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8대 조부이신 고려 우왕때인 1389년에 牧隱선생 둘째 아들 인재공(種자學자)의 6남1녀중 5자이신 叔福 직강공
선조님의 이야기이다. 1418년 兵曹佐郞職에 재임중에 兵曹判書 朴習 獄事에 관계되어 1408년 태종 8년의 과거시험에
麟齋공 아들로 (한산이씨 최초라고도 함) 최초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맡아 보다 세종원년 병조의 좌랑직에 계실때
태종이 세종의 외척 심온을 제거하기 위한 트집으로 병조 재임 전원에 대한 직첩을 회수하고 편의따라 지방에 가 살도록하는
귀양을 보냈다. 직강공 숙복 선조는 강동으로 가서 살으셨다. 그후 세종께서 편하게 살도록 형조에 전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직강공의 신원기록을 찾지 못하여 애를 태웠다. 아들 문비와 문강은 지방관직에 있으면서 후에 郡守까지 지냈는데
伸寃이 안될리 없어 백방으로 신원기록을 찾아보려고 근 20여년 속 마음을 태웠다. 그러나 큰집(군수공 문비)이 북한에서
나오지 못하여 직강공의 出生年度도 字도 族譜에 기록하지 못하고 윗대 어른들이 발행 하였다.
그러나 내가 牧隱藁를 많이 보아 직강공 숙복선조의 생년이 1389(己巳)년이란 것과 字가 中童이란 것을 알았다.
목은집에 중동은 경복(막내 숙자 치자) 선조보다 1세 많다는 글이 있어 조선왕조실록에 좌참찬 이 숙치 졸기에서 좌참찬
선조님의 출생년도를 알아내어 거기에 +1을 하니까 1389(기사)년이 생년이란걸 알수가 있었으며 그 글에 중동이 경복(좌참찬
숙치의 자)의 바로 형이라는 내용이 된다.
제번하고 이번 직강공 숙복선조님의 왕조실록의 신원일자는 연려실 기술을 보다가 문종때 작첩을 반환 했다는 기록을 보고
문종실록을 찾아 본결과 문종 원년 1450년 2월 22일 몇가지 죄를 제외하고 모든이의 직첩을 돌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아 이때 신원 되었음을 완전하게 확인하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어른들이 몰랐던 직강공 숙복의 出生年度 어릴적의 字 職級과 職牒返還 年月日등을 알게 되니 태종 8년 1408년 우리 집안 최초
科擧及第하신 선조의 신분을 조금씩 찾아내니 마음이 좋아져서 속히 큰집 長子집안의 文書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叔福[1389 )己巳生, 字 中童, 태종 8년(1408 戊子) 弱冠에 科擧及第. 成均館 直講까지 오르고 타관직 副校理 敎理등을 거쳐
1418년 世宗元年 兵曹佐郞 在任中 朴習獄死에 姜尙仁등 兵曹 在任者 全員 職牒을 回收當하고 귀양을 갔다. 이때 李叔福은
江東으로 가서 살았다. 1420년 편리에 따라 편하게 살도록 刑曹에 傳旨하였다.
그후 1450년 文宗 元年 二月二十二日 反逆者外 職牒을 돌려 주도록 하였다(朝鮮王朝實錄 記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