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고스톱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래서 세 사람만 모이면 바로 패를 돌리고요, 손님이 왔을 때도 분위기가 좀 어색하다 싶으면 바로 손님 앞에 카키색 군 담요를 깝니다. 고스톱의 매력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형편없는 패를 손에 쥐고 있어도 이길 수 있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패를 가져도 고박당하는 것이 고스톱의 매력이죠. 그리고 고스톱 용어도 입에 쫙쫙 달라붙죠! 용어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정말 재밌는 용어가 많습니다. 쪽, 뻑, 쌌다, 나가리 등등······.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고도리’ 말이에요. 새를 말하는 건 알겠는데 화투에 새가 한두 마리가 아니잖아요? 고도리는 무슨 새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고도리는 무슨 새예요?”
‘고도리’에 대해 쓰려고 예문을 찾다가 한 누리꾼의 글이 눈에 확 들어왔다. “고도리는 무슨 새예요?”라는 질문도 귀엽고 애교스럽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점(이를 재미있다고 말해야 할지)은 이 집 식구 셋만 모이면 고도리를 친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고도리의 매력을 말한 부분이다. “고스톱의 매력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형편없는 패를 손에 쥐고 있어도 이길 수 있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패를 가져도 고박당하는 것이 고스톱의 매력이죠.” 이쯤 되면 한국 가정의 문화는 대충 파악된 셈이다. 더군다나 이 누리꾼의 집에 누군가 놀러 왔는데 분위기가 어색하면 카키색 담요를 깐다는 말,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자, 그럼 한국인 셋만 모이면 열광하는 일본문화 고도리의 정체를 보자. 먼저 한국 위키피디아는 고도리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열 끗 중에서 새를 다섯 마리 모으면 고도리라고 하며 5점으로 계산한다.” 그렇다. 고도리는 다섯 마리 새(五鳥)의 일본어로, ‘도리(とり, 鳥)’는 새이며 숫자 5는 ‘고(ご, 五)’이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고도리 친다’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요즘은 ‘고스톱’이란 말을 더 많이 쓴다. ‘go’할 것이냐 ‘stop’할 것이냐를 묻기 때문일까? 고도리나 고스톱이나 일본 화투로 노는 것은 매한가지다. 커피나 피자처럼 한번 맛들이면 안 먹고는 못 배기는 게 있는데 이를 사람들은 ‘인이 박혔다’라고 한다. 고스톱도 한국인에게 확실히 인이 박힌 오락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
고스톱을 치는 데 필요한 화투는 대관절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일까? 푸른솔겨레연구소 김영조 소장의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1595〉의 설명을 보자.
“조선 후기 학자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의 병오년(1906)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화투국(花鬪局) 얘기가 나옵니다. ‘예전부터 서울과 시골 여러 곳에는 투전(鬪錢)과 골패(骨牌) 같은 도박이 있었는데 갑오년(1894) 이후 도박은 저절로 사라졌지만 요사이 왜놈들이 서울과 각 항구에 화투국을 설치했다. 돈을 놓고 도박하여 한 판에 1만 전도 던지니 아둔한 양반이나 못난 장사꾼들 중 파산하는 자들이 잇달았다.’ 조선 말기 일제는 조선 침략 과정에서 조선에 화투를 적극적으로 퍼뜨린 듯합니다. 그 뒤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 쪽 인물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을사오적(乙巳五賊), 곧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은 화투를 즐겼다고 하지요. 지금 한국이 화투공화국이 된 것은 다시 생각해볼 일입니다.”
1905년 이완용 등이 화투를 친 것으로 보아 화투 유입은 일제강점기로 봐야 할 것이다. 나라 말아먹은 것도 분통 터지는데 뭐가 좋다고 화투국까지 만들었는지 비난받을 일만 골라서 하는 게 곱게 봐줄 수 없다.
일설에는 일본에 살던 동포가 다니러 온 한국인이 귀국할 때 화투 몇 목씩 주어 보냈다는 증언도 있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표 나지 않게 은밀히 추진한 것 가운데 하나가 화투 보급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들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집안 식구들 세 명만 모이면 고스톱을 치는 게 자랑거리인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슬프다.
기왕 화투 이야기가 나왔으니 ‘김덕수의 파워칼럼’ 〈화투는 일본문화의 축소판〉에서 정리하고 있는 월별 화투 패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자.
• 1월 송학
해는 새해 일출을, 학은 장수와 가족의 건강에 대한 염원을 나타낸다. 소나무는 정초에 집 앞 대문에 세워두는 장식물로 이를 가도마츠[門松]라 한다. 이는 일본의 대표적 세시풍속으로 조상신과 복을 맞아들이기 위한 뜻이 있으며 소나무처럼 늘 푸르고 번성하라는 뜻이 있다.
• 2월 매조
2월에 해당하는 매조에는 꾀꼬리와 매화가 그려져 있다. 매화 축제는 2월에 시작되는데 벚꽃 못지않게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꽃으로 문학작품에 단골로 나오기도 한다.
• 3월 벚꽃
일본의 벚꽃 축제는 3월 최고 절정에 이른다. 그래서 3월의 화투 문양은 온통 벚꽃으로 가득 차 있다. 일본인들은 벤토(도시락)를 싸가지고 벚꽃 밑에 자리를 펴고 먹고 마심으로써 가족애와 동료애를 다진다.
• 4월 흑싸리
4월 문양은 흑싸리가 아니라 등나무 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흑싸리로 착각하고 있다. 흑싸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빗자루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되는 싸리나무는 녹색이다. 가을철에 이것을 베어 햇볕에다 말리면 갈색으로 변한다. 4월은 일본에서 등나무 꽃 축제가 열리는 계절로, 등나무는 일본 전통시의 시어로 쓰인다.
• 5월 난초
5월 문양은 난이 아니라 붓꽃이다. 난은 습지와는 상극 관계이며 붓꽃은 보라색 꽃이 피는 습지의 관상식물이다. T자 모양의 막대는 붓꽃을 구경하기 위해 정원 내 습지에다 만들어놓은 산책용 목재 다리이며 세 개의 작은 막대기는 목재 다리를 지지하는 버팀목이다. 다리 끝에는 붓꽃을 감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삼광에서와 마찬가지로 화투 하단의 보이지 않는 1인치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다.
• 6월 모란
6월 문양은 모란이다. 모란은 고귀한 이미지의 꽃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가문을 나타내는 문양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일본화에는 모란과 나비가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화에선 모란과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 것이 오래된 관례다. 당 태종이 신라의 선덕여왕에게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가 엿보인다.
• 7월 홍싸리
7월 문양은 싸리나무다. 싸리나무는 녹색이다. 그러나 이 문양은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제작자의 창작인 듯하다. 여기에 멧돼지가 나오는 이유는 근대 일본에서 성행했던 멧돼지 사냥철이 7월이었기 때문이다.
• 8월 공산
8월 문양엔 산, 보름달, 기러기 세 마리가 등장한다. 이는 8월이 일본에서 ‘오츠키미(달맞이)’의 계절인 동시에 철새인 기러기가 대이동을 시작하는 시기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문화적 암호다.
• 9월 국화
고스톱꾼들은 9월 화투를 유난히 좋아한다. 9월은 일본에서 국화 축제가 열리는 대표적인 계절이다. 그 쌍피에는 ‘壽(목숨 수)’ 자가 새겨진 술잔이 등장한다. 이는 9세기경인 헤이안시대부터 유래한 ‘9월 9일에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꽃을 덮은 비단옷으로 몸을 씻으면 무병장수한다’는 일본의 전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 10월 단풍
일본에서 10월은 전통적으로 단풍놀이의 계절인 동시에 본격적인 사슴 사냥철이다. 수사슴과 단풍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계절의 특성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 11월 오동
오동은 가장 각광받는 화투 패다. 속칭 ‘똥광’으로 불리는 오동의 광은 광으로도 쓸 만하고, 피 역시 오동만이 유일하게 세 장이다. 오동의 광에는 닭 모가지 모양의 조류와 싹 같은 것이 등장한다. 닭 모가지 형상을 하고 있는 조류는 평범한 새가 아니다.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품격과 지위를 상징하는 봉황새의 머리다. 검은색의 싹은 오동잎이다. 오동잎 역시 일왕보다도 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막부의 쇼군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나 국공립학교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 화폐 500엔 주화에도 오동잎이 도안으로 들어가 있을 정도다.
• 12월 비
절기상으로 12월은 추운 겨울이다. 그런데도 비광을 살펴보면 낯선 선비 한 명이 양산을 받쳐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수양버들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고 그 옆에는 개구리 한 마리가 앞다리를 들며 일어서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어야 할 개구리가 왜 12월에 등장했을까. 이는 일본의 ‘오노의 전설’을 묘사한 것이다. 갓 쓴 선비는 ‘오노노도후(小野道風, 894~967)’라는 일본의 귀족으로서 약 10세기경에 활약했던 당대 최고의 서예가다. 그는 글씨에 몰두하다 싫증이 나자 머나먼 방랑길을 떠난다. 이 과정에서 오노는 수양버들에 기어오르려고 노력하는 개구리의 모습을 보고 “미물인 저 개구리도 저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여기서 포기해서 되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은 뒤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가 붓글씨 공부에 정진했다고 한다. 한국 화투는 일본 화투에 나오는 선비의 갓 모양만 일부 변형했다.
화투패 12장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이보다 자세히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더 열광하는 화투는 언제 일본에 들어온 것일까? 매화, 벚꽃, 싸리꽃, 난초, 모란, 국화 등 왜 화투에는 유달리 꽃들이 많이 나오는 것일까? 그 해답은 1,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다. 8세기에 만들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집인 《만요슈[万葉集]》에는 78종의 식물과 79종의 나무 이름이 등장한다. 또한 일본이 세계문학사에서 자랑으로 여기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각 장 제목 대다수가 식물 이름이며 헤이안시대 수필문학의 백미라는 《마쿠라노소우시[枕草子]》에도 40여 종이나 되는 풀 이름이 나오는 등 일본인들은 고대로부터 풀과 꽃에 대한 남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전통은 일본말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 정초에 먹는 나나구사가유[七草粥]라는 죽이 있으며 흔히 민초라고 해서 백성을 일컫는 다미쿠사[民草], 역시 억조창생의 백성을 뜻하는 아오히토구사[靑人草], 신랑과 신부를 뜻하는 하나무코[花壻], 하나요메[花嫁] 등에도 모두 풀과 꽃의 이름이 들어간다.
화투의 일본말은 하나후다[花札]이며 여기에도 花(꽃 화) 자가 들어 있다. 처음으로 일본에 화투가 들어온 것은 16세기. 포르투갈인 선교사가 기독교를 전하면서 총, 카스텔라와 함께 ‘가르타(carta)’라는 것을 들여왔다. 포르투갈 말로 카드게임을 가르타라고 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1573년에는 이미 일본에서 가르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서민들의 카드놀이를 금지해버린다. 아마도 가는 곳마다 펼치고 앉아 본업도 잊은 채 가르타에 빠져 있는 백성들이 보기 싫어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미 카드놀이에 재미 들린 백성들은 막부가 금지하는 가르타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막부 몰래 풀과 꽃으로 디자인한 오늘날의 화투를 만들어 음지에서 즐긴다. 이름도 가르타에서 하나후다로 바꿨다. 당시 화투는 지방마다 디자인이 가지각색이었으나 메이지시대 때에 하치하치하나[八八花]라는 이름으로 화투 모양이 통일되었다. 700년간의 무신정권을 청산하고 문신정치를 부활시킨 메이지 정부는 화투 금지를 풀어주는 대신 화투 만드는 공장에 세금 폭탄을 때려서 하나둘 문을 닫게 만들었고 화투놀이도 그와 함께 사그라지고 말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이나 메이지시대나 이른바 권력층 사람들은 백성들이 생산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고 허구한 날 화투 패를 들고 날을 지새우는 꼴을 보기 싫어했나 보다.
한편 일본 땅에서 시들해진 화투는 한반도로 건너오기 무섭게 활화산 같은 인기를 얻어 가정에서, 초상집에서, 술집에서, 공항에서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유래를 가진 화투, 계속 즐겨야 하는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