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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811
7월4일 [연중 제1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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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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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nsQ060Ck_8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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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 치유의 은총이 아니라, 병을 잘 견뎌내는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변보다 집필에 더 탁월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가장 잘 드러내는 편지가 코린토 2서입니다. 몇몇 표현들은 2천년 세월을 건너와 오늘 우리에게 큰 기쁨과 위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코린토 2서 2장 15절)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4장 8~9절)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12장 10절)
쉼 없이 방황하고 흔들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사목적 열정이 코린토 2서 전체를 휘감고 있습니다. 때로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어투로 격려하는가 하면, 때로 노기 띤 어조로 꾸짖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 모든 노력은 어리고 여린 초대 교회 신자들을 향한 애끓는 사랑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봉독한 12장은 바오로 사도가 서기 57년경에 쓰신 ‘눈물의 편지’로 유명합니다.
회심이후 바오로 사도가 보여준 여러 태도 가운데 가장 변화된 측면이 한 가지 있다면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들을 아무 스스럼없이 공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약점이나 결핍, 실수나 흑역사들을 어떻게 하면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꽁꽁 감출까 고민합니다. 감추는 것뿐만 아니라 그럴듯하게 미화시키고 포장하려고 기를 씁니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과의 참 만남을 통해 새 인간으로 재탄생한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 어두웠던 과거나 부끄러운 실수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발산하신 강렬한 생명의 빛 앞에 자신의 모든 죄악이나 어둠이 완전히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자신 안에 주님께서 더욱 커지고 더욱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체면이나 이미지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 자신이 작아지고, 낮아지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저 주님만이 전부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였기에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가장 부끄럽고, 가장 감추고 싶은 약점까지도 사람들 앞에서 담담하게 밝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2장 7절)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난무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전도 여행길에 겪은 내적, 육체적 병고로 여겨지는데, 구체적인 병명을 알 길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엄청난 계시의 은총을 받은 나머지 자만하거나 우쭐해질세라, 하느님께서 엄청난 병고를 주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험난한 전도 여행길에 바오로 사도는 자주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예수님께 올렸습니다. 더 건강해지면, 더 열정적으로 복음 선포를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쉼 없이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 끝끝내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에게 병을 잘 견뎌내는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병약한 바오로 사도가 그 몸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 복음 선포를 강행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힘과 능력으로 복음 선포에 매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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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e9fZlBzR7I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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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을 가지기 위한 연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환영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닫혀있다면 그 사람과 친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매일 톱을 들고 산으로 가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 할머니는 시집올 때는 예뻤지만 남편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여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이 죽자 아이들을 무시당하지 않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산에서 톱질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건강입니다. 환상을 보고 환청을 듣습니다. 눈에서 고름이 나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다 성장했는데도 여전히 산에 올라 보통 사람이 들기도 어려운 커다란 나무를 메고 내려옵니다. 식수와 가스가 단절되어 더러운 물과 오래된 식자재로 식사를 합니다.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 제작팀에서 의료진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할머니는 톱을 휘두르며 그들을 위협합니다. 할머니는 그들이 자녀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무디게 만드는 방해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동네 사람들까지 음식을 가져다주며 도와주려 하지만 언제나 할머니의 마음이 열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출처: ‘긴급 출동한 의료팀이 톱으로 위협당함’, 유튜브 채널, ‘우와한 비디오’]
마음이 닫혔다는 말은 상대를 이미 내 방식대로 규정했다는 뜻입니다. 할머니는 자기 생각으로 모든 것을 규정합니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자신을 납치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는 모두 이전에 받은 상처 때문에 생긴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두려우면 자신을 해칠 사람인지 아닌지 저절로 구분하게 되기 때문에 상대를 규정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누군가가 다가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밥을 주로 쓰다듬어 주려 다가가는데 자신을 해칠까 봐 무조건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하는 개와도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마치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다 아는 듯이 말합니다. 그분의 부모와 형제들과 학교 성적까지도 다 아는데 자신들에게 무슨 복음을 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제가 일반 대학 1학년 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사적 계시는 무조건 좋지 않다는 편견 섞인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것에 대해 조금은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10권의 책을 다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열린 마음이란 ‘규정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 교회를 박해할 때 그를 적으로 여겼지만, 그는 가장 훌륭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우주보다도 큰 신비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규정하는 사람들은 일단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에게 규정당하고 그렇게 자신이 믿어버리면 자신 안에서 일으키는 주님의 신비로움까지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베들레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한 부부가 메시아의 부모가 될 것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판하는데 버릇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브루클린의 거리에서 구걸하던 한 노숙자 테드 윌리엄스. 그가 구걸하는 표지판에는 자신에게 신이 내린 목소리가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우연히 한 기자가 테드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때 촬영한 그의 목소리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자 여러 방송국에서 그를 성우로 섭외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억대 연봉을 받는 성우가 되었고 노숙자들을 위한 구호단체도 만들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출처: ‘구걸하는 노숙자에게 말을 걸자 튀어나온 천상의 목소리’, 유튜브 채널, ‘타임스낵’]
한 사람은 온 우주보다 큰 ‘신비’입니다. 사람이 신비가 되게 하시는 분은 신비 자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을 하느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우주도, 혹은 우리 육체도 잘 모르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안다고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을 규정할 때, 마치 성체를 눈에 보이는 밀떡이라고 믿어버릴 때 그 밀떡을 통해 오시는 그리스도를 막아버리게 됩니다. 열린 마음을 가지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자신의 처지를 겸손되이 인정하고 누구도 판단하거나 규정하지 않는 연습입니다. 판단을 멈추십시오. 그것이 겸손이고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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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은 늘 관심밖에 있었다.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어기기만 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만을 고집하여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계속 사랑하셨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 2,5). 바로 예언자의 모습은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다. 그 예언자가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최고도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최고의 값진 “선물”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의 완고함과 거부감이 최고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매우 역설적이지 않은가?
복음: 마르 6,1-6: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역시 예수께서 당신 고향에서 복음선포에 실패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불투명하고 무장되어 있지 않을 때는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이 어렵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2절) 예수께서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혜와 그 기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분을 거부하는 반응은 왜 나타났을까? 그것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시기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여러 가지 표징은 믿음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3절). 이는 믿음의 단절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출생상태나 성장배경 가족상황을 모두 아는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예수께로부터 그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해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의심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은 일상의 평범한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다의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품위를 보존한답시고 예수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 그분을 오르게 하는 것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의 길이며 예수께서 가셔야 할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기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의 표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적이 있으려면 적어도 어떤 신앙의 발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을 통해서, 권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약성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나자렛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기적은 단순한 목수에 지나지 않은 비천한 마리아의 아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특별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는 그분의 권능에 더 집착하려는 신앙에 맞서는 것이다. 특별한 징표를 추구하다가 자칫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실망하고, 더구나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주님을 거부하는 잘못도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2,9). 일상적인 평범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고통과 가난의 “징표”를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외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여, 성성의 커다란 표지가 되지 못한다고 꺼리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더 성실히 우리의 일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끌어내는 교훈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을 가지고 하느님께 우리의 신앙을 강요하면서 진정 참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의 모든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자. 모든 일은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며, 일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모든 삶의 순간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그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눈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겸손되이 청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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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순간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삶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갑니다.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다가도 다른 이들이 가진 것과 비교하기 시작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행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악을 물리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며 아픔을 없애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이에게 행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내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과 비교하고 자신의 아들과 비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라는 행복을 체험하지만, 결코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행복하려면 내 곁에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해야 합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가지지 못할 것에 마음을 두는 순간, 하느님의 나라는 지옥으로 바뀌게 됩니다. 타인을 자신의 행복을 재는 도구로 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함께 기뻐해 줄 때 나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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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 6,1-6)
1)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메시아의 모습이나 예언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을 잘 알고 있는데, 저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다.”가 나자렛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지혜로운 말씀’(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루살렘 주민들도 자기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요한 7,27)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 7,28)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출신지와 직업과 가족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싶다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2) 여기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싫어했음을 나타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목수라는 직업 때문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천대하고 무시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천대하고 무시하는 ‘보잘것없는’ 목수가 설교를 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가 나자렛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은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은총을 받는 것을 방해하는 ‘큰 걸림돌’입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혀서 인생을 모두 망친 사람으로서 대표적인 인물은 ‘사울 왕’입니다.(1사무 18,9) 그의 시기심과 질투심은 그 자신의 인생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큰 해를 끼쳤습니다.
3) 루카복음을 보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루카 4,28-29) 나자렛 사람들이 화를 낸 것은,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선민사상과 특권의식에 빠져서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가?”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신의 복음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모두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4)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라는 말은, 청하는 사람이 없어서 기적을 일으키실 기회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몇몇 병자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청해서 치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청하기만 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예수님)은 누구에게나 풍성한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또 청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받고 싶으면 청해야 합니다. 은총은 청하는 사람이 받는 법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안 믿고, 그래서 예수님께 청하지 않는 사람은, 청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안 받는 것입니다.
5)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래서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안타까움’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신 뒤에 “믿기 싫으면 믿지 마라.”, 또는 “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다 끝나버린 것 같은 상황이더라도, 그래서 인간 쪽에서 스스로 포기하더라도, 예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제발 회개하고, 믿어서, 생명을 얻어라.”라고 간곡하게 호소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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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의 숙소는 2층입니다. 사무실과 주방은 1층에 있습니다. 계단에는 손잡이가 있습니다. 1층에서 올라 올 때는 손잡이를 거의 잡지 않습니다. 그러나 1층으로 내려 갈 때는 손잡이를 잡습니다. 균형을 잡기도 좋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나오는 차들은 안전장치가 잘 되어 있습니다. 차선을 넘어가면 ‘삐’ 소리가 납니다. 주변에 다른 차가 가까이와도 ‘삐’ 소리가 납니다. 자동 속도 조절 장치(쿠르즈 기능)이 있습니다. 앞 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해진 속도를 유지합니다. 장거리 운전에는 편리한 기능입니다. 집에 있는 정수기에도 뜨거운 물이 나올 때는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화상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냉장고도 문을 오래 열어 놓으면 ‘삐’ 소리가 납니다. 문을 닫으라는 신호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예언자’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의 역할은 ‘안전장치’와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면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고통 중에 있을 때는 하느님의 위로를 전해 주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불의한 권력을 행사하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로 나가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새로운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 넣어주시면 마른 뼈도 살아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안전장치는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모든 사고를 막아주지는 않습니다. 결국은 안전장치를 이용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안전장치를 무시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안전장치를 너무 과신해도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지만 예언자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는 않습니다. 결국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작년에 코로나19가 시작될 때입니다. 안전수칙은 있었습니다.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신속한 검사, 확진자의 격리, 시민들의 협조입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런 안전수칙을 준수했습니다. 대한민국은 K 방역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추적, 검사, 치료’라는 방식으로 코로나19를 안정적으로 관리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미국은 대통령부터 코로나19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마스크도 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거리두기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가 나오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안전장치는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가 있는 뉴욕은 한국에서의 운전 면허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뉴욕에서 운전하려면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필기시험은 예상 문제지가 있어서 하루정도 공부하면 무난하게 합격합니다. 그러나 실기시험은 한국에서 운전을 잘 하던 사람도 곧잘 떨어지곤 합니다. 한국에서의 운전경험을 믿고 별 연습 없이 실기시험을 보기 때문입니다. 실기시험의 기준은 얼마나 운전을 잘 하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안전운전을 하느냐 입니다. 핸들은 양손으로 잡아야 합니다. 멈춤에서는 반드시 3초 정도 멈추어야 합니다. 규정 속도를 지켜야 합니다. 방향을 바꿀 때는 반드시 머리를 뒤로 돌려서 확인해야 합니다. 한국에서의 운전 경험을 믿고 무심코 운전하다가 실기시험에서 떨어지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실기시험 감독관이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감독관은 저에게 축복의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신자가 감독관이기에 편안하게 실기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어려운 이웃을 따뜻하게 돌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선택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넘치시기에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했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서나 환영을 받지만 고향에서는 예언자도 환영 받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들의 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하느님의 사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문 앞에 있어도 외면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마저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7월의 첫째 주일입니다. 겸손함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이웃에게 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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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재복 모세 신부님]
“어떤 대단한 사람인가 했더니, 키쟁이 마 씨네 아들이구먼!”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22절)
1.
마르코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시각을 대립시키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이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 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기는 하지만(마르코 복음 6장 2절),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마르코 복음 6장 3절)
“못마땅하게 여겼다” 는 희랍어는 ‘넘어지게 하다’ , ‘걸려 넘어지다’, ‘분노하다’ 등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200주년 성서는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 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언자는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코 복음 6장 4절)
2.
선사 마조 도일(馬祖 道一)은 법을 얻은 뒤에 귀향하자,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환영을 하는데, 개울가에서 한 노파가 도일을 보고 “어떤 대단한 사람인가 했더니, 키쟁이 마 씨네 아들이구먼!”하고 말했답니다. 이 말을 들은 도일은 “권하노니 고향에는 돌아가지 마소, 고향에 돌아가면 도를 이룰 수 없느니, 개울가의 늙은 할미, 내 옛 이름을 부르는구나!” 하고 게송(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을 남기고 홍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늙은 할미는 오늘날 꼰대라떼, 고향은 과거, 집착, 고정관념을 뜻할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마태오 복음 13장 13절)
3.
“생각은 사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태를 해석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선입견과 편견의 창입니다. 해골에 담긴 물인 줄 모르고는 달게 들이켰는데 그것이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안 순간 토해버렸다는 원효의 이야기는 생각이 실재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은 스스로 만든 관념의 감옥에 갇혀 사는 거지요.” (이주향 교수)
예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의 불신을 해소하고 강제로 믿게 하지 않으십니다. 기적은 믿음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받는 법입니다.
마르코는 기적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놀람이 아니라 믿음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뜻으로 하느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자신의 뜻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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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얄궂은 세상, 하느님의 편이 됩시다!>
갑갑한 세상, 얼굴을 덮은 마스크가 무더위의 질량을 더 높이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그분 때문에’ 기쁜 삶을 살고 계신지요? 주님의 말씀에 오직 긍정함으로 마음에 쓴 뿌리를 제거하려 노력하시는지요? 이 여름이 덥고 지리해서 더욱 성경말씀에 집중하려 애쓰시는지요? 이야말로 이 땅에서 천국의 행복을 누리는 비결임을 확신하시는지요? 하여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뜻에 괜한 트집을 잡는 미련함을 떨쳐내고 지내시는지요?
성경은 세상의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복된 존재라는 사실을 천명하며 말씀의 포문을 엽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원죄로 잃은 하느님의 모습을 회복하여 하느님 자녀의 본분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임을 누누이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하늘에 닿는 그날까지 하느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언제나 기쁘고 항상 감사한 시간을 살아내는 것임을 수없이 가르칩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의 악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한편 하느님의 징계가 죄를 깨닫고 죄와 멀어지게 하는 주님의 방법일 수 있으며 영혼에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막상 자신에게 고통이 오고 아픔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재앙이라 단정 짓고 하느님 탓을 하는 경우가 무수합니다.
이 재앙은 분명 주님께서 내리신 것이오. 그런데 이제 내가 주님께 무엇을 더 바라야 한단 말이오?” (열왕기 역사서 하권 6장 33절)라고 말했던 이스라엘 왕처럼 생각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모든 성경말씀을 객관적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결국 스스로의 삶에 적용되는 것은 거부하며 살아가는 셈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안다’는 어설픈 선입견은 신앙의 삶에서 최고의 훼방꾼입니다.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삶이 경직될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그날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했던 바로 그 모습인데요. 이래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모든 것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기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힘들고 곤고한 상황도 주님께서 허락하셨기에 끝내 유익하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당신의 일에 온전히 수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약속을 내 생각대로 변질시키거나 내 방법대로 바꾸려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날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애쓰시는 주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땅의 안녕과 풍요에 시선이 묶여 있었던 탓에 결국 예수님의 적대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도무지 이를 수 없는 엄청난 말씀을 우리에게 던져주셨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강력하고 엄청나서 오히려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고 다만 죄인이라는 사실만 처절히 일깨워줄 뿐이라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고스란히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히브리서 저자의 글에 눈이 번쩍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믿음인’은 세상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죄와 ‘맞서 싸워야 하는 존재’라는 설명이 가슴을 때렸습니다.
‘믿음인’이 죄와의 싸움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권고를 잊은 행태라는 지적에 영혼이 깨어나는 기분이었습니다.(히브리서 12장 4절-7절 참조)
성경이 인간의 허물을 숨기지 않고 들려주는 이유가 마음에 파도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이후, 생각이 고쳐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 읽기조차 민망하고 추악한 상황들…, 싫고 밉고 알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 인간의 악행들이 바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반면교사의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가 온통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예고하시는 주님의 배려라는 사실에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성경을 주님의 심정으로 읽고 주님의 고백으로 들으려 노력합니다. 오직 말씀을 향하여 돌아서고, 그 말씀에 입각하여 살려 애쓰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인간의 죄가 얼마나 뿌리가 깊고 끈질긴지 알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네 조상님들보다 훨씬 굳센 믿음을 살아내기를 기대하실 것입니다. 창세 이후 가장 교양 있고 품격 있고 고상한 역할을 살아 내리라 고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선조들보다 훨씬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도덕적으로도 현명해졌으니 말입니다. 솔직히 그네들처럼 치사하지 않으며 저열하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의 완고함을 변화시켜 주지 않고 떠나가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서 갖은 힘을 쏟으시는 분, 매일매일 사랑을 배워 연습하며 익히도록 도우시는 그분의 은총을 거부하는 어리석음이 앞날의 지복을 좌우한다는, 따끔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제발 그분을 떠나보내지 맙시다. 성경과 친해져서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해해 드립시다. 하여 얄궂게 하늘만 탓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하느님의 편이 되어드립시다. 여름 햇살처럼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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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정삼권 스테파노 신부님]
<자기 중심적 삶을 살아가는 자만의 위험성>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일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 그 무엇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것일까?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이런 면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게 하며 묵상하게 합니다.
첫째 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주님께서는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반역하고 거역하는 반항의 집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왜 그들은 그런 태도를 보였을까요? 유배지에 끌려와 있으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빠져 자만하면서 예언자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왜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요?
그들이 예수님의 출신 내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의 생각에 고착되어 자만하고 시기하며 편견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서나 존경 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 받지 못한다.”(마르코 복음 6장 4절)라고 말씀하시며, 병자 몇명만 고쳐 주셨을 뿐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반면에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주신 일을 알아보고, 알아들었기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며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힘에 자신을 의탁한 삶을 삽니다.
그렇기에 그를 통해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코린토 2서 12장 9절)
말씀을 통해 묵상해 볼 수 있듯이 자기중심적인 삶 속에 자만하고 시기하며 편견을 갖은 삶을 살아가면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는 일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며 믿음을 갖는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나약함,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여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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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사람의 아들이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에게 보내진”(에제 2,4) 사실을 전해줍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배경 구실을 합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완고함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힘은 오히려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고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혹 우리도 더러는 사회적으로는 존경받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이들,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남편, 내 아내, 내 형제, 내 자식으로부터는 존경받지 못하고 있는 않는지요?
다른 한편에서, 반대로 질문을 해 봅니다. 나는 왜 내 곁에 있는 이들, 곧 내 부모 형제들, 내 동료들을 존경하지 못할까요? 너무도 잘 알아서 그럴까? 그런데 나는 진정, 그를 제대로 아는 걸까요? 혹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 <복음>에서도 그 이유가 고향 사람들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우리 곁에 있는 내 동료, 내 형제를 존경하지 못한 이유를 내 형제에게서 찾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에게서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지혜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놀라워하였다’는 이야기는 보고 알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그분의 신적 권위와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놀라워하였지만, 동시에 그분이 목수이고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안다’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왜일까요? 왜 우리는 가까운 이나 함께 살고 있는 이를 존경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할까요? 그것은 내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요? 곧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닌 ‘내가 아는 그’라는 선입감을 믿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것은 그에 대한 하나의 편견이요, 고정관념이요, 고착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 그것을 섬기고 따르고 마는 하나의 우상숭배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생각에 가려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무지와 곡해와 왜곡과 몰이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거기에는 질투와 시기, 비교와 경쟁, 이해타산의 이해관계와 계산이 있고, 신뢰가 아닌 의혹이 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다’는 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이른바 ‘무지의 지’라고 말합니다.
사실, 자신이 ‘안다’는 생각, 그 우상을 벗어나야, 진정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자신의 앎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앎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제거해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하느님, 주님이신 주님이요, 비록 자신이 아는 그러한 주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이 변형되는 일,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앎을 비워내고 자신의 앎을 넘어서는 그분을 믿고 받아들임에 달려 있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마르 6,6) 마치,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고 수술을 거부하는 환자 앞에 선 것처럼, 당혹해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의사는 치유의 능력이 있건만 환자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오늘 우리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혹해하시지 않으시도록, 믿음으로 그분 앞에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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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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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마르6,2)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십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며..."(마르6,2-3) 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마음을 갖게 했을까?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앎과 그 앎에서 시작된 편견과 선입견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그 앎이 나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지식적인 앎으로만 남아 있다면, 그 앎은 너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예수님을 대했으며, 그곳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우리가 바라는 기적도 있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인데,
에제키엘 예언자를 부르신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에제2,4)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2코린12,7) 라고 말하면서,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라고 말합니다.
허물이 많은 우리를 위해 파견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굳게 믿읍시다!
그리고 나의 허물을 감추지 말고, 기쁘게 하느님 앞에 드러냅시다!
그래서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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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너무 오래 살았어.”라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또 평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한 후에 스스로 으스대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또 수중에 몇 푼의 돈을 지니고서는 대단한 부자인 척한다면요? 많은 이들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를 향한 자랑은 모두 비웃음거리가 아닐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는 데 너무나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기 PR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교만에서 나오는 것은 결코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진정한 인정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나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결국 주님을 믿고 있다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모두 빼앗아 가신다면 어떨까요? 아무것도 아닌 ‘나’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주님 없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굳게 믿는 사람은 결코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대신 겸손의 삶을 살면서 주님과 함께하게 됩니다. 그리고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원찮습니다. 예수님을 이미 잘 안다고 여기면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나자렛 사람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점을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믿음의 힘은 병을 고치는 것 이상의 일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당연히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챌 수도 없고, 또 이런 이유로 기적을 굳이 일으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안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을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단하다는 사람보다 자신이 더 훌륭했다는 것을 보여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지요결코 지혜로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며, 하느님의 품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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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머물지 마세요>
운전할 때 제일 중요한 방향은 어디일까요? 당연히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를 바라보는 백미러와 좌우를 볼 수 있는 사이드미러는 왜 있을까요? 뒤로 가기 위함이 아니고, 좌우로 가기 위함도 아닙니다. 앞으로 잘 가기 위해 다른 방향을 보는 거울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도 그렇지 않을까요? 차 안의 백미러가 앞으로 잘 가기 위해 있는 것처럼, 과거는 지금을 잘 살고 또 미래로 잘 가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 자체 머무는 사람이 많습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후회하면서 과거에 매여 있습니다. 앞으로 갈 수가 없게 됩니다. 과거는 내 인생이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임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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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고집물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보완 할 수 있는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이 있으면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한 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능력을 얻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 판단력과 방향 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대수롭지 않은 목수라는 것,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자기들보다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에 못마땅하였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려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입견에 얽매여 사람을 잘못 판단하거나 겉모습에 집중하여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며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내 소리가 너무 크면 다른 사람의 소리뿐 아니라 하느님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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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예언자의 삶>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
참 늦게서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게하는, 분발케하는 사람이, 책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요 책입니다. 성경책이, 예수님이 바로 그런분이지만 저는 늦게서야 그런 사람과 책을 만났습니다. 체 게라바와 그의 평전입니다. 715쪽에 달하는 평전을 6.22일부터 짬짬이 읽다가 7.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에야 독료했습니다. 저는 중요하고 감동적인 구절은 밑줄치며 읽는 습관이 있는데 참 많은 쪽수가 빨간 줄로 가득했습니다. 시간되면 잠언같은 주옥같은 구절들은 기록해두려 합니다.
결코 안주하지 않았던 육신의 모두를 극복한 영혼의 사람, 영혼의 순례자였습니다. 39년의 짧은 인생을 참 치열하게 혁명가로 살다가, 주님의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한 인물이었습니다. 전사戰死해야 비로소 전사戰士라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내적혁명가의 삶을 살려는 저는 이미 그보다 33년을 더 살고 있으니 참 부끄럽게 하고 분발케 합니다.
참으로 현실 한복판에서 별같은 이상을 살았던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늘 썼던 별달린 베레모가 상징하는 그의 별같은 삶입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의 삶을 요약한 말입니다. 불가능한 꿈, 영원한 꿈 하느님을 품고 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길다 싶지만 여러 생생한 증언들을 인용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로저 실러 신부는 라이게라의 조촐한 성당에서 체 게바라를 위한 미사를 올린다. 작은 성당은 미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신자들은 고인을 기리며 경건하게 촛불을 든다. 밤이 깊어가고 신부는 말을 내 뱉는다. “이 죄악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죄를 지은 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
-‘마리아 무뇨스 수녀는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의 분위기를 전한다. 이상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텍주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말하는 방식대로 하자면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마치 그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상하게 푸른 색으로 변한 그의 눈은 다시 뜨여 있었다.‘-
-“1967년 10월9일은 체 게바라의 실제적인 삶이 끝나고 사후의 또 다른 삶이 시작된 날이다. 그는 무척이나 대담한 사람이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가장 어렵고 위험한 순간에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일들을 해냈다. 그는 순결하고, 용감하고, 모든 것에 초연하고, 욕심이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간이었다.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영원한 전진!”-
-‘체 게바라는 누구나 만나자 마자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사람됨, 자연스러움, 호의적인 태도, 인간성, 독창적이나 기발한 면 때문에 누구나 애정을 갖게 된다. 체 게바라야 말로 인간다움의 전형이다.’-
-‘나는 체 게바라와 근 10년을 같이 지냈다. 그는 우리를 비추어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거울이었다. 그를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침착성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은 값을 정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다. 그의 사상은 러시아와 미국이 달 착륙에 성공하기 전에 이미 우주의 전체를 포함한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고 싶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그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가합니다. 흡사 그의 삶이 참된 예언자의 삶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하면 믿는 이들 누구나 불림받은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삶을, 참된 예언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복음의 예수님이, 제1독서의 에제키엘이,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 생생한 모범입니다. 또한 영감의 원천이 되는 체 게바라의 삶도 부단한 자극이, 도전이 됩니다.
첫째, 한결같은 믿음의 삶입니다.
일희일비하지 않은 시종여일의 삶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늘 새롭고 놀랍고 좋은 삶입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여정의 삶입니다. 바로 우리 정주의 삶이 목표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실망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무지의 편견, 질투에 눈이 먼 고향사람들은 그대로 우리의 부정적 보편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제가 화들짝 놀라며 옷깃을 스민 대목이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6,6)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제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가 몸에 밴 예수님이십니다. 그대로 믿음의 힘을 반영합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한결같은 믿음입니다. 체 게바라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인간은 태양을 향해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어야 한다. 태양은 인간을 불타오르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 준다. 고개를 숙인다면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태양을 품고 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말이겠습니다. 바로 시종여일(始終如一), 초지일관(初志一貫), 종신불퇴(終身不退), 하느님 중심에 자리 잡은 한결같은 정주(定住)의 삶, 믿음의 삶입니다.
둘째, 전화위복(轉禍爲福), 우공이산(愚公移山),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정말 대죄는 희망을 잃은 절망입니다. 믿음의 힘에 이어 희망의 힘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자포자기하여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것이 대죄입니다. 영적전쟁은 죽어야 끝납니다.
그러니 날마다 희망을, 꿈을, 비전을 새롭게 하여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33년을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정주했어도 결코 실망, 원망, 절망의 삼망에 빠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느님 꿈을, 희망을 지닌 자들은 결코 삼망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바로 제2독서의 바오로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바오로에게 하신 말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참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역시 주님의 말씀에 감격한 바오로의 깨달음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자랑하려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약함은 강함으로 변합니다. 바로 약함의 그 자리에서 샘솟는 내적 힘입니다. 그러니 궁즉통(窮則通), 절망은 없다는 결론입니다. 체 게바라 역시 고질병과 같은 천식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의 삶은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의 내면에 있는 부드러움과 강함은 잘 섞여서 너그러움이라는 하나의 돌이 된다. 악마처럼 밤낮으로 그의 가슴을 휘젓고 다니던 천식은 오히려 고귀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바뀌었다.’
하느님 꿈을, 하느님 희망을 지닌 사람들은 결코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사람이 됩니다. 모든 불리한 환경이나 조건들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체 게바라가 빛나는 모범입니다.
셋째, 진실한 삶입니다.
사랑과 진실은 함께 갑니다. 결코 타협이나 거짓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실로 직면합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진실하고 순수한, 겸손한 삶입니다.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주님의 영이, 진실의 영이 에제키엘을 일으키셨을 때 예언자는 자신을 파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 나를 반역해 왔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우리가 파견되는 삶의 자리에서 무지에 눈멀어 굳어지고 완고하여 닫힌 무수한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좌절하지 말고 진실로, 진리로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런 힘을 주십니다. 주님의 힘은 바로 사랑의 힘, 진실의 힘입니다. 진실만이 당당합니다. 체 게바라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체 게바라의 아버지의 증언입니다.
“에르네스토(체 게바라)는 진실에 열광적이었습니다. 진실은 그의 환상이었지요. 전투할 때는 냉정했고, 혁명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는 굽힐 줄 몰랐던 만큼 그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유머가 넘치는 아이였지요.”
흡사 체 게바라가 예수님의 아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너무 공통점이 많은 친형제 같습니다. 지상에 잠시 파견된 어린왕자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된 예언자들의 삶을,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어린왕자들입니다. 하느님 꿈을, 별을 지니고 살아가는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들이 진정 내적 혁명의 전사들이자 영적 어린왕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에제키엘이, 바오로가, 무수한 성인들이, 체 게바라가 그런 인물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 혁명의 전사가 되어, 영적 어린왕자가 되어 이렇게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들로 살도록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시편123,2ㄷㄹ)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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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보는지 물으십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 6,2)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뒤에 쏟아진 반응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집안을 너무 '잘' 알아서 오늘의 모습이 놀랍고 어색했나 봅니다.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고향 사람들의 놀람은 경탄이 아니라 못마땅함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지혜와 기적이 하느님의 좋은 일임에도 그들 인식 안에 단단히 자리잡은 선입견과 편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사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가시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차례 주님께 간청하였지만 주님은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도가 이미 넘치도록 은총을 받았고, 오히려 약한 데에서 당신의 힘이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도는 인간적으로 완벽해지기를 포기하고 자기의 약점을 받아들입니다. 아니,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서 자랑한다고까지 이야기하지요. 그 약점을 통해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더욱 큰 일을 하시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나자렛 고을 사람들이 꼽는 예수님의 결격사유는 어쩌면 그분의 태생적 신분적 약점일 듯합니다. 그들은 아직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는 눈이 없었던 게지요. 하느님의 눈은 인간의 눈과 다르고, 또 그분의 선택은 인간의 관습이나 합리적 논리성을 초월합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질이 곧 믿음이지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믿음을 거부하는 이들은 기적을 놓칩니다.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믿음이 없으면 한낱 우연일 뿐이지요. 믿음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경탄하고 감사하는 눈을 갖게 하지만, 불신은 어떠한 은총도 당연하다못해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1독서는 주님께서 에제키엘을 파견하시는 대목입니다.
"내가 너를 보낸다. .. 그들이 듣든, 또는 ...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 2,4-5)
당신 백성이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는 주님께서 그들이 어찌 반응할지 아시면서도 예언자를 파견하십니다. 오랜 세월 지속된 당신 백성의 무관심과 반역이 안타깝고 괘씸하기까지 하시면서도, 언젠가는 알아듣고 돌아오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버리시지 않기 때문에 보내고 또 보내십니다.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할 예언자는 그들이 받아들이건 거부하건 가야 합니다. 가서 전해야 하지요.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예레 1,7)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것이 예언자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어떻게 반응하건 그건 예언자가 주님과 함께 소화해 나가야 할 몫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을 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그들이 그러리라는 걸 예수님도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 복음사가 역시 복음의 머리글에서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고 했지요. 여기서 "당신 땅"은 나자렛 고향만이 아니라 당신 백성 이스라엘, 그리고 역사를 거듭해 주님을 거부해 온 이 세상까지 다 포함합니다.
이것이 예언자요 메시아의 숙명입니다. 하지만 우리 편에서 보면 안타깝긴 해도 슬퍼하긴 이릅니다. 예언자의 현존은 이 세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믿는 만큼 우리는 주님 현존 안에서 은총과 기적을 누릴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내시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 약함 너머의 은총을 알아보는 만큼 우리도 그들과 함께 커가고 성장할 것이고요. 또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누군가에게 보내신다면 설령 오해받고 거부당한다 해도, 먼저 똑같은 일을 겪으신 주님과 함께이니 (물론 힘들겠지만) 견딜 수 있을 겁니다. 파견의 역사는 이렇게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곳에서 담대하고 겸손히 머무르며 사랑을 선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듣는 이들과 믿음의 스파크가 일어난다면 더욱 좋겠지만, 혹 그렇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꿋꿋히 나아가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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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9eU_9CZvo&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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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 3)
빗소릴
듣는다.
제대로
들을 수 없기에
제대로
나눌 수도 없다.
인간관계의
번지수를
늘 잘못찾는
우리들 삶이다.
신앙이 시작된
곳에서 신앙을
다시 묻는다.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된 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응원과
지지에
연연해하거나
집착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길을
아시고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늘 상대가
원하는 것을
놓치고 사는
어리석은
우리들
관계이다.
갇혀있음과
열려있음 사이에
따뜻한
복음이 있다.
저마다의
고향이 우리의
시작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시작점이시다.
예수님마저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냉대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아신다.
아프게도
우리 마음 안에는
하느님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아신다.
비판과 폄하를
몸소 감수하신다.
믿음의 길은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존경의 길이다.
소중과 존중이
빠지면 역할만
남을 뿐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인격체의 고유함과
존귀함을
되찾아주신다.
고유한 인격은
정보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다.
삶의 무게에
힘겨워하고
아파하는
우리
형제들이다.
신앙은
거창하지 않다.
따듯한 기도가
따듯한 침묵을
배우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고향을 찾으신
예수님과
마음을 나누는
따듯한 마음의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와 홀로
사이에
마음을 울리는
복음이 있다.
사랑받고 싶고
배려받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같다.
인간관계의
올바른 번지수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듣고
기쁘게 실천하는
것이다.
복음의 꽃은
소통의 꽃이다.
하느님께서
답답한 우리를
위해 몸소
여기 이곳으로
오셨다.
이 시대의
기적과 치유는
소통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복음은
소통의 복음이다.
자만에서
벗어나는
소통의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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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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