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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빛된교회 최철호 목사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1,2).
1. 성경은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이고 사람의 딸들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그들이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고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천사일 것이라고 보았지만, 천사는 형태가 없는 영적인 존재이니 맞지 않습니다. 대다수 학자들은 그들이 셋 가문의 아들들이라고 보는데, 그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입니다. ‘사람의 딸들’이 누군가에 대하여도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지체가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이라고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인간의 딸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가장 일반적이고 구속사의 관점에도 맞는 것은 그들이 가인 계통의 딸들이라는 견해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2. 하나님께서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를 무언으로 구별해 놓으셨지만 살다 보니 양 가문 사이에 통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합니다. 셋 가문의 아들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 표현은, 셋이 아버지 아담의 형상과 모양대로 태어났고,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계보의 정통성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하지만 가인에 대하여는 셋처럼 “아담이 …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5:3)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하나님께 정통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셋의 가문은 세상과 구별된 생명계보에 속하고, 가인의 가문은 육신에 속한 계보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셋 가문의 남자들이 가인 가문의 딸들에게서 느낀 ‘아름다움"9;*3;*6;토브’에 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바로 그 단어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2:17)라고 할 때 그 선을 일컫는 단어이며, 하와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3:6)라고 할 때 ‘직도 하고’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가인 가문의 딸들에 대하여 ‘아름답다beautiful, 예쁘다fair’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그런 평가란 것이 매우 주관적인 관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다움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다움은 곧 선함goodness입니다. 그것은 악과 대칭됩니다. 그에 반해 사람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이란 기껏해야 눈에 보기에 예쁘고 매력적인 것입니다. 물론 인품이 아름답다, 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전자의 아름다움은 하늘에 속합니다. 후자의 아름다움은 땅에 속합니다. 하늘에 속한 것은 신령하고 땅에 속한 것은 속됩니다. 전자는 영원하고 후자는 일시적입니다. 일시적인 것은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여자가 몇 살 때 가장 아름다울까요? 팔십이 넘은 여자의 얼굴은 이팔청춘의 나이에 비해 어떻습니까? 봄철 가로수를 화려하게 수놓는 벚꽃은 그 아름다움이 며칠이나 유지됩니까?
4.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혼에 있습니다. 성경은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을 ‘늙은 자의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잠 20:29).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머리에 있는 아름다운 관이라고 하고(잠 1:9), 입술에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잠 22:18).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전 7:12 ; 고전 2:1). 그리스도의 신부들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름다움이고(아 4:10), 포도원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곧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사 27:2). 왜 그렇게 말합니까? 거기에는 단순히 ‘예쁘다’란 시각적 인식을 넘어서는 내면의 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르면 눈에 보이는 육체의 아름다움 밖에 인식하지 못합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오감을 통하여 지각되는 생물학적 작용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인식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인종에 따라 미美의 기준이 다른 이유입니다. 미란 얼마든지 꾸미고 조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유투브가 발달하여 온갖 내용이 다 올라오고 있는데, 중국에 사는 어느 50대의 정말 못생긴 여인이 화장을 통하여 얼마나 변모될 수 있는지를 촬영의 전 과정을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화장 후 여인의 모습은 20대의 절세미인이었습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자기 눈의 표상적 인식에 불과합니다.
5.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이 표현이 새 언약에 이르러 새사람과 옛사람으로 승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인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새사람의 성품을 지니게 됩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8-10).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간직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러한 신분 상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6. 우리는 셋의 딸들이 모두 못생겼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셋의 딸들은 인위적인 꾸밈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연미를 그대로 간직하였을 것입니다. 반면, 가인의 딸들은 속되어서 가꾸고 꾸미는 것을 즐겨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공미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남자들의 눈에 매혹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분칠 뒤에 감추어진 진짜 얼굴은 모른 채 말입니다. 그리하여 양 가문 사이에 통혼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비롯하였습니다. 맑은 물과 구정물이 섞이면 모두 구정물이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좋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언하셨습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3절). 즉 통혼으로 말미암아 생명계보에 속한 자들이 육체에 속한 자들로 변질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연관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하여 행진하던 중, 모압 평야의 싯딤에서 숙영할 때입니다. 그곳은 약속의 땅과 가까운 곳입니다. 목표를 코앞에 두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사건으로 벌어졌습니다. 숙영하는 동안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모압 여자들을 만났습니다. 보니까 광야생활에 찌든 자기 동족의 여인들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일순간에 매혹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모압 여자들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간음을 행하였습니다. 또 자원하여 모압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브올의 신전에 들어가서 제사에 참여하였습니다. 결국 그 사건으로 주동자는 체포되어 목이 매달렸고, 간음죄를 저지른 남자와 여자들은 처단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염병이 발생하여 이스라엘 사람 24,0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민 25:1-9). 하나님은 이미 그 사건에 앞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 34:16)고 하셨습니다. 그 사건 후 하나님은 아라바 광야에서 다시 경고하시기를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고 하셨습니다. 신약은 이 교훈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라는 말씀으로 승화하였습니다.
7.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통혼하여 살면, 즉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모압 사건이 잘 보여줍니다. 멍에를 같이 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심화되면 이렇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5,6절). 온 세상에 사람들의 죄가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으로 죄를 짓고, 생각으로 죄를 짓고,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고 합니다. 죄 덩어리인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멍에를 함께 맨 데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새롭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면 그렇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8.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한탄하다ם*5;נ나함’라는 말 속에는 ‘후회하다, 슬퍼하다, 불쌍히 여기다’ 등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에는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한탄하다, 후회하다는 모두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후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오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그렇게 번역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하였습니다. 사실 한탄하고 후회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후회하고 한탄합니까. 후회하고 한탄하면서 다시 되풀이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은 세상사로 인한 염려와 근심에서 비롯하는데, 이 근심을 없애는 근본적인 처방이 없을까요? 이교도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잠과 권태와 우울을 이겨야 한다. 게을러서는 안 된다. 교만해서도 안 된다. 과거에 있었던 것(번뇌)을 지워 버리라. 미래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라. 아무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평안해지리라.” 하지만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것이 안 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것은 아주 쉬운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됩니다. 말씀 가운데 들어오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이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9. 셋의 후손들은 그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잃어버렸다면, 가인을 비롯한 다른 가문의 후손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한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질게 마음을 먹고 결심하셨습니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7절). 그것은 곧 심판의 예고이자 새 창조의 예고입니다. 마지막 날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로 구별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바로 그러한 것을 담지擔持합니다. 우리에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도 일상적으로 마스크를 써야 하는, 미세먼지로 혼탁한 이 세상은 새 창조를 예고하는 새벽 직전의 어두움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안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10. 성경의 다음 구절은 우리에게 큰 깨우침을 줍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은총)를 발견하였더라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눈을 보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눈에서 그분의 은혜를 발견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의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언제나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발견하고 알고 은혜를 발견합니다. 은혜를 발견한다는 말은 은혜를 입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제 소견대로 살면 은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로 지켜주십니다(시 5:12). 하나님은 당신께 피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시 31:19).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딛 2:1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은 은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발견한 은혜의 순간은 깊은 영적 교통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밀한 교통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것을 창조된 지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립[自存]하는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그 본성상 신적 지성에게만 적합한 것이게 된다. 이런 것은 모든 창조된 지성의 자연적 능력을 넘는 것이다.” 여러분의 감각과 인식을 뛰어 넘으십시오. 여러분의 이성을 뛰어 넘으십시오. 여러분의 고정관념을 뛰어 넘으십시오. 그리고 성령 안에 깊이 머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영과 혼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 중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견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한 신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속성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동일시 하셨다(요 10:30).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고, 그 말에 대해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반응했다.
사복음서 중에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는 복음서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힌다(요 20:31).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이 그분이 유대인의 왕, 즉 “다윗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요한복음에서의 그분의 표적들은 예수님의 신성, 즉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명하고 있다(요 20:30,31).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은 구약과 신약에서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혈통인 “셋의 후손”이라고 오해하지만, 이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 온 인류가 함께 타락했음을 간과한 생각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가 아무리 선하고 경건해도 결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수 없었다. 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단지 이사야 43:6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나의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하셨을 뿐이다.
구약에서 이 용어는 다섯 번 등장하는데(창 6:2,4, 욥 1:6; 2:1; 38:7), 다섯 번 모두 천사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홍수 직후 기록된 책인 욥기에 잘 정의되어 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이 용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들이 분분하지만, 욥기 1장과 2장에서 이 용어가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자연히 창세기에서도 이 용어는 천사들을 뜻한다는 것이 증명되는데,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합하여 낳은 존재들이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기형적인 거인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통의 인간이 아닌 특수한 존재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범죄하여 땅으로 내려온 천사들로, 베드로후서 2장과 유다서에서는 노아의 홍수의 원인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 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천사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언급하실 때, 부활 때의 몸은 결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22:30). 일반적으로 이 말씀을 근거로 천사들이 무성(sexless)의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천사들이 무성이라는 것은 성경 어느 구절에서도 뒷받침될 수 없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땅에 내려온 천사는 항상 젊은 남자로 등장한다(창 19:10-15, 판 13:3-21, 행 1:10,20:12, 갈 4:14, 계 21:17). 남자들끼리는 결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천사들이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구약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 6장의 주석 참조)
이에 반해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들을 말한다. 아담에게서 태어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방법이 신약에서 제시되었다. 이 방법은 유일한 방법이며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요한복음 1:12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아담이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심을 알아야 한다(고후 4:4).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성령으로 거듭난 신약 성도들에게만 다시 회복될 수 있다. 『그 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태어나신 첫 번째 사람이시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요 3:5). 그들의 육신은 인간 부모에게서 났을지라도 그들의 죽었던 영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 중에 첫태생이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신약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롬8:14).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그러므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변화할 것인데(롬 8:29, 빌 3:21, 고전 15:49), 그 몸은 또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몸과도 같다(마 22:30). 이 몸은 피가 없이 살과 뼈로만 구성되어 있고(눅 24:39), 구운 생선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실제적인 몸이면서도(눅 24:42),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신비한 몸이다(요 20:19). 이 몸은 순간적으로 우주 저 너머에 있는 셋째 하늘에 갔다 올 수 있는 몸이며(요 20:17, 마 28:9, 고전 15:52, 살전 4:16,17), 보였다가 안보이기도 할 수 있는 몸으로(눅 24:31), 예수님의 부활 때의 몸과 같이 서른 세 살 반 된 남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일어나며(고전 15:49-52, 요일 3: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복된 소망을 갖는다(딤후 4:8, 딛 2:13). 또한 성경은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길 기다린다고 말씀한다.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나니 이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의가 아니요, 오직 소망 가운데 그것들을 굴복케 하시는 그 분 때문이니라』(롬 8:19,20).
그러나 그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비뚤어지고 변질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마귀의 자녀(요일 3:10), 불순종의 자녀(엡 2:2), 진노의 자녀(엡 2:3)였으나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진리가 가리워진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비추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는 너희 하나님의 아들들이 흠 없고 순전하여, 비뚤어지고 변질된 민족 가운데서 책망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 너희는 세상에서 빛들을 비추는 자들이라』(빌 2:15).사도행전 13장 22- 23 절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하나님은 각 사람들을 보시고 의사가 병자를 진찰 한 후에 진단을 내리는 것과 같이 각 사람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시고 다윗에 대한 평가로 이같이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우리도 각 사람을 처음 만나면, 첫인상이라는 것으로 그 사람에 대하여 내가 느끼는 것으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10년 만에 만난 친구를 평가를 합니다. 그 사람이 많이 늙었더라. 약해 졌더라. 거만해 졌더라. 싸가지가 없더라는 등등의 평가를 하듯 하나님이 당신을 보실 때 평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평가하기를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평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평가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적절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평가한 후에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우신 원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일개의 목동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구주가 나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먼저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자가 되면, 하나님이 나의 됨됨을 따라서 하나님의 세우신 뜻을 나를 통하여 이루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다윗은 어떻게 살았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1.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6절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불레셋 사람이리이까” 하면서 어린 소년이지만 하나님의 명예를 존중하며,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내 생명을 바치려는 각오를 가지고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간 다윗입니다. 골리앗과는 상대도 되지 않고,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린소년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 마음에 쏙 드는 것입니다. 내 평생을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살겠다는 각오를 갖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2. 믿음으로 달려 갈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17장 45-49절에는 어린 다윗이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않음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하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달려 나가는 믿음을 보신 하나님은 그 믿음에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여기고, 믿음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믿고, 달려 나가는 믿음에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자라 하시며 믿음의 다윗을 기뻐하셨습니다.
3. 찬송을 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됩니다. 시편 69편 30절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도 수금을 타고 비파를 연주하며 사울 왕에게 붙은 사귀를 좇아냈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혼자 양을 지킬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악기를 열심히 배우고, 연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다윗이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는 것을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광대하시다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 하나님은 커다란 황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4. 회개를 열심히 하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특징이 있다면 회개를 열심히 잘하는 회개의 선수입니다.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 안 시키고 자기의 잘못을 자기가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회개의 선수입니다. 우리아의 일로, 인구를 조사하여 많은 사람을 죽게 한 일로, 다윗은 평생을 눈물로 회개하면서 살았습니다.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됩니다.
5. 하나님께 아낌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됩니다. 역대상 22장 14절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돌과 재목들을 예비하였으나” 다윗은 일평생 모은 재물을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기초 금을 만들고, 그 일에 몽땅 바쳤습니다. 아낌이 없이 하나님께 바치는 그 마음에 하나님은 그 마음을 내 마음과 합한 자라 하시며 기뻐하시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예비하는 그 손길과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정리: 오늘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무엇이라고 말 할까를 생각하여 보십시다. 돈밖에 모르는 놈, 제 몸만 아는 몸, 제 자식만 아는 놈, 욕심쟁이 등등의 말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마귀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나를 보시고 계심을 잊지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도록 노력하면서 힘을 쓰면서 살아가십시다. 이렇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 사람을 통하여 크게 사용하는 역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귀한 사역과 복이 임하게 됩니다. 이러한 복을 받는 성도가 되고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하나님의 돌보심 / 출2:23-25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를 죽이려던 애굽왕이 죽고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애굽인들의 횡포가 극에 달한 사실과 그로 인해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일하실 시간이 가까웠음을 암시해 줍니다.
1. 시공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여러 해 후에”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피했던 나이가 40세였고, 바로 앞에 나아간 나이가 80세였으니 약 40여 년의 세월을 미디안에서 평범한 한 사람의 양치기로 지내온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 왕은 죽었다”고 합니다. 모세를 쫓던 포악한 애굽왕 투트모스 3세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히브리 민족의 고난은 극에 달했고 그 결과 히브리 민족이 애굽을 떠나는 일에 대해 동의할 만큼 애굽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같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표에 맞추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리고 그 속에서 일하시고 계십니다.
2. 탄식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탄식하며 부르짖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무거운 고역이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긴 세월의 모진 고통을 겪고 나서야 통곡하며 그들의 하나님, 그들 조상의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생들의 본성은 평안할 때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평안할 때 감사하며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고난이 닥칠 때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 혹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사인인 줄로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앞에 엎드리며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상달되다”는 ‘올라가다, 드리다, 운반되다’란 의미로 마치 향이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에 닿았다는 뜻입니다. 계5:8의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금대접에 담아 어린 양께 드렸던 향, 곧 어린양께 상달된 성도들의 기도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인내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돌보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
24절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대강 듣는 것이 아닌 세세한 것까지 자세히 주의하여 들으시고 적절하고 명확하게 응답하심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의 언약을 기억하심”은 잊고 있던 사실을 새롭게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창15:13-14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제 자손들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이 약속을 항상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과 돌보심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도 이와 동일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모습 5가지
1.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예배자
마5 : 16-17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참된 예배자는 말씀과 삶이 철저히 일치하는 삶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참 예배자의 모습이다.
2.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예배자
고후9 : 8-9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며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예배자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고난당하는 자와 낮고 천한 자들을 위해 끊임없는 사랑의 손길을 펼치셨다. 예수님의 제자인 예배자들도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예수님이 하셨던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될것이다.
3.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예배자
고전2 :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세상을 살면서 늘 분주하여 주님을 잊어버릴 때가 많이 있다 참된 예배자는
내 생각, 내 의지. 근심걱정 등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는
예배자이다.
4.겸손한 예배자
빌립보서 2 :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5.전도하는 예배자
막16 : 15-16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은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예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시고
3 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는 사실을 널리 전파하는 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십자가로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 - 8)
+ 성경: 에베소서 1장 22~23절
+ 찬송: 185장, 94장
+ 요절: 에베소서 1장 23절
---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엡 1:10)
이 구원 계획이 실현된 곳이 어디겠습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무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통일 된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건강한 몸은 머리의 지시에 따라 모든 지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나가듯이,
머리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온 성도가 하나 되어 움직여 나갈 때
건강한 교회가 만들어집니다.
건강한 교회는 어려움과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라
그 어려움과 문제를 극복해 나갈 힘을 주님으로부터 채움 받는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날마다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계 2, 3장)
고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늘 친밀함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행하고자 하시는 일을 교회가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무엇을 하고자 할 때는 머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움직입니다.
머리가 결정한 것을 정작 실행하는 것은 몸의 각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머리 되신 예수님이 이 땅을 향해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을 때,
그의 몸 된 교회가 나아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것의 실제적인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서 메시지를 전하기를 원하실 때
몸 된 교회가 입을 벌려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기를 원하실 때 몸 된 교회가 가서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고자 하시는 곳이 있을 때 몸 된 교회가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려고 하실 때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따라서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되어서 이 땅에서 주님의 사역을 온전히 가망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러면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머리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에 ‘몸이 병들었다’고 합니까?
머리의 지시가 몸에 온전히 전달되지 않거나 전달이 되었음에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우리는 ‘병들었다’고 말합니다.
몸의 건강은 머리와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교회의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건강은 교회 자체에서 진단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 되신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지체된 우리가 몸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병들거나 죽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을 누려,
생명과 능력의 충만을 채움 받고 순종함으로 이 세상을 치유하는 교회가 됩시다.
- 창골산 봉서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