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들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면 ‘이런저런 일들을 하겠다’고 공약합니다. 총선 때도 각 지역 국회의원 후보자들은 자신을 국회로 보내주면 ‘이런 일을 하겠다’고 공약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런 공약들에 대해 거의 믿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대통령을 뽑고, 그 공약을 지킬 것이라 생각해 국회의원을 뽑았지만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국민은 공약에 속아 왔습니다. 매번 대선, 총선 후보자들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난발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들은 약속했으면 생명을 걸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수 없이 약속만 남발하고 있으니 약속하고 맹세하는 일에 대해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하게 되는 맹세, 혹은 약속에 대해 우리의 신앙적인 기준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는 수 많은 약속을 하고 수 많은 공략을 남발합니다. 여러 대상에 대해 이런 저런 맹세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얼마나 그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특히 결혼해서 살아가는 기혼자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결혼 전 배우자에게 했던 약속과 결혼 후 살아가는 모습속에서 정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완전히 180도 달라진 결혼 전, 결혼 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대체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맹세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오늘도 헛된 맹세를 남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행하는 맹세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며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맹세의 기준의 기준을 삼고 정말 참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맹세할 일이 생길 때 기억할 것, 첫째로 하늘을 걸고 맹세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5장 3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여기에서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십계명 중에서 제 3계명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의 뜻이 하나님의 이름이 먹칠 당하게 만든다든지, 나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라는 말은 이제 우리가 하는 모든 말, 모든 행동, 우리의 인격, 우리의 태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꼬리표로 따라 붙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꼬리표로 달고 행하는 모든 말과 행동,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의 명예와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약성경 히브리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 13절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맹세’란 계약서에 들어가는 서명과 같습니다. 계약서가 법적효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서명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서명에 본인의 서명이 들어갈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보다 더 믿을만한 사람이 보증을 서게 될 때, 그 믿을만한 사람이 대신 서명해줄 때 큰 힘이 됩니다. 맹세하면서 타인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그 타인의 명예를 걸고 그 맹세를 지키겠다는 악속이 됩니다. 그 명예를 실추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맹세에 사용된 이름이 맹세하는 자에게 소중한 이름이면 그 맹세의 효력은 더욱 강력해집니다. 어떤 경우 맹세할 때 부모님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 아버지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맹세해 놓고 그 약속을 어긴다면 아버지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할 리가 없다”라고 생각하며 맹세에 대해 믿어줍니다. 어떤 사람은 존경하는 선생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제 선생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라고 말할 때는 나를 가르쳐주신 분, 내가 존경하는 그 선생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이름을 내건 맹세에 믿음을 갖게 됩니다. 반면 맹세하는 사람과 별로 상관이 없는 이름은 효력이 없습니다. “제 옆집에 사는 아저씨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물론 그 아저씨와 돈독한 사이일 수는 있지만 이런 맹세를 듣고 그 맹세에 대해 신뢰를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맹세는 ‘맹세의 대상’과 ‘나’의 관계를 바탕으로 어떤 사실이나 약속의 확실함을 보증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맹세에 내세울 ‘가장 큰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일단 세상에는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이름을 걸고 맹세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게 가장 든든한 맹세, 가장 확실히 인정받는 맹세였습니다. 약속을 안 믿어줄 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다 믿어주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 신앙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맹세에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이름’은 단연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맹세의 효력이 단지 ‘큰 이름’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맹세에는 두 번째 조건, 즉 대상과의 ‘관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칙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맹세가 강력한 이유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가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자기 이름을 두신 백성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과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여깁니다. 또한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거나, 거룩히 여김 받지 못하는 것을 누구보다 슬퍼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 놓고 그 맹세를 가짜 맹세로 만들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가짜 계약서를 만들어서 사기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서명을 해놓고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하나님을 걸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처음 십계명을 주신 후에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같은 죄를 범할 것을 아시고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2절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각종 거짓 맹세를 하면서도 “나는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며 떳떳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 거짓 맹세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욕하면서 살면서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우리가 은연중에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그 신앙을 걸고 맹세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말조심하며 가능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약속, 우리의 맹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맹세할 일이 생길 때 기억할 것, 둘째로 땅을 걸고 맹세하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5장 35절입니다.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땅으로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가진 재산, 세상에 보이는 유형의 재력을 근거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재산이나 유형의 자산으로 맹세의 힘을 과시합니다. 나의 맹세를 담보할 재산이 있어 맹세를 잘 지킬 것이라고 말하면서 각종 맹세를 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만큼 땅, 돈, 물질에 연약한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은 돈과 재산을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돈의 노예가 되고 돈의 위력앞에 굴복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땅을 팔아서 그것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땅을 팔고 보니 너무 큰 돈이라 욕심이 생기고 일부는 감추고 나머지만 하나님께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하고 사도 베드로에게 맹세했는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 3~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속인 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부부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져버렸고 거짓말해서 죽은 사건으로 온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맹세, 서원, 약속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지나치면 아예 안 하니 만 못 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오늘 말씀에 적용하면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어서 교훈을 받자면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헛맹세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맹세, 즉 서원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맹세만 아니면 얼마든지 거짓 맹세와 헛된 맹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제 멋대로 약속과 맹세의 의미를 왜곡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여러 가지 맹세를 하면서 하나님과 관련 없다면 모든 맹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와 랍비들은 맹세를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행위로 만들었습니다. 율법의 시행세칙을 기록한 ‘미쉬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쉬나 속에 ‘세부오트’라 불리는 맹세의 시행세칙이 있습니다. ‘세부오트’는 맹세의 다양한 절차와 함께 어떤 맹세를 지켜야 되는 지, 어떤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사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 당시의 ‘맹세’는 일종의 말장난이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맹세라 할지라도 약간의 절차와 표현만 바꾸는 것으로 꼭 지켜야 할 맹세가 되기도 하고, 지킬 필요가 없는 맹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맹세를 받는 사람은 상대방이 맹세를 지키겠다는 것인지, 안 지키겠다는 것인지, 항상 심혈을 기울여 듣고 판단해야 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우리나라의 경우로 비유하자면 “밥 한 번 먹자”라는 맹세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친구랑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야! 밥 한 번 먹자” 말했다면 그 말은 “밥을 함께 먹어야 하는 약속을 한 것일까요?” “약속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정말 잘 파악하기 힘이 듭니다. 일단 뉘앙스를 잘 파악해야 하고 상황을 잘 봐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 그냥 인사치레이기도 하고 진짜 밥 한 번 먹어야 하는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헤어질 때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인사치레입니다. 그런데 “밥 한 번 먹자”라고 이야기하고서는 바로 언제 먹을지 약속을 잡는다면 일정을 맞춰서 서로 함께 밥먹을 장소를 맞춰서 계획했다면 이것은 맹세, 혹은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 한 번 먹자”라는 표현이 맹세가 되는 지 아닌 지 헷갈리는 것처럼 유대인들의 맹세가 바로 이랬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맹세’라는 행위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말장난’처럼 여겨졌던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23장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전’으로 한 맹세는 무효, 성전의 ‘금’으로 한 맹세는 유효라는 뜻입니다. 어찌 성전으로 맹세하면 무효가 되고 성전의 황금, 즉 물질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니 이게 무슨 뜻입니다. ‘재물과 관련되어서는 철저하게 지켜라’는 뜻인가요? ‘돈을 바치기로 한 것은 정확히 바쳐라’는 뜻인가요? 아무튼 성전에서 맹세한 것은 별 상관없지만 ‘재정에 대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라’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돈에는 환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가 될 수 있는 본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돈, 재산, 물질에 근거해서 살아가면 안 되겠고 그것을 의지하며 사람들에게 맹세나 약속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물질에 연약함을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맹세나 약속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시고 혹 맹세나 약속할 때 내가 가진 땅, 재산, 물질을 담보로 그것을 하겠다고 하는 일도 없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땅, 재산, 물질은 언젠가 없어지는 것이고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호언장담할 수 없는 우리의 경제생활, 우리의 삶 속의 재력을 내려놓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맹세할 일이 생길 때 기억할 것, 마지막 셋째 우리의 육체를 걸고 맹세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5장 36절입니다.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 말씀하시면서 “네 머리를 걸고 맹세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머리’는 ‘헤드’가 아니라 ‘헤어’인 듯 합니다. 왜냐면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머리”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경험, 경륜, 지식” 등을 뜻할 것입니다. 둘째는 그냥 우리의 “몸”, 즉 “육신”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머리”라는 것이 내가 만들어 낸 ‘나의 노력’, ‘나의 경험’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 스스로의 육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내 소유인 듯 하지만 내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머리도 안 된다” 말씀하십니다. 왜? “네 머리는 언뜻 네게 속한 네 소유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네가 네 머리털 한 터럭조차 검거나 희게 할 수 없다”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 말씀에 대해 반항하며 제게 이렇게 반문하기도 할 것입니다. “목사님, 뭐 돈 좀 들이고 노력 좀 하면 염색해서 흰 털을 검게 만들 수도 있는데요”라며 말입니다. 하지만 염색해도 궁극적으로 머리카락이 검게 바뀌는 건 아닙니다. 머리털은 그대로 흰색인데 검은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미 늙고 이미 쇠퇴했는데 안 그런 척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본다면 ‘우리의 몸’, ‘우리의 지식’, ‘우리의 경험’, ‘우리의 연륜’ 이런 모든 것이 ‘나의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지식, 우리의 경험, 우리의 생각을 의지해서 맹세하지만 우리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사사기에 보면 사사 입다는 전쟁에 나가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서원하며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제 손에 넘겨주시면 제가 암몬을 물리치고 승리해서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제 집 문에서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제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암몬 전쟁에 승리한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도착했을 때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였습니다. 입다의 무남독녀 외동딸, 이 일을 어찌 해야 할까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 딸을 번제로 받쳐야 하는 이런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서원을 지키는 일입니다. 어떤 의도로 서원을 했든 결국은 갚아야 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원을 할 때 주의하며 서원해야 합니다. 특히 성경적으로 볼 때 서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내 몸을 걸든지, 다른 사람의 육신을 걸든지 이런 것을 걸고 맹세하는 것은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사사 입다의 서원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 모두 결국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맹세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 우리 인생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 아닙니까? 따라서 내가 내 몸을 가리켜 한 맹세조차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맹세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몸을 걸고 우리의 맹세, 우리의 약속을 호언장담합니다. 어떤 일의 불가능을 예견하며 말할 때 그 일이 일어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식의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언장담해도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자기 손을 불로 지질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성을 갈겠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위협적인 맹세를 해도 과연 그가 그렇게 할지 의문스럽게 쳐다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번 더 그런 일을 하면 “손을 잘라 버리겠다”해놓고 약속을 어겼을 때 스스로 손을 잘라 버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몸을 걸고 우리의 육신을 담보로 헛된 맹세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분명히 알고 그 육신으로 헛된 맹세에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서 2장 24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은 어떻게든지 드러납니다. 아닌 척 살아가지만 결국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렇게 들통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달고 행했던 모든 죄악과 거짓된 삶은 반드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당하게 할 것입니다. 완전할 수 없는 우리의 몸, 영원할 수 없는 우리의 지식을 근거로 우리가 맹세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맹세를 지킬 수 없는 거짓말쟁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맹세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외식으로 행했던 비겁한 맹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온 몸, 온 지식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깨닫고 우리가 우리를 믿고 우리의 육체, 우리의 지식, 우리의 경험으로 약속하거나 맹세하는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은 한계가 있고 우리의 경험도 편협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며 극단적인 맹세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손을 잘라 버리겠다” “성을 갈겠다” 이런 종류의 극단적 표현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참된 삶을 보여주며 사람들 속에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내뱉는 약속, 너무나 쉽게 하는 맹세를 통해 우리는 말로 죄를 지었지만 결국 그것이 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과 직장, 이웃과 공동체에 영향을 끼쳐서 결국은 주워 담지 못할 큰 피해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말고 네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 곧 율법의 내 마음은 죄와 사망의 법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맹세를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 치앞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지키겠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지켜나갈 능력이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하지만, ‘하늘’, ‘땅’, ‘예루살렘’으로 행한 맹세는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배운 사람들은 당연히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따라 교묘하게 거짓 맹세를 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맹세를 어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어떤 맹세도 함부로 어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근본적으로 “맹세를 남발하지 말 것”을 가르치십니다. 아니 남발이 아니라 아예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이 바르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가 맹세를 해놓고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할 때 가장 욕이 되는 존재는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 인간이 맹세를 지키지 못할 때 인간은 더러운 성전이 되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택받는 신앙인이 맹세를 지키지 못해 그들의 주인인 여호와 하나님이 더러워지니 하나님께서 가장 큰 피해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교훈을 깨달으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해주시기를 기대하며 내면의 변화를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내면의 변화가 이젠 우리의 언행의 변화로, 우리 삶의 변화로 열매맺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특히 너무 쉽게 하는 약속, 너무 쉽게 하는 맹세가 큰 죄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와 여러분이 좀 더 신중한 약속, 좀 더 신중한 계약을 하면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보여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