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하지 않는 목사>
1.요즘 성경 읽는 것이 힘들다. 나이가 들수록 장이 잘 넘어가질 않는다. 신대원 입시 준비때는 하루만에 4복음서를 독파 하곤 했는데, 요즘은 한장을 읽는데 2,3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작정해서 앉아 읽다가 말씀 한구절에 빠지면 그날 읽기는 다 한셈, 넓게 크게 보다, 점점 좁고 깊게 읽기가 되어가고 있다. 가족이 함께 하는 교회 통독 운동에 아들이 나보고 자꾸 핀잔을 주는데 할말이 없다. 자기는 벌써 구약을 다 읽었다나 뭐라나. 아빠는 진즉 포기했단다.
2. 어린시절 한창 햇살이 따가울 여름, 사람들은 교회로 모여들었다. 모교는 여름 부서 성경학교와는 다른 큰 행사가 하나 더 있었다. 통독사경회, 이름도 답답한 이 고행을 하기 위해 집사님 권사님들은 교회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리곤 2박 3일을 먹고 마시고 자며 성경을 읽어댔다. 그해 여름도 그렇게나 더웠는데, 어머니는 자는 나를 깨워 교회로 향했다. 본당에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감쌌다. 여름에 교회만큼 시원곳이 없다. 간단한 예배후 부목사님들이 강단에 앉아서, 창세기1장 부터 빠른 목소리로 읽어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르고 우렁찬지 나는 홀린듯 목사님을 쳐다봤다. 침이 얼마나 튀는지 마이크가 안쓰러웠다. 권사님과 집사님들은 매장이 끝날때마다, 아멘! 하며 큰소리로 외치니, 그 참에 벌써 부터 졸고 있던 박권사님도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아멘을 함께 외쳤다.
3. 어린 내가 2박 3일 동안 성경을 하염없이 읽는 이 끔찍한 행사에 참석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었다. 합법적으로(?), 영적으로(?) 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먹고 놀수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방학숙제니, 수학문제 풀이니, 하며 시달릴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교회가 나았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니 교회만큼 아이들이 놀기에 최적화된 장소는 없었다. 늘 빵빵한 에어컨, 부서 뒷방에 쟁여놓은 낡은 기타와 악기들, 아파트와 달리 마음껏 뛰어다닐수 있는 놀이터, 또 교역자 사무실에 들어가 결혼 안한 막내 전도사님께 ‘전도사님 배고파요 간식 없어요? ‘ 라고 졸라대면 교회 앞 은혜슈퍼 에서 새우깡이니, 감자깡이니 과자를 한껏 사주셨다. 내 아버지의 집은 언제나 자애롭고 넉넉한 곳이었다.
4. 한창 성경읽기가 무르익어 어머니의 주의가 성경에 깊이 빠질때즘 모올래 본당을 빠져나와 기다리던 친구들을 만난다. 교회 뒷문 쓰레기장, 도시락 쓰레기가 버려진 쓰레기통을 뒤져, 남은 나무젓가락과 고무줄을 한 껏 가져온다. 나무젓가락을 고무줄로 잘 묶으면 멋진 고무총을 만들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무 총으로 온 교회를 뛰어다니며, 신나게 총싸움을 했다. 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어머니들은 으레히 우리를 찾지 않았고, 우리도 딱히 어머니들을 찾이 않아도 어디서든 도시락을 얻어먹고 또 방들을 돌아다니며, 놀수 있었다.
5. 어스름이 짙을 저녁이 되면 아버지들이 직장을 마치고 교회에 오셨다. 교회 마당에서 밥을 먹고, 놀고 있으면 아버지가 저어기서 까만 봉지에 하드를 잔뜩 사오셨다. 그리곤 인사를 하는 친구에게 ‘니가 박집사님 아들이가? 지워이랑 사이좋게 놀아라” 하시곤 서둘러 본당으로 서로서로 인사를 하시며 올라가셨다. 그리곤 시작된 저녁 통독 집회. 낮에는 어머니들만 계셨는데 그 곁을 이제 아버지들이 오셔서 졸린눈을 비벼가며 그렇게도 또 성경을 읽으셨다.
6. 밤 10시가 되면 마무리를 하는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위에 앉아서, ... 한창을 놀다, 그 찬양이 들려오면 아쉬움을 달래며 본당으로 들어갔다. 그럼 어머니는 이제야 들어왔냐는듯 눈을 흘기며 땀을 뻘뻘흘리는 내 이마를 닦으며 무릎에 앉히셨다. 아버지께서는 벌써 성령이 임하셨는지 삼층천을 헤메고 계셨다.
7. 아버지는 출근을 위해서 집으로 가시고, 어머니와 나는 교회에서 잠을 잤다. 사실 가장 나의 큰 역할은 여기에 있었다. 함께 잠을 자지만, 그래도 막내아들을 옆에 두고 잠을 주무신것이다. 그게 내 가장 큰 임무였다. 자리가 따로 없었다. 성경을 읽던 장의자 그냥 거기에 누으면 거기가 침실이었다. 교회당, 높은 천장을 보며 자리에 누으면 천장의 조명이 하나님 처럼 내려오셔서 임하시는 것 같았다.
8. 코로나로 인해 성경통독의 숫자가 작년보다 증가했다고 하는 보고를 들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성경을 좋아하는지, 성경읽기를 좋아하는지, 양이 질을 담보하는데, 성경읽기의 양이 우리 신앙의 질을 담보하느지, 뭐라 딱 꼬집어 말할수 없어, 허허 하고 웃었다. 강영안 교수님의 <읽는다는것> 에서, 저자는 레슬리 뉴비긴을 만난 일화를 이야기 한다. 당신은 복음주의자입니까? 나는 복음주의자가 아닙니다. 왜요?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외우고 인용하지만,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그말이 저자에겐 큰울림이 되었다. 성경을 읽는다는 행위, 그 지엄하고도 놀라운 계시의 말씀에 이어지는 놀라운 삶이 드러나질 않고, 앎과 믿음이 괴리되는 경고의 메시지인듯 했다. 그렇게나 성경읽기를 좋아하고 사모했던 한국교회인데 지금 자화상은 우리의 읽기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직감하는 시간이었다.
9. 어쨋든 더운 여름이 끝났다. 부서 통독 인원체크 하던 스트레스에서 한고비를 넘겼다. 그래도 체면치레는 했으니, 다행이다. 통독하지 않는 목사 밑에서 이정도 나왔으니 성공한 셈이다. 통독시상을 하는 주일 저녁을 보내니 어린시절이 떠올라 주저리 주저리 글을 적는다. 주일 저녁 토로하는 심정으로 글을 발산하니 즐겁다가, 힘들고, 힘들다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