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126. 묵상글 들 (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 나타나시는 분. 등 )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 나타나시는 분
오늘 강론의 주제로 저는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 나타나는 분'으로 잡아봤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라진다는 것의 뜻이 무엇이고,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사라진다고 할 때 언뜻 보면 그것이 객관적인 말 같지만
잘 뜯어 보면 무엇이 내 앞에서 사라진다는 뜻이기에
사뭇 주관적인 말이고 나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무엇이 내 앞에 분명히 있었는데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있고 엄연히 있는데 나와 함께 있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어느덧 내 앞에 아무것도 없게 되고 하늘과 땅마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둘 사라지고 특히 내게 의미있던 것들,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허무감을 느끼게 되며
더 나아가 인생무상 곧 인생이란 무상한 것임을 느끼에 됩니다.
허무감은 나를 채우고 있던 것들 곧 만족시키는 것들이
빠져나가고 없어졌을 때의 느낌이고 인생 무상은
나를 채우고 있던 것들 뿐 아니라 나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한결같지 않음을, 있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포함하여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고,
하늘과 땅마저 사라질 것이니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질 때 의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사라질 때 의연하지 못하고 심하게 나의 마음이 흔들린다면
내가 사라지고 말 것들에 깊이 의존하였음을 오히려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라지는 것들 중엔 누가 사라지는 것처럼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엇이 사라지는 것처럼 누구에 의해 사라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고, 많은 것, 아니 모든 것들이 실은
하느님에 의해 사라지는 거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사라지는 것들은 사라지는 것들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겁니다.
그러면 이때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 당신이 나타나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안개가 걷힐 때 산이 드러나고
구름이 사라질 때 하늘이 나타나듯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는 이런 것들이 사라질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사라지더라도
당신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에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에 의해 생겨나고,
그래서 그것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의해 생겨난 것들은 하느님 말씀에 의해
없어질 것들이고 사라질 것들이라는 말도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느님 말 잘 들어야 합니다.
말 잘 들어야 살 수 있고 보기 좋습니다.
아무튼, 사라질 때 나타나시는 주님을 잘 영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루카 21,31)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곧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루카 21,30),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루카 21,31) 한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혹은 안 올지, 추울지 혹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징표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진정 깨닫는다면, 세상을 달리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모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에나 혹은 이 세상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언젠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지금 이곳에,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지금 이 비참함 한가운데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와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오신 주님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아니한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가 완고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받았음을 보는 것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발견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발견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그것이 우리를 발견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베풀어진 하느님의 선물”이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시도록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맛보기 시작한 그 무엇을 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오늘,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으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주님!
당신의 말씀이 제게서 사라지지지 않게 하소서.
제게 뿌리신 말씀이 자라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당신께 승복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활기차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자리이오니,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앞을 볼 수 있는 눈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면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이현주목사),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떠받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 속을 알면 누구보다도 부끄러움이 많고 자비를 간구해야 할 사람입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의 대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나자렛 예수는 사라질지라도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나 자신의 한계 속에 내 옆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날이 오고 있다.” 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날이, 오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시편 119,105)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징표를 식별하고 신성을 실현하라
“므네, 트켈, 파르신.” 벨사차르 임금이 본 이 두려운 암호를 다니엘이 가볍게 해독했습니다. 그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꾼 어마무시한 꿈을 명쾌하게 해몽하기도 했습니다. 가볍고 명쾌하게 해 내기는 했지만 실은 그 내용의 심각성 때문에 죽기를 각오했어야 했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꿈의 해몽이건 암호의 해독이건 모두 숨겨진 뜻을 알아내는 일인데, 오늘 말씀은 인간의 현실 안에 숨은 뜻을 식별하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 메시지를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라는 뜻으로 풀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방식이 징표를 드러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징표를 식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만일 이 징표를 알아보지 못하면 눈을 가리고 길을 가는 것처럼이나 위험할 것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라든 교회든 마찬가지로 그러할 것입니다.
다니엘의 환시는 가까운 미래에 그 당시 지중해 지역권에서 일어날 민족들의 운명을 내다본 식별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일상의 자연적 징표를 보고 날씨와 기후를 식별함에 빗대어 당신께서 선포하신 일들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 나라의 징표를 식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온 누리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징표는 신성을 드러냅니다. 신성을 담고 있는 징표는 다니엘이 그러했듯이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야만 알아볼 수 있고,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거룩한 기운을 받아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세상일들이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며,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그분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와 부활의 삶이 교회 안에서 계승되고 있다는 놀라운 현실을 세상과 후대에 널리 알리고자 힘쓴 기록입니다. 신구약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이를 기준으로 삼아 과거 역사의 기록 안에서나, 현재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드러나고 있는 징표들을 식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지혜에 따라서 실천하는 데 필요한 신성의 거룩한 기운은 성체성사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징표를 식별하는 지혜와 신성을 실현할 수 있는 거룩한 기운을 주려 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잘 받는 사람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 적은 것을 읽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스스로 노력해 자신을 돕는다.
2) 도움받을 만한 가치를 보인다.
3)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린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첫 번째인 자신의 노력이라고 말합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어느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깥의 일이었는데, 특히 쓰레기나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레를 이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끌고 가는데, 친구 2명이 뒤에서 밀고 앞에서 제가 끌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친구 2명이 다른 일을 하러 갔고, 저 혼자 수레를 끌어야 했습니다. 수레는 너무 무거웠고, 경사진 오르막길을 혼자가 끌기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저 혼자만 있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는데,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도와줄까요?”라면서 수레에 붙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도 반응하는 것입니다. 만약 무겁다고 또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사람들의 반응도 없었을 것입니다. 노력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삶이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도움을 얻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없습니다.
무화나무의 비유 말씀을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잎이 돋는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힘들다고 불평불만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주님께서 제일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때, 다른 이들도 함께할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과 함께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양쪽에서 태양을 느끼는 것이다(데이비드 비스코트).
-----------------
하느님 눈에 띌 수 있는 지혜
여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한눈을 팔다가 엄마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엄마가 보이지 않자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제 엄마가 없어서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좋아했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을까요?
이 아이는 엄마가 보이지 않아 두려워졌고 그래서 “김서연”이라는 이름을 큰 소리로 계속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서 엄마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라고 불러야지. 사람도 많이 있는데 엄마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되겠어?”
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기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엄마를 부르면 다 나를 보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만 나를 보라고 엄마 이름을 불렀어요.”
아이의 지혜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문득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때도 이런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만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혼인 주례를 하면서 신랑과 신부에게 질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두 분은 결혼생활을 하면서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신랑과 신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다.” 사제는 신랑과 신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분이 교회 안에서 고백한 이 합의를 당신 은혜로 확고하게 하시고, 두 분에게 복을 가득 내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부부가 약속한대로 아플 때나, 성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평생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 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혼인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격이 달라서, 마음이 변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약속은 지킬 때 의미가 있습니다. 깨어지는 약속은 이미 약속이 아닙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이 예언한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슬픔도, 고통도, 절망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질병도, 죽음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으로 하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졌던 권력을 빼앗길 줄 알았던 헤로데가 있습니다. 그동안 누렸던 기득권을 빼앗길 줄 알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두려워했던 빌라도가 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거짓된 선동에 휩쓸린 군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지만 죽음을 넘어 부활을 통하여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영토, 국민, 정부,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믿음, 희망, 사랑, 부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지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틀’에 갇혀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은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희망을 간직한 이에게 부활로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바라봄의 관상
-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읽고 삽시다 -
어제에 이어 시편 화답송 후렴이 똑같습니다.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참으로 관상적 삶을 위해 어느 때보다 하느님 찬송과 찬양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1-2)
영성체송 시편도 은혜롭습니다. 코로나와 기후위기의 시대, 영적 관상의 깊이의 삶이 날로 절실해 지는 시대입니다. 20세기 베네딕도회 영성을 대표하는 세 분의 관상가를 연대기순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장 레크레르크(1911-2000), 토마스 머튼(1915-1968) 그리고 드 브궤(1926-2011) 신부입니다. 아마도 베네딕도 규칙에 대한 연구에서 고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의 논문 지도 교수였던 드 브궤 신부님을 능가할 분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이 장 레크레르끄와 토마스 머튼이, 토마스 머튼이 1968년 선종하기까지 1950년부터 무려 18년간 나눈 서신들입니다. 양극단의 관상가가 얼마나 서로 잘 보완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놀랍습니다. 장 레크레르끄 신부는 707이라는 여객기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상 곳곳 수도원을 방문했던 외향적인 분이었고, 토마스 머튼은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그분이 머문 게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찾았던 큰산같은 아주 내향적인 분이었습니다.
세 관상 영성 대가의 공통점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수도승 삶에 대한 열렬한 사랑입니다. 오늘 ‘바라봄의 관상’이란 강론 주제에 문득 떠오른 일화의 소개였습니다. 이기락 신부의 ‘아남네시스(기억, 추억, 회고라는 뜻의 그리스말로 성체성사를 뜻함)’라는 서품 25주년을 맞이하여 출간한 책(82-83쪽)에 나오는 저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세례를 축하하며 이수철 신부의 ‘바라봄(觀)’이라는 시를 선물로 드립니다.
-‘전체를 보는 것이다/삶은 흐른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기다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가을의 황홀함과 겨울의 적요/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강함과 약함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사랑하는 것이다’-1998.11.4.
이수철 신부의 시에서처럼 우리의 바라봄도 예수님처럼 전체를 보고,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기다릴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2001.2.11. 청담동 성당 연중 제6주일 강론중-
바로 이런 바라봄의 관상적 시선으로 제1독서 다니엘서를 묵상합니다. 모든 것은 지납니다. 모든 것은 강물 흐르듯이 흐릅니다. 그 영원할 것 같던 대 제국 바빌론이, 메디아가. 페르시아가, 그리스가 마침내는 로마제국이 무너져 사라졌습니다. 바로 첫 번째 사자같은 짐승은 바빌론을, 두 번째 곰같은 짐승은 메디아를, 세 번째 표범같은 짐승은 페르시아를, 네 번째 커다란 쇠이빨을 가진 짐승은 그리스 제국을 상징합니다.
이 네 제국이 명멸한 후 주님의 영원한 나라를 환시중에 바라보는 관상가 다니엘입니다. 바로 다니엘은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중에 모시게 될 사람의 아들, 파스카의 예수님을 미리 보여줍니다. 다니엘서 마지막 부분이 고무적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내다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대로 오늘 복음을 통해, 또 2000년 유구한 역사의 가톨릭교회를 통해 서서히 실현되고 있는 다니엘의 예언입니다. 다니엘처럼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바라봄의 관상의 대가임이 분명합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오늘 지금 여기 곳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알아채라 하십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통해 영원한 말씀이신 그분을 깨달아 알아 모시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정주영성도 우리 모두 관상가가 되어 이런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데 궁극의 목적이 있음을 봅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대림을 앞둔 연중 마지막 34주간,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깨어 바라봄의 관상가가 되어 오늘 지금 여기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알아 채어 읽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코로나와 기후위기로 혼돈의 어둠 중에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시의적절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행복기도시 한 연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이옵니다.
당신의 선물들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지상천국地上天國, 하느님 나라이옵니다.”
호랑이 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했습니다. 코로나의 기승으로 인해 참으로 예측불가능한 어둡고 무겁고 암울한 세상일수록 하느님 사랑 안에 깊이 머물러 사는 관상가의 삶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어제 수도원에서 피정하고 떠나면서 이런 딱한 현실에 보름동안 미사를 청한 어느 자매의 지향을 소개합니다.
-“1.코로나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분을 위하여
2.모든 의료진들과 봉사자들 관련된 모든 분들 위하여
3.육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분들 위하여
+신부님, 하루에 100명 이상이 자살을 한다고 하네요. 그중 청소년들이 많대요.
4.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을 위하여
5.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하여”-
세상을 향한 연민의 사랑이 넘치는 자매입니다. 자살자, 사고사, 병사로 소리없이 죽어가는 불쌍한 이들이 참 많은 흡사 내전內戰 상태를 방불케 하는 현실입니다. 정치가들의 각성과 회개를 촉구합니다. 참으로 깨어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 안에서 힘껏 하루하루 관상적 깊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의 권고가 적절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종말의 경고들 속에서 희망을 보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루카 21,31)
예수님께서 나무에 잎이 돋으면 곧 여름이 온다고 아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표징들이 보이거든 하느님 나라가 온 줄 알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잎을 볼 때 그 잎에서 사고를 멈추지 않고 잎이 돋아나게 하는 순리, 곧 여름을 고대합니다. 이처럼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전쟁과 천재지변 들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움과 공포에 갇혀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라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 나라, 구원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았으면서 때때로 그 포장지에 놀라고 자지러져 정작 선물은 열어보지도 못하고 도망가거나 포기하고 절망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그날"을 허락하시는 건 우리를 괴롭히시려거나 겁주고 파멸시키시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의도시지요. 그런 하느님의 뜻을 알면, 파릇하게 돋은 잎을 보면서 여름을 꿈꾸듯 당장의 고통이 품은 미지의 열매를 고대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극적으로 상반되는 두 개의 환시 내용이 이어집니다.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 위에서 올라왔다."(다니 7,3)
먼저 다니엘 앞에 혐오스럽고 무시무시한 네 짐승이 등장합니다. 그것들은 끔찍하고 흉포스러우며 거만하기까지 하지요. 이 짐승들의 힘이 이 세상을 덮친다고 생각하면 두렵고 절망스럽기까지 할 겁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바로 뒤에 이어지는 환시에서는 천상의 대관식이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펼쳐집니다. 섬기는 이들이 무수히 늘어선 가운데 천상 어좌로 나아오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앞에 인도되어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세상을 위협하고 황폐하게 만드는 흉포한 짐승들의 통치는 잠시입니다.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하고 유한한 것은 영원 앞에서 맥없이 스러지기 때문이지요. 잠시 지나는 독하고 악하고 공포스러운 현실에 무너지지 말고 그 뒤에 오실, 그 안에 숨어계신 구원의 얼굴을 보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일 겁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고되고 지치고 두렵기까지 한 각자의 현실 속에서 구원의 표징을 찾고 눈을 들어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유한하고 불순하고 악한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니까요. 지금 죽을 듯이 힘들고 아프다는 건 구원이 가까웠다는 뜻이니, 영원하신 말씀을 꼭 부여잡고, 끝까지 믿고 희망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복음 환호송)
지금 고통 중에 힘들어하고 있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21,31)
'시대의 징표!'
사람들이 돋아난 무화과나무의 잎을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여름은 추수와 마지막을 상징하는 계절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인 '무화과나무의 교훈'은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때인 종말이 가까우니 '시대의 징표를 잘 읽고 준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제266대 교황이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보시고, 모든 복음 선포자들에게 '시대적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그 화두가 바로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입니다.
이는 '함께 가기', '함께 살기', '함께하는 여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함께 가고 함께 살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을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지금 우리가(교회가) 함께 잘 가고 있지 못하다는 '시대의 징표로써의 반성'이기도 합니다.
당신 자신을 교회의 변두리에서 온 교황이라고 소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던진 이 화두는, 우리 모두에게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될 것을 호소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아래로 향하게 함으로써, 그들과 함께하는 '변두리 중심의 교회'가 될 것을 호소합니다.
변두리에 있는 이들이 배제된 '그들만의 공동체', '끼리끼리의 공동체'가 아닌, 더 나아가 '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닌, 자연의 피조물들을 포함한 모두가 함께 가고 함께 사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호소합니다.
이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행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유학 시절 독일에 도착하여 지도 교수님을 찾아뵙고 처음으로 논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들려주셨던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성경 속의 신학과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때, 오늘이 반영되지 않으면
죽어 계신 하느님, 성경이 쓰인 시대의 하느님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의 하느님을
늘 생각해야 한다는 충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오늘을 바라보려 노력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고 있는 삶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 시대가 직면하여 있는 상황 속에 하느님께서
언제나 활동하시고 찾아오신다는 진리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보아야 한다.’, ‘시대정신을 고려해라.’라는 말은
어쩌면 지금의 삶에 대한 충실함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그 흐름을 쫓는 것이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변하지 않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만 집중해서 살지 않는 일입니다.
자신의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주위를 둘러보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 생각에 갇혀 여유롭지 못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는 지나온 길에 무엇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천천히 산책을 하다 보면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위로를 얻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얻는
‘바라봄’은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그 공동체의 삶,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라는 관계
……. 이처럼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때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듯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세상의 종말에 대해 무서운 말씀을 하시면서 그 시기가 언제인지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31절) 하시고 예루살렘의 파멸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 하신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씀으로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을 들은 그 세대가 가기 전, 70년에 파괴되었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즉 성경이 전하는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시기의 징표는 알 수 있으나 그날은 하늘의 천사들도, 사람의 아들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성부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벌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의 새로운 세계를 완성하시는 과정으로서의 죄 많은 인간과 세상이 겪어야 하는 진통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그 결정적인 모습은 마태 25에서 말씀하시듯이 당신이 구원하신 온 세상을 성부께 바치는 날이며 당신을 따른 모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신경을 써서 걱정해야 할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개인의 죽음, 나 자신의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그 종말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한다.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그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의 이 순간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인으로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다.
그때 그날은 공포와 기쁨, 영광이 이 세상에 함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둘로 가르시는 때인데, 그것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와 계속 연결된 결과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흥청대며 허송세월한다든지, 지금의 행동이 초래할 불행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히 모르나 번갯불처럼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33절) 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그 말씀이 이제 우리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우리의 삶을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어가도록 항상 깨어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이 깨어있는 삶이 우리를 항상 그분 안에 있게 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며 사는 모습일 것이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 32)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마지막에는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의
말씀만이
남는다.
수많은 사람들은
살다가 다들
어디로
간 것인지를
묻게된다.
사람이 죽으면
하느님께로
가게된다.
나무또한
마지막처럼
햇볕을 향하여
가지를
뻗어나간다.
햇볕이
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언제나
사람의 표징은
사람이다.
사람보다
더 큰 표징은
없다.
사람과 함께
걸어가는
표징이다.
우리
현실에서
만나게되는
주님의
살아있는
표징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내어주시는
진정한 사랑이
표징으로 드러난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표징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따라가는 우리들
삶의 여정이다.
삶의 마지막은
언제나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다.
거부할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며 하느님
나라의 징조이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화 가운데서 영원하신 주님을 만나기 ♣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봄 가을이 따로 없는 팔레스티나에서는 나무에 잎이 돋우면 여름이 이미 다가온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성전파괴와 같은 큰 재난이 나타나면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1,29-31).
우리는 우주만물의 변화 속에서, 빛의 속도로 발달하는 생명공학을 비롯한 과학과 정보기술, 다양한 문화와 종교현상, 빈부격차의 심화, 급격한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변화와 발달의 끝이 어디일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이지요.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국가도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인간 또한 희로애락과 생노병사를 겪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있게 하는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변화를 들여다보면 선과 사랑과 의로움을 담고 하느님을 향하여 변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와 정반대의 변화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변화와 사건을 통해 영원성을 드러내시지요.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변화나 사건을 보며 영원하신 하느님의 뜻을 읽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어떤 변화나 사건을 통해서도 늘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심지어 악과 고통스런 사건들도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긍정적 변화든 부정적 변화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겠지요.
우리는 어떤 삶을 살다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을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랑이신 하느님의 원의와 손길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가는 긍정적인 변화라면 그 안에 담긴 사랑의 메시지를 읽고 은총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것을 공유하고 되돌려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거스르는 변화라면 그 지점이 바로 회개의 시발점이요 하느님을 향한 반환점이 되어야 함을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럭저럭 문제없이 살아가는 '거짓 안정성' 안에 머무르곤 합니다. 넘어졌다 하여도 곧바로 그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겠지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시대징표를 읽어 변화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찾아나가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이를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해체를 허용하는 용기'입니다. 불의와 잘못된 구조와 타협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 해체함으로써 사랑과 정의의 질서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해묵은 습관과 굳어버린 사고의 틀을 미련 없이 해체할 수 있어야 하지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은 인간이 권력과 돈의 힘이 영원하리라 믿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각종 사건들과 부정부패, 도덕적 타락, 비인간적 현실, 우상숭배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영원성을 발견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거짓 안정성에서 벗어나 자신을 해체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만사만인을 바라보고, 시대징표를 읽어 하느님의 영원성을 살려나갔으면 합니다. 지금이 바로 고통과 시련과 슬픔 가운데서도 말씀을 실행하고 사랑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세상의 해체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천국의 맛보기
가끔씩 지상에서 천국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그 강물 위에 산산이 부서지는 아침 햇살, 때마침 날아오르는 철새들의 무리...
해맑은 아이들의 얼굴,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사랑하는 사람들, 언제 만나도 마음 편안한 따뜻한 친구들...
어떻게 보면 천국은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already)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고(not yet) 현재진행중입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 측의 아무런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어떤 분은 “이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 갈 생각도 하지마라.” 고 강조하십니다.
가가린 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우주선을 탄 소련 조종사입니다.
우주선에 홀로 탑승한 그는 대기권을 벗어나 지구를 정확히 한 바퀴 비행했습니다.
낙하산을 타고 기적적으로 지구로 귀환한 그는 지상에 내려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아무리 눈 씻고 봐도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 말에 한 사제가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못 본 사람은 지구를 세 바퀴가 아니라 서른 바퀴 돌아도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상 생활의 연장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상에서의 우리 삶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계속 진전중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와 은총, 무한한 사랑에 힘입어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상생활, 아무것도 아니라고 절대 말할 수 없겠습니다.
이렇게 함부로 살아서도 안 될 일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지극정성으로, 최대한 즐기면서, 끝없이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상에서의 삶은 ‘천국의 맛보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옥같이 끔찍한 세월, 연옥같이 지루한 나날을 보내라고 우리에게 지상생활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천국 같은 삶을 미리 지상에서 맛보고 오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으리라 확신합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나날이 고통의 연속일지라도, 사방이 온통 절벽으로 꽉 막혀있다고 할지라도 절망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악은 선의 결핍입니다.
고통 받고 가난한 백성은 나눔의 부족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좌절과 포기는 진정한 형제애 부족으로 인한 현실입니다.
이 한해의 끝자락, 종말론적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지상생활이 지옥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일입니다.
우리의 손길과 관심, 나눔과 동반을 통해 그들의 지옥 같은 삶을 조금이나마 완화시켜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울적하게 살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울며 애통해하며 살아가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없이 이 세상을 만끽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지막 시대에 해답은 유대인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는 갑작스럽기 오지 않고 ‘순차적’으로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전체적으로 잎이 생기기 시작하면 “곧 겨울이 오겠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봄이 왔고 여름이 오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도 눈만 감고 있지 않으면 다 알 수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의 가장 확실한 표는 이스라엘의 재건입니다.
2천 년 이상 나라가 없이 떠돌다가 다시 나라가 재건되는 경우는 역사에 없습니다.
인원이 많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1300만 정도 됩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1/3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1948년 독립국으로 되었고 전쟁을 통하여 이전 땅을 회복했습니다.
10억이 넘는 주위 아랍 나라들도 전쟁하면 천만 명의 이스라엘에 집니다.
성경에 예언된 순차적인 진행은 이렇습니다.
일단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이방인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나중엔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이스라엘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4)
이는 예수님만 그렇게 예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똑같이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로마 11, 25-26)
하느님께서 당신을 배척할 이스라엘을 정화하기 위해 2천 년의 시간을 이용하신 다음, 그 정화가 끝난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외국에 흩어져 사는 유태인들은 거의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을 볼 때 이제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처럼 이방 나라들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유지하는 이스라엘은 덜 고통을 당할 것은 뻔합니다.
우리도 지혜가 있다면 이스라엘과 닮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어쨌건 유대인이 답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과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이 하늘에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토론주제는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원리가 무엇인가?’였습니다.
먼저 모세가 십계명을 손에 들고 말했습니다.
“법이 전부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당신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사랑이 전부죠.”
셋째는 프로이트가 자신이 쓴 『꿈의 해석』을 들어 보이며 말하였습니다.
“무의식과 섹스가 전부에요.”
마르크스가 밥을 먹다 숟가락을 놓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밥이 전부죠. 돈이 전부에요. 이게 세상을 움직인다고요.”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조용히 칠판에 ‘E=MC²’이라 휘갈겨 쓴 다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이 모든 등장인물이 다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이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유대인식 조크입니다.
유대인들에 세상에서 보여주는 역량에 대해 말하자면 입만 아플 뿐입니다.
발명가 에디슨, 20세기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 퓰리처상을 만든 조지프 퓰리처,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 전설의 앵커 래리 킹,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컴퓨터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구글의 래리 페이지,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 스타벅스의 하월드 슐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인재들이 유대인일 뿐 아니라, 재산 10억 달러 이상인 미국인 가운데 1/3이 유대인이고 미국 유명 대학 교수 중 1/5이 유대인이며,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0.2%가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머리가 좋아서일까요?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연구 결과 유대인의 평균 IQ는 95이고 한국인은 106입니다.
그들이 이런 성과를 올리는 이유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근본적인 이유 하나를 말하라면 ‘자존감’입니다.
피카소도 유태인인데 유태인은 어머니만 유태인이면 유태인이 됩니다.
피카소의 말을 들어봅시다.
“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카소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자존감 때문에 이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 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될 수 있다고 믿으면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피카소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같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여러 가지 사소한 일로 낭비한다.
나는 내 에너지를 단 한 가지, 그림에만 집중한다. 그림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한다.”
이런 자존감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종교교육’에서 옵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에게 자존감을 주려고 하더라도 ‘넌 내 자식이야!’라고 하면 ‘인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신 “넌 하느님 백성이야!”라는 자존감을 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다 해냅니다.
그들은 바다를 가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가 하는 것은 자녀를 하느님께 끊임없이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성전에 봉헌되셨고 예수님도 봉헌되셨습니다.
12살 성인식 때는 아들이 사라져도 부모는 사라진 줄도 몰랐습니다.
이미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12살 때 대학 등록금 정도를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그리고 믿어줍니다.
자존감은 깎아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고 시키면 아이들은 ‘아, 나는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혼자 할 수 없는 존재구나!’ 라고 느끼게 되고 자존감 바닥의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그의 머리에는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믿음이 박혀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이 멋진 자녀들을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자녀를 많이 낳습니다.
이것도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유럽이 출산율이 높아 봐야 이스라엘의 절반입니다.
우리나라에 세계 꼴찌입니다.
아이를 키울 자신감이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결국 잘 지키고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가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이때 성경에 예언된 대로 믿으면 마지막 때에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종교교육을 통한 자존감 높이는 가정교육을 본받아야 합니다.
결국, 미래는 우리 자녀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돈만 많이 벌면 뭐하겠습니까? 집값도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교육비도 오릅니다.
그래서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낳아도 사는 것이 힘든 것은 똑같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져 올수록 유대인들이 비록 예수님을 죽은 민족이기는 하나 결국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기에 유대인들을 연구하고 본받아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린 벌로 받았던 고통에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
211126.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제1독서 (다니7,2ㄴ-14)
"다니엘이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불어오는 네 바람이 큰 바다를 휘저었다. 그러자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왔다."(2-3)
다니엘서 7장 1절은 벨사차르 제일년에 받은 일련의 환시에 대한 진술을 시작하는 말이다. 다니엘은 앞선 1절에서 밤에 꿈을 꾸고 환시를 보았다는 진술을 했기 때문에, 다니엘서 7장 2절에서 굳이 또다시 자신이 밤에 환시를 보았다는 진술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다니엘이 이렇게 중복 진술하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환시를 본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으나, 원문은 '그런데 보라!' 라는 의미의 감탄사 '와아루'(waaru)로 시작하여 환시의 내용이 매우 주목할 만 것임을 강조했다. 그 다음에는 다니엘이 본 환시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된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서 맨 처음 본 광경은 하늘 사방에서 불어온 바람이 큰 바다를 휘젓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하늘이 네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그 바람에 대조되는 바다가 나온다. 하늘을 기원으로 하여 사방에서 불어오는 이 바람에 대하여 하느님의 심판으로 보는 입장이 있고, 인간 역사에 끊임없이 개입하여 왕권을 세우고 폐하기를 반복하는 하느님의 주권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이 가운데 후자의 입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여기서 '불어오는'에 해당하는 '메기한'(megihan)이 능동태 분사형 단어로서 지속적인 활동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한편, '큰 바다를'에 해당하는 '레암마 랍바'(leamma rabba)는 문자적으로는 '큰 바다로' 혹은 '큰 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성경에서 '바다'는 하느님의 주권을 대항하면서 싸우는 악한 영적 세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많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바다를 질타하시며(시편18,16), 바다를 꾸짖어 말려 버리시고(나훔1,4), 바다를 짓밟으시며(하바꾹3,15), 바다 괴물과 싸우신다(이사27,1). 그리고 사악한 자들은 포효하는 바다와 같다고 묘사된다(이사17,12.13).
이러한 성경적 예들을 고려할 때, 여기의 바다는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를 싫어하는 불신 세상의 세력, 혹은 세상의 왕국들의 배후에 역사하는 강력한 사탄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우기 세상의 거대한 왕국들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짐승들이 이 바다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이 바다가 세상 왕국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다니엘은 환시 가운데 거대한 짐승 네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여기서 '거대한'에 해당하는 '라브레반'(rabreban ;great)은 다니엘서 7장 2절의 '바다'를 수식하는 '큰'에 해당하는 '랍바'(rabba)와는 다른 단어로서, 크기가 매우 거대하면서 기세와 힘이 엄청난 상태를 묘사한다.
그리고 '올라왔다'에 해당하는 '쌀레칸'(salleqan)은 '올라오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쎌리크'(seliq)의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거대한 짐승들이 바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다니엘은 7장 17절에서 '그 거대한 네 마리 짐승을 이 세상에 일어날 네 임금' 이라고 해석한다. 대부분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들이 다니엘서 2장의 꿈에 나오는 머리, 가슴/팔, 배/넓적다리, 아랫다리/발 등이 상징하는 바빌론, 메디아, 페르시아 연합국, 그리스, 로마 제국과 상등하는 것으로 본다.
하느님께서 세상 나라들을 그렇게 무시무시한 짐승들의 환시로 계시하신 것은 그 나라들이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약소국들과 약한 자들을 향해 극악무도한 폭정과 착취를 일삼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로 모양이 다른'에 해당하는 '샤네얀'(shaneyan)은 '바꾸다', '변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셰냐'(shena)의 능동태 분사형이다. 이것은 그 짐승들이 모양, 크기, 성질, 속성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짐승들이 상징하는 상기의 나라들은 그 규모와 힘과 문화과 종교와 성격에 있어서 모두 다 달랐다.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복음(루카21,29~33)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1~32)
루카 복음 21장 29~38절은 종말의 때를 살면서 종말을 기다리는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는 '무화과나무'만을 다루는 데 비해, 루카 복음사가는 '다른 모든 나무'를 첨가시켜 기록한다.
어떤 이는 '무화과나무'는 유대교를, '모든 나무'는 '이방 교회들'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열매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제한해서 해석하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루카 복음사가는 이런 오류를 막고자 '이방 세계' 또는 '이방 교회'를 상징하는 '모든 나무'를 첨가했다고 본다.
실제로 세상의 종말은 어느 한 민족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이고 전세계적 사건이다.
루카 복음 21장 31절의 '하느님의 나라'에 해당하는 '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he basileia tu theu; the kingdom of God)는 종말에 올 심판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상의 종말이 갖는 이중성을 잘 알고 있다. 즉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무서운 심판과 형벌의 날이 될 것이며,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 날이 영광과 기쁨의 날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人子)의 오심은 확실히 세상에 대해서는 심판의 날이요,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날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를 묘사하여 독자들에게, 특히 고난받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용기와 위로와 힘을 주고자 한다. 따라서 종말에 나타나는 징조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주는 서곡과 같은 것이다.
한편, 루카 복음 21장 32절의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멸망의 전조로 예언된 모든 일들이, 당시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살고 있던 세대에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예언이 A.D.30년에 주어졌고, 예루살렘의 멸망이 A.D.70년에 있었기에, 그 사이 40년의 기간이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은 단지 예루살렘 멸망과 관계된 예언의 성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 더불어 그리스도 재림으로 오게 되는 최후의 종말의 시기에 임박하여 나타날, 전우주적인 징조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며, 비로소 그 뒤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제 루카 복음 21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심판의 대상이 되어 완전히 없어질 하늘과 땅(천지;天地)과, 영원히 보존될 당신의 말씀을 대구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심판과 예언의 확실성을 더해 주신다.
게다가 당신의 말씀과 하느님의 말씀을 동일시하심으로 인해 당신의 말씀에 신적(神的) 권위를 부여하시며, 당신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