보도록 하라’ 하였는데 공이 모두 맞추지 않았다. 장군이 거듭 격노하여 말하게를 ‘네 이놈 !!! 내 비록 의술에 대해 아는바가 전혀 없는 무장(武將)이라 하나 의서(醫書)의 기본원리가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체질(體質)에 있다는 이야기 정도는 어렴풋이 들었다. 사람의 체질에 따라 약을 써서 병을 치유하는게 의원의 본분인대 조선인과 왜인,중국인도 구분 못하는자가 어찌 병자(病者)를 치유한단말이냐. 한낱 미개한 왜적 첩자가 거듭 나를 속였으니 더는 용서 못하겠도다. 당장 끌어내 목을 베어라 !!’ 하니 다시 공이 억울하여 무릎꿇고 말하기를 ‘신이 내의원 첨정으로 여러차례 북방의 국가들은 방문한적 있으나 중원은 천년전에 망한 나라라 조선인이 갈알이 없고, 왜인은 예부터 풍속이 미개하고 천하여 교류가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헌데 어찌 내의원 의관이 중원이나 왜인을 접할일이 있겠나이까. 원컨대 소인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오소서. 소인이 어느덧 20년 세월 내의원 의관으로 복무하면서 그 전문병이 부인병(婦人病)과 소아병(小兒病)으로 이미 그런 연고로 왕실의 종친을 치유한일도 몇차례 있나이다. 원컨대 지역의 사소한 부인이나 소아 병자(病子) 한두명만 무작위로 소인에게 보여주시면 바로 치유해 보이곘나이다. 이미 왕실 종친은 물로 북방의 임금과 공주까지 치유한 제가 한낱 평범한 백성의 사소한 병증을 치유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 있겠사옵니까. 원컨대 의슬로써 직접 증명해 보이겠나이다.’ 하였다.
장군이 곧 부장(副將)을 시켜 고을내에 가벼은 병증이 있는 여인과 아이를 데려오게 했는데 얼마 안있어 부장이 각기 부인 2명과 소아 2명을 데리고 왔다. 공이 진맥을 해보고 말하기를 ‘부인들의 경우 여인들이 간혹 겪는 사소한 병증으로 크게 염려할바가 못됩니다’ 하고는 이내 곧 나물류와 우엉뿌리,부평초등을 섞은 환약을 지어 먹이니 얼마안가 나았다. 아이들의 경우도 ‘아이들이 종종 겪는 천식증세일뿐 크게 걱정할일이 아닙니다’ 하고는 도라지와 오미자 달인물을 시시때때로 먹이니 2-3일 정도 좀 심한 구토증세를 보이다 이내 곧 차도를 보였다. 장군이 그제서야 약간의 술과 음식을 공에게 내어주며 ‘내가 뭔가 오해를 한것이니 사죄드리네. 용서하시게’ 하였다. 허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듯 ‘내가 나라의 변방을 책임지는 무인(武人)의 몸으로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는 맡은바 소임을 다하다보니 과도한 경계를 한것일뿐 너무 심려치 마시게’ 하고는 또 한편으로 말하기를 ‘내가 무장의 몸으로 동서고금의 서책을 읽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나 세상에는 의(義)를 지나치게 발휘하려다 오히려 화(禍)를 입는 경우도 많고 특히 이 나라는 옛 구려때부터 작금의 금선에 이르기까지 재능있는자를 시기,질투로 모함해 내친경우가 많으니 그대도 몸조심하시게’ 하였다. 공이 대략 장군의 뜻을 수긍하는 것 같았다. 장군이 또 한편으로 말하기를 ‘나는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장수의 몸이요 그대는 병마(病魔)로부터 백성과 왕실을 보호하는 의인(醫人)의 몸이니 어찌 맡은바 소임이 같다 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하며 거듭 공을 격려하였다. - 일설(一說)에 이르기를 나중에 장군이 모함을 받아 귀양길에 오르게 되는데 도중에 다시 공을 만난일이 있다고 한다. 그때 말을 전하기를 ‘이 나라는 재능있는 인재를 너무 많이 내치고 있어. 그대도 언제 화를 입을지 모르니 너무 매사에 과도한 열정은 드러내지말고 몸조심하시게’ 당부헀다는 말이 있다.
공이 문경-상주 지방에 이르렀을때의 일이다. 경북(慶北)지역이 원래 산세가 깊고 다양한 종류의 약초,약재가 많이 난다고 해서 공이 직접 더 깊고 은밀한 지역까지 가서 약초를 캐고 세밀한 연구와 재배방법을 알아보려 하였다. 헌데 이때 임길홍(林吉洪)이란 이가 있어 300의 무리를 이끌고 도적이 되어 자신들만의 독자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1년여전부터 진압하고자 헀으나 쉽지 않았다. 공이 이를 모르는바 아니나 오직 약초 연구에만 집중하다보니 그만 임의 무리의 산채까지 들어가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함정을 판 무리들이 곧 공을 끌어내어 두령(頭領)에게 데려갔다. 공이 이전에 어설프게 약초꾼이라 신분을 둘러대다 낭패를 본 일이 있어 차라리 ‘내의원 의관인데 조정의 명을 받고 백성들을 치유할 보다 귀중한 약재를 알아보기 위한 여행중이었소이다’ 하며 자신을 해치면 조정에 반역하는 것이 되니 이만 풀어달라 하였다. 무리가 더 어이없다는 듯 껄껄대며 ‘우리가 금선의 폭군과 부패한 양반과 탐관오리의 전횡에 분개해 일어난 무리이거늘 너는 그런 금선조정을 돕는 의원이라고 하니 너도 그런 폭군과 탐관오리와 한패거리가 아니더냐. 씹어먹어 죽여도 시원찮을자로다’ 하였다. 공이 더욱 당황하여 ‘내가 알기로 금상께서 백성들을 그리 핍박한 것이 별로 없고 또 나라에 부패한 양반과 탐관오리가 없다고 할수 없으나 이전의 일에 비해 지금은 그리 심하지 않은 것으로 아오. 그게 무슨말이오’ 하며 더욱 납득도 수긍도 하지 않으려 들었다. 부두령 백반(白盤)이란자가 좀 논리적으로 말을 하는자였는데 말하기를 ‘옛 화려시절엔 그래도 천인(賤人)이라도 실력만 있으면 무장(武將)도 될 수 있고 의원(醫員)도 될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양반아니면 출세도 못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어찌 지금이 이전시절보다 낫다고 할수 있겠느냐 ? 200년을 기다렸는데 이모양이니 더는 기대할게 없도다’ 하였다. 공이 더욱 놀라서 ‘그대들은 정녕 단순한 도적이 아닌 조정에 반역하려는것인가 ?’ 하였다.
부두령과 책사로 보이는이 일부가 자기네들끼리 뭔가 수군거리며 의눈하는 듯 하더니 옥에 가둔 공을 다시 끌어내 두령에게 데려갔다. 두령이 주의를 물리치고 공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내가 실은 이전에 없던 병증이 생겨 그 정도가 심해져서 한번쯤 용한 의원의 도움을 받고 싶었소. 한번만 진맥을 해주시오’ 하고는 ‘허나 만약 차도가 없을 경우 그대의 목을 베어버릴 생각이니 그리 아시오’ 하였다. 일단 공이 침착하게 진맥을 해보고 상태를 살펴보고는 ‘이 병은 예전에 알지 못하던 병으로 아무래도 간과 위에 심각한 마군(魔軍)이 들어온 것 같소이다. 굳이 옛 문헌을 참조하면 와송(瓦松)등을 달여먹인 한약이 약간의 차도가 있다고 들었으나 역시 장담할 수는 없소’ 하였다. 두령이 말하기를 ‘내 원래 이 병증이 만약 치유되지 않거든 죽기전에 조선에서 가장 부패한 양반 한놈을 잡아 그 간과 심장이라도 씹어 이 울분을 풀고자 하였다. 허나 마음만 그럴뿐 쉽지 않으니 대신 이 병증이 치유되지 않을 경우 그대를 부패한 양반놈의 대표이자 본보기로 삼을테니 그리알라’ 하였다. 와송등을 달여 적극 치료해보려 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공이 ‘이렇게 죽는것인가’ 하고 절망하였다. 다음날이 죽는날인줄 알고 있었는데 뜻밖에 옥문이 열려있었다. 감시하는이도 없어 능히 도망칠수도 있었으나 이미 체념한 상태라 공이 도망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헌데 한참을 있으니 두령이 직접 와서 자신의 방으로 공을 데려갔다. 무릎꿇고 큰절을 올린뒤 말하기를 ‘내 원래 부패한 양반의 간과 심장을 씹고 죽으로 하였으나 그대는 보아하니 사람을 살리려는 지극정성이 담긴 의원인듯하니 어찌 차마 그리할수 있겠소이가. 또 인명재천(人命在天)이란 말도 있으니 내가 이 생에 지은 업보가 많아 하늘이 내게 더 이상의 수명을 허(許)하지 않으심을 어찌하리오. 그대를 특별히 살려줄터이니 부디 높으신 의술을 발휘하는데 정성을 게을리하지 마시어 많은 백성을 살리도록 하시오’ 하고는 돌려보냈다. 공이 이로서 살아날 수 있었다.
공(公)이 천안에 이르렀을 때 이런일이 있었다. 원래 공이 각지(各地)를 돌아다니며 지역의 유명한 약재를 알아보려고 할 때 보통은 주막같은데 들러 술이라도 나누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보통 자신의 신분을 ‘원래 몰락한 양반가의 자제로 과거응시엔 자신이 없어 의생(醫生) 시험이나 보고자 한다’며 그런식으로 대화를 나누며 약재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하루는 천안의 한 이름난 주막에서도 밤늦게까지 그렇게 술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복면에 검은옷을 한 괴한이 나타나 칼로 공을 찔렀다. 마침 주막에 힘쓰는 장정이 두어명 있어서 괴한은 멀리 도망 못가고 바로 붙잡힐수 있었다. 잡고보니 생각보다 키가 왜소해 보였는데 분장을 벗겨보니 놀랍게도 나이어린 소녀였다. 주막에선 소녀를 바로 관아로 넘기러 하였으나 공이 워낙 기이한 일로 여겼는지 사연이나 들어보곘다며 잠시 별도의 방에서 대화를 나누어보았다.
소녀의 이름은 육완순(陸婉順)이라 하고 이때 나이 17세였는데 사연인즉슨 이와 같았다. 본래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남동생 둘과 함께 살았다. 헌데 아버지가 병을 앓았는데 한 돌팔이 의원이 시침을 잘못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또 얼마후엔 어떤 이름없는 의원이 아픈 동생의 진맥을 잘못하여 두 동생마저 모두 잃고 말았다. 이때부터 의원들을 증오하기 시작하여 ‘못된 돌팔이 의원 99놈만 잡아먹고 지옥으로 떨어지려 했는데 오늘이 영광스러운 첫 거사일이었는데 개시(開始)부터 실패하였으니 더 할말이 없다. 관아로 넘겨 죽이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완순을 딱하게 바라보다 ‘그 마음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바로 내가 그런 돌팔이 의원이나 질못된 진맥,시침을 없이하고자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일세’ 하며 자신의 신분과 전국을 돌아다니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완순이 많이 놀란 듯 하였으나 다만 의원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거두진 못한듯했다. 다만 공이 완순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래도 소싯적에 관상을 좀 배워서 아는데 낭자의 상(相)이 범상치가 않소이다. 이생에서 성품을 잘 다스리고 온순한 일을 많이하면 다음생에 다른 세상에선 이 나라를 위해 더 큰 공훈을 세워 역사에 길이남는 그런 인재가 될수도 있을것이오’ 하였다. 완순이 의아해서 ‘의원이 관상도 본단말이오 ?’ 하니 ‘소싯적 우연한 인연으로 관상가와도 인연이 있어 잡기(雜技)삼아 배워본것뿐 의술과는 관련이 없다’ 답하였다. 공이 완순에게 약간의 금전을 챙겨주고 고을을 떠났다.
공이 북방(北方)에 갔을 때 이런말을 했다. ‘금선은 옛 구려시절부터 의녀제도를 두어 특히 여인들의 치료나 진맥에는 이들이 주도하게 하여 그간 많은 역할을 하였나이다. 허나 북방에는 이와같은 제도가 없어 여인의 치료,진맥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나이다. 원컨대 저희 금선의 의녀제도를 받아주시면 제가 직접 주도하여 ’의녀학교(醫女學校)‘를 세워보도록 하겠나이다’ 하였다. 거란과 여진왕이 모두 옳다여겨 3년정도의 수련기간을 거쳐 의녀가 되는 기관을 설치하고 주로 신분이 낮은집안 여인을 중심으로 의녀를 선발하여 가르쳤다. 이 제도가 효과가 있자 이후 흉노도 이를 받아들였다.
공이 또한 때론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 천하에 병자를 치료하는데는 오직 침과 뜸 그리고 탕약과 탕제만을 쓰고 있는데 몸안의 병증을 온전히 알아내는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도다. 또한 침과뜸을 놓을 때 환자가 아픔을 종종 느끼고 특히 어린아이와 여인,노인이 더하니 그 아픔을 줄일방도가 없도다. 듣기로 옛 중원에는 화타와 편작,창공같은 이들이 있어 병자의 몸을 들여다보고 환자를 일시적으로 재워 시술하는 방도도 있었다 하나 중원이 이미 열국시절에 패망한후 그때의 자취를 찾아볼수 없으니 실로 안타깝도다. 중원의 열국이 패망한게 이미 천년전의 일이고 화타와 편작이 모두 그 이전시대 사람이거늘 어찌 이제와 그 자취를 찾을수 있단 말인가. 원컨대 누군가 내게 칠천만금만 준다면 내가 중원땅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옛 화타와 편작,창공의 의서를 찾아내 환자의 몸을 들여다봐 병증을 치료할 방도를 알아오곘는데 그 길이 쉽지 않도다. 칠천만금이란 여느 대감댁 아흔아홉칸 저택을 사고도 남는돈으니 누가 그런 큰 돈을 내게 줄수 있겠는가. 실로 안타깝도다’ 하였다.
공이 옛 고을 의원이 심부름꾼 시절 어미의 병을 고쳐준 인연으로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있는 금옥이란 여인이 있는데 하루는 공의 시름을 알고 찾아와서는 이와같이 말했다. ‘명공(明公)꼐선 어찌 그와같은 근심을 하시나이까. 저희 선친께 아들은 없고 오직 딸이 저 하나만 있어 이미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뒤로 선친의 재산이 온전히 제것이 되었나이다. 부친께서 비록 부패한 관리는 아니었으나 은밀히 모은 재산이 없지는 않아 그것을 도합하면 이미 칠천만금이 넘나이다. 제가 이미 온전한 벼슬가진이와 혼인하여 자손도 있고 어느덧 나이도 들었거늘 제게 칠천만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공께서 정히 원하신다면 아버님께서 남기신 재산을 모두 넘겨드릴테니 어서 속히 중원으로 떠나시어 화타와 편작의 비기(秘記)를 찾아오소서’ 하였다. 허나 공이 차마 면구스러워 받지는 못하였다.
공이 의원일에 전념하느라 혼사가 늦어졌다. 원래 고향에서 현감 부인을 치료해준 인연으로 일시적으로 그 딸 금옥과 인연을 맺었으나 신분의 차이로 더 이상 가까워지진 못했다. 스승격이었던 백승국은 친척어른이 양녀로 거둬 동생처럼 여겼던 의녀 예진과의 혼사를 원했으나 공이 예진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후 내의원 의관을 하던중 역관벼슬을 하던 길승수란이와 인연이 맺어져 그 딸 은미(恩美)와 혼사를 치루었다. 은미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다.
공이 반도의 약재들을 보다 자세히 알아보고자 종종 내의원에 휴직계를 내고 12도를 돌아다녔는데 그 횟수가 대략 4-5회에 도합하면 그 시간이 10년에 달했다. 한번 여행을 떠나면 그 시간이 평균 2-3년 정도가 되었다. 마지막 원행(遠行)길에 이를때는 나이 70에 다다랐는데, 어의를 잠시 다시 쉬고 12도를 돌아다닐 때 선종의 아들 혜종이 승하하였다. 선종이 25년을 재위하고 그 아들 혜종이 21년을 즉위하였는데 혜종은 바로 선종의 총비였던 현빈 주씨의 소생이다. 혜종이 모후시절의 일로 누구보다도 각별히 공을 아꼈는데 공교롭게도 어의의 몸으로 상감의 병환중에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임종을 지키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
혜종이 승하하고 그 이복동생 태(泰)가 즉위하여 인종(仁宗)이 되었는데, 이때 동인에서 공을 탄핵하기를 ‘동환이 어의라는 막중한 임무가 있음에도 사사로이 자리를 비워 상감의 승하를 방치하였의 그 죄 실로 역모에 준하여 다스리고도 남음이 있나이다. 마땅히 동환을 벌하소서.’하였고 서인은 반박하여 말하기를 ‘동환이 비록 공교롭게도 잠시 어의자리를 비웠을 때 대행대왕이 승하한 과오는 있으나 이는 사사로운 여행이 아닌 전국 12도의 다양한 약초와 약재의 효능을 알아내 만백성의 병환과 건강을 살피고자 함에 있었으니 이 역시 의원된이의 막중한 책무라 아니하리까. 또한 자고로 인명은 재천이니 이런일로 한낱 의원을 죄줌은 이치에도 마땅치 않으니 마땅히 폐하께선 통촉하여 주시오소서’ 하였다. 논박이 거듭되자 인종이 일시적으로 동인의 손을 들어주어 동환의 파직을 명하고 북청으로 귀양보냈다. 공의 고향이 영남이고 북청은 함길도니 정 반대지역으로 보낸 것이다. 다만 인명은 재천이라 이런일로 역모의 죄까지 물음은 온당치 않으니 아들둘은 연좌하지 않고 다만 도성에서 추방토록 하니 동환의 두 아들은 경기 남부에서 약재상을 하며 생령과 자손을 보존할수 있었다.
금선이 예부터 귀양처에서 죄인의 살림을 돌봐주며 감시를 겸하는 직책을 두었는데 이를 ‘보수주인(保守主人)’이라 했다. 보통은 평민중에 여건이나 시간이 되는 이들에게 임무를 맡겼는데 이때 지영(智影)이란 여인이 고을에 있었다. 나이 19세로 수년전 부모를 잃고 혼자 동생 둘을 돌봐야하는 몸이었다. 이에 고을 현감이 불러서 일정한 급여를 주는 조건으로 동환의 보수주인일을 맡겼다.
동환이 원래 금선의 이와같은 제도를 아는지라 자기 거처 살림을 돌봐주는 지영을 하루는 불러 말했다. ‘너의 처지를 이해하나 나는 보다시피 죄인된 몸이고 무엇보다 한낱 의원의 몸으로 파당을 조직하여 다른일을 도모할 이유도 없다. 도망갈 이유도 외지인을 만날 이유도 없으니 너무 필요이상의 근심은 말라’ 하였다. 지영이 민망하고도 죄송하여 차마 더 이상 무슨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동환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다만 내가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간중간 휴직을 하고 전국 12도를 돌아다니면서 알아낸 약초와 약재의 효능을 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구나. 네가 내 일을 도와줄수 있겠느냐 ?’ 하니 지영이 고민하다 응하기로 했다. 원래 공이 따로 적어놓은 원고가 사가(私家)에 있었으나 귀양을 떠나면서 그것을 챙겨올수는 없었다. 지영이 고민하다 막내동생을 은밀히 떠돌이 광대로 분장시켜 동환의 집으로 보내 원고를 가져오도록 했다.
공이 귀양지에서 3년동안 머물며 의서(醫書) 집필에만 전념하다 세상을 떠나니 나이 72세다. 그 두 아들이 부친의 부음 소식을 듣고 귀양처에 찾아오니 지영이 울며 두 아들을 맞았다. 그간의 곡절을 공의 아들들에게 전하니 공의 아들들이 감읍하여 절하고 그녀를 ‘수전부인(守全婦人)’으로 봉하게 하고 사후(死後)에 정부인 길씨(吉氏)곁에 별도의 무덤터를 만들어주아 함께 제사지낼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