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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49)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
소외된 이들 삶 속으로 들어간 교회, 복음 열매도 풍성
- 정진석 대주교가 1998년 9월 열린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임시총회에서 임기 중 세계 평균 복음화율(18%) 달성 의지를 밝히고 있다. 서울대교구 제공.
정진석 대주교의 마음은 대형화된 본당을 분할해 가능하면 많은 본당을 신설하는 데 있었다. 사제들이 가능하면 작은 공동체에서 신자들을 돌보는 것이 사목적으로 훨씬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형화된 도시 본당은 공동체 구성원의 유대가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교회 공동체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전례적 일치, 심리적 유대감이 올바르게 형성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정 대주교는 교구장 취임 후 바로 본당 신설 등을 통해 사제들이 작은 공동체에서 사목 효과를 증진하는 데 초점을 뒀다. 그래야 신자들과의 깊은 유대 속에서 사목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 대주교는 사목의 효과는 무엇보다 사제들의 마음 자세에 달렸다고 굳게 믿었다.
정 대주교는 본당 주임 신부에게 전권을 주고 본당을 맡기는 스타일이다. 자율성 안에서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사석에서도 가끔 농담조로 말했다.
신부님들은 주교가 간섭을 안 하면 사목을 훨씬 열심히 합니다. 믿고 맡겨야 해요. 모든 사제는 충분히 자격이 있고, 인격적 자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시콜콜 간섭하면 좋아하던 일도 하기 싫은 게 사람 심리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조금 실수를 해도 가만두면 제 힘으로 제 길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 1998년 9월 명동본당 ‘예비신자 · 새 영세자 축제의 날’에 참석한 정진석 대주교가 신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아마도 오랜 기간 교구장으로서 사제들과의 관계에서 나온 경험이었을 것이다.
정 대주교는 1998년 교구장 부임 첫해부터 본당 신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어진 사제 인사와 새 본당 신설에서도 본당 소형화를 강조하는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이어 정 대주교는 특별한 실험을 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밀집한 지역에 선교본당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본당 공동체에서도 자칫 소외될 수 있는 가난한 지역의 신자들을 더욱 집중적으로 사목하기 위해 정식 본당은 아니지만 선교본당을 설립해 주임 사제를 임명했다. 그 사목적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 대주교는 빈민사목을 하고 있는 사제들의 열성과 진정성을 믿고 선교본당 설립을 추진했다. 그래서 서울대교구 최초의 선교본당이 설립됐다. 솔샘 공동체로 불리는 미아1동선교본당이었다. 1998년 11월 14일 축복식을 한 미아1동선교본당은 곧바로 본격적인 사목에 들어갔다. 빈민지역 선교의 새 장을 연 교구는 선교본당 설정이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고 판단했다.
사람들은 기존의 본당 인식에서 탈피해 세상에 열린 교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선교 경험을 가진 안광훈(골롬반외방선교회) 신부가 주임을 맡았다. 그는 솔샘 공동체가 지역사회 운동의 중요한 하나의 축이 되어 본당을 중심으로 힘을 모아 하느님이 원하시는 마을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실제로 미아1동선교본당이 지역 주민센터의 역할도 해나가며 복음적 가치를 보여줄 수 있었다. 미아1동선교본당 외에 금호1가동, 무악동, 봉천3동에 선교본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 가정집을 고쳐 본당 건물로 운영한 무악동선교성당에서 2004년 박문수 신부(왼쪽 시계 방향으로 두 번째)와 신자들이 문화 기행과 캠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3개 선교본당의 추가 신설은 미아1동선교본당을 필두로 1999년 2월까지 교구 내 지역별 도시 공소 지역에 네 곳의 선교본당을 설립키로 한 계획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선교본당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목하겠다는 취지는 빈민사목도 다양한 요구가 많아짐에 따라 지역 특성에 맞게 설립된 선교본당을 통해 안정성 있는 사목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무악동선교본당은 성전을 짓지 않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가난한 이들을 선교하는 데 투신한다는 선교본당의 설립 취지에 따라 66㎡ 규모의 일반 주택을 구입해 사제관으로 봉헌했다. 이에 따라 무악동선교본당은 미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례와 모임을 사제관이나 신자 또는 마을 주민들의 가정을 돌아가며 하게 됐다.
독립문 공동체라고 불린 무악동선교본당은 종로구 무악동과 서대문구 현저동 지역의 세입자들, 집 없는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활동을 계획했다. 특히 주민들과 함께 한누리 공부방, 한솥밥 공동체, 공공임대아파트 입주 준비 등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활동을 지원하고 실업 극복 사업에도 참여할 계획이었다. 본당이 더욱더 신자와 주민들 속으로 깊이 들어간 형태로 복합적 사목을 시도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금호1가동선교본당도 성전을 짓지 않고 빈민지역 주민들을 위한 선교본당으로 가난한 이들을 선교하는 데 투신한다는 설립 취지에 따라 100㎡ 규모의 일반 가정집을 구입해 성전으로 봉헌했다. 다른 선교본당도 소중한 걸음걸음을 옮겨갔다.
정 대주교는 선교본당이 일종의 시범 운영과 같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 처음 시도해보는 것이라 외부적 반발과 일반 본당과 마찰 등 내부적인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패기 있는 젊은 사제들이 잘 견디어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도했다. 특히 젊은 사제들의 순수한 마음이 상처받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 서울대교구의 복음화율이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10%대를 돌파했으며, 교구 내 본당 수도 200개를 넘어섰다는 소식이 교계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서울대교구 각 본당에서 선교 운동에 주력한 결과로 풀이되고 있다는 해석도 덧붙여져 있었다.
서울대교구가 집계한 교세 통계에 따르면 1998년 말 교구 신자 수는 125만 3392명이었다. 관할 지역의 전체 인구 대비 신자 비율, 즉 복음화율이 전년도의 9.94%에서 0.28%p 증가한 10.22%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998년 성인 영세자의 증가율이 두드러졌다. 상설 예비신자 교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주교좌 명동본당이 한해 1084명의 새 영세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교계 언론은 복음화율과 새 영세자 수가 이처럼 부쩍 증가한 것은 정진석 대주교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교구의 복음화율을 끌어올리겠다며 선교를 강조하고 각 본당에서도 선교 운동에 주력한 결과로 진단했다.
정 대주교는 저녁에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한 것이 없는데 사제들과 수도자들, 신자들이 너무 열심히 따라주었습니다. 그분들을 축복해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제가 주님 품에 들기 전에 교구 복음화율 20%가 달성되는 걸 지켜볼 수 있도록 꼭 도와주세요.”
[추기경 정진석] (50) 나의 소원은 선교
작은 본당으로 끈끈한 유대감 조성
- 2000년 5월 동성고 강당에서 열린 서울대교구 선교대회에서 정진석 대주교는 강한 어조로 선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1998년 11월 23일, 정진석 대주교는 교구 사제들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각 사목구 주임은 목자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당연히 담당한 신자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명의 사목구 주임이 합당하게 직무를 수행할 적정 규모보다 더 큰 사목구에 대하여는 본당 분할 신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명동주교좌성당 등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3보좌 신부를 가능하면 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정 규모보다 큰 사목구는 본당이 분할 신설되거나 적어도 주임대리가 임명되도록 사목자와 신자들이 합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관할 인구 9만 명 이상 신자 수 7000명 이상이 되는 본당은 1999년 이내에 새 본당 분할 신설이 요망됩니다. 본당 분할 신설이 시급히 요망되는 곳에서는 기존 본당 내 건물의 신축, 개축, 증축을 일절 금지합니다. 만약 건물의 신축, 증ㆍ개축이 부득이한 경우에는 해당 지구의 지구사제회의 심의를 거쳐 교구장의 서면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교구 사제의 주 임무는 선교와 사목임을 명심해 주시고 각 본당에서는 매년 신자 수 10% 증가를 위한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주십시오. 신부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본당 설정 증가와 소공동체 활성화는 정진석 대주교가 착좌하기 이전부터 마음속에 깊이 담고 있던 사목적 과제였다. 그리고 본당 공동체의 대형화는 서울대교구의 큰 숙제였다. 정 대주교는 본당의 대형화가 사목적 장점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특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본당 대형화의 개선을 위해 교구는 이미 1996년에 ‘본당 신설 10개년 계획안’을 수립한 바 있었다. 10년 이내에 112개의 본당을 신설함으로써 본당 규모를 신자 수 4000명 이하, 사목 지역 반경 0.6km, 도보 10분 이내로 줄인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뿌리내린 참다운 본당 공동체’를 건설하고 가정, 소공동체, 본당의 삼위일체적 공동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정 대주교는 전임 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방향을 그대로 전수해 대형 본당을 분할하도록 독려하는 데 역점을 뒀다. 이러한 규모로 본당을 줄이는 것이 사제의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사목 활동과 신자들의 원활한 신앙생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는 본당 구성원들 사이에 보다 강한 공동체적인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구역ㆍ반의 소공동체를 통한 선교를 지향하는 데 가장 적정한 규모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정 대주교는 착좌한 이후 본당 설립에 최선을 다했고 실제로 많은 열매를 맺었다.
- 2002년 7월 제15회 M.E. 가족모임 장엄미사에서 정진석 대주교가 손을 흔들고 있다. 서울대교구 제공.
1990년대 들어 서울대교구는 규모가 커지면서 본당 구성원 간의 대화와 협력이 어려워지고 교회의 본질인 일치와 친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목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소공동체를 통한 복음화라는 장기적인 사목 방향을 정했다. 교구는 신자들이 소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교회에서 멀어지는 청소년을 보살피고, 소외받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기본 방향 아래 소공동체를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을 전 교구적으로 기울여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환경이 바뀌고 소공동체 운동을 과거와 똑같은 형태로 실행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기본 정신을 살려 계속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과제였다. 정 대주교는 전임 김수환 추기경 때부터 진행해온 소공동체 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독려했고, 시대 흐름에 맞춰 변화하기를 해당 부서에 주문했다.
정 대주교는 가능하면 전임 교구장의 사목적 과제를 그대로 받아 수행하는 것이 큰 흐름에 따르는 것이고, 사목적으로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사목자들에게 갑작스러운 혼란과 불안을 주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도 그대로 반영됐다.
정 대주교가 사목자로서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선교였다. 사목이 무엇보다 우선 가치를 둬야 할 것은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 대주교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그 기준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 선택과 결정이 선교에 도움이 되는가?’ 그가 하는 모든 것의 기준이었다. 자신이 가장 즐기는 글쓰기도 결국에는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하는 기도의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곳에서 정 대주교는 자신의 임기 동안 복음화율을 18%대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교구 사목의 거의 모든 역량을 선교에 집중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정 대주교는 취임 다음 해 평화방송(현 가톨릭평화방송)과 가진 대담에서 이런 취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서울대교구장 착좌 후 처음으로 맞은 새해에 정 대주교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입을 뗐다.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이 되는 날, 제가 서울교구장으로 임명됐다는 것이 발표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우리 한국 교회를 이끄시는 섭리가 신비롭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서 소임을 무사히 마치고 건강한 몸으로 은퇴하게 되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부터인지 정 대주교는 숫자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습관이 생겼다. 자신의 삶에서 숫자와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이 신비롭게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일생 전체를 되돌아보더라도 숫자에 대한 체험은 각별했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는 어느 날짜도 무의미한 날이 없었다. 실제로 그의 강론이나 연설, 그리고 사적인 자리의 대화에서도 숫자에 대한 이야기가 큰 의미를 차지한다.
인터뷰 말미에 정 대주교는 신자 수 증가와 본당 신설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얼마 전 저는 교구 사제들에게 보낸 공문을 통해 매년 10%의 신자 증가를 위한 노력과 본당 분할 신설을 거듭 당부했습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때에 신자 증가율이 기존 신자의 10%씩 됐던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도 200주년 때의 그 열성으로 돌아간다면 신자 10% 증가는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사목자 한 명이 사목할 수 있는 신자 규모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서울대교구에는 신자 수가 7000명이 넘는 본당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경우 보좌 신부님들이 계시더라도 사목자와 신자들 간의 인격적 교류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3000명 정도의 신자를 기준으로 본당이 운영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본당 분할에 따른 성당 건축이 문제지요. 그래서 우리 신부님들께 비싸고 화려한 건축은 자제하고 아주 최소한의 필수적인 시설만 갖추는 조립식 성당을 지어 신자들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이자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정 대주교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란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석에서 주변의 사제들에게 자주 이야기했다.
“외국의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서 휑하니 빈 채 몇몇 신자들이 미사를 지내는 것과 시골의 낡고 허름한 성당이 신자들로 가득 차 살을 맞대며 바닥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 것 중 어느 것을 하느님이 더 좋아하실까?”
[추기경 정진석] (51) 새천년기를 앞두고
교회 안팎으로 분주한 세기말, 희망찬 대희년 꿈꾸다
- 1999년 10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2000년 대희년 맞이 평신도 대회에서 정진석 대주교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정진석 대주교는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한 후 거의 매일 사람들을 면담했다. 그는 하루를 마감하며 그날의 일정과 면담한 이들을 꼼꼼히 기록해두곤 했는데, 그가 쓴 일기장에 비어 있는 칸이 없을 정도로 면담과 회의 등 일정이 끝이 없었다. 교구 단체의 입장에서는 새 교구장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이해시키는 한편,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교구장은 바쁠 수밖에 없었다. 정 대주교가 만나는 면담자도 주교, 사제들뿐 아니라 사도직 단체를 맡고 있는 신자 대표들, 그리고 그동안 서울대교구에서 많은 봉사를 해왔던 원로 신자들이 많았다.
거기에다 정부와 사회 기관장들의 인사도 많았다. 때로는 잘 모르는 분야의 사람들도 교구장 면담을 청해 비서실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만큼 서울대교구장의 위치와 중요성이 크다는 방증이었다. 교회 내 인사뿐 아니라 교회 밖의 많은 이들이 서울대교구장과의 만남을 원한 것은 자신들의 문제를 알아주고 또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 밖의 문제에서도 더 이상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 1999년 5월 조계종 총무원장 고산 스님의 예방을 받고 있는 정진석 대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사람들과의 면담도 면담이지만 각종 회의가 너무 많았다. 모든 회의가 중요한 결정을 하는 자리이므로 정 대주교는 어느 때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용한 청주집에서 살던 처녀가 사람 많고 복잡한 서울집으로 갑자기 시집와서(?) 전혀 다른 수준의 살림을 사는 느낌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회의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정확한 판단을 한다고 해도 교구 행정이 이뤄지는 도중에 합류한 정 대주교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공부하듯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보고서를 여러 번 정독해 흐름을 파악했다. 그리고 보좌 주교들의 이야기나 해당 안건 책임 사제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 정 대주교에게는 우선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모든 회의 때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전체의 실제 분위기나 의견을 알려고 했다. 그러나 회의라는 게 딱딱한 느낌이어서 그런지, 쉽게 자유로운 의견이 나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 대주교는 비서실에 신부들이 교구장을 만나고 싶어 하면 무조건 시간을 잡아두라고 일러두었다. 교구장이 교구 사제를 만나는 것이 첫 번째 사목이란 생각에서였다. 갑자기 혹은 일정이 끝난 저녁에도 연락할 수 있도록 숙소 전화번호도 알려주도록 했다. 언제라도 사제를 만나겠다는 교구장의 의지를 드러냈다.
지나 보니 실제로 일상사나 어려운 점을 미리 이야기하는 사제는 많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이미 문제가 발생한 후에 만나니 면담을 하더라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 대주교는 항상 그런 점이 아쉬웠고 힘들었다. 미리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구장인 자신이 사제들에게 좀 더 다가가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하고 사제들에게 늘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도 정 대주교는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잘 챙겨야 했다. 다행히 청년 시절부터 새벽에 일어나면 한 시간 정도 맨손 체조를 하고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 평생 습관이 돼 있었다. 체조는 학창 시절부터 배운 것을 토대로 정 대주교가 필요한 대로 정해서 하고 있는 체조였다.
세 끼 식사는 가능하면 소식을 하고, 저녁에는 식사 후 묵주기도를 하면서 걷는 운동을 주로 했다. 명동 주교관에서도 가능하면 이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가정에서 웃어른이 아프면 집안이 어두워지고 생기가 없어지는 것처럼 많은 교구, 본당에서도 교구장이나 주임 사제가 아프게 되면 공동체가 휘청이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래서 정 대주교는 공부하고 일하듯이 성실하게 건강을 챙겼다. 혼자 하는 운동과 기도,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는 아주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가능하면 잘 지키려 했다. 아마 평생을 통틀어 이것을 하지 못한 날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크게 마음먹고 정한 것은 그대로 지속해서 행동하는 것이 그의 성정이었다.
그렇게 기묘년(己卯年) 새해의 아침이 밝았다. 1999년 1월 1일, 2000년 대희년 준비 마지막 해였다.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지나온 역사가 2000년이 흐른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미 1994년 11월 10일에 2000년을 대희년으로 지낼 것을 선언하고 1997년부터 3년간을 각각 성자, 성령, 성부의 해로 정해 대희년에 대한 집중적이고 직접적인 준비를 할 것을 권고했다. 1999년은 한 해 남은 2000년 대희년 맞이에 주력해야 하는 해였다. 2000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 인류가 가슴 설레며 새로운 천년기, 2000년을 고대하고 있었다.
- 1998년 8월 김대중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는 정진석 대주교.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한국 교회도 ‘새날 새삶’ 운동을 선포하고 대희년 동참을 적극적으로 권고했다. ‘새날 새삶’ 운동은 신자 전체가 네 가지 구체적인 방향으로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자는 것이었다. 첫째는 우리 각자의 삶을 새롭게 쇄신하자는 것, 두 번째는 각 가정을 참된 가족 공동체로 새롭게 이끌어나가자는 것이고 세 번째는 우리 이웃들이 서로 사랑으로 협조해 나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국민 전체가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사람답게 사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가정과 공동체, 사회로까지 확산하는 실천 방안들을 하나씩 실천해나가고자 했다. 사실 매해 큰 노력 없이도 끊임없이 늘어나던 새 신자는 그 증가세가 한풀 꺾이다 못해 하향 곡선을 그린 지 여러 해가 지나 있었다. 교회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선교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 교회는 새로운 천년기를 그 계기로 삼아야 했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 대주교에게는 1998년이 개인뿐 아니라 교회 안팎으로도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개인적으로는 생각지도 못하게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했고, 교회 바깥으로는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룩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 민주주의에 기초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IMF(국제구제금융) 체제 1년 동안 정리 해고의 바람이 불어 수많은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고 중산층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모든 사람은 희망과 꿈을 안고 2000년 대희년을 고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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