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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수필의 미학, 구조 탐색과 분석의 실제
- 이중구조와 변증구조를 중심으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 사실 소재를 가지고 플롯작업을 하면 그 결과는 더 이상 역사, 사실과 1:1의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개연성의 세계가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플롯, 즉 구성법은 모든 문예창작의 기본작법이 되었다. 본격수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작법과 랭보의 견자론, 그리고 문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시창작법의 핵심요소인 메타포의 원리를 대표적 작법으로 삼아 발전하게 되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뒤틀림에 의해 견자가 된다는 주장이 견자론의 핵심이다. 시인은 견자가 되어야 하고, 견자가 되려면 타자가 되어야 한다. 견자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해석해보면 ‘견자’는 ‘남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자’다. 17살 때 보낸 <견자의 편지>는 견자로서 고통의 세상을 바라보고, 또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목격하고, 어떤 사람도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닿겠다는 의미심장한 다짐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세계다. 미지의 세계를 발견했다고 할 수 없다.
시작법의 문제는 시 창작발상에 대한 시어 찾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소설작법은 소재에서 얻는 허구적 인물 이야기 창작발상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시, 소설 작법과 달리 본격수필 작법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 만들기에 있다고 하겠다. 즉 ‘일상적 사건’을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 정화, 순화하는 데 있다. 본격수필의 작법이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창작에 있는 이유는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태생부터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으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태생적 특징은 에세이가 본격수필로 진화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사실적 토의>를 하는 데 그치지만 본격수필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창조적 구성작업,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 즉 상관화로 변용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관화가 이중성과 변증성의 구조와 함께 했을 때, 문학성은 시너지 효과를 배가한다고 하겠다.
II. 본격수필과 적들의 이름
나는 ‘수필’이라는 말 앞에 ‘본격’이라는 어사를 붙여왔다. 이런 이유는 수필을 잡문시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냥 수필이 아니라 왜 수필다운 수필을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자신의 본질과 순결성을 재호명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수필 아닌 것들’에 대한 ‘구별짓기’의 욕구와 자의식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나 ‘본격수필’은 엄밀히 말해, 실체를 가진 수필장르의 명칭이 아니며, 특정한 수필적 조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 담론화 과정을 끝내지 못했다. 그 고유한 미학적 형식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개념의 실체적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차별화의 욕구는 ‘작본격수필유법불가 무법역불가’라는 ‘본격수필을 쓰는 데 있어서 그 법이 있다고 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없다고도 볼 수 없다.’에서, 또는 ‘본격수필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본격수필이 아닌 것은 있다.’라고 말하게 한다. ‘배제의 원리’ 혹은 ‘부정의 전략’에 의해 개념의 자기 정체성이 주어진 것이다. 타자와 적들을 호출함으로써 본격수필은 자기 이름의 내용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 구별과 배제의 논리화와 관련된 궤적을 더듬어 보겠다.
문학이란 <한 편의 의미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본질적 대답이며 또한 문학의 존재 이유가 된다. 문예작법의 핵심은 하나의 창조적 의미를 형상화하기 위한 모든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격수필을 일러, “주제의식이 형상적으로 체험화되고, 비유적으로 의미화된 글”이라고 정의한다. 과학은 하나의 사물에 대한 한 가지의 개념적 이해만이 가능하다. 만약 한 마리의 ‘개구리’를 보고 사람마다 이해나 인식이 다르다면, 이 세상에 ‘개구리’라는 객관적 동물은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과학적 차원에서 보면, 토끼는 토끼일 뿐이고, 사자는 사자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은 그 같은 과학적 사물존재가 아니다. 예술은 그 존재하는 양상 자체가 창조적이다. 그래서 도올은 ‘작가’에서 ‘작’의 의미는 ‘creative'라 하였고, 김지하는 문학을 ’어불성설‘이라 하였다. 따라서 본격수필은 동양시학의 ’언불진의, 입상진의‘, 즉,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형상적으로 체험하는 편이 보다 우수한 창조성을 가진 작품이 될 것이다.
III. 본격수필의 원리와 그 구조
이런 본격문학의 역사적인 토대 위에 나는 ‘본격수필’이란 용어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수필을 잡문이라고 폄하하고 비하하는 데 대한 방어이면서, 오도되고 있는 수필문학의 개념과 본질을 되찾아야겠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본격수필작법이 있다고 전제하고, 탐구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수필창작에 절대적인 공식이나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명수필들은 어떤 보편적인 창작원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나는 그런 원리와 기법들을 찾아 그 논리성과 체계성을 부여해 왔으며, 이런 기법과 원리가 새로운 수필을 잉태하고, 장르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믿고 있다. 소재의 철학적 통찰과 글감의 미적 구조화, 그리고 호소력 있는 수사법 탐구는 수필의 미학성과 철학성을 결정짓는 창작의 핵심과제라 하겠다. 그럼에도 많은 수필가들이 이러한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창작의 조건과 메커니즘을 경시하거나 탐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요즘은 수필이 질적으로 많이 좋아졌지만, 수필가의 머리 속 수필시학의 부재 결과는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되어 철학적 깊이와 미학적 울림이 약하다는 평가와 함께 고질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모든 예술작품의 평가에서 최종적인 문제는 예술성과 그 울림의 유무에 쏠리게 된다. 아무리 이야기 구조가 견고해도 미적 울림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작품의 예술성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이야기를 미적구조로 전환하는 핵심원리인 플롯에 대해 무관심할 경우, 텍스트는 작가의 미적 창작 의도가 배제된 단순한 줄거리의 순차적 배열에 불과하게 된다. 플롯은 예술성이 약한 스트리를 감동이 큰 미적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배열원리라는 점에서 작가들에겐 중요한 탐구대상이다. 수필은 짧은 분량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산문 장르라는 점에서 더욱 정교한 플롯과 구조미학이 필요한 것이다. 작품의 미적구조와 그 예술적 울림으로 경쟁하고, 삶의 철학을 창의적 형식미학으로 형상화하는 전략의 축척 없이 수필 장르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헨리 제임스가 소설에는 백만 개의 창이 있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필에도 백만 개 이상의 창이 있다. 이야기의 다양한 구성미학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 이중구조화
[송명화]의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
옛날에는 세 가지 삼상의 수필이 존재했다. 침상의 수필은 철학하는 사색의 글이고, 마상의 수필은 자연과 인생에 대한 관조의 세계를 보여주는 글이고, 측상의 수필은 배설의 욕구를 언어로 쓴 글이다. 그러나 현대는 수필 창작과정에서 미적 울림을 창조하는 데 활용 가능한 원리와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구조의 조직방식에 따라 미적 울림통의 규모와 기능이 달라진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수필쓰기는 선비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하여 수필가는 마땅히 옛날의 선비와 같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며, 높은 경지에 홀로 서서 자기의 줏대를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읽을 가치도 없는 글을 써서 활자화하는 것은 사회 재산의 낭비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사람은 독자에게 아무 울림도 줄 수 없는 글은 발표해서는 안 된다. 독자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은 큰 죄다. 모든 문학작품의 의미는 그 구조에서 나온다. 독자를 감정이입의 세계로 인도하는 미적 울림도 기본적으로는 작품구조가 만들어내는 예술적인 공감의 힘이다. 이러한 구조의 힘은 평면층에서는 단어와 문장들의 결합방식에서 창조되지만, 입체적으로는 이야기 요소들의 예술적 결합에 의해 생성된다. 따라서 작가가 작품의 미적 구조에 대하여 무관심할 경우, 수필작품은 허약한 울림구조 속에 갇히게 된다.
뉴턴 역학에 기초한 고전 물리학이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영역에 자리를 내준 양자혁명 동안 발생한 패러다임 전환을 ‘사실을 사실대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전통수필’에서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한다’는 본격수필로의 전환에 견주어보면 어떨까.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박인규 교수는 우리 문인의 전유물이기도 한 ‘비유’를 지극히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비유는 사람을 현혹하는 법칙으로 설명을 못 할 때 둘러치는 것으로, 깨우쳤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현혹법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철새들이 왜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먼 남쪽 나라를 날아가는지 물으면,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그냥 ‘귀소본능’이라고 둘러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비유로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현상학적 관점으로 주관세계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문학자로서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지만, 참으로 과학자다운 발상임이 분명하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왜 많을까 생각해봤나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말씀에 비유가 많기 때문이다. 비유는 인식의 아버지이자 설득의 어머니다.
마술이 왜 신기하고 놀라울까? 거시세계를 지배하는 결정론적 인과율을 깨기 때문이다. 이 인과율을 따르지 않는 세계가 바로 미시세계이며, 그 세계를 다루는 것이 양자물리학이다. 양자물리학의 세계관은 결정론만 뒤업었다. 빛에 관한 뉴턴의 알갱이론에 이어 맥스웰의 파동설, 다시 아인슈타인의 입자론을 거치면서 지금은 파동이면서 입자라는 이중성이 정설로 자리잡았다. 이 전환은 오랜 결정론적 세계관에 도전하고 파동 입자 이중성, 불확실성 및 양자 중첩과 같은 개념을 양자역학이 도입했다.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여섯 가지, 양자도약, 양자얽힘, 양자중첩, 관찰자 효과, 불확정성 원리, 상보성 원리 등 양자 혁명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놀라운 과학적 발전과 기술 혁신의 발판을 마련했다. 거시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말이 안 되는 일을 양자역학의 이해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본격수필이론도 양자역학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교술이라는 전통수필 이론에 도전하고, 기존 수필에 대한 개념에서 전환하여 사실론 경험론 허구론을 거쳐 형상적 체험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새로운 시학의 전환으로 우리는 수필에 현대수필의 옷을 입힐 수 있었다.
이 장에서는 빛의 이중성을 강조하는 ‘파동-입자’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송명화의 수필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에 적용해서, 빛이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여 그 동작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도전하였는 바,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 수필의 구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과 다른 이해를 통해 더 나은 해석에 도달해 보겠다. 파동-입자 이중성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이중 슬릿 실험과 같은 유명한 실험을 했다. 이 실험은 빛이 어떻게 동시에 파동과 입자로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촘촘하게 간격을 둔 두 개의 슬릿을 통해 빛을 통과시키면 파동과 같은 행동을 암시하는 간섭 패턴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광자가 어떤 경로를 택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검출기를 배치하면 간섭 패턴이 없는 입자와 같은 동작을 관찰하게 된다. 이는 빛이 파동-입자의 이중적 성질을 띤다는 사실과 세계의 모든 물질은 보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 또한 말해준다.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
누가 여성을 꽃이라 했던가. 손바닥만 한 꽃이라니. 씩씩한 아름다움이다. 화개장터에서 데려온 주먹만 한 구근 하나에 이렇게 큰 세계가 숨어있을지 몰랐다. 달포 넘게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꽃대 끝에 사방으로 커다란 나팔형 꽃을 세 개나 피웠다. 화피갈래 속을 들여다본다. 화판 아래쪽에서 뻗쳐 나온 삐침무늬가 빨간 치마폭에 대필로 친 댓잎마냥 거침이 없다. 파죽지세다.
그 기운에 압도된 까닭일까. 말실수를 하였다. 단체톡에 올린 사진을 보고 이름을 묻는 친구에게 ‘아마조네스’라고 알려주고 폰을 닫았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 버린 것이라는데 그래도 의외의 연상이다. 아마조네스라니?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용감히 다른 손을 내민 여전사의 이미지를 그려보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서 트로피를 들고 온몸으로 박수갈채를 받던 사람, 윤여정 배우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러 나선 장수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소외감에 절어있던 국민들에게 함박웃음을 전리품으로 안겼다.
아마조네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 무사족의 이름이다. 그들은 수렵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숭배하며, 부족을 지키기 위해 무술을 익혔다. 활을 쏘고 창을 던질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쪽 가슴을 누르고, 다른 쪽으로 아이를 먹여 길렀다. 다른 종족의 사내들이 하는 역할을 도맡았으되 그들에게 있어 어미의 자리는 포기할 수도, 누구에게 대여할 수도 없는 고귀한 소명이었다. 역사가의 상상에 의지해 각색된 부분도 많겠지만, 그 부족의 여인들은 꽃이자, 벌이자, 농부였으며, 그 시대의 알파걸이었다.
그런 아마릴리스가 여든을 바라보는 할머니라면 생뚱맞지 않은가. 한껏 뻗쳐낸 긴 꽃대 끝에는 미모로 한자리하는 젊은 여배우가 더 어울린다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꽃줄기의 단호한 색깔과 꺼칠한 구근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실 양파보다 나을 게 없는 몰골이었다. 검보랏빛 껍질은 터덜거렸고, 버짐 핀 까까머리에 돋은 볼록한 혹 탓에 다른 것을 골라 봐도 별 수 없지 않았었나. 작고 강마른 할머니가 시상대 앞에 섰다. 단순한 검정드레스에 흰 머리카락을 단정히 올려 튼 모습이 화려함이나 우아함, 또는 섹시함이라는 콘셉트를 잡은 대부분의 여배우들과 확연히 달랐다. 환한 웃음을 입은 그녀에겐 은발과 얼굴주름이 보석이 되고 향수가 되었다. 덧칠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내면을 더 잘 볼 수 있었다.
“저는 경쟁을 싫어합니다. 다섯 후보들은 각자 다른 영화에서의 수상자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역을 연기했잖아요.” 겹겹 내피 속에서 고이 갈무리한 지혜가 그녀의 말에 실려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최고는 없다, 최중이 필요하다.’, ‘대본은 먹고 살아야 하는 내게 성경이었다.’는 그녀의 말을 나는 공책에 적어 놓았다. 그녀가 쏘아올린 화살이 세상을 돌고 돌아 나의 아마릴리스 꽃 속에 내려앉고, 나팔소리처럼 쟁쟁 울리고 있다. 생명을 키우기 위해 쉼 없이 영양을 빨아들여 구근을 살찌우는 노력 끝에 꽃을 피우고,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보낸다.
아니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은 윤여정의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자신의 역할’에서 ‘자신’을 지울 수는 없다. 어차피 혼자 태어나 세상은 혼자 갈 수밖에 없지만 순간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 저마다 가진 강렬한 색채를 섞고 문지르고 덜어내어 조화로운 세상을 엮어낸다. 하기에 ‘자신’은 더욱 소중하다. 자칫 잃어버린다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자신의 색깔을 찾기도 어려울 터이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란 ‘자신’에 속한 것이 아니어야 함을 알았기에 그녀는 애당초 밖에서 반짝이는 것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마음속의 금강석을 찾고 다듬었다. ‘자신’을 지켜내었다.
아마릴리스는 남미가 원산지다. 스페인어로 ama는 여자 가장을 뜻한다. -ryllis가 가지는 뜻은 알 수 없으나 나는 영어의 release를 떠올린다. 아마릴리스, ‘여성 가장의 해방’이라. 얽매임을 끊고 자신의 의지로 선다는 뜻으로 읽는다. 그러고 보니 날씬하게 뻗어 나온 여섯 개의 수술대와 하나의 암술대가 장엄하기까지 하다. 어머니의 자리다. 수술과 암술은 중매자를 기다린다. 꽃이 달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밀어 올린 꽃대는 날이 갈수록 심지를 죌 것이다. 튼실한 열매가 들어설 자리도 준비되었다. 애증의 그림자도, 욕심의 찌꺼기도 비워낸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무엇이든 슬기롭게 다독일 자신이 생겨서일까.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윤여정은 아마조네스의 전사다. 이혼의 상처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아이들을 안았다. 유명인이기에 그녀의 힘든 가정사를 사람들은 대체로 알고 있었다. 한때는 쉽게 어둠의 그림자를 벗어 내리라 생각지 못해 안쓰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빈 줄기 속에 쓰디쓴 눈물과 아픈 모정과 수많은 대본을 쟁여 넣고 우뚝 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가열한 삶에서 구한 내공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진중하면서도 재치 있게 말했다. “나를 바깥으로 내몰았던 아이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무슨 배역이든 맡아 생계를 책임지려 했던 그녀의 시간들이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무지개다리를 놓는다. 땀과 눈물이 양팔저울의 눈금을 영으로 만들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제 그녀의 트로피가 땀에 얹혔다. 그녀가 받은 갈채는 세상과 전투를 벌이는 어머니들에게 나누는 비타민이라 해도 될까.
아마릴리스 꽃잎이 바람에 잘게 흔들린다. 나팔소리를 스캔한다. 진격의 신호인가. 힘내라는 격려인가. 아니면 어찌 살았소, 잘 살았소 묻는 존재론적 의문부호인가. 나도 치열한 워킹맘이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발에 바퀴를 달고 살았다. 일인다역을 맡은 내게 알람은 수시로 나를 재촉했다. 논바닥에 조금 남은 습기를 갈무리하며 아끼고 아껴 내 땅을 다져나갈 때 미래는 어떨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칡과 등나무가 되어 만들어낸 불협화음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시간 우물의 바닥을 박박 긁어대며 동동거렸던 그 순간들이 소중하지만, 혼자라는 낱말에 익숙해진 아들을 향한 미안함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다. 이젠 아쉬움도 내 삶의 일부인 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살아내었으니 되었다.
공허한 날개옷을 벗겨주고 싶다. 회자되는 꽃말인 ‘눈부신 아름다움’ 말이다. 외관에 초점을 둔 것이겠지만, 화려한 화판 속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조준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소심한 여성성은 버려도 좋다. 그냥 ‘꽃’이다. ‘제3의 젠더’다.
“아마릴리스, 너의 별명은 여전사꽃, 꽃말은 당당함이야.”
작명의 기쁨을 즐기는 내게 이 경이로운 식물은 네 번째 꽃봉오리를 쏘아 올리는 중이다.
수필은 새가 하나의 세계인 알을 깨고 태어나듯이 인습과 고정관념을 깨고 태어난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예전부터 있어 온 세계, 기성품으로 가득 찬 인습의 세계, 타인의 가치가 규범으로 옭아매고 있는 타인의 땅에 태어난 것이다. 타고난 개성을 바탕으로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낡은 인습과 타인들의 가치로 뭉쳐진 알을 깨지 않으면 안 된다. 기성품의 세계에서의 바람은 질서와 떳떳함과 맑은 세계로, 남의 가치에 맞춘 또 다른 기성품으로의 삶이다. 이 기성품 세계의 맞은편에는 또 다른 세계의 삶이 있다. 수필 <아마릴리스>는 바로 다른 세계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송명화 작가가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키워온 ‘아마릴리스’ 꽃에 대한 수필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수필정신과 맞닿아있어 신선감을 준다. 무엇보다도 전이의 미학을 통한 문학성 견인해내기에 성공한 작품이다.
어느 한 부분도 비장함이 묻어나지 않는 데가 없지만, “윤여정은 아마조네스의 전사다. 이혼의 상처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아이들을 안았다. 유명인이기에 그녀의 힘든 가정사를 사람들은 대체로 알고 있었다. 한때는 쉽게 어둠의 그림자를 벗어 내리라 생각지 못해 안쓰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빈 줄기 속에 쓰디쓴 눈물과 아픈 모정과 수많은 대본을 쟁여 넣고 우뚝 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가열한 삶에서 구한 내공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진중하면서도 재치 있게 말했다. “나를 바깥으로 내몰았던 아이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무슨 배역이든 맡아 생계를 책임지려 했던 그녀의 시간들이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무지개다리를 놓는다. 땀과 눈물이 양팔저울의 눈금을 영으로 만들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제 그녀의 트로피가 땀에 얹혔다. 그녀가 받은 갈채는 세상과 전투를 벌이는 어머니들에게 나누는 비타민이라 해도 될까.“한 대목은 이 작품의 백미를 보여준다. 주체적 여인이고자 한다면, 유교적, 남성중심적 세상과의 전투는 여성의 운명이 아닌가.
<아마릴리스>를 쓴 송명화 작가는 실수로 아마릴리스를 ‘아마조네스’로 인지한 데서 전사의 이미지를 건져내고, ‘릴리스’를 해방을 뜻하는 영어단어 release로 풀어내었다. 이 수필의 최고 압권은 이 부분이 주는 이중성이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아마릴리스를 ‘얽매임을 끊고 자신의 의지로 선다’는 뜻으로 읽어낸다. 의미화해 놓고 보니, ‘날씬하게 뻗어 나온 여섯 개의 수술대와 하나의 암술대가 장엄하게’ 보인다고 하면서 윤여정의 이미지를 잘 소화하고 있다. 아마릴리스 꽃잎에서 나팔소리를 스캔하고, 진격의 신호로 읽어내고, 윤여정의 삶에 워킹맘으로서의 자신의 고되었던 삶도 전사 이미지에 포개어, 궁극적으로는 미의식으로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데 성공했다. 작가는 연상과 상상을 위한 전략을 수립해서 수필텍스트를 철학적 인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미학적으로 전자와 후자가 조화롭게 융화될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미의식의 창조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수필은 미적 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배우 윤여정과 자연 아마릴리스, 여성의 문제를 통찰하는 미적 사유의 예술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데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수필로서의 성공적 요인은 이중구조라는 문학적 원리를 사용하여 수필의 구조와 전개를 짜나간 데 있다. 변용, 전이 치환의 미학은 감동의 바로미터다. 이 작품의 쾌미는 이중구조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심층차원에서 획득한 제재의 성찰결과를 감동적인 이야기질서로 표층차원에서 이중구조화한 부분에서 맛볼 수 있다. 한국현대수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문제는 제재의 통찰 결과를 미적인 이야기로 이중구조화, x축과 y축으로 이원화하는 이야기 배열작업에 대한 무관심인데, 송명화 작가는 이야기의 미적 배열을 통해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 <회자되는 꽃말인 ‘눈부신 아름다움’ 말이다. 외관에 초점을 둔 것이겠지만, 화려한 화판 속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조준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소심한 여성성은 버려도 좋다. 그냥 ‘꽃’이다. ‘제3의 젠더’다. “아마릴리스, 너의 별명은 여전사꽃, 꽃말은 당당함이야.”>라는 결말부의 이런 변용미학은 송명화 수필의 의미구조 생성원리일 뿐만 아니라, 주제를 형상화하는 미적 원리라는 점에서 창작의 핵심 부분을 차지한다.
주제와 구조가 튼실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울림을 생성하도록 주제의식을 형상화하는 면에서도 모자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송명화 수필의 문학적 울림은 이야기의 감동을 구조화하는 방법과 그러한 이야기 구조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서술전략이 긴밀한 상호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마다 산고의 고통을 겪는다는 의미다. 송명화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기성품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 즉 어두운 세상을 낯선 인식으로 열어젖히는 열린 작가다. 사회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녀의 수필은 하나 같이 독자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게 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실로 우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진지한 성찰을 안겨준다. 이처럼 진지하게 우리네 삶의 본질을 천착해 보인 작품이 있었던가.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는 진정으로 우리가 읽고 싶은 수필들이라 감동을 준다. 이는 그녀가 세상을 향해 눈과 귀 그리고 가슴을 열어놓고 제 물상의 발신음을 듣는 열린 마음의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송명화의 수필 세계는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를 그 특징으로 하며 비평의 렌즈를 번뜩이면서 작가 자신이 직접 네거리로 뛰어나가 여성의 문제를 목이 터지게 외치는 그런 지성의 세계다. 송명화는 같은 시대의 대다수 여성수필가들과 달리 인식을 통한 수필 쓰기가 창작의 바탕을 이루면서 탄탄한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수필 속에서 부드러운 감성과 예리한 지성이 교직되고 있음을 발견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중화 구조를 통해 작가는 나름의 개성적 색깔을 문학적 형상화로 축성한다. 때로는 소시민적 일상을 수필적 제재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경우라도 결코 단순한 소품으로 그치는 경우란 드물다. 하동 화개장터에서 산 ‘아마릴리스’ 구근 한 톨을 ‘다시 보기’를 통해 정교하게 이중성으로 형상화하였다.
2. 변증구조화
[김규련]의 <개구리 소리>
변증구조는 정서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수필을 전개해 나가는 데보다 논리적인 글에 어울리는 논법으로 배워왔지만, 그렇지 않다. 목성균의 <세한도> 역시 변증구조 속에서 태어난 꽃이다. 10여 년 전 통섭Consilience이란 개념이 학자들 사이에 아주 뜨거운 토론 주제였다. 영어 ‘컨실리언스’가 낯설기도 했지만, 그 번역어인 ‘통섭’ 또한 아주 특이했다.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학문을 ‘사회생물학Sociobilogogy으로 통합하겠다는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의 야심찬 개념을 최재천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통섭’은 무리였다. 윌슨의 생물학적 개념들은 ‘메타언어’로서의 확장성에 한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이를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결코 넘을 수 없어 보이는 벽을 뛰어넘자는 ‘소통’의 시도로 받아들인다면, ‘통섭’은 매우 의미 있는 문제 제기였다.
비슷한 시도가 백년 전 심리학 분야에도 있었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라는 주장의 ‘게슈탈트심리학Gestaltpsychologie’이다. 사실 이 문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나왔다. 인간은 대상을 그 부분들의 지각을 종합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전체’로 인식한다는 게슈탈트심리학적 통찰은 각 학문의 분절화가 부지런히 진행되던 20세기 초반의 상황에서는 매우 획기적이었다. 대상은 가만히 있는데, 주체의 의지만으로 일어나는 ‘게슈탈트전환’은 ‘현상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으며, 언제나 주체적 시각의 사회문화적 조건, 그리고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메타이론적 확장성을 갖는다. 지각심리학의 범주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게슈탈트Gestalt라는 명사로 ‘형태’라는 뜻이고, 동사 ‘게슈탈텐gestalten’은 ‘형성하다’ ‘조직하다’ 혹은 ‘꾸미다’라는 뜻을 갖는다. ‘디자인’ 개념이 본격 사용되기 전, 독일에서는 ‘게슈탈텐’이 ‘디자인’의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인식론적 구성과정에 관한 게슈탈트심리학은 하늘에서 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당시 바그너의 ‘종합예술’ 이후로 유럽을 달구던 ‘시대정신이기도 했다. 근대 학문은 분류에 기초한다. 그러나 분류는 지속적으로 변증법적 과정을 거친다. 즉 분류와 통합,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의 분류라는 메타언어의 창출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20세기 초반 게슈탈트심리학을 낳은 시대정신이었다. 이는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주창한 바우하우스의 철학이기도 했다.
역사는 기록의 토대 위에서 보존되고 전승된다. 그래서 기록은 기억을 이기는 것이다. 수필창작의 존재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기록으로서 우리 문학의 달려온 역사를 생생히 기억나게 해줄 것이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수필은 사실을 그대로 적는 게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문학으로 만드는 것이다. 미적인 구조로 생성을 해내어야 한다. 미는 적을 이긴다. 이번 장에서는 김규련의 <개구리 소리>를 가지고 수필의 새로운 구조, 변증법적 프로세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랑비 옷 젖듯 자신 모르게 스며드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파나가야 한다. 가슴 속에 거울, 꽃씨, 옹달샘, 종소리, 엽서를 가져야 한다. 우리에겐 외면할 수 없는 역사와 현실이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로고스(논리)’만으로는 안 되고 ‘에토스(신뢰)’ ‘파토스(감성)’도 필요하다는 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이다. 저절로 피는 꽃은 없다. 우주의 정성을 모아야 한다. 옛날 수필은 가슴으로부터의 감동을 가져오면 그만이었다. 그때는 수필을 ‘정의 문학’이라고 했다. 형식보다 내용이 우선이었고, 지성보다 정서가 우선이었다. 예술성의 핵심은 복잡성이다. 이중성이나 변증성은 단순성을 넘어 선다는 차원에서 예술성으로 가는 첫관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새로운 명제를 이끌어내는 논리적인 전개 방식이다. 변증법은 정-반-합의 관계로 도식화할 수 있다. ‘정’은 기존 유지되어 오던 상태나 명제를 나타낸 것이다. ‘반’은 ‘정’을 부정하며 새로운 상태나 명제를 만들어낸다. 이 ‘정’과‘반’의 갈등을 통하여 ‘합’의 상태로 귀결되는데, 이 ‘합’은 ‘정’과 ‘반’ 모두 배제된 새로운 상태이다. 이 ‘합’이 다시 ‘새로운 정’이 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이론이다. ‘합’은 단순히 모순되는 ‘정’과 ‘반’에서 모순되지 않는 각각의 성질을 취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 둘 모두를 초월한 새로운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통합’이나 ‘융합’이 아닌 ‘통섭’과 비슷한 개념이다.
김규련의 수필 <개구리 소리>의 변증법적 프로세스
[정]
[A=A]개구리 소리= 가락도 없고 장단도 없다
시끄러운 울음소리, 단조로운 반복
<개구리 소리=소음>
개구리 소리
“지창에 와 부딪치는 요란한 개구리 소리에 끌려 들에 나와 서성거려 본다. 저녁 나절 몹시 불던 바람은 잠이 들고 밤은 이미 이슥하다.
모를 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물이 가득 잡힌 빈 논에는 또 하나의 밤하늘이 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개구리 소리는 연신 하늘과 땅 사이의 고요를 뒤흔들고 있다. 와글거리는 개구리 소리에 물이랑이 일 적마다 달과 별은 비에 젖은 가로등처럼 흐려지곤 한다. 첩첩한 산이며 수목樹木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다. 그들도 이 밤에 개구리 소리에 묵묵히 귀를 모으고 있는 것일까.
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가르르 걀걀걀걀.
산골의 개구리는 진달래가 피었다가 지고 제비꽃이 논둑에 점점이 깔릴 무렵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녹음 속에서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면 개구리들은 이제 지친 듯 조용히 입을 다문다. 비가 올 때는 더러 울기도 하지만 개구리의 한 해는 이미 저물어 간 것이다.
개구리 소리에는 가락도 없고 장단도 없다. 그저 시끄러운 울음소리의 단조로운 반복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허허로운 빈 마음으로 가만히 들어 보면 묘하게도 짜증이 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이 설레온다. 개구리 소리는 춥고도 긴 겨울을 땅밑에서 견디고 다시 살아난 개구리들의 환희의 목소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머지않아 태어날 그 숱한 작은 새생명의 창조를 노래하는 소리이기 때문일까.
개구리 소리는 즐거운 소음이다. 만약 개구리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없다면, 꽃이 피고 숲이 우거지고 개울물이 흐르며 산새들이 더러는 지저귄다 해도 이 산중은 얼마나 살벌하고 적막할 것인가. 어쩌면 정적이 지나쳐서 죽음의 공포 같은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반]
2. [A=B]개구리 소리는 즐거운 소음, 음악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허공 속으로 증발
개구리 소리는 자기의 참모습을 찾아 스스로 마음의 골짜기를 헤매게 함
열반에 들게 하는 소리
<개구리 소리=열반음>
“나는 산중생활에서 고독을 달래 보려고 요즘은 밤마다 들에 나와 논둑을 오르내린다. 농가의 들창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무논 위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면 괜히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고향집 툇마루에서 어머니 무릎에 앉아 듣던 개구리 소리를 등에 찬바람을 느끼는 나이에 이 산골에서 다시 들어 보는 서글픈 감격. 불효한 청개구리 삼 형제 얘기를 들려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며, 감꽃 목걸이를 해 걸고 철없이 뛰놀던 옛 친구들의 목소리가 금시라도 들려 올 것만 같다.
산골에 와서 살면 맑고 은은한 자연의 목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메밀꽃이 피는 가을의 석양 들길에서 발바닥이 가렵도록 들려 오는 뭇 풀벌레 소리. 늦가을 깊은 밤에 외양간의 소가 먹이를 되새길 때 목에 달린 요령이 흔들려서 땡그렁땡그렁 들려 오는 그윽한 요령 소리. 눈보라 치는 겨울 새벽, 문득 잠에서 깼을 때 머리맡에서 가냘프게 떨리는 문풍지 소리. 오뉴월 긴긴 날 진종일 앞뒷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의 피울음소리. 뜨락에 거목으로 서 있는 벽오동 잎에 여름 소나기가 후드득 듣고 지나가는 소리……. 이러한 소리에는 항시 절묘한 여운이 감돌아 무한한 자연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개구리 소리는 그윽하지도 않고 은은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구리 떼가 깊은 밤에 산천이 떠나가도록 개골개골 울어대는 소리를 듣고 섰으면 어느덧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침내 숙연해진다. 개구리 소리에는 울고 웃는 생생한 여항閭巷의 목소리가 있다고 할까. 아니면 정한에 사무쳐 흐느끼다 간 많은 서민의 목소리가 깔려 있다고 할까. 개구리 소리는 남의 불행과 고통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한까지도 더불어 슬퍼하고 아파하는 공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나는 젊은 시절 한때 몹시 가슴을 앓으며 수없이 각혈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의 안정과 약물요법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무슨 인연으로 얻은 크나큰 마음의 상처는 약물복용으로는 도저히 가시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 세월과 신앙과 음악은 구원의 신이었다. 나는 그 당시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심혼에 열광했으며, 드뷔시와 사라사테의 분위기에 감동했었다. 음악이 주는 환희의 파도와 감격의 눈물은 마음의 상흔을 서서히 씻어 주었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의 울타리 밖에서 즐기는 환상과의 대화일지도 모른다. 음악의 소리에는 자기 망각의 묘한 선율이 있다. 그 선율은 모래 위에 깔린 많은 발자국을 지워 주는 잔잔한 물결과 같다.
개구리 소리는 들떠 있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무엇인가를 생각게 하고 자꾸만 깊은 곳으로 그 생각을 유도해 간다. 음악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허공 속으로 증발시킨다면 개구리 소리는 자기의 참모습을 찾아 스스로 마음의 골짜기를 헤매게 한다.
불가에서는 최고의 이상경을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이라 함은 번뇌의 불길을 불어서 끈다는 취소(nirvana)의 뜻이 아닌가. 개구리 소리를 밤이 이슥하도록 혼자 듣고 섰으면 드디어 열반의 경지에서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을 느끼는 순간을 맛보게 된다.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이러한 순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동양의 진수를 안다고 할 수 없으리라.”
[합]
3. [A=C]문명의 소리가 동動, 자연의 소리는 정靜
개구리 소리는 선禪 ->한 개 바위 ->무거운 침묵
<개구리 소리=선->바위>
“인류의 역사는 시간의 선 위에 굴러가는 소리와 모습의 함수관계라고 할까. 세상이 달라지면 소리도 변하고, 소리가 달라지면 세상도 변해 갔다. 이제 이 지상에서 자연의 소리는 차츰 문명의 소리에 밀려나고 있다. 개구리 소리는 더욱 그렇다. 문명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조화를 잃을 때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문명의 소리가 동動이라면 자연의 소리는 정靜이다. 그리고 개구리 소리는 선禪일지도 모른다. 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걀걀 걀걀. 개구리 떼가 연신 울고 있다. 나는 먼 훗날 애환을 모르는 한 개 바위가 되어 해마다 제비꽃 필 무렵이 되면 개구리 소리에 부딪치며 무거운 침묵에 잠기고 싶다.”
김규련의 <개구리 소리>의 창작과정 분석을 통해 우리는 한 편의 수필이 변증법적 과정으로 통해 창작됨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을 논리적 구조로 풀어내면, 수필의 담론화 과정은 ‘동일률의 원리’에서 ‘모순율의 원리’로 나아가고, 다시 이 정-반이 ‘보편성의 원리’로 합해져서 존재론적으로 형상화됨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우리는 神이 만든 언어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神이 만든 언어의 집, 그것은 여과된 언어요 순화된 언어이며 승화된 언어이다. 이러한 언어는 잘 익은 술처럼 순수하게 발효되고 걸러진 언어이다. 이러한 언어의 발성은 작위적으로 꾸며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에 고인 언어를 자연스럽게 떠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표현을 위한 언어 이전의 인격이 요구되고, 문학 이전의 사람됨이 전제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물을 바라보는 나와 대상적 사물 사이에 동질적인 소성이 상호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이 가능하다는 인식의 논리가 성립된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환언하면 김규련이 ‘개구리 소리’라는 제목의 수필을 쓰는 경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사물들 가운데 '개구리'를 선택했다는 것은 작자 자아 속에 '개구리'의 소성이 특별히 내재해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의 수필 <개구리 소리>에서 "나는 먼 훗날 애환을 모르는 한 개 바위가 되어 해마다 제비꽃 필 무렵이 되면 개구리 소리에 부딪치며 무거운 침묵에 잠기고 싶다."고 피력하였는데, 이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바위'라는 사물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표현한 셈이 된다. 김규련의 ‘바위’란 편린과 유치환의 시 <바위>의 경우, 장르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하는 의식의 풍향은 대동소이하다. 동양적인 무위의 세계를 추구한 청마와 선풍의 세계에서 무념무상으로 안심입명의 경지를 추구하는 김규련의 작품세계는 장르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세계는 상호 뿌리가 닿아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볼프강 카이저는 서정적인 것에 대한 기본 태도를 서정적 거시擧示와 서정적 단언斷言, 그리고 가요적 표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서정적 거시의 경우, 세계와 자아와의 대립관계는 갈등구조로 나타나게 된다. 전쟁으로 황폐화되고 기계문명과 물질주의 배금주의로 말미암아 인간성의 붕괴가 가속되는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인 상황이 자아와 조화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물과 자아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데, 김규련의 수필은 그 사물과 자아와의 관계가 하나로 융합되어서 아름답게 내면화된 물살무늬를 이룬다는 것은 눈여겨 볼만 한 일이다. 볼프강 카이저의 '서정적 단언'에 비춰보게 될 때 김규련의 단언 중에는 "문명의 소리가 동動이라면 자연의 소리는 정靜이다. 그리고 개구리 소리는 선禪일지도 모른다."라는 의미화는 설득력 또는 호소력 있는 효과음을 내고 있다. 이러한 지배적 정황은 종교적 상상력이라든지, 철학적 인식을 통한 통찰력에서 탄생된다.
문학의 소재가 되는 피조세계를 신이 창조한 도서관으로 가정할 때 모든 사물은 장서로 비유할 수 있겠다. 종교적 상상력과 철학적 인식을 통한 통찰력이 아니고는 그 상징적 도서들을 해독할 길이 없다. 따라서 명수필을 창작하는 길은 '신기한 사건'이나 '기발한 생각' 또는 '소재의 발굴'보다는 서정적 자아에 종교적 상상력이나 철학적 인식, 또는 역사적 안목을 포함하여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침묵의 세계까지 내다볼 수 있는 사물 인식의 눈과 인식한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구조의 창출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III. 로그아웃
신라 혜공왕 7년 서기 771년에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은 세계의 범종 전문가들이 “이 세상에서 겨룰만한 것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명종”이라고 극찬했던 에밀레종의 주조원리와 방법은 수필작법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적격이다. 이 종의 종교철학적 이념과 아름다운 구조미학의 합일 속에서 창조되는 울림은 곧, 철학성과 미학성의 완벽한 통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한마디로 철학성과 미학성의 유기적 통일을 지향하는 수필작법과 다르지 않다. 현대의 세련된 독자들은 영혼을 울리는 성덕대왕신종과 같은 종소리를 원한다.
시끄러운 군중으로부터 벗어나 조용한 소수, 즉 문학적 취향을 가진 비평가, 작가, 고급독자로부터 존경받는 본격문학을 하려면, ‘수필시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조용하면서도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울릴 만큼 고상한 가치있는, 의미있는 수필을 쓰려면, 일단 형상화라는 개념에 유의해야 한다. 본격수필은 주제를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표달하는 데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해야 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주제를 직접 내보이면 안 된다는 원칙 때문에 갖가지 다른 어휘와 표현을 동원하여 숨겨진 의미를 전달해 가면서, 주제의 핵심에서 잠시라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란 본격수필작법은 이중 또는 변증 구조화로 이어지면서 생성되는 하나의 유기체다. ‘이렇게 수필을 쓰라’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주문이다.
고은 시인은 “수필은 늦가을 남아 있는 익은 감이다. 수필은 철이 들어야 써지는 영혼의 내신이기도 하다면, 나는 아직도 철부지인 것이다.” 라고 썼고, 이문열은 “시와 소설은 수필만큼 깊이 천착하지 않아도 조금 훈련하면 되나, 수필은 끝없는 내적 수련 없이 한 줄도 쓸 수 없다.”라고 고백한다. 안성수는 에밀레종의 구조원리와 방법은 수필작법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적격이라고 했다. 성덕대왕신종이 주는 수필작법의 상관성은 크게 3가지 점에서 발견된다. 첫째, 신의 음성을 담기 위한 재료의 연금술적인 합금술이다. 둘째는 신의 울림을 담을 수 있는 종의 구조적 특성이다. 셋째는 울려 만들어내는 맥놀이의 소리 공학적 음향이다.
수필에 대한 오도된, 부당한 인식을 바꾸려면, 논리적이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논리와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도움이 될 만한 자질을, 수필비평가가 되고, 수필학박사가 되고, 수필학 대한민국 명인이 되어, 지금까지 길러왔다. 시도 소설도 희곡도 아니며, 그들의 장점은 모두 가져와 변증법적으로 변용하여 절묘하게 태어난 것이 미래문학인 본격수필임을 우리 작가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벨기에의 모리스 마테를링크처럼 우리 수필가 중에서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하기를 소망해본다. 이런 갈급한 심정으로 이 작은 논고를 여러분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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